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말의 스페인의 태양이 전해준 위로
자전거 패들에 놓인 발의 움직임이 가볍다. 소매가 없는 상의는 이미 땀으로 축축이 젖어가고 있고,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와 각종 주전부리 그리고 큰 페트병에 담긴 물 두 통을 가득 채운 가방끈이 닿은 어깨에는 상당한 무게가 느껴진다. 십 유로를 내고 대여한 자전거를 타고 발렌시아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해변으로 갈 생각에 아침 일찍 일어난 나의 몸과 마음은 아침부터 내내 들떠 있던 터였다.
내가 숙박하고 있는 호스텔 리셉션에 한국인 직원이 있다. 동향 사람을 만난 것이 반가운 몇 안 되는 순간· 마음을 쉽게 하고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 현지인들이 많이 가는 한적한 해변을 추천해달라는 말에, 발렌시아에 십 개월 남짓 거주한 그녀가 아는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그녀가 나에게 어디를 통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냐고 물었다. 내가 이곳에 발을 닿게 된 이야기를 간략하게 했다. 그녀도 그녀의 이야기를 풀었다.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달랐지만, 어쩐지 비슷하게 불안한 쟁반 위에 놓인 젊은 우리였다. 다음의 이야기를 물었다. 나의 다음 일정을 말했다. 내가 그녀에게 다음을 물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어디로 갈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구시가지를 가로지르는 거대하고 길쭉한 도심 내 공원을 따라 잘 정비된 자전거 도로를 타고 계속 남쪽으로 향한다. 한가로운 주중 늦은 아침에 각자의 방법으로 느린 시간을 보내는 발렌시아 시민들. 이윽고 거리 위에 유동인구가 적어지고, 도로 위에 자동차의 숫자도 점차 자취를 감추더니 작동하지 않는 건널목 신호기와 낡은 표지판 뒤에 왕복 이 차선의 도로가 이어지기 시작한다. 거리 위에 엘 살에 해변을 가리키는 표지판에 의지한 채 계속 남쪽으로 향한다. 자동차가 뒤에서 오는 소리를 들으면 멈추고 갓길에 자전거를 댔다가 다시 달린다. 시월 말이지만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에 이미 자전거 안장에 앉은 엉덩이와 등에는 땀이 말 그대로 샤워한 듯 흘러내리고 있다.
해변에 확실하게 다가가고 있다는 확신. 자전거 패들을 밟는 속도에는 어떠한 서두름도 없다. 인적하나 없는 한적한 도로. 자전거가 바람을 받아 천천히 달리는 소리. 목덜미로 흐르는 땀은 어깨에 닿기 전에 바람과 함께 날아가고 있다. 오른쪽으로 펼쳐진 평탄한 평야의 땅은 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고, 왼쪽에서는 불어오는 바람에는 점차 바다가 실어다 주는 시원함이 채워지고 있다. 아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왼쪽에 있을 바다가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았다. 머지않아 눈에 가득 채워질 바다였다.
이내 비포장도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자전거 바퀴가 비포장도로에 닿는다. 고르지 못한 도로를 천천히 달린다. 진흙과 모래 사이로 힘겹게 굴러가는 바퀴에 달라붙는 흙. 바로 옆에 있는 표지판을 본다. 도로 왼쪽으로 우거졌던 수풀은 점차 높이가 낮아지더니 이내 수풀 자리에는 하늘인지 바다인지 모를 푸른 물감이 채워졌다. 모래의 양이 너무 많아져 자전거로 더는 달릴 수 없는 지점까지 오자,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모래 위에 찍힌 무수한 발자국은 하나같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
너덜너덜해진 샌들 사이사이로 뜨거운 모래가 들어와 발가락 사이에 달라붙는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모래 깊숙이 빠지는 발에서 그동안 잊고지냈던 뜨거움이 느껴진다. 이대로 올해의 여름을 끝낸 것이 못내 아쉬운 나에게 아직은 올해의 여름이 남아있다고 시월 말의 스페인이 말하고 있다.
투박한 모습의 해변. 입구에 하나 있는 하얀 건물의 카페 겸 레스토랑은 한동안 영업을 하지 않은 모습이다. 창을 닫은 레스토랑 내부에 있는 하얀색의 테이블과 의자는 결점 없이 깨끗하다. 태양 빛에 카페 내부에 떠다니는 먼지들을 살펴본다. 카페 외부 좌석에 있는 테이블과 의자 위에 쌓인 모래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듯 보인다.
넓은 백사장에 아주 적은 수의 사람만이 각자의 자리를 잡고 아침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정오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다. 갈매기도 잘 보이지 않는 이곳은 오로지 사람과 파도가 있고 그사이의 공백을 햇살이 순수하게 메우고 있다. 수건을 깔고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돌멩이로 고정을 했다. 바지와 티셔츠를 벗었다. 급하지 않아도 되지만, 저절로 급해진 손놀림으로 빠르게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누웠다. 자세를 잡고 일광욕을 시작하는 이 순간, 이내 햇살로 뜨거워진 피부 속으로 대지와 대기 그리고 태양이 주는 아주 강렬한 위로가 가슴 깊숙이 들어온다.
성숙하지 못한 이 육신과 정신이 뜨거운 위로로 인해 조금 더 성숙해지길 바라는 마음, 연약한 어깨에 여름의 흔적을 짙게 남겨두려는 바램을 담은 나의 가슴의 호흡은 길고 가볍다. 여름의 열기를 육신 구석구석으로 전달하겠다는 확신에 찬 숨쉬기. 동행이 없는 나의 여정은 늘 그렇듯 꾹 다문 입술의 침묵 사이로 파도 소리와 가끔 들려오는 이방인들의 대화로 채워지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의 대화와 파도 소리를 듣다가 뜬금없이 오래전에 만났던 한 사람이 생각이 났다. 왜 그 사람 생각이 나는 걸까. 하필 여기, 발렌시아의 한적한 해변에서.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었다. 길을 되돌아가는 건 결국 수많은 걸음 중 다만 한 걸음을 되돌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오늘 너무 고민하지 말라는 얘기. 한 걸음만 되돌리면 다시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또 어느 순간이 되면 선택이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더라는 그 사람. 어떤 인생 안에 있든 그게 결국 나니까,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선택은 별것 아닌 게 되더군요, 라고 말했던 그 사람.
정말로 그렇게 말처럼 쉬울까. 한 걸음을 되돌리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 그 한 걸음으로 인해 되돌릴 수 없는 곳까지 와버렸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파도 소리가 귀에 닿았다. 서늘한 온도가 목덜미에 닿는다. 나는 내가 걸어왔던 길을 다시 돌아보았다. 다시 걸어보았다. 그 길에 있던 꽃과 나무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물웅덩이가 곳곳에 패어 있다. 가시가 돋친 식물이 곳곳에 있다. 이토록 험난하고 힘든 여정을 걸어올 수밖에 없었던 시간.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다시 돌아갈 길을 굽어본다. 길을 잃은 나. 수많은 나무와 풀이 내뿜는 안개와 창백한 초록의 숲에서 무언가 비 생명적인 것을 발견한다. 어떤 인생 안에 있든 그게 결국 나여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내가 나로서 살아간다는 생각, 어떤 길을 가더라도,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결국엔 내가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생각. 물과 진흙에 젖은 신발을 쳐다보았다. 비가 내린다.
그런 말을 해준 사람과는 이별이 좋지 못했다. 서로에게 더는 해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마지막.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던 마지막 만남에서 우리 둘은 말이 없었다. 그렇게 춘천에서 서울로 오는 두 시간은 몹시 아픈 기억으로, 쓰라린 시간으로 남아 일 년에 한두 번씩 생각나 나를 괴롭히곤 한다.
그렇게 과거의 아픈 페이지를 머릿속에서 꺼내서 읽어내고 있는 사이에 커플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해변으로 들어선다. 들어오자마자 신나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안고 서로의 손은 꽃 주위를 맴도는 나비와도 같이 서로의 몸을 만지며 날갯짓을 한다. 해는 중천에 떠 있다. 해변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발을 향하는 남녀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에 묻힌다. 내 눈 옆으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호스텔에 그 한국인 직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답을 한다. 나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