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제 몸을 불살랐다. 그의 죽음은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고발에 머물지 않고 이후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당시 민주화운동의 두 축이었던 학생운동과 종교운동은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노동운동, 빈민운동 등으로 관심을 넓혀갔다. 그의 죽음만이 아니다. 전태일의 수기를 바탕으로 조영래 변호사가 집필한 『전태일 평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부제처럼 한 청년 노동자가 제 몸을 불태우는 결단을 내리기까지의 고뇌와 실천을 전한다. 바보회를 조직하고 평화시장 노동실태를 조사하고 관련 기관에 알리고 사업주들과 협상을 벌이는 등 노동운동가로서 그의 치열함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이러한 실천이 배고픈 어린 시다들을 위해 버스값을 아껴 풀빵을 사다주는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 사람의 독자로서 덧붙인다면, 아무리 지독한 가난과 억압 속에 놓인다 하더라도 세상을 이해하고 변화를 꿈꾸는 인간의 존엄은 훼손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전태일 평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1983년 저자를 밝히지 않은 채 발간되었다. (국내 발간이 어려워 1970년대 일본에서 먼저 발간되었다.) 당시 이 책은 이적 표현물로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검거되었다. 1991년 1차 개정판에 이르러서야 저자 조영래를 밝힌다.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고 있으며 다양한 장르를 통해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조명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박광수 감독), 만화 『태일이』 등이 그렇다. 지난 해 50주기를 맞아 애니메이션 <태일이>도 제작발표회를 가졌다. 연극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조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1990년 20주기에 놀이패 한두레의 <불꽃으로 살아>가 제작되었다. 당시 놀이패 한두레는 <우리공장 이야기> 등 직접 사업장을 순회하면서 민주노조운동 현장 공연에 매진하던 때로 <불꽃으로 살아> 역시 전태일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이면서 당시 노동연극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평전을 비롯하여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다루는 대중매체가 지속적으로 발표되면서 전태일에 대한 연극 제작은 좀 다른 고민에 놓이는 것 같다. 물론 장르와 매체에 따라 그리고 참여하는 창작자들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는 이야기들이 있겠지만, 대중매체의 파급력에 비할 수 없는 연극은 ‘지금’ ‘여기’에 더욱 천착하게 된다. 즉 5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넘어 그의 삶과 죽음이 ‘지금’ ‘여기’에 어떻게 되불려 들여져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다.
지난 해와 올해 공연된 극단 파수꾼 <불씨>(이은준 작 연출)와 전태일기념관 <어쩔 수 없는 막, 다른 길에서>(이양구 작, 김태형 연출)는 각각 실존 인물을 초대한다거나 현재의 사건과 과거의 사건을 교차하거나 중첩하는 방식으로 ‘지금’ ‘여기’를 환기하고자 한다. 두 작품 모두 전태일의 어린 시절 등은 제외하고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시간에 주목한다. <불씨>는 평화시장 재단사로서 어린 시다들의 노동환경에 마음 아파하면서 바보회를 조직하는 등 평전의 주요 사건을 따른다. 분신에 이르는 전태일의 고뇌가 평전의 에피소드를 통해 직조되고 마지막 장면에 이어 전태일의 동료를 초대하여 이야기 시간을 갖는다. <어쩔 수 없는 막, 다른 길에서>는 이머시브씨어터를 표방하면서 관객들을 여행사 ‘피스투어’ 인턴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하고 전태일기념관을 옮겨다니면서 진행된다. 그러나 모든 장면이 관객들이 직접 참여하는 인턴프로그램인 것은 아니다. 연극이 시작되는 1층 로비에서 관객들은 여행지 소개글을 직접 작성하는 등 인턴 교육과정에 참여하지만 장면은 피스투어에 재직하고 있는 인물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2층 공연장인 울림터는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처럼 재봉틀이 놓여있지만 그곳은 피스투어 사무실이기도 하며 회사와의 갈등은 격화된다. 이처럼 이 공연은 현재 피스투어의 사건과 과거 전태일의 사건이 교차하고 중첩되면서 전개된다.
<불씨>는 실존 인물과의 만남의 장을 덧붙임으로써 <어쩔 수 없는 막, 다른 길에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노동쟁의를 중첩시킴으로써 현재적 해석을 시도한다. <불씨>에서 실존 인물과의 만남은 실존인물로서의 전태일을 환기하는 것이지만 전태일에 대한 회고를 넘어 사건 이후 현재에 이르는 시간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관건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막, 다른 길에서>는 현재 노동현실을 환기하는 점은 있으나 현재 사건의 쟁점으로 전태일이라는 인물과 사건이 협소하게 이해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남는다. 예를 들어 회사의 부당한 지시에 대한 반대, 저항하는 동료와의 연대 등이 현재 사건의 주요한 갈등을 이루는데 한편으로는 전태일의 실천과 결단이 소극적 갈등으로 협소화되거나 현재 사건의 갈등을 넘어서는 데에 전태일의 삶은 생략된 채 목숨을 건 그의 희생이 강조되는 우려가 있다.
사람 속에서
음악극 <태일>과 <2020 연극 전태일- 네 이름은 무엇이냐>에서도 ‘지금’ ‘여기’에 대한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제작의 맥락이 서로 다른 두 작품에서 이에 접근하는 시선과 방식은 사뭇 다르지만 말이다.
음악극 <태일>은 창작그룹 목소리프로젝트 세 창작자들의 작업으로 시작되고 완성되었다. 즉 세 창작자의 협업프로젝트다. 2017년 트라이아웃 공연에 이어 2018년 우란문화재단, 2019년 전태일기념관 개관공연을 거쳤다. 음악극 <태일>은 성마저도 제하고 이름만 남겨둔 제목처럼 인물에 집중한다. 오직 두 명의 배우만이 무대에 선다. 창작자들은 ‘태일의 목소리’ ‘태일 외 목소리’로 인물을 나누었지만, 인물이 둘인 것은 아니다. 한 명의 배우가 전태일을, 다른 한 배우가 전태일 외 모든 역할을 연기한다. 태일과 태일 외 역을 남배우와 여배우가 나누어 맡았다. 이러한 설정이 자칫 드라마를 협소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전태일의 삶은 전쟁 직후 대구와 서울 도시 빈민층의 삶과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현실을 가로지르는 것이 아닌가. 60년대 빈곤한 삶의 풍광처럼 낡은 나무상자를 잇대어 만든 무대는 변화 없이 세워져 있고 시대를 해설하는 영상도 등장하지 않는다.
음악극 <태일>은 전태일이 살아낸 시대의 풍광을 포기하는 대신 그가 만났던 사람들 속에서 그의 삶을 그려간다. 태일과 순옥, 태일과 엄마, 태일과 아빠, 태일과 시다, 태일과 바보회 동료, 태일과 근로감독관, 태일과 사장 등등 장면은 오직 두 인물로 전개된다. 이러한 전개는 한편으로 전태일이 살아낸 시대를 뒤로 물러세우는 점이 있지만 다른 한편 태일의 고뇌, 연민, 분노, 실천 등등이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려지면서 태일을 사람 속에서 성장하는 인물로 다가오게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 미싱 한 대로 작은 피복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파산하자 엄마는 돈을 벌기 위해 가족들이 있는 대구를 떠나 서울로 가고 태일은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온갖 잡일을 하며 엄마를 찾는다. 드디어 태일이 엄마를 만난 날, 태일과 엄마는 엄마가 얹혀살던 남의 집 단칸방에 신세질 수 없어 그 집 방문 앞 마루 밑에 눕는다. 식당 일하는 엄마의 앞치마를 이불 삼아 흙바닥에 누운 태일과 엄마의 밤. 이 장면은 한국전쟁 후 도시 빈민의 곤궁함 삶의 증언일 터인데, 연극은 이 장면을 가난의 가혹함만을 전면화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가난을 낭만화하지도 않고 혈연의 애틋함에 빠지지 않으면서 엄마와 아들,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의지하고 보듬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완성한다. 인물과 인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의 전개는 이후 에피소드에서도 이어진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통행금지에 걸려 한뎃잠을 자고 그렇게 아낀 버스비로 박봉에 끼니도 거르는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는 태일은 돈 잘버는 재단사 아저씨라기보다는 엄마와 앞치마를 나누어 덮던 바로 그 태일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즉 청년 남성 재단사와 어린 여성 시다라는 위계적 관계에서의 일방적인 연민이 아닌 의지하고 보듬는 관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음악극 <태일>은 연극이 전개되면서 무대 위에 하나 둘 촛불을 켠다. 촛불이 조명의 전부인 것은 아니며 극적 상황과 연관된 것도 아니다. 세트 전환이 없는 무대의 특성상 장면 전환 행위이기도 하고, 한 장면 안에서 상황 전환을 위한 행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나 둘 촛불이 늘어가다가 연극의 후반부에 이르면 촛불을 켜는 행위가 장면과 장면 사이에 오래 계속되면서 무대 가득 촛불이 일렁인다. 작고 노란 불빛의 질감은, 그자체가 어떤 위기의 전조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불빛이 무대에 가득 차오를수록 태일의 결단의 사건은 가까워 온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제작될 당시 분신 장면에 대한 특수효과가 화제가 되었는데, 영화라는 장르에서 특수효과가 차지하는 비중도 있겠지만 그만큼 결단의 사건은 드라마적으로도 절정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음악극 <태일>은 태일의 삶이 달려온 결단의 사건에서 라이터를 켠 태일이 무대 뒤로 퇴장한 채 무대 가득 일렁이는 촛불만을 남겨둔다. 그 작고 노란 불빛의 일렁임만으로 이 엄청난 사건을 해석할 수 있을까.
음악극 <태일>의 창작진은 여러 인터뷰에서 전태일에 대해 “좋은 삶을 산 분”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이 연극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것도 “좋은 삶”의 “선한 영향력”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전태일의 죽음을 빈무대로 남겨둔 것은 이 연극이 쫓아온 전태일의 삶이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연극은 그의 마지막 결단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분신 장면을 무대 가득 촛불이 일렁이는 빈 무대로 남겨두었을 뿐이다. 창작진들은 창작과정에서 실존하는 인물의 삶이 드라마를 통해 왜곡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조심스러움과 함께 전태일의 위대함을 걷고 인간 전태일을 만나기를 희망한다고 이야기한다. 실존하는 역사적 인물에 접근하는 다소 상투적인 언급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시선은 세상 속에서, 사람과 사람 속에서 살아내는 인간을 그려내는 것으로 완성된다.
전체의 일부인 나, 나의 나인 그대들
음악극 <태일>이 목소리프로젝트 세 창작자들의 협업으로 창작된 작품이라면 <2020 연극 전태일 - 네 이름은 무엇이냐>(이하 <네 이름은 무엇이냐>)는 전태일 50주기를 기념하여 ‘나무닭움직임연구소’와 ‘연극 전태일 추진위원회’가 공동제작한 작품이다. ‘연극 전태일 추진위원회’는 노동운동, 사회운동, 연극운동 등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제작비 모금과 더불어 지역공연 유치활동을 했다. 공연의 제작과 기획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개인과 단체의 연대활동인 셈이다. 이 작품은 초연작은 아니다. 2000년 전태일 30주기를 기념하여 극단 한강에서 제작된 <2000 연극 전태일>을 각색했다. <2000 연극 전태일>은 그해 11월~12월 전국 주요도시를 순회하면서 공연되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도 지난 해 6월부터 12월까지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되었다. 지난 해 공연을 마치고 ‘연극 전태일 추진위원회’는 ‘함께하는 연극 전태일’로 조직을 개편하고 올해도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음악극 <태일>이 대구 시절에서부터 시작된다면 <네 이름은 무엇이냐>는 평화시장 재단사에서 시작되어 그의 죽음까지 순차적으로 전개된다. 각 장은 전태일1에서부터 전태일10으로 나뉘어 있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연극을 열고 닫는다. <2000 연극 전태일>에서 <네 이름은 무엇이냐>로 이어지는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콘셉트는 각 장마다 전태일 역의 배우가 바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장에서 전태일 역의 배우가 2장에서는 전태일 외 다른 역할을 맡고 1장의 사장 역 배우가 2장에서는 전태일로 등장하는 식이다. 즉 열 명의 배우들이 모두 어느 한 장에서 전태일로 분한다. 프롤로그는 이러한 공연의 콘셉트를 매우 명료하게 보여준다. 프롤로그는 순옥과 함께 서울에 온 태일이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엄마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그리는데, 이때 모든 배우들이 전태일로 분하여 상황 상황을 이어간다. 어린 순옥과 함께 무대에 등장한 전태일이 순옥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돌아서면 전태일로 분한 또 다른 배우가 거리에서 우산을 팔고 구두를 닦는다. 다시 이어 또 다른 배우가 분한 전태일이 다시 순옥을 찾아간다. 이렇게 상황이 전개되면서 하나 둘 전태일로 분한 배우들이 등장하고 순옥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무대에는 10명의 전태일이 함께 선다. 배우들은 성별, 몸의 크기 등이 제각각이다. (서로 다른 색의 추상적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검은 의상이 전태일과 다른 인물들을 구별하면서 인물의 동일성을 부여한다. 여러 배우가 각각의 전태일로 분한다고 해서 인물의 동일성을 해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분열적 자아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한 작품에서 동일한 인물을 여러 명의 배우가 분하는 이러한 공연의 콘셉트에 대해 공연팀은 “전체의 일부인 나”라는 전태일의 사상에서 착안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전태일의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 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인용자 강조)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죽음 이후를 당부하는 이 구절에서 전태일은 스스로를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들은 ‘나의 나’다. 전태일은 유서에서 자신의 죽음은 일부의 소멸이며 이 일부의 소멸을 딛고 ‘나의 나인’ 그대들은 움직여가라는 것이다. 유서만을 놓고 본다면 전체는 곧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운동일 것이다. 운동은 노동운동일 뿐만 아니라 세계, 생명으로 확장되는 것일 게다. 그런데 과연 이 작품에서 여러 명의 배우들이 한 인물을 연기함으로써 전체와 부분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고 있는가는 모호하다. 프롤로그에서처럼 무대에 동시에 여럿의 전태일이 존재할 때, ‘나의 나인 그대들’의 전체가 시각화되는 점은 있다. 개인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무수히 다시 이어지는 전체를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개인과 무리를 대비하는 외에 전체와 부분에 대한 재해석은 모호하다.
여러 배우가 분한 전태일이라는 콘셉트는 인물의 입체성, 다면성, 다성성과 연관된다. 프롤로그에서 전태일이 순옥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전태일이 처해있던 곤궁한 삶, 그 가운데에도 어린 동생을 지키고자 하는 전태일의 애틋함과 노력이 여럿의 전태일을 통해 좀 더 부피 있게 그려진다. 순옥과의 만남과 헤어짐은 평화시장 어린 시다들에 대한 전태일의 연민과 이어진다. 또한 각 장마다 전태일로 분한 배우들이 바뀌면서 각 장의 독립성이 강화된다. 연극은 전태일의 삶을 전개하지만 각 장의 독립성이 강화되면서 인과적인 드라마로 수렴되지 않고 전태일이 살고 있는 세상, 살아낸 세상으로 확장된다. 각 장의 독립성은 스타일의 변주을 통해 강화되기도 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각 장의 독립성이 마련하는 시선의 확장은 어린 시다에 대한 주목과도 연관된다.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공연된 이 작품은 시다 역의 어린이 청소년 배우를 지역에서 캐스팅했다. 훈련받지 않은 아마추어 배우라 할 수 있는데, 전문 배우와 아마추어 배우, 성인배우와 아동배우가 한 무대에 서면서 미싱사와 시다, 재단사와 시다라는 위계적 관계, 당시 평화시장 피복공장의 시다들은 어린이노동이었다는 점 등이 환기된다. 제작에서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열어둔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야기를 새롭게 하기
음악극 <태일>은 시대의 풍광을 물러세우는 대신 단 두 명의 배우가 그려가는 태일과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태일의 삶을 구축한다. 반면 <네 이름은 무엇이냐>는 열 명의 배우가 분한 열 명의 태일은 물론 각 지역에서 참여하는 시다 역의 아동 청소년 배우 등으로 다양한 시선을 열어둔다. 영상 등을 통한 시대의 풍광이나 마임, 춤, 노래 등 양식적 표현도 다양한 시선의 자리를 만든다.
이 두 작품은 지금 여기의 시간과 장소를 두드러지게 드러내지 않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길어올림으로써 동시대성에 접속한다. 음악극 <태일>은 시대 앞에서의 결단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가는 태일을 포착함으로써 이제까지 주목하지 않았던 전태일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한다. 그의 삶이 놓여 있는 시대적 정치적 맥락이 물러서 있는 점은 아쉽지만 말이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는 복수의 전태일 등 다성성의 구축을 통해 해석의 가능성을 넓힌다. 이 가능성이 스타일의 다채로움을 넘어 ‘나의 나인 그대들’에 대한 해석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이렇게 놓고 보면 두 작품은 지금 여기의 시간과 장소를 삽입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전태일의 삶에 천착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고, 해석의 가능성을 넓힌다. 결국 전태일을 지금 여기에 놓는다는 것은 전태일을 새롭게 읽는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 여기는 단지 연극의 과제만도 아니다. 평전이든 영화든 만화든 지금 여기는 전태일의 이야기를 고쳐 쓰는 모두의 과제다. 그리고 결국 관건은 그의 삶을 지금 여기의 삶 속에서 새롭게 해석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