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살다 보면 세상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때가 있다.
사방에서 나를 잡아당겨 팽팽하게 긴장시키거나, 때로는 내 계획과 일상을 무참히 싹둑 잘라버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우리는 괜히 억울해져 묻는다.
“왜 나한테만 이래?”
그런데 여기, 그런 무례한 개입이 있어야만 비로소 제 기능을 시작하는 기묘한 존재들이 있다.
바로 고무줄과 플라나리아다.
이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묘한 안도감이 든다.
외부의 충격이 이들을 망가뜨리는 대신,
감춰져 있던 본색을 선명히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2]
서랍 구석에 굴러다니는 노란 고무줄을 떠올려보자.
잡아당기기 전까지 그것은 그저 힘없는 동그라미에 불과하다.
하지만 누군가 양 끝을 잡고 쭈욱 늘리는 순간, 고무줄은 비로소 탄성이라는 자기 성질을 증명해 낸다.
물속을 흐느적거리며 움직이는 플라나리아는 한술 더 뜬다.
멀쩡한 몸이 칼에 베이는 사건이 벌어져야만, 숨겨 두었던 재생이라는 본능을 꺼내 보인다.
이들은 평온할 때는 스스로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외부의 공격이나 시련이 닥쳐야 비로소 "나는 이런 존재야"라고 말하는 셈이다.
[3]
여기서 주목할 건, 이들이 상실 이후를 버티는 방식이다.
흔히 고무줄은 늘어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플라나리아는 잘려도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고들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두고, 이들이 결국은 ‘원래대로 회복된다’고 쉽게 말해버린다.
하지만 이 회복이 어디까지 유효한지,
상황을 조금 더 극단으로 밀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 번 잘린 고무줄은 스스로를 이어 붙여 다시 매끄러운 원형이 될 수 없고,
토막 난 플라나리아 역시 예전처럼 하나의 단일한 몸으로 합쳐지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하나였던 상태는 깨졌고, 겉모습만 놓고 보면 명백한 파괴다.
하지만 그 파편들 속에 남겨진 작동 규칙은 죽지 않는다.
몸이 두 토막 나도 고무줄은 여전히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튕겨 나가는 성질을 조각마다 품고 있고,
플라나리아는 잘려 나간 자리마다 새로운 생명을 가동하기 시작한다.
원래의 외형은 잃었을지언정,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핵심만큼은 조각마다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이다.
[4]
이 관점을 우리 일상에 대입해 보면 생각보다 담담한 결론에 닿는다.
인생도 종종 원치 않는 가위질을 당한다.
믿었던 관계가 끊어지고, 공들였던 프로젝트가 토막 난다.
하지만 고무줄과 플라나리아의 시선으로 보면,
이건 종말이라고 단정하기엔 아직 이르다.
탄성이 특정 고무줄 하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고무라는 물질 자체의 성질이듯,
당신의 기질이나 태도 역시 상황 하나에 싹둑 잘려 나갈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다.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핵심 규칙은 어떤 조각으로 남겨지든 끝내 살아남는다.
잘린 고무줄은 더 이상 무언가를 묶지는 못하지만,
손가락에 걸어 튕기면 어딘가에 매섭게 명중할 탄성을 품고 있는 것처럼,
쓸모가 변했다고 해서 그 안에 깃든 성질까지 만만해지는 건 아니니까.
[5]
그러니 오늘 하루가 유난히 팽팽하게 당겨졌거나,
무언가가 싹둑 끊어진 기분으로 끝났다 해도
꼭 실패로 정리할 필요는 없다.
겉보기에는 잘려 나간 하루였을지 몰라도,
그 안에서 어떤 성질이 작동하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니까.
물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진짜로 몸을 자를 필요는 없다.
우리는 플라나리아처럼 자아가 여러 개로 늘어날수록
월급도 몇 배로 벌어와야 하는, 꽤 피곤한 인간들이니까.
그저 내가 가진 성질이 아직 유효한지만 살피면 된다.
어쩌다 끊어진 하루의 끝에서도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을 품고 있는지.
그것만으로도 내일의 탄성을 준비하기엔 충분할 테니까.
추신)
글머리에 노란 고무줄 사진을 걸어둔 건 개인적인 향수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고무줄만 손에 쥐면 서너 번을 교차해 삐뚤빼뚤한 별을 띄우곤 했다.
손끝에서 별이 되고 꽃이 되던 그 유연한 탄성이 좋았다.
가끔 친구들이 새총을 쏠 때, 나는 그 매서운 쓰임이 싫어 더 악착같이 별을 만들었다.
탄성이 누군가를 해치는 힘이 아니라, 나만의 형상을 빚는 에너지가 되길 바랐던 것 같다.
내친김에 내가 참 귀엽게 여기는 플라나리아 사진도 한 장 올릴까 했으나 끝내 관두기로 했다.
누군가에게는 이 경이로운 생명체의 꿈틀거림이 그저 낯선 얼룩으로 읽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야에 굳이 불필요한 잔상을 남기고 싶지는 않다.
플라나리아의 기묘한 다정함은 나만 아는 은밀한 비밀로 간직해도 충분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