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장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이 대리의 그 말, 아니 그 표정을 보는 순간 김 사장은 직감했다. 아, 또 시작이구나. 명치끝이 찌릿하게 아려왔다. 벌써 이번 달에만 세 번째다. 그것도 우리 회사에서 일을 할 줄 아는 친구들만 골라서 말이다.
이 대리는 소위 말하는 에이스였다. 중소기업에선 보기 드문,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일 줄 아는 종족. 그가 들어오고 나서 꽉 막혔던 신규 프로젝트에 숨통이 트였고, 거래처 사람들도 "이번 담당자는 말이 좀 통하네요"라며 웃었다. 김 사장은 내심 그를 보며 회사의 미래를 그렸다. 연봉도 조금 더 얹어줬고, 회식 자리에서는 "자네가 우리 회사 기둥이야"라며 어깨를 두드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착각이었을까.
"어디로 가나?" 김 사장이 짐짓 덤덤한 척 물었다.
"…L사로 가게 됐습니다. 제안이 들어와서요."
L사.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기업이다. 김 사장은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피땀 흘려 가르치고 실무를 익히게 해 놓으면, 대기업은 그저 잘 익은 과일을 따듯 낚아채 간다. 이건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하지만 이 대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더 넓은 시스템, 더 높은 연봉, 더 화려한 명함. 젊은 그에게 이곳은 그저 잠시 비를 피하는 처마 밑이었을 뿐이다.
"그래, 가서 잘해봐야지. 거기가 더 배울 게 많을 거야."
축하인지 자조인지 모를 말을 건네며 이 대리를 보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평소보다 무겁게 들렸다. 김 사장은 텅 빈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이 대리가 쓰던 책상 위, 포스트잇 몇 장만이 주인을 잃고 펄럭이고 있었다.
그날 밤, 김 사장은 낡은 선술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셨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능한 인재를 뽑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들이 유능해질수록 이 회사를 떠날 확률만 높아지는 것 아닌가. 정성을 다해 키운 나무가 열매를 맺자마자 다른 집 마당으로 옮겨 심어지는 과정을, 나는 도대체 몇 번이나 더 반복해야 하는 걸까.
술잔 속의 투명한 액체가 흔들렸다. 김 사장의 눈빛에 이전에 없던 기묘한 체념이 서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날개가 없는 애들을 뽑으면 어떨까."
이것은 한 기업이 찬란한 비상을 포기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안전하게 썩어가기로 결심한, 그 비극적인 서막이었다.
[2]
인사 공고를 올리는 김 사장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건 일종의 복수극에 가까웠다. 세상에, 아니 시장에 복수하는 거다. 나를 버리고 떠난 그 유능한 배신자들에게, 그리고 내 인재를 곶감 빼먹듯 가져간 대기업들에게.
이번 채용 공고는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화려한 우대 사항은 다 뺐다. '창의적 인재', '도전 정신', '글로벌 마인드' 같은 미사여구는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건 지극히 현실적이고, 어쩌면 조금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문구들이었다.
[근거리 거주자 우대]
[장기근속 가능자(가장 중요)]
[화려한 경력보다는 성실함이 우선]
면접 날, 김 사장은 돋보기를 고쳐 쓰며 지원자들을 살폈다. 예전 같았으면 단번에 탈락시켰을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답은 어눌하고, 눈빛엔 세상을 뒤집어엎겠다는 기백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그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는 직장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박 씨라고 했나? 전 직장에선 왜 나왔어요?"
"아… 거기가 좀 멀기도 했고, 제가 적응이 좀 느려서…"
박 씨는 연신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예전의 김 사장이었다면 "우리 회사가 복지관인 줄 아느냐"며 면박을 줬을 테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적응이 느리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적응이 느리면 나가는 법도 잊어버리겠지.
"괜찮아요. 우리 회사는 천천히 가는 곳이니까. 대신, 한 번 들어오면 정년까지 같이 가는 겁니다. 약속할 수 있어요?"
박 씨의 눈이 동그래졌다. 감격에 젖은 그 표정을 보며 김 사장은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유능한 놈들은 고마운 줄을 모른다. 그들은 자기 실력으로 여기 온 줄 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은 다르다. 자신을 받아준 이 낡은 사무실을 구원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렇게 채용된 뉴 멤버들은 확실히 달랐다. 시키는 일 외에는 절대 입을 떼지 않았고, 회사의 비효율적인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았다. 회의실은 적막해졌지만, 사직서 때문에 가슴 졸이던 밤은 사라졌다.
그런데 문득, 복도를 지나가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김 사장은 흠칫 놀랐다. 날개 없는 새들을 모아놓은 요람의 주인치고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무미건조했기 때문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했지만, 김 사장이 마주한 것은 '퇴행의 평범성'이었다.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조금씩 뒤로 걷고 있는 기분. 하지만 그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이게 맞는 거야. 이게 안전한 거야."라고 되뇌면서.
사무실에는 이제 고요한 평화가 깃들었다. 고여서 썩어가는 물 위로 햇살이 비치면 겉보기엔 반짝이는 법이니까.
[3]
사무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공기가 멈췄다.
예전에는 출근길 사무실 문을 열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있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경쾌한 행진곡 같았고, 가끔은 복도 끝까지 들리는 격렬한 토론 소리가 회사가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고요하다. 아주 평온하고, 지독하게 정적이다.
박 씨를 포함해 새로 뽑은 직원들은 참 착했다. 출근 시간 30분 전이면 어김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점심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복귀했다. 문제는 그들이 앉아서 무엇을 하느냐였다.
"박 대리, 저번에 말한 거래처 제안서는 어떻게 됐나?"
"아, 사장님. 그게… 가이드라인을 주신 대로 정리는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새로운 기술을 요구하면 어떡하죠? 일단은 빼뒀습니다."
김 사장은 뒷목을 잡았다. 빼뒀다는 말. 요즘 사무실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단어다. 모르는 것, 복잡한 것, 책임져야 할 것들은 일단 다 빼둔다. 그들은 시키지 않은 일은 절대 하지 않았고, 시킨 일조차 반쪽짜리로 해오기 일쑤였다. 사고만 안 치면 다행이라는 식의 태도.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김 사장 자신이었다. 예전 같으면 불같이 화를 냈을 텐데, 이제는 "그래, 뭐… 큰 문제없으면 됐지"라며 넘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화를 내서 그들이 기가 죽거나, 혹시라도 "힘들어서 못 하겠다"며 나갈까 봐 겁이 났던 걸까.
어느 날 오후, 김 사장은 사무실 한복판에 서서 직원들을 관찰했다. 모두가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것은 업무를 처리하는 눈이 아니라, 퇴근 시간이라는 구조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조난자의 눈이었다.
문득, 에리히 프롬이 말한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자유보다는,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어 순응하는 안락함을 선택한다는 그 말. 우리 회사는 지금 거대한 도피처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장님, 복사기 토너가 다 됐는데…"
박 씨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김 사장은 헛웃음이 났다. 토너 하나 주문하는 것조차 못하는 이 철저한 무능함. 이것은 순종인가, 아니면 지능적인 태업인가.
회사의 시계는 분명 돌아가고 있었다. 째깍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날짜는 바뀌고 월급날은 다가왔다. 하지만 김 사장은 알고 있었다. 이 시계는 시간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소멸을 카운트다운하고 있다는 것을. 냄비 안의 물은 이제 미지근함을 넘어 서서히 피부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뜨겁다고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게 이 회사의 가장 무서운 규칙이 되어버렸으니까.
[4]
위기는 언제나 가장 평온한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우리 회사의 오랜 밥줄이었던 성진 정공에서 연락이 온 건 화요일 오후였다. 10년 넘게 군말 없이 우리 부품을 받아주던 곳이다. 늘 담당자끼리 형님 동생 하며 술 한잔으로 계약을 갱신하던, 일종의 안전 자산이었다. 그런데 새로 부임했다는 구매팀장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사장님, 이번 분기부터 납품 단가 15% 인하하시거나, 아니면 스마트 공정 자동화 솔루션 도입한 제안서 다시 보내주세요. 다른 업체들은 벌써 다 보냈던데."
전화를 끊고 김 사장은 멍하니 수화기를 내려다봤다. 15% 인하? 그건 남기지 말고 팔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남은 건 솔루션 제안서인데, 문제는 우리 사무실에 그걸 쓸 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예전의 이 대리였다면 벌써 밤을 새워서라도 해외 사례를 뒤지고, 협력업체를 수소문해 그럴듯한 기획안을 가져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김 사장의 앞에는 박 대리가 서 있었다.
"저… 사장님. 스마트 공정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잘 몰라서요. 인터넷 찾아보긴 했는데, 저희가 하기엔 너무 복잡해 보여요. 그냥 단가를 맞추는 쪽으로 협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박 대리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마치 남의 집 불구경을 하는 사람처럼. 그는 이 위기가 자신의 월급을 앗아갈 수 있다는 공포보다,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한다는 귀찮음이 더 커 보였다. 김 사장은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박 대리, 단가를 맞추면 우리 회사는 적자야! 적자가 나면 회사 문을 닫아야 한다고!"
"아… 네. 하지만 제가 기획 업무는 해본 적이 없어서… 잘못 썼다가 나중에 책임질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책임질 일이 생길까 봐.'
그 말이 김 사장의 머리를 때렸다. 그는 자신이 뽑은 날개 없는 인재들이 사실은 날개가 없는 게 아니라, 날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책임지지 않는 삶, 도전하지 않는 일상. 그것이 그들이 이 낡은 회사에 머무는 진짜 대가였다. 김 사장은 그들에게 안락함을 줬고, 그들은 그 대가로 회사의 미래를 가져간 셈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추와 같다"고 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무료함이, 이제는 파멸이라는 더 큰 고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결국 김 사장은 직접 펜을 들었다. 돋보기를 쓰고 밤늦게까지 자료를 뒤졌지만, 노안이 온 눈은 침침했고 머리는 굳어 있었다. 텅 빈 사무실, 야근하는 사장 옆에서 박 대리는 6시 정각에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라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김 사장은 깨달았다. 이 회사는 이제 유기적으로 연결된 조직이 아니다. 그저 각자의 안녕만을 위해 모인 고립된 섬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그리고 섬들은 육지가 가라앉기 시작해도 서로의 손을 잡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 더 늦게 잠기길 기도할 뿐이다.
그날 밤, 김 사장이 쓴 제안서 위로 잉크가 번졌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가 종이를 적시고 있었다.
[5]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김 사장에게 지금 보고 싶은 것은 단 하나였다. 이 지긋지긋한 정적과 무능의 늪에서 회사를 단번에 건져 올려줄 구원자였다.
성진 정공의 최후통첩 기한은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밤새워 쓴 김 사장의 제안서는 구매팀장에게 "요즘 초등학생도 이것보다는 잘 쓰겠네요"라는 모욕적인 평가와 함께 반려당했다. 자존심은 이미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예전에 잠시 협력 업체에서 일했던 정 이사였다.
"김 사장, 소문 들었어. 힘들다며? 내가 아주 기가 막힌 친구 하나 아는데, 한 번 써볼래? 대기업 전략 기획 출신인데 잠깐 쉬고 있거든. 몸값이 좀 비싸긴 한데, 지금 사장님 찬밥 더운밥 가릴 때 아니잖아."
김 사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기업 출신', '전략 기획'. 그토록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갈구했던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경고등이 켜졌다. '왜 그런 인재가 이런 구멍가게 같은 우리 회사에 오려하겠어?'
하지만 그 의구심은 이내 지금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한다'는 절박함에 덮여버렸다.
다음 날 찾아온 강 팀장은 화려했다. 맞춤 정장에 세련된 말투, 그리고 그가 가져온 포트폴리오는 박 대리가 평생 봐온 서류 뭉치보다 두꺼웠다. 그는 사무실을 한 번 쓱 훑어보더니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띄웠다.
"사장님, 회사가 아주… 평화롭네요. 제가 오면 이 평화는 좀 깨지겠지만, 결과는 확실히 보장해 드리죠."
김 사장은 그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기존 직원들의 연봉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 액수, 그리고 전권을 위임한다는 약속. 박 대리와 직원들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지만, 김 사장은 외면했다.
파스칼은 "모든 불행은 인간이 방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했다. 김 사장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는 말라죽을 것 같아 문을 박차고 나갔지만, 그 문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광명인지 심연인지는 알지 못했다.
강 팀장이 출근한 첫날, 그는 가장 먼저 박 대리의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박 대리님, 이런 식의 일 처리는 우리 중학생 조카도 안 합니다. 내일부터 당장 보고 체계 바꿀 거니까 긴장하세요."
박 대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고인 물속에서 안락하게 헤엄치던 미생물들이 거대한 포식자의 등장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김 사장은 집무실 안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 이게 회사지. 이제야 좀 돌아가는 것 같네.'
하지만 그는 간과하고 있었다. 이미 근육이 다 퇴화해 버린 이들에게 갑자기 마라톤을 뛰라고 하면, 그들은 달리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주저앉아 버린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강 팀장이라는 구원자가, 사실은 침몰하는 배의 귀중품을 챙기러 온 약탈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6]
강 팀장이 몰고 온 바람은 신선한 충격이 아니라 날카로운 면도날이었다.
그는 출근 사흘 만에 사무실의 모든 규칙을 갈아치웠다. 아침 8시마다 진행되는 공포의 리포트 시간이 생겼고, 오후에는 실적을 압박하는 고성이 집무실 유리창을 넘어 들려왔다. 박 대리를 비롯한 기존 직원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모니터 앞에 얼어붙어 있었다.
"박 대리님, 어제 시킨 시장 조사 결과가 이게 다입니까? 이건 조사가 아니라 검색이잖아요. 대학생 과제물도 이보다는 낫겠어!"
강 팀장의 비아냥에 박 대리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예전 같으면 김 사장이 "에이, 강 팀장. 우리 박 대리 성실한 거 알잖아. 천천히 가자고"라며 중재를 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김 사장은 집무실 문을 굳게 닫고 모른 체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강 팀장이 대신 휘둘러주는 채찍질에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저렇게 굴려야 사람이 변하지.'
하지만 변화는 김 사장이 기대했던 방향이 아니었다. 직원들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하기 시작했다. 강 팀장에게 깨지지 않기 위해 통계 수치를 교묘하게 조작했고, 복잡한 문제는 해결하기보다 강 팀장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겼다.
어느 날 저녁, 김 사장은 탕비실 근처에서 직원들의 수군거림을 들었다.
"이게 회사야? 군대도 아니고… 그냥 사고만 안 나게 대충 맞춰주자고. 어차피 저 사람도 금방 나갈 거 아냐."
"맞아요. 사장님도 너무해요. 우리를 무슨 고장 난 기계 취급하고…."
직원들의 목소리엔 예전의 그 평온한 나태함조차 사라지고, 독한 냉소만이 남았다.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사무실에서 지옥은 타인이 아니라,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 공간 그 자체였다. 강 팀장은 성과를 위해 직원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었고, 직원들은 그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혼을 껐다.
위기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강 팀장이 성진 정공에 제출하겠다며 가져온 혁신 제안서였다. 내용은 화려했다. AI 기반 공정 최적화니, 빅데이터 분석이니 하는 단어들이 춤을 췄다. 김 사장은 희망에 부풀어 서명했다. 하지만 그 서류의 밑바닥, 즉 우리 회사의 실제 생산 라인과 기술력이 그 제안서를 뒷받침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체크하지 않았다.
박 대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 기계로는 그 제안서에 적힌 정밀도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입을 닫았다.
"사장님한테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닐까요? 우리 설비로는 불가능한데…." 옆자리 김 양이 속삭였지만, 박 대리는 고개를 저었다.
"두어 봐. 말해봤자 강 팀장한테 깨지기밖에 더 해? 나중에 문제 생기면 그때 몰랐다고 하면 돼."
비겁함이 전략이 되는 순간, 조직의 척추는 부러진다. 김 사장은 강 팀장이 가져온 가짜 희망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모래성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왕관과 같았다. 파도가 치기 직전의 고요함. 그것이 허상의 끝을 덮고 있었다.
[7]
성진 정공 대회의실의 에어컨 바람은 유난히 차가웠다. 김 사장은 빳빳하게 풀을 먹인 와이셔츠 깃이 목을 죄어오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옆에는 자신만만한 표정의 강 팀장이, 그리고 그 뒤편에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박 대리가 앉아 있었다.
"자, 그럼 제안서 잘 봤으니 실현 가능성을 좀 따져봅시다."
새로 왔다는 구매팀장은 안경을 치켜 쓰며 강 팀장이 만든 PPT의 12페이지를 띄웠다. 거기엔 우리 회사의 구식 프레스 기계가 마치 최첨단 IoT 센서와 결합해 0.001mm의 오차도 없이 가동될 것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강 팀장님, 여기 적힌 실시간 공정 정밀도 피드백 시스템 말입니다. 이거 지금 사장님네 공장에 구축된 설비로 정말 구현 가능한 겁니까? 제가 알기로 거기 기계들, 도입한 지 15년 넘은 걸로 아는데."
강 팀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하드웨어의 노후화는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으로 충분히 보정 가능합니다. 저희가 자체 개발한 모듈을 장착하면..."
강 팀장의 화려한 언변이 이어질수록 김 사장의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슬쩍 박 대리를 쳐다봤다. 박 대리는 책상 밑으로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자체 개발 모듈이라는 게 실상은 오픈 소스 코드를 대충 짜깁기한, 실제 기계에 연결하면 에러 메시지만 뿜어낼 껍데기라는 것을.
하지만 박 대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서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쏟아질 강 팀장의 폭언과 김 사장의 실망을 감당할 용기가 그에겐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만 아니면 돼'라는 그 지독한 안락함의 관성이 그의 혀를 마비시켰다.
"박 대리님, 현장 책임자로서 한마디 하시죠. 문제없겠습니까?"
구매팀장의 날카로운 질문이 박 대리에게 날아왔다. 정적이 흘렀다. 김 사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박 대리의 입술만 쳐다봤다.
"…네, 뭐. 강 팀장님이 계획하신 대로… 잘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형 선고였다. 거짓 위에 쌓아 올린 안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구매팀장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덮었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저희 기술팀이랑 같이 공장 실사 나가겠습니다. 제안서에 적힌 대로 가동되는지 직접 확인하고 계약서 쓰죠. 만약 수치가 다르면, 이건 단순한 계약 미이행이 아니라 사기라는 거 아시죠?"
회의실을 나오는 길, 김 사장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강 팀장은 여전히 "걱정 마십시오, 어떻게든 맞추면 됩니다"라며 큰소리를 쳤지만, 박 대리는 이미 도망갈 궁리를 하는 듯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생각의 부재'가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오는지 경고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그저 눈앞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거짓에 동조한 박 대리. 그리고 그 무능함을 안정이라 착각하고 품어온 김 사장. 이제 그들이 지은 안락한 감옥의 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공장 실사까지 남은 시간은 단 7일. 고여 있던 물이 썩어 문드러져 악취를 풍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8]
공장 실사 당일, 공장의 아침은 평소보다 일찍 시작됐지만 활기는 없었다. 대신 비릿한 긴장감만이 기계 사이를 유령처럼 떠돌았다. 김 사장은 밤새 직접 기계의 기름때를 닦았지만, 15년의 세월이 박힌 녹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오전 10시, 성진 정공의 기술팀원들이 탄 검은색 승용차가 공장 마당에 들어섰다. 차에서 내린 이들은 마치 해부학자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작업복을 고쳐 입었다.
"자, 제안서에 적힌 실시간 보정 시연부터 보죠."
구매팀장의 지시에 강 팀장이 화려한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자 모니터에 현란한 그래프와 숫자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엔 완벽한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기술팀원 중 한 명이 기계 뒷면의 배선을 유심히 살피더니 차갑게 한마디를 던졌다.
"이거, 센서 연결 안 되어 있는데요? 그냥 시뮬레이션 영상 틀어놓은 거 아닙니까?"
순간, 공장 안의 모든 소음이 멈췄다. 덜덜거리며 돌아가던 프레스 기계의 소음마저 누군가 목을 조른 듯 잦아들었다. 강 팀장의 얼굴에서 자신만만한 미소가 서서히 지워졌다.
"아, 그게… 지금 통신 장애가 약간 있어서 데이터가 밀리는 모양입니다. 박 대리, 어제 세팅한 거 확인해 봐!"
강 팀장은 비겁하게 화살을 돌렸다. 하지만 박 대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아침부터 급체를 핑계로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책임의 순간이 오자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안락한 숨은 곳으로 도망쳐버린 것이다.
기술팀원이 기계의 제어반을 강제로 열었다. 그 안에는 먼지 쌓인 전선들과 구식 회로 기판만이 엉켜 있었다. 제안서에 적힌 AI 모듈은커녕, 기본적인 데이터 추출 장치조차 달려 있지 않았다.
"김 사장님, 이건 실수가 아니라 기만입니다."
구매팀장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김 사장은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강 팀장을 쳐다봤지만, 강 팀장은 이미 "내가 오기 전부터 관리가 엉망이었다"며 자기 방어 기제를 가동하고 있었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우리는 소유하고 있는 것에 의해 거꾸로 소유당한다"고 했다. 김 사장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유능한 사기꾼과 무능한 충복들을 곁에 두었지만, 결국 그들이 만든 거짓의 무게에 깔려 죽게 된 셈이다.
"오늘부로 모든 거래는 중단합니다. 법무팀에서 연락 갈 겁니다."
성진 정공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공장. 김 사장은 텅 빈 컨베이어 벨트 앞에 주저앉았다. 그때야 화장실에서 나온 박 대리가 멀찌감치 서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에게선 미안함보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이기적인 공포가 먼저 읽혔다.
김 사장은 웃음이 났다. 미친 사람처럼 꺽꺽대며 웃었다. 뜨거워진 냄비 속에서 뛰쳐나갈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찬 개구리들이,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으려 눈을 부라리고 있는 꼴이라니.
공장의 불이 하나둘 꺼졌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비출 미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9]
공장의 잔금은 빠르게 바닥났다. 법무팀의 서류 뭉치가 책상 위에 쌓이는 속도는, 직원들이 짐을 싸서 떠나는 속도보다 아주 조금 느렸을 뿐이다.
강 팀장은 가장 먼저 자취를 감췄다. "내 커리어에 이런 오점을 남길 수 없다"며 마지막 달 급여조차 청구하지 않고 도망치듯 사직서를 던졌다. 그는 끝까지 당당했다. 자신이 망친 게 아니라, 애초에 망해있던 곳이라며 침을 뱉고 떠났다. 김 사장은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세련된 향수 냄새가 지독하게 역겨웠다.
그다음은 착하고 성실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성실하지 않았다. 밀린 퇴직금을 계산하느라 주판알을 튕기는 소리만이 사무실을 채웠다. 김 사장을 사장님이라 부르던 따뜻한 호칭은 사라졌다. 이제 그들에게 그는 채무자일 뿐이었다.
"사장님, 저… 고용노동부에 진정서 넣었습니다. 이해하시죠? 저도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박 대리였다. 화장실로 도망치던 그 비겁한 뒷모습 그대로, 그는 서류 봉투 하나를 밀어 넣었다. 그동안의 정, 남아서 회사를 살려보자는 의리, 그런 건 애초에 이 고인 물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책임지기 싫어 이곳을 택했던 이들이니, 책임져야 할 순간이 오자 가장 먼저 칼을 뽑아 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김 사장은 아무 말 없이 도장을 찍어주었다. 분노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설계한 안락한 지옥의 완성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체는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고 했다. 김 사장은 무능을 안정이라 부르며 심연을 들여다보았고, 이제 그 심연이 그의 삶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은 밤. 김 사장은 낡은 수첩을 꺼내 초기 멤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그때 떠났던 이 대리, 최 과장... 그들이 떠날 때 그는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배신한 게 아니라 탈출한 것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숨이 쉬어지는 곳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진정한 배신자는 김 사장 자신이었다. 변화가 두려워, 나가는 게 무서워,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직원들의 날개를 꺾어버린 그 이기심. 그것이 이 모든 성실한 퇴행의 시작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공단 부지는 여전히 어두웠다. 저 멀리 보이는 대기업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비웃음처럼 번쩍였다. 김 사장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화분에 물을 주려다 멈췄다. 화분 속의 식물은 이미 뿌리부터 썩어 검게 변해 있었다.
"아무도…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구나."
김 사장의 나지막한 읊조림이 빈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뜨거워지는 물속에서 기분 좋게 졸고 있던 개구리들은, 이제 다 익어버린 채로 식탁 위에 오를 준비를 마쳤다.
[10]
공장 정문엔 붉은 딱지가 붙었다. 한때는 세상을 다 가질 듯 당당했던 성공의 상징이었던 철문이 이제는 흉물스러운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김 사장은 마지막으로 공장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전기가 끊겨 어두컴컴한 내부엔 차가운 금속 냄새와 먼지 냄새만이 가득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떨어진 볼트와 너트들이 밟히며 서글픈 소리를 냈다. 한때는 이 소리들이 회사가 살아 움직이는 심장 박동 소리처럼 들렸던 적도 있었다.
그는 박 대리가 앉아있던 자리에 멈춰 섰다. 책상 위엔 그가 급하게 챙겨가지 못한 낡은 칫솔 통과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안정을 갈구하며 이곳에 머물렀던 그 평범한 가장은, 이제 또 다른 안락한 늪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역시, 냄비 물이 뜨거워질 때까지 졸음 섞인 눈으로 모니터를 지켜보겠지.
문득, 김 사장은 주머니 속에서 작게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냈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사장님, 저 이 대리입니다. 소식 들었습니다."
몇 년 전, 대기업으로 떠났던 이 대리였다. 그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생기가 넘쳤다.
"사장님, 실은 제가 이번에 작은 스타트업을 하나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사장님이 저한테 가르쳐주셨던 그 기술, 그걸로 새로운 솔루션을 만들었거든요. 혹시… 괜찮으시면 한 번 뵙고 싶습니다. 사장님의 그 깡이 지금 저한테 좀 필요해서요."
김 사장은 목이 메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 대리는 탈출한 게 아니었다. 그는 김 사장이 준 씨앗을 들고 더 넓은 땅으로 나가 꽃을 피운 것이었다. 반면 김 사장 자신은, 그 씨앗들을 창고에 가둬둔 채 썩어가는 것을 보존이라 믿으며 자위하고 있었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고, 변화하지 않는 존재는 소멸한다. 김 사장은 흐르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고인 물로 만들었고, 그 대가는 처참했다. 하지만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그가 멈춰있던 시간 동안에도 세상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다.
공장 밖으로 나오자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냄비 안의 물은 이제 완전히 식었거나, 혹은 냄비 자체가 타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 사장은 처음으로 뜨거운 햇살 아래서 피부가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감각이었다.
그는 공장 열쇠를 경비실 근처에 놓아두고 정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수많은 안락한 냄비를 만들어낸다. 실패하지 말라고, 도전은 위험하다고, 그저 적당히 머무르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그 달콤한 속삭임 끝에 기다리는 것은 평온한 죽음뿐이라는 걸, 김 사장은 이제 안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김 사장은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이 대리의 번호를 다시 눌렀다.
"이 대리, 나야. 어디로 가면 되나?"
소멸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진짜 내 길을 찾기 위한 처절한 항복 선언이었다. 이제 김 사장은 더 이상 개구리가 아니었다. 그는 비로소 냄비 밖으로 기어 나와, 거친 흙바닥을 딛고 선 한 명의 인간이었다.
[외전 1] 이 대리의 일기
2023년 10월 14일. 날씨 흐림
오늘 김 사장님을 만났다. 5년 만이다.
멀리서 걸어오는 사장님의 뒷모습을 보는데 코끝이 찡해졌다. 어깨는 조금 굽었고, 머리칼엔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식당 자리에 앉아 나를 마주 본 사장님의 눈빛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회사를 그만두던 그 마지막 날보다 훨씬 맑았다.
“이 대리, 아니 이 대표라고 불러야 하나?”
사장님은 씁쓸하게 웃으셨다. 나는 그냥 예전처럼 이 대리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사실 사장님을 처음 뵀을 때, 나는 그분의 열정에 반했었다. 낡은 프레스 기계 옆에서 기름때 묻은 장갑을 끼고 “우리가 이 나라 산업의 허리야!”라고 외치던 그 활기.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장님은 변하셨다. 정확히 말하면 겁을 먹으신 것 같았다. 유능한 선배들이 연봉 때문에, 혹은 비전 때문에 떠날 때마다 사장님의 가슴엔 흉터가 남았을 테고, 그 흉터는 결국 아무도 떠나지 않는 무덤을 만드는 것으로 스스로를 치유하려 하셨다.
내가 퇴사를 결심했던 건 연봉 때문이 아니었다. 사무실의 그 지독한 정적 때문이었다.
새로 들어온 박 대리님과 동료들은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점심시간에 무슨 반찬이 나올지만 궁금해했다. 기계가 멈춰도 “수리 기사 오겠죠 뭐”라며 커피를 마셨고, 새로운 도면을 가져가면 “이거 일만 많아지는데 그냥 예전 걸로 하죠”라며 나를 별종 취급했다.
그곳에 계속 있으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물 온도가 올라가는 줄도 모르고 “여기가 제일 따뜻해”라며 웃다가, 결국 다리가 흐물흐물해져서 헤엄치는 법조차 잊어버리는 개구리. 그게 너무 무서워서 도망치듯 사표를 던졌다.
사람들은 말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맞다. 밖은 지옥이었다. 스타트업을 차리고 월급을 못 줘서 밤새 울기도 했고, 대기업 담당자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며 사장님이 겪었을 수모를 비로소 이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살아있었다. 매일이 전쟁이었지만, 매일 성장했다.
오늘 사장님께 우리 회사의 기술 고문을 맡아달라고 부탁드렸다. 사장님은 손사래를 치셨지만, 나는 안다. 사장님의 손에 박힌 그 투박한 굳은살은 아직 현역이라는 것을. 사장님은 무능한 인재들을 모아놓고 안주하던 관리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기계와 대화하던 기술자로 돌아와야 한다.
헤어질 때 사장님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말씀하셨다. “이 대리, 내가 미안했다. 자네 날개를 내가 꺾을 뻔했어.”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사장님이 꺾으려 했기에 나는 더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해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이제 우리는 고인 물이 아니라, 거친 바다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일기를 쓰는 지금, 창밖으로 밤비가 내린다. 이제 냄비는 깨졌다. 뜨겁지도, 안락하지도 않지만 비로소 대지 위에 서 있다.
[외전 2] 박 대리의 고백
2023년 11월 20일. 어느 편의점 앞
공장이 문을 닫은 지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지금 집 근처 편의점 파라솔 의자에 앉아 캔커피 하나를 놓고 멍하니 앉아 있다. 실업급여 신청을 하고 오는 길이다.
김 사장님이 마지막으로 도장을 찍어주던 날, 나는 사장님의 눈을 피했다. 미안해서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원망스러웠다. '끝까지 책임져준다고 했잖아요. 정년까지 같이 가자면서요.' 그 비겁한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뱉지는 못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큰 소리 한 번 못 내고, 그저 주어진 울타리 안에서만 안전함을 느끼는 초식동물 같은 존재니까.
요즘 나는 구인 구직 사이트를 뒤진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곳이 없다. '도전적인', '주도적인', '성과 중심의'... 이런 단어들만 봐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손바닥에 땀이 난다. 김 사장님네 공장은 내게 완벽한 도피처였다. 거기선 아무도 나에게 혁신을 요구하지 않았고,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미지근한 물속에서 행복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물이 식고 냄비가 깨지고 나니,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15년 된 기계의 수동 레버를 돌리는 법은 알지만, 세상이 요구하는 스마트한 일들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어제 길에서 우연히 강 팀장을 봤다. 번쩍이는 외제차를 타고 누군가와 웃으며 통화하고 있더라. 그는 우리를 밟고 올라가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았겠지. 그를 보면 화가 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자꾸 내 모습만 돌아보게 된다.
강 팀장이 윽박지를 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가져온 제안서가 엉터리라는 걸. 하지만 나는 입을 닫았다. 왜 그랬을까? 사장님의 헛된 기대를 지켜주기 위해서? 아니, 그저 귀찮아지기 싫어서였다. 문제를 제기하면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같아서, 그 수고로움이 내 안락한 오후를 망칠까 봐 눈을 감았다.
사장님이 "불안은 인간을 본래적 자아로 마주하게 한다"고 했었는데,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지독한 불안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 본모습을 본다. 나는 착한 직원이 아니었다. 그저 내 무능을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사장님의 뒤에 숨어있던 기생충이었다.
캔커피가 차갑게 식었다. 이제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참 초라하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뭐라도 배워볼 생각이다. 엑셀이든, 코딩이든, 아니면 낯선 현장의 잡일이든. 더 이상 미지근한 물속에서 졸고 싶지는 않다. 살점이 익어가는 줄도 모르고 웃고 있던 그 개구리 시절이, 이제는 소름 끼치도록 무섭기 때문이다.
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찬바람이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아프지만, 정신이 번쩍 든다.
[외전 3] 김 사장의 귀환
2023년 12월 24일. 눈 내리는 성탄 전야
공장 열쇠를 넘겨준 지 두 달이 지났다. 오늘은 이 대리가 보내준 주소를 들고 경기도 외곽의 어느 지식산업센터를 찾았다. 이루다 솔루션이라는 작은 간판이 붙은 사무실 안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 대신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왔다.
나는 구석진 책상 하나를 배정받았다. '기술 고문 김진수'라는 이름표가 붙은, 작지만 깨끗한 책상이었다.
지난 몇 주간 나는 이 대리가 개발 중이라는 소프트웨어의 논리 구조를 들여다봤다. 처음엔 도통 무슨 소린지 몰라 돋보기를 썼다 벗었다 하며 끙끙댔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다. 복잡한 기호와 영어 단어들 너머로, 내가 30년 넘게 만져온 기계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 이건 프레스의 압력을 계산하는 거구나, 이건 오차 범위를 줄이는 로직이네.
결국 기술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담는 그릇이 변했을 뿐이다.
"사장님, 아니 고문님. 오늘 이 부분 데이터가 좀 이상한데, 예전 기계식 제어 방식에선 이런 오차를 어떻게 잡으셨어요?"
이 대리의 질문에 나는 한참을 설명했다. 쇠가 열을 받았을 때의 미묘한 뒤틀림, 기름이 마를 때 들리는 날카로운 마찰음... 내 입에서 나가는 말들이 젊은 친구들의 손가락을 거쳐 차가운 코드로 변하는 과정은 경이로웠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내 경험과 자산을 지키려고만 했다. 보물 상자에 넣어 자물쇠를 채워두면 안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키려고만 했던 보물은 상자 안에서 녹슬어 사라졌고, 상자를 열어 세상 밖으로 던진 이 대리의 열정은 새로운 가치가 되어 돌아왔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은 뒤를 돌아보아야 이해되지만, 앞을 향해 살아야만 한다"고 했다. 내가 공장 문을 닫으며 느꼈던 그 처참한 몰락은, 사실 뒤로만 걷던 내가 드디어 몸을 돌려 앞을 바라보게 된 사건이었다.
오늘 퇴근길, 이 대리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첫 달 고문료라고 했다. 액수는 예전 사장 소리를 들을 때 벌던 돈의 십 분의 일도 안 됐지만, 봉투를 쥔 손등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구걸한 돈도 아니고, 누군가의 고혈을 짠 돈도 아니다.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며 얻은, 정직한 땀의 대가였다.
함박눈이 내리는 거리를 걸으며 나는 생각한다. 작금의 수많은 김 사장들은 여전히 냄비 안에서 떨고 있을 것이다. 나갈 용기는 없고, 안락함은 사라져 가는 그 지옥 같은 미지근함 속에서. 나는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냄비가 깨지는 순간이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라고. 비록 발바닥은 차가운 얼음 위를 걷는 듯 시리겠지만, 가슴만은 뜨겁게 타오를 수 있다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사장이 아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나 자신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창가에 비친 내 얼굴이, 꽤나 근사하게 웃고 있었다.
[외전 4] 강 팀장의 미소
2023년 12월 31일. 강남의 어느 고급 라운지 바
통창 너머로 화려한 서울의 야경이 발밑에 깔려 있었다. 강 팀장, 아니 이제는 강 대표라 불리는 그는 싱글 몰트 위스키를 천천히 흔들었다. 크리스탈 잔 안에서 묵직한 둥근 얼음이 굴러가며, 발밑의 화려한 불빛들을 투명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그의 스마트폰은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얼마 전 새로 맡은 프로젝트가 대박 조짐을 보인다는 투자자의 연락이었다. 김 사장의 공장에서 도망치듯 나온 지 반년도 안 되어, 그는 보란 듯이 더 화려한 무대로 복귀했다.
“거기? 아, 그 구멍가게 말입니까? 에이, 사장님. 거긴 제가 심폐소생술 하러 갔다가 시체 썩는 냄새가 너무 심해서 나온 곳이라니까요.”
전화기 너머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강 팀장에게 죄책감이란 사치였다. 그에게 세상은 아주 단순한 원리로 돌아간다. 먹거나, 먹히거나. 그는 먹히기 직전의 사체를 잠시 빌려 자신의 몸집을 불렸을 뿐이다. 그가 쓴 가짜 제안서? 그건 사기가 아니라 세일즈 기술이었다. 실사를 통과하지 못한 건 김 사장의 무능 때문이지, 자신의 기획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고 그는 진심으로 믿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강 팀장은 이 시대의 가장 충실한 마키아벨리스트였다. 그는 박 대리의 비겁함과 김 사장의 절박함을 아주 정밀하게 이용했다. 그들이 안락함에 젖어 눈을 감고 있을 때, 그는 그들의 눈꺼풀 위에 화려한 신기루를 그려주고 그 대가로 자신의 커리어를 챙겼다.
“솔직히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아니었으면 그 지루한 연극이 언제 끝났겠어. 내가 냄비를 확 엎어버린 덕분에 다들 각자도생이라도 한 거지.”
그는 잔을 비우며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그에게 박 대리나 김 사장은 한때 머물렀던 정거장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행인들에 불과했다. 그들이 지금 어디서 노가다를 뛰든, 스타트업에서 코딩을 배우든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강 팀장은 오로지 더 높은 곳, 더 뜨거운 곳만을 향해 움직이는 불꽃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는 더 큰 냄비 속의 개구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신보다 더 거대한 포식자가 나타나 그를 집어삼키려 할 때, 그가 비웃던 박 대리처럼 비굴하게 화장실로 숨게 될지, 아니면 김 사장처럼 허망하게 무너질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자, 다음은 어디를 먹어볼까.”
그는 새로운 먹잇감의 리스트를 넘기며 태블릿을 켰다. 라운지의 조명이 그의 안경 렌즈에 반사되어 서늘하게 빛났다. 강 팀장 같은 이들이 득세하는 한, 세상의 안락한 냄비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또 깨질 것이다.
포식자의 밤은 깊었고, 그의 야망은 여전히 굶주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