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안 마시면 착해요

착하다는 말의 이면

by 키튼

응급실 당직을 서다 보면 유독 자주 마주치는 얼굴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간경화로 복수가 차오른 환자들은 거의 단골손님에 가깝다. 불룩하게 부푼 배를 안고 힘겹게 응급실 문을 들어서는 그들의 목적은 늘 하나다. 복수를 빼는 것. 처치가 끝나면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돌아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물이 차오르면 또다시 이곳을 찾는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싸움이 아니라, 끝없이 차오르는 독을 그저 비워내며 버티는 싸움 같다.


내가 수련을 받았던 곳은 천안의 한 병원이었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드넓은 농촌 지역이 펼쳐지는 곳이라, 응급실에는 정겨운 사투리와 고된 농사일의 흔적을 가진 환자들이 자주 찾아왔다. 그날 기억에 남은 환자 역시 그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 같은 분이었다. 잊을 만하면 찾아와 묵묵히 복수를 빼고 가던 남자. 그리고 그의 곁에는 늘 그림자처럼 그를 보필하는 외국인 아내가 있었다.

타국에서의 삶도 고달플 텐데 남편의 병수발까지 묵묵히 해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의사로서 안쓰러운 마음과 동시에 참 대견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저토록 지극정성이니 남편도 금방 기운을 차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응급실에 들어선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늘 남편만 살피던 그녀의 눈가와 뺨이 시퍼렇게 멍들어 퉁퉁 부어 있었기 때문이다. 명백한 폭력의 흔적이었다. 의사의 오지랖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망설였지만,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어 조심스레 어디서 다치셨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매번 복수를 빼러 오는, 바로 그 남편에게 맞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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