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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난 영화를 사랑해 <바빌론>

by KEIDY

(※주의!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빌론>을 보았습니다. 무려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의 압박이 있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아주 만족스럽고 즐겁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저의 만족도와는 별개로 크게 흥행하지는 못한 것 같지만요...^^) 영화의 홍보 포인트는 크게 세 가지로 <라라랜드>로 잘 알려진 데이미언 셔젤 감독, 그리고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대배우 브래드 피트와 '할리 퀸'으로 유명해진 마고 로비 주연, 그리고 높은 성적 수위를 꼽을 수 있는데요. 꿈을 가진 모두에게 아름답고도 슬픈 메시지를 던진 <라라랜드>의 다크버전, 이라고 하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바빌론'이 상징하는 것은,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엔터테인먼트 업계 종사자들(구체적으로 영화 산업 종사자들)의 성취와 좌절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 도시 바빌론에서는 하늘까지 닿는 탑을 만드려다 신의 저주로 탑이 무너지고, 도시가 멸망해 버렸다는 전설이 있죠. 높은 이상을 추구하다 실패한다는 점에서 영화와 공통된 주제의식을 다루는 것 같지만, 실은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했거나, 사랑에 눈이 멀어 현실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추락하게 되죠. 영화에서는 도시 바빌론을 멸망시킨 과도한 욕망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과 재능이 있었지만 개인이 어찌해 볼 수 없는 환경적 요인의 변화 또는 재채기처럼 숨길 수 없는 사랑이라는 마음의 변화가 이들을 결국 파멸의 길로 이끕니다. 그래서 오히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조금은 서글프고, 짠해지는 마음이 듭니다.


영화에서 다루는 주요 배경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처음 영화는 화면과 사운드가 분리된, 무성 영화였습니다. 그렇기에 촬영장에서는 영상만 신경 쓰면 되었고 실제 영화를 상영할 때는 관련된 정보를 자막으로 싣거나 배경음악을 따로 틀어주었죠. 그러나 유성영화의 시대로 넘어가며 배우들은 연기와 대사 외우기까지 신경 써야 했고, 촬영 스태프들은 영화를 촬영하며 다른 외부 사운드가 유입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서야 했죠. 영화에서는 무성 영화 시기에 톱스타로 군림하던 배우들 중 유성 영화로 넘어오며 하락세를 겪게 되는 두 남녀배우를 보여줍니다. 예전에는 화면으로만 잘생기고 예쁜 얼굴을 보여주면 되었는데, 대사를 다 외우고 역할에 맞게 목소리 연기도 해야 되니 웬만한 연기력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사태에 이릅니다. 두 배우는 몰락의 길을 걷고,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하죠.


이 영화에서는 배우 외에도 또 하나의 축을 이루는 영화 제작자, 스태프들의 이야기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 제작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주인공은 우연히 기회를 얻어 영화 촬영장에 스태프로 참여하게 되고, 여러 아이디어를 제안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아 주요한 직책까지 맡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 무명시절부터 고생하여 톱스타의 반열에 오른 여배우를 계속 짝사랑하며, 유성영화 시대에 몰락한 그녀의 커리어를 다시 살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본업보다 그녀의 커리어 살리기에 몰두하던 어느 날, 큰 사건에 휘말리며 본인의 커리어와 짝사랑하는 여자를 모두 잃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 쫓겨나다시피 떠났던 이곳에 주인공은 아내와 딸과 함께 방문하여 한창 일하던 시기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영화관에 들어가 영화를 보며 영화산업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체감하고, 이 산업에 종사하며 인생의 가장 정점이었던 아름답고 화려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립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먹먹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실 콘텐츠 업계에 오래 종사해 오면서,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저는 영화 주변인이에요"라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곤 했었는데요. 배우나 감독도 아니고, 제작사도 아니고, 영화 제작 담당자도 아니니까 스스로를 '주변인'으로 규정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많은 변화와 오랜 세월 동안 그동안 해 왔던 작품 속에 '나의 발자취가 작게나마 새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와 감독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영화 산업을 지탱하고 지금까지 지속할 수 있었던 숨겨진 힘은 '주변인'들로부터 비롯된 것 아닐까요.

또한, 그동안 이 산업에서 너무 오래 일했기에 식상하고 지루하다고 가끔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드는 첫 감정이 '나,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구나'였습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왜 이 산업을 선택했는지, 왜 10년 넘는 이 세월 동안 이 산업군에서 일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산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지금까지의 발전과정을 보며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 내가 이 업계에 좀 더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 콘텐츠 업계에 오래 계신 분들에게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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