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감정 때문이다. 이 말을 언뜻 들으면 당연한 말 같지만 실제로는 당연하지 않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생각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라고 여긴다. 감정은 자신이 통제 할 수 있으며 감정보다 이성이 상위 요소라고 여긴다. 나 또한 그랬다. 나는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고, 감정은 무의식적으로 스쳐가는 요소라고.
평상 시 생각이 많고 이성적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이 말에 “이거 내 얘기인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반대로 평소 감수성이 풍부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아닌데 나는 원래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걸 알았는데?”라고 생각 할 것이다. 그런데 후자인 사람들도 자기 감정의 실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왜 일까? 감정은 복잡하고도 오묘하기 때문이다. 나 조차도 제대로 파악 할 수 없는,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존재. 그것이 바로 감정이다.
내가 새삼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이렇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행동조차도 알 수 없는 나의 오묘한 감정에 의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모든 행동을 결정하는 감정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하는 의문증. 이것이 아무리 복잡하고 오묘하다고 해도 이것의 윤곽이라도 파악 할 수 있다면,
“나는 언제 행동하는가?”
“나는 언제 노력하는가?”
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 그렇기에 깊게 생각해봤다. 이야기를 풀기 전에 뇌 과학에 관한 일화를 살펴보자.
뇌를 잘라버리면 정신병을 치료 할 수 있다고 여겼던 의사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50년대, 당시 의사들은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한 발상 하나를 고안해낸다. 현대사회인 지금에서 보면 말도 안되는 엽기적인 행동이지만, 인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발전도 적었던 당시에는 나름 합리적이었던 생각. 바로 우울증, 공황장애, 조현병과 같은 정신병을 뇌의 일정 부분을 칼로 잘라버림으로써 해결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뇌엽절제술이라고 불리는 이 엽기적인 방법은 놀랍게도 1949년 노벨 의학상까지 수상한다. (이 노벨상의 수상자이자 뇌엽절제술을 개발한 에가스 모니스는 여전히 포르투갈에서 추앙받고 있다. 지금도 포르투갈 지폐에는 반으로 쪼개진 뇌의 그림이 있다고. 이것을 보면 이 사람 포르투갈판 황우석이다. 다른 점이라면 황우석은 노벨상을 못 탔고, 한국인들은 이딴 개 사기에 놀아나지 않을만큼 똑똑하다는 것.)
노벨상 수상의 위엄 덕분인지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이 수술을 받았다. 존 F. 케네디의 여동생 로즈마리 케네디는 일상생활이 가능한 가벼운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아버지에 의해서 억지로 이 수술을 강행받았다. 수술 후 그녀는 가족조차 알아보지는 못하는 폐인이 되었다. 또한, 1940년대 미국의 유명 배우였던 프랜시스 파머는 실제 정신병이 있지 않았는데도 성격이 정신병자처럼 뭣 같다는 이유로 강제로 끌려가서 이 수술을 받았다.
지금 보면 말도 안되는 폭력에 엽기성 그 자체지만 노벨상을 수상한 수술이라는 권위 아래 계속해서 수술이 시행되었다. 실제 이 수술을 받은 정신병자들은 얌전해졌지만 그것은 치료가 된 것이 아니라 전두엽이 파괴되었기에 그랬다는 사실이 이후 밝혀졌다. 이렇게 한 때 세계를 휩쓸었던 뇌엽절제술은 그 부작용만큼이나 뇌과학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뇌의 특정 부분을 잘라냈더니 감정도 못 느끼고 사고도 못하더라. 즉, 우리들의 사고 능력, 감정 기능이 모두 뇌의 특정 영역에 위치해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뇌의 특정 부위를 건드리면 사람의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있겠네?
이런 발견에 힘입어 의학계는 감정은 후천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각 영역마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영역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이 우리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좌뇌 / 우뇌” 개념이다. 좌뇌가 발달한 사람들은 이성과 논리가 발달하고 우뇌가 발달한 사람들은 감정이 발달한다는 이론.
그렇기에 대다수의 한국인들도 이것을 과학으로 알고 교육 과정에서 교육 받았다. 감정을 통제 할 수 있다는 믿음도 바로 이곳에서 비롯됐다. “봐봐. 뇌엽절제술을 통해 여러 사람이 폐인되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과학자들이 이성 그 자체로 감정의 뇌 부위를 규명했잖아. 이성은 위대하다고!”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이 이론이 잘못됐다는 정보가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애초에 좌뇌와 우뇌 구분에는 의미가 없고 둘 다 이성과 감정의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뇌였다는 사실. 저렇게 단순하게 구분 할 수 없을 정도로 뇌는 엄청나게 복잡한 존재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리사 펠드먼 베럿이라는 하버드대 정신과 의사가 쓴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란 책을 읽어보면, 저자는 기존의 이론과는 정 반대로 감정은 후천적으로 발전되는 것이라는 과학 이론을 주장한다. 지금까지의 의학계 주장은 공포는 편도체에서 발생하고 기쁨과 슬픔은 변연계에서 발생한다는 뇌 부위 별 이론이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뇌의 어떤 부위가 어떤 감정을 주관하지는지에 대해 설명하는건 잘못된 정보다. 뉴런은 수도 없이 많아서 그 때 그 때 복잡하게 변화한다. 중요한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뇌의 부위가 아니라 후천적인 경험이다. 다시 말해 감정은 학습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과라는 단어를 읽는 순간 사과가 실제로 앞에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데 그것은 그 전에 사과를 쳐묵쳐묵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뇌가 뉴런을 사용해 있지도 않은 사과를 상상해서 꾸며내 특정한 감정을 부여하는 것이다. 꼭 이런 음식 뿐만이 아닌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성격이나 사상, 꿈, 공감 등 모든 것은 어떤 경험을 그 전에 했기 때문에 연관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포라는 개념을 학습한 경험이 없으면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감정이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기존의 주장과 배치되는 이론이다. 우리의 뇌는 무지 복잡해서 과학계가 그렇게 수십 년을 연구했음에도 아직까지도 밝히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다. 이렇듯 학계에서조차 의견이 분분하고 제대로 규명이 안됐는데 어떻게 일반인들이 이 감정이란 존재를 파악하고 알 수 있겠는가. 사람은 감정에 의해 행동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는 프로세스 과정이 너무 복잡해서 학자들조차도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계산을 잘하고 판단을 잘하는 인공지능을 만들 수는 있지만, 감정을 느끼는 AI는 존재하지 않는 이유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을 잘 모르고 실체를 파악 할 수 없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거시적인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실무다.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조금이나마 내가 어느 순간에 어떤 감정을 느끼고 행동하는지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최소한 내 행동을 교정하는 효과는 낼 수 있을테니깐. 그렇다면 나는 언제 감정이 변화하고 행동하는가? 이 부분은 글이 길어져 다음 글에서 다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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