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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파우스트’는
텍스트로 읽어내야 한다

영상과 이미지 시대, 왜 우리는 아직도 종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괴테의 파우스트는 텍스트로 읽어내야 한다

영상과 이미지 시대왜 우리는 아직도 종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깊이 읽지 않으니 기피 대상이 된다


"내 아이들에게 당연히 컴퓨터를 사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책을 사줄 것이다.” 빌 게이츠가 남긴 명언이다. 컴퓨터보다 책이 아이의 사고력 신장에 도움을 준다는 가정에서 나온 말이다. 이제 컴퓨터와 책아 맞서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스마트폰과 책이 맞서다 책이 완패당하는 현실이다. 책을 읽고 일으키는 독서혁명보다 컴퓨터나 스마트 폰이 이끄는 기술혁명이 더 중요하다. 기술혁명을 이끄는 원동력은 사고 혁명일진대 사고방식이 혁명은 뒷전으로 밀리고 기술혁명, 특히 4차 산업혁명이라는 유령이 영혼을 뒤흔들며 헤집고 다닌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사고 혁명을 낳는 원동력은 독서혁명에서 시작되고, 독서혁명은 문해력(文解力)을 혁명적으로 향상하는 진원지다. 문해력은 문자의 의미를 해독하는 능력을 넘어선다. 문해력은 문맥 안에서 문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해석할 수 있는 힘이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국내 만 18세 이상 성인 4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7년 성인 문해 능력 조사'에 따르면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하기가 불가능한 단계(수준1)은 7.2%,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하기는 가능하지만 일상생활에 활용이 미흡한 단계(수준2)는 5.1%, 가정 및 여가생활 등 단순한 일상생활에 활용은 가능하지만 공공 및 경제생활 등 복잡한 일상생활에 활용이 미흡한 단계(수준3)는 10.%로 조사되었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충분한 문해 능력을 갖춘 수준(수준 4)은 나머지 77.6%로 나타났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국민의 약 35%가 중학교 이하의 문자 이해 능력 수준임을 지칭한다. 글자는 읽어도 단어의 의미를 모르거나 단어는 알아도 문장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글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힘이 떨어지니 당연히 깊이 사고할 수 있는 힘은 더욱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다. “인쇄된 책을 읽는 행위는 독자들이 저자의 글에서 지식을 얻기 때문만이 아니라 책 속의 글들이 독자의 사고 영역에서 동요를 일으키기 때문에 유익하다. 오랜 시간, 집중해서 읽는 독서가 열어준 조용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연관성을 생각하고, 자신만의 유추와 논리를 끌어내고, 고유한 생각을 키운다. 깊이 읽을수록 깊이 생각한다”(101쪽).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미디어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며 읽는 일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너무나 많은 방해꾼이 곳곳에 숨어서 독자를 괴롭힌다.



깊이 읽지 않으니까, 아니 깊이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면서 국어 실력도 덩달아서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국어실력이 떨어지면 언어 해독 능력이 현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국어가 외국어보다 더 어려워지는 아이러니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너무 어려서부터 국어보다 외국어 눙력 배양에 노력일 기울인다. 외국어 구사 능력은 자국의 언어구사 능력이 좌우한다. 모국어를 적절히 구사하지 못한다면 외국어는 자연히 구사하지 못한다. “인간의 의식 밑바닥으로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는 언어는 그 인간의 모국어다. 외국어는 컴퓨터 언어와 같다. 번역 과정을 거칠 때의 논리적 정확성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낭비를 용납하지 않는 그 경제적 측면에서도 그렇다. 지식과 의식의 깊이를 연결시키는 노력은 낭비에 해당하며, 그 낭비에 의해서만 지식은 인간을 발전시킨다. 


외국어로는 아는 것만 말할 수 있지만 모국어로는 알지 못하는 것도 말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말은 도구적 기호에 그치지 않는다(144쪽).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 나오는 말이다. 모국어를 외면할수록 의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무엇을 진정 욕망하는지를 저자는 그 방법을 찾아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분투노력(奮鬪努力)한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던져진 사람일수록 절박한 심정으로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 문제는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를 위기로 의식하지 못할 때 언어는 현상에 정상적으로 머문다. 언어가 현실에 안주하는 순간 인간의 생각도 아니 두 발로 걷는 삶에서조차 지금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틀에 박힌 삶에 정착한다. 모국어의 위기는 곧 삶의 위기다. 왜냐하면 사고의 위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 



동아일보는 20여 명의 현장 교사와 학생, 교수 등 전문가, 사교육계 관계자를 심층 인터뷰해 ‘모국어’가 ‘모르는 국어’가 돼 버린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자기 생각 써보세요” 연필 못 떼는 아이들“의 실상을 집중 보도했다. “국어에서 외울 게 왜 이렇게 많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암기 과목 같아요. 어떨 땐 지문이 짧은데도 잘 안 읽혀요”(고1 신모 군). 어려운 어휘가 들어 있거나 긴 지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문이 요구하는 답을 이해하지 못해서 답을 쓰지 못하는 학생들의 국어실력의 한 단면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학생들의 국어 역량은 국제 평가에서도 그 추락세가 심각하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는 3년 주기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 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에서 2006년 이후 읽기 점수가 계속해서 떨어지는 모양새다. 특히 가장 최근인 2015년 평가에서 상위 수준 학생은 14.2%에서 12.7%로 줄어든 반면에 하위 수준 학생은 7.6%에서 13.6%로 두 배 가까이로 급증해 충격을 줬다. 아이들의 문해 능력 하락 추세는 앞으로도 더욱 가속화될 움직임이다.


 김경회 성신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현재 우리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 학력은 역대 최저 수준이고 동아시아 국가 중 꼴찌”라며 “10년 넘게 하향화하고 있는데도 교육 당국이 원인을 분석할 생각조차 없으니 큰일”이라고 개탄했다. “영어 공부보다 더 낯설어요”… ‘모르는 국어’가 돼버린 모국어“라는 동아일보 기사는 국어실력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추세가 가속화되면서 국어도 학원 가서 배우는 과목’이 되었다. 사교육 1번지인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는 ‘옛날엔 수학이었다면 요즘은 국어 학원 설명회가 가장 빨리 마감된다’는 말이 이런 사실을 입증한다. 이 기사에 따르면 국어를 가르치는 현장 교사들 사이에서는 “요즘 학생들이 글은 읽을 줄 알지만 그 안의 생각을 이해하고 소통은 못 하는 ‘문맹’이 됐다”란 말이 나온다. 


검색 기술은 발전하지만 사색능력은 뒤떨어진다

     

“작가들은 새로운 통사와 어휘에 도전했고, 새로운 생각과 상상의 길을 열었다. 독자들은 열심히 이 길을 따라 여행했고, 유려하고 정교하고 기발한 산문과 시를 읽는 데 익숙해졌다. 책 속의 단어들은 추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만 강화시킨 것이 아니라 책 밖에 있는 물리적 세상에 대한 경험을 풍부하게 했다”(114-115쪽). 니콜라스 카의 같은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사유체계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갈 수 있는 길목을 방해하는 장본인이 도처에서 기회를 엿본다. 바로 책 읽는 재미를 빼앗아가는 인터넷 기반 각종  이미지나 영상은 물론 반짝이는 뉴스가 여기에 해당된다. “인터넷이 주는 자극의 불협화음은 의식적, 무의식적 사고 모두에 합선을 일으켜 깊고 창의적 사고를 방해한다. 뇌는 단순한 신호를 처리하는 단위들로 바뀌고, 정보를 잠시 의식 속으로 안내했다가 다시 내 보낸다”(179쪽). 


후두엽으로 들어온 정보를 비교하고 분석해서 그 의미를 해석하려면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정보를 전두엽으로 보내기 전에 후두엽으로 또 들어온다. 너무 많은 정보가 뇌로 입력되지만 그걸 해석하고 의미를 반추할 시간은 없다. 머리가 뜨거워지고 심장은 뛴다. “웹 페이지를 살펴보는 데 시간을 보내느라 책 읽을 시간이 사라졌듯이, 작은 글자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간 때문에 문장과 절을 지어내는  데 투자하는 시간이 사라졌듯이, 링크들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보내는 시간이 조용한 명상과 사색의 시간을 몰아냈듯이 오래된 지적 기능과 활동에 사용되던 회로들은 약해지고 해체되기 시작했다. 뇌는 사용하지 않는 뉴런과 시냅스를 더욱 긴급한 다른 업무 수행을 위해 재활용한다. 우리는 새로운 시각과 기술을 얻었지만 오래된 것은 잃어버렸다”(180쪽). 니콜라스 카는 결국 인터넷 기술이 정보검색과 처리 속도는 높였지만 깊은 사색으로 지식을 창조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검색 기술은 날로 발전하지만 사색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뒤떨어진다.


덴마크 출신 전산학자인 제이컵 닐슨 박사는 디지털 읽기의 특징을 'F자형 읽기'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쇄된 종이 대신 디지털 매체를 읽으면 문서를 재빨리 훑는 스캐닝(Scanning)을 한다"면서 인터넷 사용자 232명의 시선을 추적한 실험을 했다. 디지털 화면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카메라로 따라가 보니 10초 이하의 시간 안에 페이지 아래까지 재빨리 훑기 위해 알파벳 'F'자 모양으로 읽는다는 것이다. 즉 맨 위 1~3 문장만 끝까지 살펴본 후, 중간까지 뛰어넘은 뒤 중반부 한두 문장을 읽으며, 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는 한 줄 한 줄씩 문장 끝까지 체계적으로 읽는 사람도, 디지털 매체를 접하면 빨리(Fast) 읽기 위해 페이지 왼쪽에만 시선이 머물렀다고 닐슨 박사는 주장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디지털 매체로 100 단어를 읽을 때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4.4초에 불과했다. 



닐슨 박사는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4.4초 만에 읽을 수 있는 단어 수는 18개 정도에 불과하다"며 "웹 이용자들이 실상 거의 글을 읽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500페이지가 넘는 고전 문학작품이나 니체의 철학서적을 이메일을 읽듯 훑어본다면 머릿속에 무엇이 남을까. 아마 다 읽고 나서도 기억나는 내용은 거의 없을 것이다. 훑어 보기식 읽기는 F자형 읽기를 닮았다. 읽을 때마다 나타나는 새로운 철학용어가 있거나 문장을 한 두 번 읽어서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때 독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읽고 깊이 생각해보고 다시 읽어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꼼꼼히 따져보는 수밖에 없다. 전후좌우 문맥도 살펴볼 겸 저자가 이 문장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를 한 발 빼고 숲을 보듯 바라보고, 다시 깊이 파고 들어가 의미의 껍질을 깨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반복하지 않는 다면 주어진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법은 없다. 문제의 심각성은 F자형 훑어보기에 익숙한 우리가 인터넷상에서 읽는 방식으로 종이 책을 읽으려는 과정에서 느끼는 피상적 이해나 아예 이해하지 못하고 느끼는 독자의 좌절감이다. 


30년간 뇌의 정보 처리와 사고방식에 대해 조사한 호주의 교육심리학자 존 스웰러는 "우리 뇌는 장기 기억력과 단기 기억력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기억력에 의존하는데, 인터넷을 이용한 읽기를 할 경우 단기 기억력에 폭발적인 정보가 들어가면서 병목 현상이 일어나고 집중력이 저하돼 산만해진다"라고 주장한다. 반면 책 읽는 사람들의 뇌는 이 부분 대신 고차원적인 이해와 사고력을 담당하는 장기 기억 장치를 활성화한다고 존 스웰러 교수는 밝혔다. "구글이 가장 원치 않는 것은 여유롭게 읽는 행위나 깊이 생각하는 것을 독려하는 것이다. 구글은 말 그대로 산만함을 업으로 삼는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231쪽).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구글의 업의 본질을 산만함을 파는 회사라고 했다. 한 페이지에 오래 머물수록 구글에게는 손해다. 독자가 빨리 보고 넘어갈수록 광고수입이 오르기 때문이다. 디지털 텍스를 열어 놓고 깊이 있는 사색을 하면서 글을 읽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읽는 게 아니라 훑어보는 게 맞다. 의미의 껍질을 파고들어가 생각하기보다 재빨리 훑고 지나간다. 


SNS는 읽기가 아니라 보기


“신중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바라볼 때 그 장면을 만들기 위해 켜켜이 쌓여 있는 역사와 맥락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읽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읽기를 위해서는 장면의 앞뒤를 길게 연속적 흐름으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읽기는 역사적 읽기라고 할 수 있다”(280-281쪽)“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진실은 어떤 한순간을 포착해서는 알 수 없고 오로지 역사적 과정과 맥락에 있기 때문에 그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층을 파고 들어가 위치를 파악하고 깊게 사색하며 신중하게 분석하는 집요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터넷에서의 읽기는 이런 역사적 읽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의 경과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보다 남들보다 먼저 순간을 포착해서 자극적으로 알리는 능력이 중요하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남들에게 주목받고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사건이나 사고의 일면을 재빠르게 드러내는 민첩함을 요구한다. 저자는 계속해서 읽기 능력보다 순간포착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면서 읽고 생각하는 시대에서 캡처하고 알리는 시대로 전환된다고 강조한다. ”읽기를 대체한 것이 바로 이 포착이다. 지층을 파고 맥락을 읽어내고 사건의 위치를 파악하는 연구자의 자리를 이 현자들이 차지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현자들은 순간을 캡처하고 박제하는 것으로 본질을 드러낸다(281-282쪽). 순간을 포착해서 대중이 알기 쉽게 포장하는 능력이 각광을 받으면서 문장도 짧아지고 그걸 읽어내는 호흡도 짧아지는 추세다. 에둘러 말하고 돌려서 표현하는 은유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표현하는 직유가 대세다. 독자는 바로 보고 이해가 가지 않으면 기다리지 않는다. 또 다른 콘텐츠로 이동하거나 아예 보기를 멈춘다.



왜 우리는 이미지와 영상이 텍스트를 압도하는 시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 특이 종이책을 읽어야 될까. 정보를 습득하는 효율성이나 습득한 정보를 관리하는 방식에서 기술적 수단과 방법을 활용하면 원하는 목적을 훨씬 빠르게 달성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종이책을 읽어야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연구결과가 제시되어 왔다. 우선 "長文, 종이로 읽을 때 기억효과 두배… SNS는 읽기 아닌 보기"라는 조선일보 기사에 실린 다양한 연구결과를 보자. 조선일보와 성균관대 최명원 교수팀(독어독문학·휴먼ICT융합학)은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을 때 정보를 기억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실험했다. 성균관대생 30명과 명덕외고·서초고 재학생 59명 등 고교생·대학생 총 89명을 상대로 '읽기 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이었다. 


실험은 네 가지 지문을 5분간 한쪽 집단(44명)은 종이로, 다른 한쪽 집단(45명)은 SNS(페이스북)로 보여주고, 6시간이 흐른 뒤 지문 내용을 확인하는 14개 문항을 풀도록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주어진 지문은 ①역사적 사실을 담은 단문(933자) ②독감과 감기의 차이를 이미지로 구현한 인포그래픽형 기사 ③커피에 대한 상식을 담은 복잡한 장문(한글·영문 혼용 1673자) ④추상적이고 함축적인 시(詩)(정호승의 '부활' 184자) 등 네 가지였다. 실험 결과 나이에 따라 약간의 효과 차이는 났지만 모든 집단에서 종이로 글 읽기가 SNS로 읽기보다 효과가 뛰어났다. 대학생의 경우 종이로 읽은 집단의 평균 점수가 49.8점으로 SNS로 읽은 집단 평균 점수(30.1점)보다 19.7점 높았고, 고교생은 종이로 읽은 학생들 점수(32.9점)가 SNS로 읽은 학생(26.1점)보다 6.8점 높아 상대적으로 차이가 적었다. 죽 어린 나이일수록 SNS로 소통하는 빈도가 높기 때문에 종이와 디지털의 읽기 점수 차이가 현격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 한 가지 특이할만한 연구결과는 제시된 지문이 길고 난이도가 높을수록 읽기 효과 차이는 더 컸다. 대학생과 고교생 모두 추상적이고 함축적인 글(④번)이나, 길고 내용이 복잡한 글(③번)에 대한 질문에서 종이로 글을 읽었을 때가 SNS로 글을 읽었을 때 보다 더 높았다. 복잡한 내용일수록 종이로 읽지 않고 SNS로 읽으면 훑어보기 방식으로 빠르게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려는 심리적 욕망이 작동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다. SNS로 글을 읽은 학생들을 인터뷰해본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성균관대생 강지하(21·문헌정보학과)씨는 "SNS로 글을 읽으면 내용이 조금만 생소해져도 대충 건너뛰고 딱딱한 내용이 나오면 자동적으로 스크롤을 내리게 된다"며 "메모를 할 수도 없어 더 기억하기 힘들었다"라고 했다. 전형적인 F자형 방식으로 읽으려는 성향을 드러낸 증거다. 서초고 2학년 최지연(17)양은 "SNS에 있는 글은 대충 읽으면서도 내 뇌가 '다 읽었으니 됐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 같다"며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기억나는 게 별로 없어 당황스러웠다"라고 했다. 


SNS로 읽었지만 읽고 나서 생각해보면 머릿속에 남는 게 없는 현상은 “SNS는 읽기가 아니라 보기”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물론 SNS로 읽는 방식이 종이로 읽는 방식에 비해 좋지 않은 주장은 아니다. 종이책, 종이 인쇄물이 분명 장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노르웨이 스타밴거 대학의 망겐(Anne Mangen) 교수뿐만 아니라 다른 연구진도 화면으로 책 읽기가 무조건 나쁘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책의 내용뿐 아니라 개인차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난독증 환자들 가운데 전자책으로 글을 읽고 나서 글을 읽는 속도와 이해력이 높아졌다는 사례가 있다. 결국, 우리는 어떤 종류의 글이냐에 따라 책과 오감을 나누며 읽으면 더 좋은 종이책과 만질 수는 없지만 상대적으로 집중을 덜 하고 읽어도 괜찮은 전자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문제는 전자책을 비롯해 인터넷 기반 텍스트를 읽으려고 할 때 책 읽기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수많은 장애물이 도처에 산재한다는 점이다. 조선일보가 실험했던 일부 학생과의 인터뷰에서도 "빨리 익숙하게 읽을 수 있어서 SNS가 더 좋다" "이미지가 있는 글은 SNS가 더 적합한 거 같다"는 의견을 내놓은 경우도 발견했다.


나는 산만하고 너는 바쁘다


종이로 읽기가 SNS로 읽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외국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종이로 읽은 집단이 디지털 매체로 읽은 집단에 비해 기억력과 이해력 둘 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예를 들면 2014년 앤 니콜리는 '기억력과 이해도에서의 읽기 효과' 논문에서 "학생 231명을 대상으로 태블릿 PC와 종이로 읽는 팀으로 나눈 뒤 똑같은 글을 제공하고 기억력과 이해력의 차이가 나는지를 실험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종이로 글을 읽은 집단이 태블릿 PC로 읽은 집단에 비해 높은 점수를 받았다. 10점 만점 중에 종이로 읽은 집단은 28%가 9~10점을 받았지만, 태블릿 집단은 18% 정도에 그쳤다. 노르웨이 스타방에르 대학과 프랑스 엑스마르세유 대학 연구팀이 대학원생 50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도 여전히 종이책으로 단편소설을 읽은 집단이 아마존 킨들로 읽은 집단에 비해 높은 점수를 받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연구결과는 읽은 내용의 전반적인 틀이 이나 아웃라인을 물어보는 항목에선 두 집단 간 차이는 미미했지만, 사건 발생 시점이나 구체적인 사건의 세부 사항을 묻는 항목에서는 종이책 집단이 전자책 집단에 비해 두 배가량 효과가 높았다. 이런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디지털 매체를 통한 읽기에 대해 실험해 보니 디지털 기기 스크린을 통한 글 읽기에서 딴 짓으로 이어질 확률은 85%로, 종이 매체 읽기(26%) 보다 크게 높으며 읽기 집중력 역시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나오미 배런(Baron) 미국 아메리칸대 교수의 지적이다. SNS는 그만큼 읽는 도중에 독자를 유혹하는 다양한 아이콘이 많이 등장하며 한 번 잘 못 누르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정도로 주위를 산만하게 만드는 요소가 곳곳에 숨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조선일보가 창간 96주년 특집으로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정보 학장 앤드루 딜런(Andrew Dillon) 교수를 인터뷰한 결과, 디지털 읽기는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이책 읽기에 비해 비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정보를 빨리 찾아내야 하는 상황, 짧고 그림이 많은 텍스트를 읽을 때 등에는 디지털 읽기가 효과적이다. 하지만 비교적 글이 길어서 논리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하거나 기존 정보를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분류해서 오래 기억하는 데는 "종이 책이 여전히 가장 강력한 매체"라고 말했다. 반면 디지털 읽기는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와중에 이해력을 떨어뜨리는 방해 요소가 많을 뿐만 아니라 뇌가 정보를 분류하는 위치 단서(locational cues)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읽으면서 깊게 사유하는 독서(deep reading)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인간의 뇌는 텍스트를 읽을 때 주목하고 싶은 단어 어느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위치 단서를 활용해 정보를 분류하려고 노력하는데, 디지털 텍스트를 읽어내려가려면 마우스로 스크롤을 한 번 내리면 그 사이에 광고에 해당하는 이미지와 접속 링크가 뜨면서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도대체 지금 어디쯤 읽고 있으며, 여기까지 읽은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를 뇌가 반추하면서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시도 때도 없이 광고 사이트는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로 신출귀몰한다. 많은 자료와 정보가 입력되지만 해당 정보를 지식으로 전환하기 위한 별도의 시간이 없다. 산만하게 떠도는 자료나 정보를 지식으로 숙성시키는 사색과 침묵이 없어졌다. 불특정 다수와 대화하지만 나와 대화하는 시간은 실종되었다. SNS로 연결된 수많은 접속 상태가 집중을 방해하고 계속 바쁘게 만든다. 나는 산만하고 너는 바쁜 세상이다.  


산호세대학의 류 지밍(Ziming Liu)은 지난 2005년, “화면으로 글을 읽을 때는 대강 훑어보기, 핵심 주제만 추려내기, 한 번 읽고 말기,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읽기와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고 정리했다. 기술의 발달로 글 말고도 볼거리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우리는 화면에 있는 글들도 최대한 요점만 추려내어 빨리 읽고 처리하는 데 익숙해진 습관이다. 이런 훑어보기식 글 읽기는 (특히 종이책, 종이 인쇄물을 읽을 때 비해) 집중해서 내용을 세세히 파악해야 하는 독서에 취약하다. 우리가 지금 보는 화면에는 글 말고도 수많은 이미지, 링크, 광고, 소리 등이 한데 엉켜있다. 집중해서 글만 읽어 내려가기가 굉장히 힘들다. 사람들이 같은 정보를 종이 인쇄물로 읽을 때보다 컴퓨터 스크린을 통해 읽을 때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글을 읽는 데 드는 시간을 제대로 관리,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온라인상에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와중에 읽은 글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했을 때 보고서의 질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런 방해물은 글을 읽고 이해하면서 그 내용을 장기 기억 저장소로 보내려는 뇌의 인식 과정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장애요인이다. 그는 "어떤 자극을 의미 있는 정보로 전환해 머릿속에 저장할 때는 완충 장치인 단기 기억 저장소를 거치는데, 그 사이 자꾸 다른 자극이 들어올 경우 어떤 것이 중요한 정보인지 필터링하는 데 혼란을 느낀다"고 말했다. 후두엽으로 들어온 정보의 의미를 분석하고 해석하기 이전에 또 다른 정보가 아무 때나 습격하기 때문에 한 마디로 뇌는 집중력을 상실하고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손을 놓아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딜런 학장에 따르면 이런 상태가 반복되면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으로 기사를 읽는 독자의 30%가 첫 문단도 끝내기 전에 다른 기사로 링크를 타고 넘어가거나, 스크롤을 내려 띄엄띄엄 읽는다"면서 "끝까지 읽는 경우에도 종이책으로 같은 양을 읽는 것보다 20% 이상 오래 걸린다"고 설명했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제 글을 읽기 위해 과거보다 "애를 써야만 한다"고 본다. 띄엄띄엄 읽고 훑어보기로 읽다 보니 사고가 깊어지지 않고 단절된다. 파편화된 사유 쪼가리들이 상념의 날개를 달고 여기저기 날아다니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사고의 뿌리를 내리기도 어렵다. 늘 뭔가를 보고 있지만 보는 게 아니라 대충 보니 새로운 생각의 씨앗으로 잉태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텍스트로 만나야 한다

     

한동안 종이 책을 선호하는 세대와 디지털 텍스트를 선호하는 세대로 구분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디지털 텍스트 조차 읽기가 힘들어서 유투브 영상을 주로 보는 세대가 대세를 이룬다. 이제 얼마 안 되는 디지털 텍스트를 읽고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 자체를 싫어한다. 건너뛰고 훑어보는 습관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들은 심각한 문자 회피증이나 텍스트 난독증에 시달린다. 조금만 긴 글도 읽어내는 참을성이 없다. 문자도 짧고 자극적이지 않으면 보지 않고 바로 다음 텍스트로 넘어간다. 주의집중을 요구하는 정보가 도처에 산재한다. 이미지와 영상이 텍스트를 대체하는 흐름이 더욱 빨라진다. 정여울 작가는 한 신문 칼럼에서 ‘원작에는 있고, 애니메이션에는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느리게 읽고 힘겹게 글쓰기보다는 쉽게 유튜브 동영상으로 정보를 접하고 인터넷 검색으로 빠르게 글을 쓰는 요즘 학생들에게 ‘원작 읽기와 손글씨로 글쓰기’를 강의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고백한다. 검색도 이제 네이버나 구글로 검색하지 않고 유투브로 검색한다. 읽지 않고 본다, 그만큼 읽는데 불편함을 느끼고 보는데 익숙해지지 시작한 것이다. "귀찮게 왜 읽어?"… 요즘 10대들 검색도 네이버·다음이나 구글도 아닌 유튜브로 한다. 텍스트는 훑고 넘어가는 스마트폰 세대는 읽고 쓰는데 약하다는 논의가 관심을 끌고 있다. 예전의 문맹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을 지칭했지만 최근의 신(新) 문맹은 글자는 읽는데 글은 이해 못하는 세대를 지칭한다. 기존 아날로그 세대와는 전혀 다른 미디어와 사회화 과정을 거친 디지털 N세대(Net Generation)는 너무 영상이나 이미지만 봐서 텍스트로 문장을 읽고 해석하지 못하는 '텍스트 혐오증' 걸리고 있다는 보도도 우리들의 주목을 끈다. 그래서 이들은 인터넷 뉴스는 읽는 게 아니라 관람(觀覽)한다는 표현이 정확한 해석이다.


노르웨이 스타밴거 대학의 망겐(Anne Mangen) 교수는 종이책의 촉감과 같은 실제 물리적인 차이가 원인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종이 책으로 읽기와 전자책으로 읽기의 결정적인 차이는 지금 책을 어느 정도 읽고 있는지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지의 여부다. 종이책을 읽을 때는 내가 지금 500쪽짜리 두꺼운 소설책을 읽고 있는지, 짧은 시집을 읽고 있는지를 인식하면서 책을 읽는다. 반대로 킨들이나 아이패드로 책을 읽으면 얼마나 읽었는지, 남은 양은 얼마나 되는지를 직관적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책장을 실제로 넘길 때의 촉감도 당연히 느낄 수 없다. 이런 감각, 느낌들은 책을 덮은 뒤 이야기를 재구성할 때 각 부분의 기억과 연동되어 도움을 주는데, 전자책은 그런 연결 고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부산대학교 컴퓨터 공학과 조환규 교수도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 종이책의 경우에는 읽은 양과 남은 양을 두께로 확인할 수 있어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를 알게 한다. 다 읽은 책의 두꺼운 두께를 다시금 확인할 때의 정신적 포만감은 전자책이 줄 수 없는 종이책만의 장점이다. 이런 물리적 쾌감은 책의 내용을 기억하고 전체 구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우치다 다쓰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 따르면 “독서는 ‘지금 읽고 있는 나’와 ‘벌써 다 읽어버린 나’의 공동 작업”(64쪽)이라고 한다. 두껍고 어렵지만 그래도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원동력은 다 읽고 나서 느끼는 통렬한 깨달음의 희열과 깊은 사유로 이끈 긴 여정 속에서 뜨거운 감동에 젖어 있는 나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즉 ‘다 읽고 난 나’가 보증인이 되어주기 때문에 ‘지금 읽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읽고 있는 나’와 ‘다 읽은 나’는 모래밭 양쪽에서 굴을 파는 두 아이와 같다고 한다. 맞은편에서 저마다의 생각으로 굴을 파 들어가면서 상대방이 파 들어오는 손길이 느껴질 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파 들어오던 손과 손이 만나는 극적 성취감을 상상해본다. 한 권의 책을 다 읽는다는 것은 이처럼  ‘다 읽은 나’와 ‘지금 읽고 있는 나’의 극적 상봉이다. 



우치다 다쓰루의 같은 책에 보면 아이패드로 책을 읽는 것과 종이 책으로 읽는 것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나온다. 저자에 따르면 아이패드로 책을 읽으면 책이 지닌 두툼한 느낌이 없어서 페이지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문제는 아이패드로 읽는 것처럼 전자책 독서는 이런 ‘다 읽은 나’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전자책의 특성상 남은 페이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다 읽는 내가 어디서 기다려야 되는지를 알 수 없다. 남은 페이지가 왜 중요하냐면 “자신이 책의 어느 부분을 읽고 있는지에 따라 언어의 해석이 달라진다”(62쪽)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똑같은 에피소드나 형용사, 특정 개념이 등장하는 위치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고 한다. 마치 사랑하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사랑해”라는 말이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는 초기 단계에 사용할 때, 그리고 사랑이 어느 정도 무르익어가는 중간 단계에서 사용할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이 식어가면서 끝나가는 단계에서 사용하는 “사랑해”라는 말은 각각 천차만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남은 페이지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알아야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이나 깨달았던 교훈을 저자의 숨결에 따라 강약을 조절할 수 있다. 우치다 다쓰루는 종이 책을 읽는 것과 깜깜한 방에서 라면을 먹는 과정을 흥미롭게 비교한다. “깜깜한 방에서 테이블에 놓인 대접에 담긴 라면을 먹는다면 하나도 맛나지 않습니다. 얼마나 국물이 남아 있는지, 두 번째 고깃점을 집어 먹을 때가 되었는지, 마지막 한 입을 입속에 넣을 때 면과 죽순의 균형은 잘 맞는지 등등, 전체 과정 속에서 뱃속 사정과 입맛을 살피면서 먹기 때문에 맛있는 것입니다. 면이나 국물이나 고깃점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는’ 책 컴컴한 방에서 먹는다면 맛있을 리 없습니다”(66쪽). 



종이 책을 읽는 것은 손으로 받쳐둔 책의 중량감과 남은 페이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읽는 속도를 조절하고 마지막으로 향할수록 글이 주는 절정감을 느낄 준비 하면서 독서의 맛을 음미한다. 책의 초반을 읽을 때 기다리고 있는 많은 페이지 속에 숨어 있는 놀라움의 정체가 신비스럽고,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제 반환점을 넘었으니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서 읽어내면 마침내 두꺼운 책을 다 읽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빛이 나를 독려해준다. 라면을 먹으면서 남아있는 면과 고깃점, 그리고 기타 양념으로 들어간 파와 수프 속의 각종 야채, 그리고 국물의 양을 조절하면서 맛을 음미하다 마침내 바닥이 드러나는 순간 라면의 깊은 맛을 다시 음미하면서 진한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다. 책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꿀꺽 삼키기기만 하는 독서가 아니라 책장을 넘기면서 느끼는 감촉과 중간중간에 떠오르는 생각을 줄 사이나 여백에 메모도 하고 저자가 전해주는 공감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무릎을 치기도 하고 전두엽을 번개처럼 스치는 깨달음의 종적을 쫓아가는 즐거움을 잊을 수 없다. 괴테의 《파우스트》나 데카르트의 저작물을 누군가 강의하는 동영상을 본다고 괴테와 데카르트의 깊은 사유체계로 들어갈 수 없다. 괴테의 파우스트나 데카르트의 저작물은 그들이 남긴 텍스트를 열고 읽어내는 수고스러움이 따라줘야 비로소 사유의 문이 열린다. 그들이 고민했던 콘텍스트 속에서 텍스트로 드러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읽어내지 않는 이상, 그들이 파고든 사유의 깊이에 도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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