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먼스는 광화문 광장으로 이어지는 대로와 축제로 분주한 서울광장을 조망할 수 있는 서울도서관 옥상에서 시작된다. 시민정원사와 시청투어 시민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잔디 조각을 이어 붙이고 옥상 화단에 물을 주고 3층 전시실로 내려와 이야기를 듣는다. (잔디 체험?과 투어에 작은 트릭이 있다.) 여기까지 관객들은 시민자원봉사자들로 운영되는 가이드 프로그램의 참여자인 셈이다. 서울역사 전시관에 대한 해설을 듣고 시장실로 쓰였다는 방에서는 사진도 찍는다. 그리고 이제 방을 막 나서려는 순간, 참가자들의 이름에 주무관, 주임, 과장 등등의 직책이 붙여 불려지면서 사원증을 나눠준다. 이제부터 참가자들은 구체적인 '역할'을 부여받고 가상의 상황으로 들어선다.
올해 있었던 전작, <원의 안과 밖:탄생비화> <THE Theater Keeper> 등이 두산아트센터와 아르코예술극장이라는 특정한 장소의 곳곳을 돌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던 것처럼 이번 공연 역시 서울광장을 앞에 둔, 옛 시청 청사로 쓰였던, 하여 서울시와 시청청사에 대한 전시실이 있는, 서울도서관의 곳곳을 돌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관객들은 퍼포머스의 전개에 따라 공간을 돌아다닌다. 앞의 두 작품이 이동형 공연으로 관객들이 계속 움직이지만, 관객들은 보는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반면 이번 공연에서 관객들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사실 옥상의 잔디체험과 전시실 투어에서도 관객들에게는 이미 퍼포먼스의 전개에 따른 역할이 부여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퍼포먼스의 관람자가 아니라 시민가이드프로그램의 참여자였던 것이다.
사원증을 목에 건 관객들은, 아니 신입사원들은 시장실 바로 옆 회의실에 병풍처럼 둘러서, 정말 우리는 둘러서 있는데 물론 세트가 준비 안 된 때문이라 할 수 있지만 그 회의에서 우리의 역할이 딱 병풍이었다, 상사들의 이야기를 지켜보다가 의견을 내라니 의견을 내고, 결론을 만들라니 결론을 만들지만, 상사는 그냥 자기가 결정해 버린다. 회의가 끝나자 이번엔 뭔가 거부할 수 없는 업무 외 업무 지시가 있고, 일을 하려고 자리잡는 순간 마치 민방위훈련 소식이라도 전하는 듯 어서 빨리 퇴근하라는 방송이 울리고 사원증을 반납하고 어리둥절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 길목에서 이번엔 택배상자를 받게 된다. 그리고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굴에 빨려들어가듯이 동그라미를 싫어하는 모임의 회원들이 되어 가면을 쓰고 펼침막, 피켓 등 시위용품(?)을 구비하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한다.
드디어 광장이다. 동그란 원형 잔디밭 경계에서 마치 존재론적 결단이라도 내리는 듯 잔디밭에 발을 딛는 순간 우리는 모두 광장을 질주하며 가로질러 기차놀이를 하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그런데 이 모임은 동그라미를 싫어하는 모임 아니었던가!) 수건돌리기를 하고 장기자랑이라도 하는 듯 격파를 하고 그리고 한 사람이 모두 함께 누워보자고 한다. 눈 앞에는 높은 가을 하늘이 가득 펼쳐있다. 엔딩.
올해 처음 만난 창작자, 창작집단의 세 작품을 연달아 본 셈이다. <원의 안과 밖: 탄생비화>가 극장이라는 장소성을 서사의 모티브와 중첩시키면서 극장 내부 구석구석의 공간을 배경으로 원지영 자신과 아버지가 캐릭터가 되어 부녀의 내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면, <THE Theater Keeper>는 극장의 내부가 아닌 로비 계단 주차장 등등을 돌면서, 그렇다 무대와 객석이 있는 극장 '안'에 진입하지 못하는 것이 결말이다, 무대와 객석 '밖'에 있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조각조각 펼친다. 흥미로운 점은 두 공연 모두 노골적으로(?) 극장의 장소성을 결코 벗어나 않음에도 이야기는 연극하는 이들의 연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두 작품과 이번 공연을 나란히 놓고 보면 원지영의 이야기는 동심원을 그리면서 점점 넓어지는 파문 같다.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더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끌어들이더니 관객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시민정원사에서 시민투어가이드로 전환하는 장면에서 약간의 트릭이 있다고 했는데, 시민정원사와 관객들이 옥상정원에 물을 주고 있을 때 옥상의 또 다른 편에서 한 무리의 탐방객들을 이끌고 있던 시민가이드가 불쑥 관객들에게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고 한다. 순간 관객들은 잔디체험단에서 투어참가자들로 역할이 바뀌는 것이다. 관객들은 조금 어리둥절한채로 가이드를 따르고 가이드는 건물의 계단과 창호를 설명하면서 전시실로 관객들을 이끈다. 그렇게 불쑥 밀고 들어오는, 그러나 충격적이랄 것 없는 미묘한 변화가 예비되면서 일상과 가상이 흔들린다. 투어가이드는 이 공연의 마지막에 다시 한번 등장한다. 광장에 누어 하늘을 보고 있을 때 가이드가 무리를 이끌고 광장을 돌고 있다. 얼핏 보니 앞서 전개된 장면에서 등장했던 배우들이다. 물론 이들은 지금 투어에 참여하는 '일반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옥상에서 가이드를 따르던 무리들 역시 일반인 역할을 하고 있는 배우들이었으리라) 물론 이러한 미묘한 전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서 퇴근하라는 방송에 쫓기듯 계단으로 향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을 호명하며 택배 상자가 전달되자마자, 갑자기 청년들이 뛰어들고 순식간에 관객들은 '동그라미를 싫어하는 모임'의 집회 참가자들이 된다. 때로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물컹하게 하면서, 때로는 급작스러운 충격적 전환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관람객들은 전개되는 상황에서 각자 자신의 역할을 해석하고 수행한다. 섬세한 연출이다.
아마도 가장 고민이 컸던 장면이 원형의 잔디밭에 진입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원에 들어서자마자 질주가 시작되고 광장을 가로지르면서 이제 관람객들은 시위대에서 다시 각자 자신으로 돌아간다. 원의 경계, 경계의 넘어섬, 질주, 그리고 질주 후의 '나'. 이처럼 마지막 장면은 연출된 상황의 제시 없이 오직 자신의 행위를 통해 상황에 돌입하고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잔디밭의 경계를 넘는 한 걸음이 어떻게 마지막 변화의 불길을 당길 것인가. 그래서 각자의 하늘에 도착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 하늘에서 관객 각자가 도착한 결말은 관객의 몫일까, 창작자의 몫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