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의 균형, 그 어딘가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니 글을 읽기 전에 확인 부탁드립니다.)
<국보>를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가부키를 배경으로 하는 재능과 핏줄의 단순한 대결구도를 생각하여 한창 재미있게 봤던 만화 [유리가면] 과 비슷하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유리가면]에서는 가난하지만 타고난 재능을 지닌 주인공과 배우 어머니, 감독 아버지를 둔 최고의 혈통을 가진 라이벌이 궁극의 배역을 두고 다투는 과정을 그리며 누가 그 배역을 따낼 것인지 알 수 없어 긴장감이 넘치는 전개였다면, <국보>는 사실상 누가 더 우수한지는 정해져 있었으나 험난한 과정을 겪는 주인공의 상황과 결국 그가 잃은 것, 얻은 것이 무엇인지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내용이었다는 점이 다를 것입니다. 혈통을 그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가부키라는 좁고도 높은 세계 안에서 주인공이 겪는 멸시, 지금의 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갖지 못한 혈통에 대한 질투와 갈망 등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점이 좋았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 스승으로부터의 인정, 양어머니의 배척, 오랜 연인과의 헤어짐, 사생아 스캔들, 라이벌과의 다툼과 화해, 업계로부터의 외면과 생계를 위한 공연을 거쳐 주인공은 마지막에 결국 바라 마지않던 최연소 ’국보‘가 됩니다. 주인공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가부키에 한해서는 결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 어우러져 스승의 친아들보다 먼저 스승의 대역을 맡게 되는 무시무시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 소명에 대해서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최고가 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 정도였으며 가부키에만 몰두하는 주인공에게서 아마도 벽을 느끼게 되어 주인공의 라이벌과 사랑의 도피를 하는 오래된 연인과의 관계 파탄, 행사에서 자신을 알아보고 뛰어오는 딸을 무시하며 자식과의 관계도 파탄이 나게 되었고 주인공을 사랑해서 주인공이 업계에서 쫓겨날 때 같이 사랑의 도피를 한 사람과도 결국 진정한 애정을 주고받지 못하고 관계가 파탄나게 됩니다. 가부키라는 예술 세계에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만 그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면 상실과 관계 단절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며 예술혼을 불태워 최고가 된 주인공의 모습에는 경외감을 느꼈지만, 인간으로서는 매우 고독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씁쓸해졌습니다. 마치 워커홀릭으로 일에만 매달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어느 날 뒤돌아보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느끼는 상황과도 유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 그 어딘가에서 헤메고 있을 우리 모습이 떠올라 더욱 긴 여운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