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

민둥산.

by NOMAD J

"올라가면 막걸리를 한 잔씩 팔아. 그 한 잔이 얼마나 단지. 가을이 되면 꼭 한번 가볼만 해."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같이 가보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마치 아껴둔 자기만의 비밀장소인 양 꽁꽁 숨겨두고서.

굳이 같이 가 달라고 보채지도 않았다. 나로 말하자면 정말로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혼자라도 하는 사람인걸. 그리하여 꼭 가고 싶다면 한라산도 지리산도 설악산도 그냥 혼자 잘만 다녀오는 사람인 걸. 그깟게 뭐라고.


민둥산.

가을이 되면 억새풀 군락이 장관을 이룬다는 곳. 돌리네 라고 하는 신기한 지형이 있다는 곳.

꼭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왠지 자꾸만 그 기회를 미루게 되던 곳.

그 산은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 이름만으로도 괜히 서운한 감정이 드는 곳.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다. 말하자면 현실 도피로서의 여행을 좋아한다. 일단 채비를 하고 떠나면, 내 생활 근거지에서 감당해내던 것들로부터 조금이나마 동떨어진 느낌이 든다. 또한, '나는 지금 여행중이니까~'라는 허울 좋은 핑계도 생기지 않는가.


나의 여행은 일종의 "부유(浮遊)적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잠시나마 나를 둘러싼 온갖 약속과 속박을 벗어나 이방인으로서 잠시 존재하다가 없어지는 뭐 그런.


11월.

가을이 끝나가고 있다.

그렇게도 좋다던 그 산에 가볼 마음이 생겼다.



보편적 사회인으로 기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최소한의 효도이자, 또한 나의 미래를 위한 역시 최소한의 장치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뇌를 빼 놓고 몸만 왔다갔다 하고 있는 회사는 최근 들어 점점 더 거지 같다. 좀 더 고급스러운 어휘를 쓰고 싶은데, 나의 표현이 점점 더 상스러워지고 있다. "진짜 개짜친다!"

회사 메신져로 갖가지 육두문자를 날렸더니, 직장동료(엄밀히는 후배)가 화들짝 놀란 모양이었다. 힐링이 필요한 시점이 아니냐는 것이다.

- 힐링이고 나발이고 일단... 민둥산이라는 데를 좀 가보고 싶은데, 이게 또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네.

- 민둥산이요? 거기 가 보고 싶어서 지도에 별표를 쳐 두었던 곳이에요. 같이 가실까요? 누군가 같이 하면 또 마음이 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함께 등산이라는 운동을 곁들인 소위 '여행'이라는 것을 떠나본다.

다음주부터 한파가 찾아올거라는 호들갑스러운 뉴스 일기예보가 믿기지 않으리만치 좋은 날이었다. 하늘은 푸르렇고 햇살은 따스했으며 바람은 적절히 시원했다. '집에 가고 싶다.', '아 졸려.', '진짜 재미없다.','저사람 왜저래? 미친 거 아님?' 같은 말들만 서로 주고 받던 동료와 나는

- 와~ 오늘은 날씨가 다 하네요. 너무 좋아요.

- 갈대가 절정은 지난 상태라고 하는데도 너무 예쁘네~ 시야도 탁 트였어.

- 저 너무 힐링돼요. 여기 여름에도 와 보고 싶어요.

오늘은 세상 이렇게 긍정적인 사람들일 수가 없다.


단체로 오신 중장년의 친구분들은 올라가는 동안 패가 갈리신 모양이었다. 어떤 분은 올라가자고 재촉을 하시고 어떤 분은 그냥 여기서 놀자~하고 애교를 부리신다. 결국 한 무리는 중턱에 자리를 깔고 막걸리 파티를 시작하시는데 그 또한 귀여워보이기까지 한다. 그래 뭐 산에 와서 꼭 정상을 봐야 하나. 내 능력껏 오르고 또 마음껏 즐기면 그게 여행이지.


돌리네.

석회암이 빗물과 만나 녹아서 생기는 현상이라는데, 이를테면 싱크홀에 물이 찬 거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나무가 없어 민둥민둥한 산에 억새풀이니 잡초들 사이에 동그랗게, 그것도 아주 엄청 동그랗게 자리잡은 웅덩이가 신비롭다. 정상에서 충분히 보이지만 그래도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약간의 하산을 감행하여 웅덩이 앞 억새풀 사이에 잠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요하다. 수많은 등산객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 같은 것들이 이상하게도 돌리네 앞에 가 있으니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내 삶도, 내 마음도 늘 이렇게 평화롭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한 평화를 즐길 줄 아는 인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매번 이런 저런 일에 분노하거나 격앙되었다가, 모든 일이 안정되고나면 또 심심하다며 자극이 없는 삶이라며 떼를 쓰지 않는가.

나는 얼마나 미성숙한 인간인가. 잠깐의 반성.


좋았다.

날씨도 풍경도 음식도, 같이 간 사람도.

그리고 특정한 방향 없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나의 의식의 흐름을 지켜볼 수 있었던 그 시간도.



2025.11.

민둥산, 강원도 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