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감정 컨트롤이 안된다면
연극영화학과 학부 시절 연출 전공이던 나를 연기의 길로 인도하셨던 교수님의 책 이름은 '배우,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백세개의 모노로그' 였다. 기초 연기 수업에서 그 책을 보며 독백을 익힐 때 나는 그 부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유로운 인간이라는게 뭘까? 무슨 날개를 달아주는 걸까?' 마치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했던 것 같다.
나는 연기에 대해 정말 아무 것 도 모른채 그저 내가 연출하면서 답답했던 연기자들 보다는 잘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연기에 임했던 것 같다. 읽으면 되는 것, 정말 쉬워보였다. 하지만 막상 연기를 시작하면서 나 역시 그들과 다를바 없다는 것을 알게됐다.
내가 그들과 같았던 점은 바로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갇혀 있다라는 것은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들어왔던 내 자아와 사회적 시선,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들 이데아 등 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는 것이다.
내가 연출을 하면서 배우들에게 불만이었던 점은 디렉팅시에 배우들이 확확 변하지 못하고 아주 미세하게 변한다는 점 이었다. 정도가 1부터 100까지 있을때 100으로 바뀌길 원하는데 디렉팅 이전에 비해 1, 2 정도 변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배우들 스스로는 정말 대단히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3의 벽 바깥에서 보고 있는 관객 겸 연출인 나는 그 점이 너무 답답했다. 그걸 알면서도 내가 그러고 있다니... 정말이지 연기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첫 독백은 제일 짧은 독백으로 외우기 편할 것 같아서 골랐는데 화를 엄청 내는 독백이었다. 짧아서 고른건데 정말 어려웠다. 사실 나는 그동안 살면서 화를 제대로 내본적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큰소리조차 낸 적 없었다. 회피형이었던 나는 화가 나면 말없이 조용히 혼자 삭히기 바빴고, 누군가가 화나게 하는 상황이 오면 그냥 아무일 없다는 듯 마음을 흘려버리거나, 화나는 일이 아닐거라고 생각하고 웃어 넘겼다. 그런 나에게 큰소리로 화를 내라니... 내가 원래 화를 안내는 사람이라고 해서 있는 대사를 안 읽을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이 화내는 모습을 떠올리고 흉내내서 연기 하였지만 그것은 화내는 연기가 아니었다. 애초에 진짜 화가 나지 않았고, 그냥 텅 빈 껍데기 같은 연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를 내고 화내는 척만으로도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그동안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삶, 그것만이 정답은 아닐 수 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묵혀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연기생활을 이어가면서 내 마음과 감정의 트리거를 정확하게 짚는 방법을 알게 되었을때, 내 인생은 확실하게 더 자유로워 졌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화가 나는 상황에 맞닥뜨렸을때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조용히 넘어갈 수 도 , 필요 할때는 화를 낼 수 도 있게 되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하나 더 얻게 된 것이다. 이 것은 엄청난 것을 의미했다. 그동안의 인생에서 어쩌면 당연한 알고리즘이라 생각했던 표현이 내 주도적인 선택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러한 작은 점들이 모여 인생의 여러 상황에서 나는 내 감정에 대해 더 정확히 파악하고, 주도적으로 감정 표현을 컨트롤 할 수 있게 되었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에서 처럼 내 안에 다양한 감정이 생길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느낌을 무시하지 않고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고, 그것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표현할 지 이다. 어떤 사람들은 화가 나면 그것을 표출하지 않으면 해결 되지 않는 경우(분노조절 장애)도 있고, 응당 화를 내야하는 상황에서 꾹 참고 속으로 곪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감정과 표현은 당연하게 하나의 원인과 결과로 연결 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선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배우기 어렵지만, 연기를 통해 연습하고 배울 수 있다. 연기라는 것은 내 마음을 속이고 가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내 삶의 방향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틀을 깨고 나오면 훨씬 자유로워지고 얽매이지 않는다. 배우들에게 느껴지는 아우라는 어찌보면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느껴지는 자유로움에서 기반 한 것이다.
이 사실만 알고 있으면 표현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고, 감정 또한 수동적이기 때문에 내가 어찌 할 수 없고 지나간다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 이다. 화남,슬픔,즐거움 등 다양한 감정들을 피할 순 없다. 그것은 우리가 수동적으로 맞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동적인 감정은 또한 지나간다. 지나가고 사라진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느낀 첫번째 감정에 사로잡혀 연기는 커녕 일상을 지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