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피, 혼돈 그리고 축배

서울괴담 <여우와 두루미>

by 김소연

이솝우화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교훈으로 끝난다. 그런데 서울괴담의 <여우와 두루미>는 피를 부르는 한바탕 싸움으로 나간다. 서로 물어 뜯고 피흘리는 격렬한 싸움이다.


등장부터 달랐다. 방향을 알 수 없는 북소리가 마로니에 공원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거의 거의 하반신을 가리는 큰북이 몸을 떨며 만들어내는 소리의 위력도 그렇고, 단순한 리듬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흥분도 그렇고, 거기다가 북을 치는 고수들의 울긋불한 치장은 마치 전쟁에 나서는 전사들 같았다. 그 북의 대열 앞에 각각 여우와 두루미가 섰다.


드디어 마로니에 공원에서 맞닦드린 여우와 두루미는 대열을 이끌고 한바탕 어른다. 우아한 초대와 방문이 아니다. 호리병과 접시는 던져지고 둘은 몸을 부딪치며 싸운다.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 가지만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여기까지라면 우화의 형식으로 가리워져 있는 갈등을 극대화시킨 것이라 할 터이다. 그런데 이 싸움은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만신창이가 된 여우와 두루미가 겨우 몸을 일으켜 다시 싸움을 시작하는데 그만 서로 몸이 뒤섞이고 만다. 여우의 머리와 몸통이 두루미의 꼬리에 붙고 두루미의 머리가 여우의 꼬리에 붙었다. 몸을 흐트려 다시 조합해보려고 하지만, 두루미의 부리가 여우의 머리에 붙고 여우의 꼬리가 두루미의 몸통에 붙는다. 싸움을 다시 시작하려 해도 그조차 불가능하다. 여우를 공격한다는 것이 두루미 제 꼬리를 공격하는 것이 되고 두루미를 공격한다는 것이 여우 제 몸을 공격하는 것이 된다. 아니 이미 몸이 뒤섞였으니 누가 여우고 누가 두루미라 할 수도 없다. 내 몸에 적이 있고, 적의 몸에 내가 있다.


이 혼돈을 끝내는 데에는 두 갈래 길이 있을 것이다. 너와 내가 뒤섞여 버렸지만 싸움을 멈추지 않는 것. 싸움은 너와 나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끝날 것이다. 또 다른 길은 몸의 뒤섞임을 깨달는 것에서 열린다. 너가 나이고 내가 너이니 어떻게 내가 너를 찌르고 너의 칼을 받아치는 싸움이 가능하겠는가. 서울괴담의 <여우와 두루미>는 후자의 길을 간다.너를 향한 증오의 화살이 나에게 되돌아오는, 아니 너와 나를 구분할 수 없으니 증오도 공격도 불가능해진다.


하여 이어지는 장면은 축배다. 공원 한 가운데에 긴 테이블을 차리고 여우의 머리, 두루미의 다리 등등 뒤섞여 있던 것들이 제각각으로 테이블에 늘어서고 이들을 둘러싸고 있던 관객들에게도 술잔이 건네진다. 싸움은 끝났고 이제는 축배의 시간. 그러고 보면 예기치않은 반전에도 불구하고 화해라는 우화의 결말에 도착한 셈이다. 싸움이 끝났으니 먹고 마시고 춤추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것일 터인데, 그럼에도 싸움을 경유해서 도착한 축배가 그렇지 않은 축배와 어떻게 다를까라는 질문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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