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못할 거같으면 확실하게 못한다고 말해야한다.
일단 내과 의사로써 함정군의관으로 임관하는데 얼마나 바늘 구멍 같은 확률인지 말부터 해야 할 거 같다. 이제부터 말할 이야기는 내가 ‘내과’ 군의관이어서이기 때문이라는 변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레지던트 4년 차를 마치게 되면 대한민국의 모든 남자가 그렇듯 의사도 군대를 가야 한다. 국시를 치르고 얼마 되지 않은 추운 겨울이었는데 30대 중반의 나이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괴산의 장교 훈련소로 향했다. 장교훈련은 3개월이다.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고 생각할 기간에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뭔가 막막한 기분이었다.
괴산 훈련소에는 전국의 다양한 전문과 의사들이 한방에 보인다. 그리고 해군, 육군, 공군으로 방을 분류하고 한 방당 10명도 같이 사용하게 되는데, 내 바로 옆자리는 응급의학과 선생님이었다.
“난 해군 응급의학과여서 함정에 배치되겠지. 함정에 배치되면 퇴근도 못 하고 1년 내내 가족과 또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우울하다. 넌 좋겠다. 해군 내과 중에서는 딱 한 명 배타잖아. 네가 되진 않겠지.”
말이 씨가 되었을까?
난 그때 내 앞에 닥쳐올 불행을 인지하지 못하고 밤마다 해군 응급의학과 군의관을 위로했다. 1년 차 군의관이 가장 선망하는 것은 군 병원에 배치되는 것이다. 군 병원에 있으면 그래도 의사다운 일을 할 수 있고, 퇴근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대부분 의사가 수도권이 연고지를 두고 있어서 수도에 있는 군 병원이 1순위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해군에서 단 한 명 된다는 함정군의관으로 1년간 복무하게 된다. (내가 위로해줬던 그 응급의학과 군의관은 육상부대로 발령 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함정군의관을 이용하여 생활하는 건 좋은 추억이었다. 아마 30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한다. 고요한 동해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무수히 많은 별이 보인다. 도시에서는 보지 못했던 별들. 그 별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센티 해진다. 그때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의무병이나 또래 장교와 진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연애 상담, 진로 상담 등이었다. 그중에 몇몇은 지금도 간간이 연락하고 지낸다. 뜬금없이 잘 지내냐고 전화가 올 때도 있고 생일 축하한다고 문자도 온다. 군인들은 참 정이 많다.
함정군의관으로서 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날들이었다. 새벽에 자고 있는데 의무병이 급히 나를 깨웠다.
“군의관! 지금 큰일이 났습니다. x 하사님이 손을 크게 베이셨습니다.”
나는 헐레벌떡 진료실로 향했고 거기에는 x 하사가 수건으로 손을 붙잡고 있었다. 손에 있던 수건은 피로 흥건했다. 조심스럽게 수건을 치우니 손바닥 정중앙에 8cm 정도 되는 큰 상처가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거예요?”
“철제 옷걸이를 재활용하려다가 커터칼에 손을 베었습니다”
피가 많이 났다. 순간 멍해졌다. 내가 봉합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근처에 있는 군 병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돌리든지 아니면 헬기를 띄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해 한가운데서 배를 돌려서 전속력으로 가든, 헬기를 타든 12시간 이상은 걸릴 거 같았고 그동안 손바닥의 상처는 방치될 것이다.
물로 잘 씻어 상처를 자세히 보았다. 상처는 꽤 깊었지만, 상처는 깨끗해 보였고 다행히 손가락 힘줄은 건들이지 않은 듯 보였다. 하사에게 손가락을 움직여보라고 지시하였다. 잘 움직이고 감각도 괜찮았다. 운이 좋은 건지 하사는 비만한 체형이어서 손바닥에 지방층이 두꺼웠다. 커터칼이 지방층만을 훑은 것으로 보였다.
“제가 보기에는 손가락 힘줄은 괜찮아 보이고 다행히 잘 봉합하면 큰 상처는 남겠지만, 손가락을 굽히고 핀다는 문제 없어 보여요. 배를 돌리고가는 도중에 상처로 균이 들어갈 수도 있고, 상처가 더 커질 가능성도 있어요. 여기서 제가 한번 해볼게요.”
x 하사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알겠다고 하였다. 사실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객기인지 아니면 정말 의학적 판단이었는지. 한땀 한땀 봉합을 했다. 1시간 정도 봉합을 했다. 한고비는 넘겼다고 생각했고 이후 소독을 해야 하니 다시오라고 설명해줬다. 몇 시간 뒤 x 하사가 진료실을 왔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군의관님, 저… 손바닥에 감각이 없습니다.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온갖 생각이다 들었다.
‘아직 장가도 안 간 어린 하사인데…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손가락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건가… 어쩌나… 이를 어쩌나…’
일단 손가락의 허혈을 의심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끝까지 따뜻했고, 움직이는 것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하아.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일단 기다려볼게요. 손가락 봉합된 부분은 다행히 염증 사인은 없어 보이고, 깨끗해 보입니다. 마취약을 많이 써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까 기다려볼게요.”
의사가 가장 무서운 순간은 자신이 처음 겪어보는 상황을 겪는 것이다. 경험 많은 외과 의사나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은 의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시 나는 바다 한가운데 물어볼 사람도 없고 의사라고는 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사를 병실에 눕혀놓고 멍하니 모니터만 보았다. 그때 친했던 의무병 아이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군의관님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군의관님은 최선을 다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눈물이 왈칵 났다. 내과 의사 주제에 뭐라고 그 큰 상처를 봉합한다고 설쳐댔는지 자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10살 아래 의무병이었지만, 그때 그 상황에서 내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었다. 서둘러 눈물을 닦긴 했지만, 하사에게 미안한 마음과 환자에게 해를 끼쳤다는 자책감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2시간쯤 지났을까 하사는 손바닥 감각이 돌아온다고 했다. 마취약이 문제였던 거 같다. 꼼꼼히 마취한다고 국소 마취제를 많이 사용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때 1년치 운을 다 쓴 느낌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은 선명하다.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경계와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는 모호하기만 하다. 의사의 영웅심은 환자에게 정말 해롭다.
때론 못할 거같으면 확실하게 못한다고 말해한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큰 수업이었다.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던 그 의무병 아이는 벌써 27살이다. 여자 친구가 서울에 간호사로 취직했다고 형 보러 오겠다고 한다. (지금은 형·동생 하는 사이이다) 그래놓고 아직도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여자 친구랑 노느라 정신이 없나보다.
다시 생각해 보니 모든 게 고맙다.
그때 나를 지지해 줬던 의무병, 나를 믿고 손바닥을 건네줬던 x 하사.
잘 버텨 줬던 32살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