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원한 파트너에게

by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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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수술 일정이 잡혔다. 쓸개에 자리 잡은 종양이 제멋대로 몸집을 불린 탓이다. 사태가 악화된 덕분에 오히려 진료 순번이 당겨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악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불행의 가속도를 빌려야 하는 이 아이러니가 현대 의료 시스템의 효율성이라면, 기꺼이 그 속도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새삼 기술의 정교함에 감탄한다. 몸을 가르지 않고도 내밀한 곳에서 자라나는 불청객의 존재를 알아낼 수 있다니. 그러나 현대 과학조차 마지막 진실 앞에서는 겸허해진다. 그것이 악성인지 양성인지 확언하기 위해서는 결국 직접 살점을 떼어내어 대조해 보아야 한다. 99.99%의 추측 속에서도 결국 직접 겪어내야만 알 수 있는 모호함의 영역이 늘 존재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번은 그의 네 번째 수술이다. 첫 번째 흔적은 추돌 사고로 부서진 왼쪽 무릎에 남았다. 수술 자국이 코끼리를 닮았다며 동생과 내가 까르르 웃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나는 코끼리 인형 없이는 잠들지 못하던 어린아이였으므로, 그의 무릎에 깃든 코끼리가 우리를 지켜주는 줄로만 알았다. 그 대가로 그는 낮은 등급의 장애 판정을 받았고, 나는 한동안 장애인 주차 구역이라는 배려를 일종의 특권으로 오해하며 천진하게 즐거워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허리였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흔한 질환이라지만, 그의 디스크에는 그 이상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건설 현장의 기술자였던 그에게 부적절한 자세로 무거운 짐을 옮기고, 기계 장비의 진동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불규칙한 지면 위에서 장시간 작업하는 환경은 선택 사항이 아닌 필연이었다.


4년 전, 세 번째 수술을 마친 그는 평소와 달리 지독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병실 침대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평생의 유일한 낙이었던 술도 잠시 끊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잔을 들었지만, 나는 그를 비난할 마음이 추호도 없다. 그 잔에 담긴 것이 단순한 알코올이 아니라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내는 유일한 용해제였음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술을 즐기는 그의 모습에서 나의 미래를 엿보는 것 같아 묘한 동질감을 느낄 뿐이었다.


그는 자기 몫의 삶을 묵묵히 일궈온 성실한 사내였다. 주말에도 연장통을 들고 지인들을 위해 대가 없는 노동을 자처하는 참된 일꾼이었다. 덕분에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그의 곁에는 생일이면 귀에 꽃을 꽂아주고 케이크를 내미는 친구들이 가득했다. 아들인 내가 그 중년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그들의 내밀한 유대를 관찰하는 것은, 마치 문틈 사이로 누군가의 진솔한 내면을 몰래 염탐하는 것처럼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그에게 나는 단순한 아들을 넘어 일종의 훈장이기도 했다. 육체노동을 업으로 삼는 사내들의 세계에서 아들과 대화가 통하고 술잔을 나눌 수 있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드문 일이었으니까. 그들은 나에게 복잡한 행정 절차나 실무적인 정보를 묻곤 했다. 정보의 격차가 곧 삶의 격차가 되는 세상에서, 스스로 찾는 복지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에게 나는 그 격차를 메워줄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창구였던 셈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나를 '내 새끼'가 아닌 한 명의 파트너로 대우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가 일하는 현장의 지명을 물었을 때, 내가 잘 모르겠다고 답하자 그는 의외의 짜증을 냈다. "그곳을 왜 모르냐"는 그의 핀잔은 나를 서운하게 하기보다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그는 나를 보호받아야 할 자식이 아니라, 당연히 이 정도 정보는 공유하고 있어야 할 동등한 동료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견고한 파트너십에도 균형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순간은 찾아온다. 깊게 패인 주름보다 더 낯선 것은, 당연하게 건네던 술잔을 "오늘은 영 안 땡긴다"며 물리는 그의 담담한 거절이다. 동등한 보폭으로 함께 나이 들어간다고 믿었으나, 그는 어느덧 치열했던 노동의 계절을 지나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짊어졌던 무게의 흔적들을 지켜보며, 나는 우리 관계가 언젠가 마주하게 될 필연적인 결말, 즉 생의 마지막 정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 정산의 과정이란 대개 서늘한 법이다. 떠난 이의 생을 갈무리하기 위해서는 모니터 앞에 앉아 금융감독원의 페이지를 들여다보며 재산의 잔액을 조회해야 한다. 상속이란 누군가가 일궈온 양의 재산뿐만 아니라, 끝내 털어내지 못한 음의 채무까지도 오롯이 물려받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생의 흔적을 숫자로 추적하며 손익을 가늠해야 하는 남은 이의 숙명은 참으로 가혹한 것이다.


수술을 앞둔 그를 떠올린다. 내가 그로부터 상속받을 유산은 숫자나 도표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기를 바란다. 나의 유년 시절을 지켜주었던 그의 무릎 위 코끼리 흉터, 파트너로서 내게 건네던 짜증 섞인 신뢰, 그리고 오랜 친구들과 나누던 유대감 같은, 그런 무해한 것들 말이다.


현대 의학의 정밀함이 채울 수 없는 영역은 온전히 기도의 몫으로 남겨두려 한다. 통계는 신뢰하지만, 그 숫자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빈틈만큼은 나의 간절함으로 채우고 싶기 때문이다. 차가운 메스가 그의 몸속 불청객을 도려내는 동안, 나는 그의 생애 전체를 응원하며 다시 술잔을 부딪칠 수 있는 일상으로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것이 나의 영원한 파트너인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응답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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