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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핼로군 Sep 27. 2023

면사무소에서 걸려온 전화 - 의식없는 환자 이후

초보의사일지

의식이 없는 환자를 이송한 뒤에, 면사무소에 보낼 의료일지를 작성하고 잤다. 다음날 전화를 받았다.

"여기 면사무소인데요 질문 좀 할게요. 여기 'GCS score' 라고 적혀 있는데 이게 뭐예요? 

GCS score는 Eye opening, Versal Response, Motor response 등으로 나눠져 의식이 없는 환자의 의식 상태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이것에 대한 내용을 면사무소 직원이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설명해주었다. 

"그럼 이 N/S 는 뭐에요?"

N/S 은 normal saline의 약자로 생리식염수이다. 수액 라인을 잡고 수액 투여를 했기 때문에, 당연히 써놔야 하는 것이라 써 놓았다. 

"어제 배로 나갔나요?"


이런 전화를 받는데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의사는 환자의 비밀을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내가 블로그를 쓸 때도 내가 어느 섬에 있었는지 심지어 전라남도 중 어느 시군구에 있는지도 표시하지 않는 것이고 환자를 나타낼 수 있는 어떤 표현도 쓰지 않는 것인데, 면사무소 직원이 전화 와서 의료적 행위에 대해 질문하고, 나의 기록에 대해 계속 물어보는 것이 싫었다. 


"어제 배로 나갔고요, 왜 이렇게 물어보세요?"라는 질문에 "저희도 알아야죠. 이런 식으로 써놓으면 어떻게 알겠어요."라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솔직히 의료 기록을 남기는 것도 원래는 불법적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거기서 보건지소가 면사무소의 하위기관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렇게 갑질을 하는 것이 싫었다. "저는 환자에 대해 의료진만 알아볼 수 있게 의료기록을 남길 것입니다. 아실 필요 없어요. 대략적인 내용은 써놓잖아요"라고 하고 끊었다. 


섬의 응급진료체계는 엉망이다.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혼자서 응급진료를 책임지는데, 내가 블로그에 아무렇지 않게 써놨지만, 서로 칼부림을 해서 오는 환자부터, 집이 다 타서 화상 입어 오는 환자, 이렇게 자살 시도하는 환자 등 많은 지소에서 볼 수 없는 응급환자들이 온다. 이런 경우에 신고도 의사가 하고 닥터헬기/ 해경을 부르는 것도 다 의사가 해야 한다.

즉 의사가 해야 하는 일이

1. 육지 119에 전화해서 응급후송 수단 마련

2. 환자에 대한 응급처치

3. 배를 타면 해경이 섬 인근 해안까지만 오기 때문에 해경선까지 갈 배 구하기

4. 면사무소에 전화해서 앰뷸런스 요청하기

5. 면사무소에 보낼 응급일지 작성하기 


이 모든 일을 '의사 혼자서' 해내야 한다. 할 때마다 전화만 10통 넘게 하고, 그동안 환자와 보호자는 방치되어 보호자의 불만이 많다. 의사라는 이유만으로 이 모든 일을 도움 없이 해야 하는 게 힘든데, 제일 중요하지 않은 면사무소 응급일지마저 면사무소의 일개 직원까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풀어서 작성해달라니.. 이해가 안 된다. 환자의 비밀을 지켜주려는 의사의 노력마저 무시하고 불법적인 일을 종용하는 우리나라 공무원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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