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은넷 May 20. 2022

외로움에 관한 3가지 생각

오늘은 약속이 없어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책을  읽다가 침대에 누웠다하며 빈둥댔는데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을 적어보겠다.


1번 : 사람들이 영화, 드라마, 게임, 소설을 보는 이유는 외롭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집에 짱박혀 있으니 외로웠다. 생각해보면 로스쿨 입학 이후로 외로움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성균관대 재학 시절에는 매일 같이 대외활동을 다니고, 공모전을 나가고, 학교 수업을 듣고, 사람들을 만나며 몸이 2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쁘게 살았었다. 그러니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었고 행복했었다. 틈만 나면 어떤 것을 지속적으로 성취를 했고,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불타올라 살던 시절이었다.


그런 환경이 조성된 것에는 대학교라는 것이 컸던 것 같다.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이런 죽은 공부를 왜 해야 해? , 대학 교육이 과연 이만한 등록금을 낼만큼 가치가 있나?” 이런 비판을 하며 재학을 했지만, 돌이켜보면 대학교라는 존재는 공부 그 자체보다는 사람들을 매일 만나게 하는 환경 조성 그 자체에 가치가 있었다. 수업을 들으러 학교를 가면 과방에 동기들이 모여있고, 매일 함께 수업을 듣고, 애들과 영화도 보고 공모전도 하고 미팅도 나갔다. 내일은 이 후배한테 밥 사주는 약속, 모레는 친구와 어디 놀러가는 약속.


그 시절의 구글 캘린더를 보면 매일이 빠짐 없이 꽉 차 있다. 그렇게 바쁜데도 연애도 꼬박꼬박 하면서 살고, 휴학 안하고 입시컨설팅 사업까지 했었다. 집에 오면 피곤해서 녹초가 되기 일쑤였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그렇게 바쁘게 살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인 것 같다. 아직 군인 신분인지라 지금은 어떠한 영리 활동도 할 수 없다. 사업을 하고 싶어도 못하고, 일도  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휴가 나와서 약속 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면 그렇게 외롭고 불행 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넷플릭스 드라마를 본다. 아니면 책을 읽는다. 남들 대부분도 이럴 것이다. 문득 책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들이 일종의 외로움을 잊기 위한 마약이구나. 영화 / 드라마 / 게임 / 책 이 경험들의 특징은 ‘몰입’이다. 몰입을 하게 되면 그 순간 나 자신을 잊어버린다. 사회적 관계로부터 단절된 나의 모습. 엉망인 나의 모습. 이런 것들을 모두 잊고 배역 속의 캐릭터에 집중 할 수 있다. 사회가 허락한 일종의 마약. 이런 컨텐츠들이 임시방편으로 작용 할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일 뿐이다. 본질적인 해결책은 사람들을 계속 만나야 하는 것에 있다.


게임에 중독된 사람들은 외로워서 그런 것이다. 드라마에 빠진 사람들도 외로워서 그런 것이다. 게임에 중독된 내 친동생을 보며 쟤는 왜 저렇게 사나 싶어 이해가 안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나도 외로우니 게임을 하고 싶어지더라. 매일 사람들을 만나고 무언가를 성취하던 대학 시절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약하다. 타고나기를 사회적 관계에 민감하게 태어나 조그마한 고독도 견디지 못한다. 어떻게든 이를 잊고자 자투리 시간에도 핸드폰을 열고 웹툰을 보고 / 넷플릭스를 보며 / 유튜브를 본다.


생각해보면 SNS 서비스가 성공한 이유도 이런 인간에 내제되어 있는 고독감을 잘 파고들어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런 감정적 유대감이 없이 단순히 연락만 주고 받아도 인간은 어딘가에 조금이나마 연결된 느낌이 든다. 그것이 결국 덧 없고 허무해지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당장의 소통에 집중한다. 인스턴트와 같은 즉각적 웹 상의 소통은 깊은 사회적 유대감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니콜라스 카가 책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말했듯 인터넷과 컴퓨터는 사람들에게 풍요 속의 빈곤. 공허함만 더 안겨준다.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타인에 대한 보수성을 버리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 그리고 이런 환경이 조성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임이든 넷플릭스든 집에서 혼자서 보는 그런거 말고. 인스턴트처럼 허무한 텍스트 기반의 연결 말고. 대학교 다닐 때처럼 매일 사람들 만나고 / 어떤 일을 같이 하다보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국 사회의 병폐인 노인 고독사 안 당하려면 나이 들어서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뭐를 하며 살면 된다. 그런 다짐을 스스로에게 해본다.



2번 : 종교의 기능 중 하나는 외로움을 잊는 것이다.


본래 정치와 종교 / 젠더 갈등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정답이라는게 존재하지도 않고 말하는 순간 적이 생길 수 밖에 없거든. 이런 얘기는 1950년대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같이 무서운 신념 같은거라 멀쩡하던 사람들도 저 얘기가 나오면 헷까닥 돌아버린다.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할아버지, 할머니들 죽창으로 죽이고 다니던 모택동의 홍위병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 선생님들 말 잘 듣던 착한 학생들이었다. 이런 멀쩡한 인간들도 순식간에 헷까닥시켜 살인자들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것이 정치, 종교, 젠더와 같은 신념이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종교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민감한 이야기는 다 차치하고, 모든 종교가 가지는 장점 하나만 꼽자면 ‘외로움을 잊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MJ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외롭지 않아.” 이 말에 가치 판단은 하지 말자. 오로지 정신적 이득에 대해서만 보자. 신을 믿는다는 것은 분명 인간에게 이득이 있는 부분이다. 외로움을 잊게 해주거든. 세상 산다는게 얼마나 고독한데 옆에 누가 있대. 그게 만들어진 상상이든 진짜 있든 그건 몰라. 근데 있어. 나는 믿어. 이러면 정신적 이득이 있는거다.


어떤 절대적 존재가 항상 내 옆에 있다는데 외로움에 있어 이것이 얼마나 개꿀인가. 물론 나 개인적으로는 종교 얘기를 들을 때마다 과학적 반박이 마구 떠올라 믿으래야 믿을 수가 없다. 그냥 눈 딱 감고 대뇌피질 정지시켜봐? 어쨋든 이득이 있으니 시도는 해볼 필요는 있겠다.



3번 : BJ들이 인터넷 방송을 하는 것도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다.


현대 첨단 기술을 활용해 개인의 고독감을 가장 잘 극복하는 현명한 사람들이 BJ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는 문제점은 이것이다. 누군가를 만난다 / 혹은 어떤 활동을 한다. 그 때는 사람들을 만나 재밌고 신나고 외롭지 않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혼자네? (가족하고 사는 사람들은 차치. 하지만 언젠가 다 독립해서 혼자 살아야 함.) -> 외롭네? -> 이걸 잊기 위해 티비 보거나 게임해야겠네. 이런 구조다.


그런데 BJ들은 집에 와서도 사람들하고 소통을 한다. 카카오톡 같은 형식적인 소통이 아니다. 인터넷 화상망을 이용한 실제 만남과 유사한 진짜 소통이다. 아마 옥시토신 호르몬 분비에 있어서도 카카오톡 같은 텍스트 기반 소통보다 이런 식의 얼굴 까고 하는 화상망 소통이 그 호르몬 수치에 있어 유의미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외로움을 느낄 새가 많지 않다. 외로우면 방송 켜고 사람들 만나면 되거든. 그러면 실제 만남과 유사한 효과가 난다. 현대 첨단 기술이 주는 혜택을 그대로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인류는 100만 년 전 유인원 루시로부터 진화 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사회적 연대를 통해 타 동물들을 이기고 문명을 구축해왔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사회적 유대감을 추구하며, 고립에 고통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우리들 모두 누구 만나다가 집 오면 외로움이란 고통을 느껴야 하잖아. 그런데 BJ들은 첨단 기술을 통해 이런 만남을 끊기지 않고 집에서도 이어 갈 수 있다. 이 얼마나 혁명적인가. 외로움으로부터 발버둥치던 호모 사피엔스의 완전한 진화다. 나 또한 외로움으로부터 발 버둥을 치기 위해 이렇게 블로그에 일기를 쓰고 있지만, 이거는 카카오톡의 텍스트 소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 만남처럼 얼굴 까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유대감을 느낄 때 나오는 행복 호르몬인 옥시토신의 분비 수치도 분명 낮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골방에서 혼자 생각하며 느낀 외로움에 관한 3가지를 요약 정리해보겠다.


1. 게임, 드라마, 영화, 소설 등은 외로움이 주는 고통을 잊기 위한 임시 방편의 마약이다. 지속 효과 시간은 길지 못하고 다시 외로워져서 중독 수준으로 계속 맞아야 한다. 좋지 않다. 현명한 방법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처럼 90살 죽을 때까지 매일 사람들 만나고 일 하면서 살다가 죽기 전 1시간만 잠시 외롭다 죽는 것이다.


2. 정주영 회장처럼 되지 못하겠으면 지속적이고 꾸준한 외로움 극복 아편 종교를 갖자. 대뇌피질을 멈추고 신이라는 존재가 내 옆에 있다고 믿어버리면 개꿀이다.


3.  만년간 계속된 호모사피엔스의 외로움 투쟁으로부터 최종 진화를  개체는 인터넷 방송 BJ. 그들은 현대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화상망 만남을 이룰  있다. 뇌에서는 실제 만남과 화상망 만남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1 : 다수의 방송 참여 구조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쉬지 않고 질문을 받고 커뮤니케이션   있다. 이거 현명하게 잘만 활용하면 거의 최종 승자 급이다.


원문 링크 : https://m.blog.naver.com/no5100/222416860639 ​

작가의 이전글 타인의 평가와 위축감 간의 관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