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벽에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한스 콘라트 슈만은 베를린 장벽을 최초로 탈출한 자로 기록되고 있다. 동독 경찰 조직에 몸을 담고 있었던 그는 사전에 서독 경찰과 합의하여 장벽을 만들 자리에 임시로 깔아둔 철조망을 사뿐하게 뛰어 탈출하였다. 동독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그는 통일 이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가족들의 차가운 대접과 서먹함을 뒤로하고 다시 돌아왔다. 이런 경험과 전직 동독 요원들이 자신을 죽이러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우울증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차가운 벽을 만지는 동안 내가 오래전에 읽었던 슈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유를 쫓은 그의 발걸음. 스스로 목숨을 걷어가야만 했던 그. 슈만 그 자신도 철조망을 넘으면서 그런 것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슈만은 자유를 얻었지만, 그의 목숨을 스스로 잃었다. 철조망은 크나큰 콘크리트 벽이 되었다. 그 벽은 허물어지면서 베를린은 하나가 되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과 하나의 일관을 띈다는 것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때로는 사람이 하는 선택들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진다. 철조망이 세워지기 전에 이곳에 터전 삼아 살았던 사람들. 선이 그어진 시간. 철조망에서 삼 미터의 장벽이 되기까지의 시간. 장벽의 성장을 도왔던 정치적 영양분들. 그리고 지금은 강가에 남아서 햇볕을 쬐고 있는 이 장벽들
그렇게 한동안 장벽에 손을 대고 있었다. 한여름에 벽은 묵직한 한기를 내뱉고 있다. 장벽과 장벽 사이에 깎인 틈 사이로 강가 너머 나무들이 보인다. 푸르른 여름이었다. 베를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