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근무제에 바치는 찬가
이렇게 말하면 라떼 인증하는 것이긴 한데... 확실히 10여년 전 꼬꼬마 신입사원으로 입사할 때와 지금은 정말 천지차이가 난다 싶을 정도로 근무환경이 개선되었음을 느낀다. 입사 초기에는 여자 선배들이 퇴사한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들었는데, 그 사유가 임신, 출산, 육아 등에 거의 국한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는 심각성을 몰랐으며 그저, 저 분은 회사에서도 상당히 인정받는데 왜 그만두실까? 아깝다...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변화가 없을 것 같던 회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아마, 대리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 회사, 더 나아가 그룹 전체적으로 여성 친화 정책을 펼친다며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던 것 같다. 여성이 다니기 좋은 회사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했고, 그에 따라 법적으로는 정해져 있지만 눈치보여서 아무도 끝까지 다 쓰지 못했던 육아휴직을 자리잡게 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었다. 그때는 그룹 전체적으로 '남자도 무조건 육아휴직을 가는 회사'라는 인식을 심기 위해 실제 육아휴직을 쓰고 있는 남자 직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실은 TV광고를 내보냈고 육아휴직을 가야 하지만(아내가 출산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육아휴직에 들어가지 않는 남자직원들을 리스트업해서 그룹에 보고하고, 적절한 사유가 없으면 부문장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소문 또한 돌았다. 실제로 얼마나 불이익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기한이 정해져 있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우리 팀에 어떤 남자 직원이 육아휴직에 들어가야 하는데 대체자를 주지 않아서(아니, 대체자를 못 줘서...) 사유를 적은 문서를 도장찍어서 보고한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 사실 그렇게까지 해야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씩이나마 바뀐다는 것을 깨달았다.
변화는 느리지만, 조금씩 일어났다. 어느 새 회사에서는 PC오프제와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는데, PC오프제는 일정 근무시간을 넘기면 PC가 자동으로 꺼지는 제도였다. 물론, 꺼진 다음에 다시 켤 수는 있지만 1분 내로 계속 컴퓨터가 꺼진다. 만약 컴퓨터가 꺼지지 않게 하려면 미리 연장근무를 신청해야 하고 연장근무를 승인하는 사람은 팀장->부문장->인사팀 이어서 이 결재선을 모두 통과하려면 상당히 일찍 야근여부를 계산해서 미리 결재를 올려야 한다. 그 당시 인사 쪽 상무님이 너무 FM이어서 나중에 올린 야근신청을 안 받아주는 경우도 왕왕 있었는데, 전화받고 그렇게 짜증을 낼 거면 차라리 본인 결재선을 넣지 말고 인사팀까지만 해서 끝내지, 하면서 불만이 생겼던 것 같다. 야근을 원해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마치 급하게 야근신청하는 사람은 회사의 규칙을 어기는 사람마냥 여겼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마법의 단어는 "대표님이 지시해서..." 로 시작하면 일사천리로 통과될 때도 있었지만. 인사팀에서는 PC오프제를 도입하며 다른 파생되는 프로세스를 확인해야 하는데, 상당히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운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름의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는데, 말이 유연근무제지 선택적 출근제, 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맞는 개념일 것 같다. 일반적으로 출퇴근 시간은 9 TO 6인데, 출근시간을 8시 / 9시 / 10시 이런 식으로 선택하면 출근한 시간으로부터 8시간+휴게시간 1시간 을 더해서 근무하는 제도다. 나중에는 조금 업그레이드되서 30분 단위도 생기긴 했다. 8시, 8시30분, 9시, 9시30분 등등... 선택근무제의 조상 격인 셈이다. 나름 시간대를 선택할 수 있었으나, 한 번 선택한 시간은 한 달 기준으로 바꿀 수 없어서 만약 바꾸려면 다음달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 나는 아이를 낳고, 복직을 하고, 복직 후 약 2년이 좀 못 되어 생애 첫 이직을 했다. 이직한 회사는 지각의 개념이 없을 만큼 기존 회사보다 더욱 자유로운 유연근무제를 도입하고 있었다. 매일 본인의 업무와 회의 등의 일정을 고려하여 알아서 출근하고, 알아서 퇴근한다. 출근한 시간부터 일하면 되고, 만약 오늘 컨디션이 별로라서 조금 일찍 간다고 하면 한달 내에 다른 날에 모자란 시간을 채우면 된다. 일이 많으면 야근하고 다른 날 일찍 가도 된다. 아이를 기르면서 어린이집에 등원시킬 때, 늦잠을 잔다던가 병원에 가야 한다던가 하는 돌발 변수들이 가끔 생기는데 그러한 변수에 언제든 대응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제도였다. 일 단위, 주 단위가 아니라 월 단위로 총 근로시간을 계산하니 훨씬 유연하게 근무를 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첫 연차를 쓰려고 보니 결재문서에 1일 단위로 적혀 있었다. 전 회사는 내가 과장이 되었을 무렵 처음으로 반반차를 도입해서 2시간 단위로 연차를 쪼개 쓸 수 있었는데, 여기는 근무시간은 좀 더 자유로운데 왜 휴가는 1일 단위일까? 조금 의아해했다. 그러나 결재문서를 직접 작성할 때, 1일 이라고 쓰여진 탭을 클릭하니 그 밑으로 주루룩 1시간 단위로 연차를 쪼개 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이 회사는 반차와 반반차보다 더욱 자유롭게 1시간, 2시간, 3시간... 해서 1일(8시간)까지 세세하게 쪼개쓸 수 있는 것이었다. 새로운 회사는 모회사가 IT직군의 업무스타일에 맞게 세팅되어 있어서 그 제도를 그대로 도입했다고 한다. 기존보다 훨씬 자유도가 상승함에 만족도가 커졌다.
또 하나, 여기는 휴가를 쓸 때 결재를 올리긴 하지만 '승인'하는 절차가 없었다. 전 회사는 휴가를 쓸 때 조직장 결재 후 인사팀 승인까지 나야 결재문서가 완료되어서 비로소 시스템에서 차감된다. 그러나 여기는 휴가를 올리면 상위 결재자에게 알림이 가지만 말 그대로 참고차 '알림'을 보내는 것이지 따로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점도 묘하게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아이를 키우면서, 소위 말하는 워라밸을 지킬 수 있는 제도를 적극 도입하는 회사에 계속 눈길이 간다. 코로나19가 휩쓸고 간 이래로 재택근무제도가 많이 활성화되었으며, 이 또한 굉장히 매력적인 제도인 것 같지만 재택근무보다는 사실 유연근무제가 근로자의 자율성과 업무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재택근무를 권유하면 당연히 쓸 예정에 있지만...^^) 그렇기에 근로자의 워라밸과 높은 생산성을 위해 딱 한 가지 제도만 도입할 수 있다고 하면 유연근무제를 우선순위로 꼽고 싶다.
물론, 유연근무제가 모든 근로자에게 정답은 아니며 모든 회사에 100% 들어맞는 제도는 아닐 것이다. 이는 비단 유연근무제 뿐만이 아니라 다른 제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도의 도입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제도를 회사의 상황에 맞게 적절히 조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운영상에 부족한 점이 있을 경우 꾸준히 개선하려는 노력을 지속할 수 있는지 여부일 것이다. 그리고 제도 도입에 앞서 그 제도를 눈치보지 않고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이 급선무일 것이다. 유연근무제가 많은 회사에 도입되어 누구나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제도가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