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크레타

우리가 살아가는 확률이란

by 조르바


아테네에서 비행기가 이륙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기내에서는 착륙 준비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다. 복도 좌석에 앉은 나는 창문 좌석으로 보이는 새파란 바다와 나무가 많이 보이지 않은 마른 대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고도가 낮아지고 공항 활주로에 다가갈수록 크레타의 대지와 바다의 색이 점차 가까워진다. 나는 어린아이가 되어 설레기 시작한다. 저기 저 파란 바다에 내 몸을 맡긴다면 그것은 어떤 기분일까, 내가 여태껏 가보았던 바다와는 어떻게 다를까. 저 마른 대지에는 어떤 종류의 식물이 길옆에 있을까. 안내 방송과 함께 짧은 잠을 자던 승객들이 하나씩 일어나 기지개를 하기 시작한다.


오월의 크레타. 하니아 시내에 도착해 버스터미널에 발을 닿자마자 내리쬐는 태양. 북아프리카로부터 지중해를 넘어와 내 코끝에 닿는 시로코 바람에는 최소한의 수분마저 남아있지 않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내가 뱉는 공기가 뜨거운 것인지, 마시는 공기가 뜨거운 것인지, 물을 마셨다. 마시는 물이 즉시 몸에서 수분이 날아가 버리고 있다.


삼 층을 넘는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은 아기자기하고 작은 시내에는 한여름의 지중해를 상징하는 열대 꽃들이 거리 건물에 창문에 옥상에 주렁주렁 열매처럼 열려있다. 건물마다 그리고 골목 아귀마다 잘 가꾸어진 식물과 꽃을 보며 걸으면서 하니아에는 도시에 경관을 관리하는 조직이나 정부 부서가 있을까, 혹은 이런 도시 전체의 싱그러움이 각 개개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조화인 걸까.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걷다 보니 작은 항구가 나타났다. 방파제 둑 덕분에 도심에서 보이는 항구 내 바닷물에는 어떠한 물결도 파장도 없는 잔잔함과 맑음을 보여주고 있다. 속까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작은 항구에는 관광목적의 작은 보트만이 정박하여 뜨거운 볕을 홀로 쓸쓸히 받고 있다.


유럽 최초의 문명의 발상지이자, 지정학적 위치로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던 섬. 북아프리카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남부 유럽으로 가기 전 잠시 속도를 줄여 쉬어가는 섬. 뜨거운 태양과 해수욕을 기대하고 왔지만, 이곳에서 조르바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내심의 기대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질문도 함께 들고 온 곳이다. 본격적인 여름 성수기가 시작되기 전에 하니아는 생각했던 것보다 한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그 위로 내리쬐는 태양의 빛은 자비란 없이 정수리에 가차 없이 떨어지고 있다. 항구를 쓸쓸히 지키고 있는 베네치아 성벽과 등대에는 세월 대대로 내려온 단단한 고독함이 엿보인다.


구시가지와 하니아 항구를 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기자기하고 작은 구시가지. 그 길로 하니아 시내 서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걷기 좋게 조성된 길은 아니지만, 그리스 본토와 에게해를 마주한 시원한 바다가 바람의 리듬에 맞춰 파도를 실어다 주고 있다. 해안에 있는 돌 사이사이에 숨어있다가 모래를 실어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 바람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자유로운 삶은 아마도 지금 방금 내 몸에 들어왔다 나간 바람에 가깝지 않을까. 그 길로 계속 서쪽으로 걸었다. 가방에는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기 위해 간단한 용품을 챙겨온 터였다. 작은 바닷가에 도착했다. 고운 모래의 백사장은 아니지만, 그냥 쉬어 가고 싶었다.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온몸을 태양에 맡겨 쥐죽은 듯 소리 없이 일광욕을 즐기는 이곳 사람들. 한쪽에서는 상의를 벗은 채 그리스 청년 세 명이 족구를 하고 있다.


어느 곳 보다 뜨거운 크레타의 태양. 살이 이대로 계속 익어가길 바랐다. 나라는 사람이 이 태양 빛에 닳아 없어지도록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바다에 시선을 두는 동안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피부가 까만 어떤 여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온 뒤로 계속 보고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를 보는 시선에는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보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내가 그녀의 시선에 응한 뒤로 그녀는 시선을 뒤로 물리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녀는 손짓하며 이쪽으로 오라는 몸짓을 취했다. 나를 쳐다보던 눈빛에는 어느새 애절함 비슷한 무엇이 가득 차 있었다. 낯선 사람이 보내는 관심과 시선에는 별로 응하지 않고 계속 여행해온 터라,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바다를 보았다. 파도의 소리를 들었다. 백사장에 다다르지 못하고 뒤에 오는 다른 파도에 자리를 내어주는 파도. 혹시나 그녀가 계속 나를 쳐다보는 것인지 궁금해서 보니 아직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무언의 손짓을 하고 있다. 허름한 복장. 까맣게 그은 피부. 헝클어진 머리. 행색이 추한 그녀는 두 손을 모아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고 있다. 참지 못한 내가 그녀에게 갔다. 내가 느끼는 시선이 나의 과민에서 온 것인지 묻고싶었다. 도와달라고 하면 동전 한두 푼 줄 요량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내가 그녀와 대면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건물을 지목하며 저기 가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얘기를 했다. 무거운 짐이 있어 들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눌한 영어를 통 알아들을 수 없어 그녀에게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가 지목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백사장에서 십여 미터 이내의 건물은 아주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과 관심으로부터 방치되어온 흔적이 가득했다. 무너진 지붕, 쓰러진 기둥, 시멘트는 벗겨져 있고 철골은 군데군데 튀어나와 있었다.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면서 건물로 그녀의 뒤를 밟았다. 백사장과 가까우니 무슨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도착해서 본 건물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안쪽으로 들어가니 햇빛이 잘 비치지 않는 구역이 있었다. 구석으로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그녀. 그쪽으로 가니 그녀의 태도가 돌변하더니 나의 손을 잡고 그녀의 신체 부위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놀란 나는 손을 잽싸게 거두었다. 그녀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왔다는 말이 나왔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알제리에서 왔다는 대답을 했다. 그을린 피부 사이에 건강해 보이는 그녀의 입술에서 얼마의 금액 이야기가 나왔다. 그녀가 말하는 숫자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녀는 알제리 사람이고 나는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언짢은 기분이 된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건물의 외관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애초부터 상당히 기분 나쁜 색의 건물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뒤로 돌아보지 않았다. 계속 서쪽으로 걸었다. 햇볕을 받으니 다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흐르는 땀에 방금 기억이 걸러지고 난 노폐물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걷다 보니 부드러운 백사장의 해변이 나타났다. 부드러운 모래. 그 뒤로 있는 갈대밭. 그곳에서 한두 시간을 보냈다. 오로지 뜨거운 햇살에 몸을 맡기는 일. 내 육신과 정신을 위한 단순하고도 숭고한 작업. 바다를 보았다. 오다가 본 그 허름한 건물과 그녀의 얼굴이 생각이 났다. 금액을 이야기하는 건조한 그녀의 입술. 그녀가 사는 삶을 그려보았다. 그녀는 매일 이렇게 한산한 해변에 오는 몇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허름한 건물에 데려가는 일상을 사는 것일까. 그녀가 걸고 있는 오늘의 확률은 어떤 숫자로 환산될까. 그 작은 확률을 생각하는 동안 파도는 계속 해변에서 모래를 집어삼켜 바다로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내가 삶을 걸고 있는 확률은 얼마의 숫자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각자 말도 안 되는 작은 확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계산할 수 없는 그런 숫자 놀음이 머릿속에서 계속되는 사이에 벌거벗은 소년과 소녀가 바닷가에서 물장구를 쳤다. 오월의 크레타였다.

작가의 이전글포지타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