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알려주세요.
모든 회사는 그 무엇이라도 크고 작은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 쯤은 알고 있다. 그래도 이런 식의 불쾌함이 찾아올 줄은 차마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다.
"옷이 예쁘네."
회의실 공간을 비워주고 또 들어오는 그 찰나 스치듯이 지나면서 그가 말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제 딴에는 칭찬이랍시고 한 말일 것이다.
"허허" 대답이라고 할 수 없는 이상한 리액션이 나온다.
속으로는 쌍욕이 나온다. 미친 ㅅㄲ.
저 ㅅㄲ가 잡은 회식이 내일 모레다. 가기 싫다. 내가 그간 어떻게 피해왔는데. 위경련이 나는 것만 같다.
회식자리.
자꾸 술을 강요한다. 그나마 맨 정신일 땐 내가 "저 천천히 마실게요." 혹은 "저 약 먹는게 있어서 오늘 술 못 먹습니다."라는 것으로 어느 정도 회피가 가능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불가능해진다. 더욱이 지난 몇개월간 회피해 왔기 때문에 이번에 적당히 시늉을 하고 있는데 한 시간 정도가 지나고 조금 취기가 오르자 시작된다.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혼자서만 계속 늘어놓다가 급기야
"너 요즘은 왜 전처럼 그런 재기발랄한 모습이 없어졌냐~? 재미 없어졌어. 피부도 푸석하고 말이야. 무슨 일 있냐~? 아버지 돌아가셔서 그런가 했는데 그것도 아닌거 같아."
"네? 아~ 뭐 요즘 잠을 아주 편하게는 못자서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것 같아요."
"잠을 왜 못자는데? 이유가 있을거 아니야."
"원인를 정확히 알면 그걸 제거하면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어요."
"이유가 있을텐데~ 남자 생겼구나~?"
"네? 제가 남자가 생겼다는 말을 1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그냥 느낌에~ 흐흐. 다른 이유가 없잖아."
"제 남자 유무에 대해서는 안 궁금해하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부부생활도 하고 사는데 그런게 없어서 우울한가?"
더 이상 대꾸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다.
인상을 구기고 자리를 겨우겨우 이어가고 있는데 바로 상급자는 슬쩍 나에게 "너무 또 그러지 마~"라고 한다. 위로랍시고 하는걸까? 분위기 대충 맞추라는 무언의 압박인가?
한 두번이었다면 그냥 별 상스러운 인간이 다있네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간 몇 번의 신체적 접촉, 또 몇 번의 언어적 성희롱 그것들에 대해 상급자에게 보고를 했고, 조심하라는 조언이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때마다 '내가 뭘 잘못했냐.' '내가 진급이니 연봉이니 잘 챙겨주고 있는데 그 정도로 기분나쁘다는 거냐.'는 반응이 돌아왔었다.
한번 당한 일은 두 번은 안 당하겠단 생각으로 상급자와 동료들에게 회식을 마치고 집에 갈 땐 나를 보내고 난 다음에 가달라고 부탁하고, 부적절한 스킨십이 있으려고 할 땐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예정된 부서 회식이 아니라면 갑자기 생기는 소규모의 그가 참석하는 술자리는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회사에서조차 가급적 마주치지 않으려고 타이밍 맞춰서 계산하면서 움직이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직접 보고를 해야할 땐 누구하나 꼭 껴서 같이하려고 하고 있다. 내게는 쓰레기 하나를 어찌할 힘이 없기에 나 혼자 부단히 애를 써서 피할 밖에 도리가 있겠는가.
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느냐고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도 겪어보기 전엔 그랬다.(심지어 과거에 나는 간혹 이런 문제에 대해서 교육을 진행하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쉬운 일이 아닌게 문제가 아니라 아주 지난한 싸움이며, 진실 공방을 전제한 아주 지독한 감정 소모의 과정이다. 다른 참을만한 것이 있는 상황이라면 최대한 그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서 회피하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냥 내가 원인을 제거해버리거나. 이직이나 퇴사도 그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좀 독기가 드는 것이다. 이직이나 퇴사를 그냥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어떤 방식으로든 이 자가 이런 큰 리스크를 가진 자 라는것을 회사에 알리고 싶다. 증거나 근거는 차고 넘친다. 나한테 유독 심한 것이지 나한테만 그런 것은 또 아니므로.
아직 모른다. 내가 어떤 결정을 할 지 무엇을 감수할 수 있을지.
그저 한 한동안 이 회사에서 뭉개는 동안에는 어떤 식으로는 선 넘는 무례함에 대처할 수 있어야하는데, 막상 당할 때가 되면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 뭔가 똑부러지게 말을 할 수가 없다. 이쁘다는데 내가 뭐라 하겠는가. 하 참.
지난 주 더러웠던 회식 기억이 주말내내 잊혀졌다가(다행히) 출근을 위해 지하철 플랫폼에 딱 서는 순간 내 존재가 상당히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밥벌이를 위해 또는 가족이나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어느 정도 수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게다가 종종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일단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다녀야한다는 것이, 다음 스텝을 마련하기 전까진 이 상황을 견뎌야한다는 것이 숨 막힌다.
(물론 나란 인간, 한계에 다다르면 앞뒤 보지 않고 저질러버리는 성격이긴 하니 아직 견딜만 해서 견디는 것일 수도.)
정리되지 않은 분노와 더더욱 정리되지 않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 그리고 현실 안주 사이에서의 방황.
울화가 치밀었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