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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

마음사전은 ‘표준어’ 사전이 아니라 ‘표정’ 사전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

마음사전은 표준어’ 사전이 아니라 표정’ 사전

     

마음 사전은 뼈와 뼈 사이를 오고 가는 감정 언어 사전이다


김소연 시인은 《마음 사전》에서 설렘을 “뼈와 뼈 사이에 내린 첫눈”(308쪽)으로, 애틋함을  “뼈와 뼈 사이에 내린 첫눈이 녹아내릴까 봐 안타까워하는 것”(309쪽)으로, 야속함을 “뼈와 뼈 사이에 내린 첫눈이 녹아내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309쪽)이라고 정의한다. 국어사전에는 설렘을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들떠서 두근거림”으로, 애틋함을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 듯함”으로, 야속함을 “무정한 행동이나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이 섭섭하게 여겨져 언짢음”으로 정의한다. 결국 설렘은 두근거림, 애틋함은 애가 탐, 야속함은 언짢음으로 정의하는 데 두근거림과 애가 탐, 그리고 언짢음을 다시 찾아봐야 하는 단어 반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그 뜻을 ‘감(感) 잡기’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정의되어 있다. 예를 들면 두근거림을 찾아보면 “몹시 놀라거나 불안하여 가슴이 자꾸 뛰다”로, 애가 탐은 “어떤 고민에 걱정이 되다”로, 언짢음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좋지 않다”로 정의한다. 



마음 사전이 필요한 이유는 각종 전문서적이나 용어사전, 또는 국어사전에 풀이되어 있는 개념의 논리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그 개념이 담고 있는 미묘한 감정적 차이를 구분하거나 해명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소연 시인은 그래서 외롭다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고생해본 추억담을 들려준다. “외롭다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룻밤을 꼬박 새워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에서 시작해서 “이를테면”을 거쳐서 “마치 그것은……”을 지나 “비교하자면……” 즈음에 이르렀을 때에야 그는 겨우 ‘외롭다’는 말을 이해했다. 이해하자마자 그는 침대에 누웠고 이내 코를 골았고, 나는 공책을 펼쳤고 ‘외로움’을 발화한 대가를 치른 간밤을 낱낱이 기록했다. 십수 년 전의 일이다“(7쪽).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 특히 인간의 감정과 관련된 단어들의 미묘한 차이에 별다른 주목이나 관심을 두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도 사람마다 외로움에 대해 느껴본 당시의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의 마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마음사전을 만들어야 되는 이유는 이해는 되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 않는 수많은 개념의 정의나 의미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에 따르면 ‘마음’은 세상과 사람을 만나는 가장 자연스러운 시선이라고 정의한다. “마음의, 무수히 중첩되고 해체되고 얽혀 드는 실핏줄, 나는 언제나 핏발이 선채 피곤하지만, 두 눈 똑바로 뜨고 정면을 응시하면서, 바라보려 한다. 세상을, 사람을, 당신을, 마음은 우리를 현실 이상의 깊은 현실과 만나게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시선이기에”(9쪽). 결국 사람이나 세상과 만나는 첫 번째 접촉은 마음으로 만난다. 머리로 계산하기 이전에 가슴으로 다가오는 감정과 기분과 느낌은 논리적 의미로 설명할 수 없다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존재한다. “감정이 한 칸의 방이라면, 기분은 한 채의 집이며, 느낌은 한 도시 전체라고 할 수 있다”(45쪽). 


감정이 상했지만 기분은 그렇지 않고 느낌은 특별히 나쁘지 않은 이유가 각각이 커버하는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정과 기분과 느낌의 개념적 차이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본 적도 없지만 이들 간의 미묘한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에 관여되는 인간의 감정과 기분과 느낌에 관한 미묘한 차이점을 절묘하게 설명하는 부분이 여러 군데 나온다. 그중에 처참함과 처절함, 그리고 처연함의 차이를 예를 들어본다. “처참함은 너덜너덜해진 남루함이며, 처절함은 더 이상 갈대가 없는 괴로움이며, 처연함은 그 두 가지를 받아들이고 승인했을 때의 상태다. 처참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정황이라면, 처절함은 차마 손댈 수 없는 정황이며, 처연함은 눈 뜨고 볼 수도 있고, 손을 댈 수도 있지만, 눈길도 손길도 효력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는 상태다. 처참함은 입맛을 잃어 물조차 삼킬 수 없는 지경이라면, 처절함은 밥솥을 옆구리에 끼고 전투적으로 숟가락질을 하게 만드는 지경이며, 처연함은 한 그릇 밥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경지이다”(63쪽). 


처참함과 처절함, 그리고 처연함의 감정 상태를 이보다 더 자세하고 친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함과 차마 손댈 수 없는 처절함, 그 사이에서 눈 뜨고 볼 수도 있고, 손을 댈 수도 있지만, 눈길도 손길도 효력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는 처연함을 묘사하는 구체적인 감정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에서 한 가지만 더 인용하면 유쾌, 상쾌, 경쾌, 통쾌 간의 미묘한 감정적 차이점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유쾌한 사람은 농담을 적절하게 잘 활용하며, 상쾌한 사람은 농담에 웃어줄 줄 알며, 경쾌한 사람은 농담을 멋지게 받아칠 줄 알며, 통쾌한 사람은 농담의 수위를 높일 줄 안다. 고민스럽고 복잡한 국면에서, 유쾌한 사람은 상황을 간단하게 요약할 줄 알며, 상쾌한 사람은 고민의 핵심을 알며, 경쾌한 사람은 고민을 휘발시킬 줄 알며, 통쾌한 사람은 고민을 역전시킬 줄 안다. 유쾌함에는 복잡함을 줄인 흔적이, 상쾌함에는 불순물을 줄인 흔적이, 경쾌함에는 무게를 줄인 흔적이, 통쾌함에는 앙금을 없앤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는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유쾌해지고, 좋은 공간에 놓였을 때 상쾌해지며, 좋은 컨디션일 때 경쾌해지고, 지리한 장마처럼 오래 묵은 골칫거리들이 빠르고 정확하게 해결될 때 통쾌해진다”(71쪽). 


김소연 시인이 구분한 유쾌, 상쾌, 경쾌, 통쾌 간의 차이점을 약간 다르게 구분할 수도 있다. 여기에 명쾌와 흔쾌를 추가해서 이들 간의 미묘한 감정적 차이점을 구분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운동하면 몸이 상쾌해지고 발걸음은 경쾌해지며 기분이 좋아져 마음은 유쾌해질 뿐만 아니라 머리는 맑아져서 명쾌해진다.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잘 풀려서 몸은 상쾌해지고 머리는 명쾌해지고 마음은 유쾌해졌으며 꿈으로 가는 발걸음이 경쾌해지면 영혼은 통쾌해진다. 이럴 때 누군가 뭔가를 제안하면 별일이 없는 한 무조건 수용하면서 흔쾌히 수락할 것이다. 


마음 사전은 ()국어 사전이 아니라 한()국어 사전이다

     

이처럼 마음사전은 개념이 갖고 있는 의미를 논리적 이성으로 정의 내리기보다 마음이 가는 대로 자신의 체험적 느낌을 중심으로 정의하는 사전이다. 영화, 「세 얼간이」에 보면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기계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보라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난초는 다음과 같이 자신이 체험한 기계에 대해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예를 통해 감성적으로 정의한다. “인간의 수고를 덜어주는 건 다 기계라고 할 수 있죠. 일을 좀 더 쉽게 만들어주거나 걸리는 시간을 줄여주는 것이 기계입니다. 더운 날 버튼을 누르면 시원한 바람이 나오죠. 선풍기... 기계죠! 멀리 떨어진 친구와 이야기할 수 있는 전화기도 바로 기계죠! 수백만의 단위를 몇 초 만에 계산하는 계산기도 기계죠! 우리는 기계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펜촉이나 바지의 지퍼 같은 것도 다 기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답을 들은 교수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분필을 던지며, “그래서 정의가 뭔데? 시험에도 그렇게 쓸 건가?” 라며 소리 질렀다. 그런 대답은 기계공학보다 상대나 예술대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정의라면서 야단을 친다. 



이어서 암기만큼은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한 학생이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계란 연결되어 있는 물체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상대적 운동이 발생합니다. 그 말은 즉, 힘과 운동이 전달되고 변형됩니다. 나사와 너트, 지렛대 원리를 이용한 지레, 도르래의 회전 등이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구조는 더 복잡할 수도 덜 복잡할 수도 있는데 움직이는 요소들로 결합되어 구성이 되어 있거나 바퀴나 지레, 캠과 같은 단순한 기계적 요소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기계에 대해 책에 나오는 대로 암기해서 대답한 학생에게 교수는 “최고의 답안이네”라는 평을 내린다. 사실 후자의 학생이 대답한 기계의 정의는 자신의 정의가 아니라 책에 나오는 교과서적 정의다. 마음사전은 논리적 의미로 파악하는 교과서적 사전보다 체험적 느낌으로 정의하는 감성사전에 가깝다.



“언어는 거울이면서 거짓이다. 삶을 비추기도 하지만, 삶을 비틀기도 한다. 삶과 조응하기도 하지만, 삶을 조롱하기도 한다. 한韓국어가 언어의 표준을 자임할 때, 표준에서 배제된 언어는 한恨국어가 된다. 한韓국이 국민의 표준을 지정할 때, 표준에 끼지 못한 사람은 한恨국에 산다”(7쪽). 이문영의 《웅크린 말들》에 나오는 말이다. 한국어(韓國語) 사전에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생각을 담고 있다. 하지만 같은 단어라고 해도 특정 단어에 담긴 사연이나 뉘앙스가 달라지면 그 순간부터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개념으로 변화된다. 표준 언어는 많은 사람들이 책에서 배운, 또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다. 마음사전은 표준 언어보다 표준의 언어에 대한 사람들의 표정을 주로 다룬다. 같은 단어라고 해도 그 단어에 대해 어떤 체험적 느낌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韓국어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라고 쓰지만, 恨국어는 ‘뼛가루들의 눈물’이라고 읽습니다. 한국에서 ‘해고노동자의 호소’가 韓국어에선 ‘불순세력의 떼법’으로 오역됩니다. 한(恨)국어 사전은 ‘표준의 언어’보다 ‘표정 있는 언어’에 주목한다. 한(韓)국어 사전이 표준과 비표준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편집할 때, 한(恨)국어 사전은 표준에 외면당한 은어·속어·조어로 한국을 본다(p.479).” 에 나오는 말이다. 마음사전에는 ‘구조조정’을 ‘뼛가루들의 눈물’로, ‘해고노동자의 호소’를 ‘불순세력의 떼법’으로 오역되어 기록되지만 사실은 구조조정을 통해 해고를 당하는 노동자의 억울한 감정이 표정으로 번역되어 기록된 것이다. 마음사전은 표준 언어를 편견과 선입견에 따라 오역한 결과가 아니라 표준 언어를 직접 체험하면서 몸으로 느낀 감정을 반영해서 번역한 산물이다.


“슬픔은 결코의 무게다”(26쪽). 슬픔(grief)이라는 단어는 '무겁다'는 뜻의 중세 영어 gref에서 왔다고 한다. 슬픔은 저마다의 무게로 슬픔에 처한 사람을 무겁게 짓누른다. 그래서 저자들은 슬퍼한다는 것은 저마다 처한 슬픔에 대해 ‘결코’를 말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나에게 그런 슬픔이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슬픔이 와도 ‘결코’ 울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막상 내가 맞닥뜨린 슬픔의 무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다가왔다. 아무리 ‘결코’를 말해도 내가 겪고 있는 슬픔은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슬픔으로 당분간 무겁게 지내는 수밖에 없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슬픔은 “슬픈 마음이나 느낌” 또는 “정신적 고통이 지속되는 일”이다. 슬픈 마음이나 느낌으로 정의되는 ‘슬픔’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지속되어야 슬픈 일인지도 더욱 감이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통과 슬픔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감정이나 기분 또는 느낌은 아무리 정교한 언어를 논리적으로 구사한다고 해도 적확한 표현을 찾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영화 「메디슨 카운트의 다리」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한 대사다. 어느 날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같이 이곳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는 “아무리 멀리 가도 늘 마음에 걸릴 거예요. 우리가 함께 할 모든 순간에... 당신을 택한 대가가 너무 고통스러울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거절한다. 일생에 단 한 번만 오는 감정은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 언어로 표현한다고 해도 언어화되는 순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은 희석되고 싸늘히 식은 논리적 껍질만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수많은 단어에 담긴 나의 주관적인 표정을 담아내는 마음사전을 꾸준히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그래서 모든 단어에는 그 단어를 사용한 사람의 단서가 담겨 있다. 단어에 담긴 단서에는 그 사람만이 겪었던 표정이 서려있다.




마음 사전은 앎과 삶이 일치되는 정서 사전이다


“만기자가 출소하고 난 그날 저녁 취침 시간이 되면 그 빈자리가 눈에 띕니다. 함께 생활했던 감방 사람들은 자연히 바깥에 나간 그를 생각하면서 한 마디씩 합니다. 그 한마디가 또 놀랍습니다. 이 자식 오늘 한잔 걸치겠구나. 여자 끼고 자겠구나가 아니었습니다. 아 이 친구 ‘방 바뀌었네’. 그렇지 오늘은 ‘치마 걸린 방에서 자겠네.’였습니다. 절제된 언어이고 탁월한 상상력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치마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우리 감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체취가 짙게 배어 있는 정서입니다. 더구나 혹독한 비극적 정서가 바탕에 깔린 정서는 단 한 줌의 관념적 유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삶을 직시하고 삶과 언어가 일체화되어 있는 정서는 한마디로 정직한 것이었습니다. ‘진실’이란 말의 본뜻이 바로 그런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263쪽). 신영복의 《담론》에 나오는 말이다. 관념적 유희를 용납하지 않는 정서가 담긴 사전이 바로 이문영의 《웅크린 말들》에 나오는 한(恨) 국어사전이자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마음사전이다. 



마음사전은 삶과 언어가 일체화되어 있는 정서를 담아내는 사전이다. 단어와 관련된 그 사람의 표정을 읽어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이는 이유다.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언어가 존재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언어가 존재한다. 마음 사전은 특수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겪는 감정이나 기분, 또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반영해서 삶이 언어로, 언어로 삶을 표현하는 사전이다. 머리는 속일 수 있지만 몸으로 느끼는 감정은 속일 수 없다. 감정이 드러난 표정은 위장할 수 있지만 표정을 조정하는 감정은 위장할 수 없다.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 박용하 시인의 《견자》라는 시집에 나오는 ‘심장이 올라와 있다’는 시다. 표정이 흔들린다는 것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도 같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감정이 자신도 모르게 표출될 때 동반되는 언어가 바로 그 사람의 삶을 몸으로 느끼며 대변하는 언어다.



마음 사전의 한 가지 예로 진은영 시인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들 수 있다. 진은영 시인은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를 표준 언어로 정의하지 않고 표준 언어에 대한 표정을 담아서 한(恨)국어 사전이자 마음 사전을 만들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면서도 절망의 뒤안길에 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건져 올리는 짤막한 일곱 개의 단어로 노래하고 있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진은영


봄,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감각의 경련이 수시로 찾아들면서 잠자고 있는 감성의 샘물을 만날 수 있었고 그때마다 새로운 언어로 생각과 느낌을 담아내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시는 감각의 경련이고 언어의 운동이다”(168쪽).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 나오는 말이다. 시인은 보통 사람은 보고 지나쳤을 사물이나 현상, 개념이나 생각에 감각을 통과시킨다. 거기서 나오는 진액을 농축시켜 언어화시키려고 벌인 사투 끝에 마음 사전의 개념들을 하나씩 자기 몸에 다시 각인시킨다. “시는 어쩔 줄 모르는 삶의 흔들리는 언어다. 시는 흔들리는 삶의 어쩔 줄 모르는 언어다.”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 나오는 김중식 시인의 말이다.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운 장면에 맞닥뜨렸지만 포기하지 않고 안간힘을 쓸 때 나오는 언어가 ‘흔들리는 언어’이고, 흔들리는 삶을 포착하기 위해 적확한 언어를 찾기 위해 애간장을 태울 때 터져 나오는 언어가 ‘어쩔 줄 모르는 언어’다. 마음 사전은 흔들리는 언어이자 어쩔 줄 모르는 언어에 담긴 표정 언어 모음집이다.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고 친정 엄마가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 시어머니는 어머니이고 친정 엄마는 엄마다. 어머니와 엄마의 차이, 머리 아픈 것과 가슴 아픈 것의 개념적 차이를 논리적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시어머니와 친정 엄마 사이, 머리와 가슴 사이에서 며느리는 어쩔 수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흔들리는 언어로 표현했을 것이다. 며느리는 흔들리는 삶의 정중앙을 횡단하면서 어쩔 줄 모르는 언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다만 시어머니와 머리 아픔, 그리고 친정엄마와 가슴 아픔은 그 어떤 언어로도 구분해낼 수 없는 며느리의 복합적인 감정 표현이다. 그것은 속일 수 없는 정직한 감정이자 기분이며 느낌이다. 



마음 사전은 시인의 마음으로 쓴 심안(心眼)사전이다


“유혹에도 점층적인 단계가 있지요. 먼저 끌림입니다. 저절로 눈이 가는 거지요. 다음이 쏠림입니다. 마음이 얹혀 갑니다. 그리고 꼴림입니다. 가닿고 싶은 욕구죠. 마지막이 홀림입니다. 넋이 나간 상태이지요... 꼴림은 마음을 따라간 몸이 불시에 반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허겁지겁한 유혹입니다”(58쪽). 손철주, 이주은의 《다, 그림이다》에 나오는 말이다. 사랑에 빠지는 단계와도 일맥상통한다. 끌림과 쏠림, 꼴림과 홀림에 관여하는 미묘한 감정의 차이를 김소연의 《마음 사전》처럼 풀이해보려는 노력이 뒤따를 때 감정표현의 해상도를 높일 수 있다. 끌림은 유혹의 자석이자 페로몬이며, 쏠림은 빠져나오기 힘든 유혹의 덫이다. 꼴림은 어쩔 수 없는 유혹의 광속 열차이며, 홀림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유혹의 환각제다. 사랑은 끌림으로 시작해서 쏠림이 발생하고 꼴림으로 달려가 홀림 상태가 되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변화되는 과정이다. 



영화 「행복한 사전」의 주인공, 미츠야가 어느 날 우연히 하숙집에 들어온 카구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장 잘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뜨거운 사랑에 빠진 미츠야라고 판단, 미츠야에게 사랑에 관한 정의를 내려 보라고 한다. 그가 말한 사랑이란 단어는 이렇게 정의된다. “어느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서 자나 깨나 그 사람이 머리에 안 떠나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으며 몸부림치고 싶은 마음의 상태, 성취하면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국어사전에서 찾은 사랑에 관한 정의,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다가오지 않는가. 개념사전은 내가 직접 체험하면서 보고 느낀 점을 토대로 내 생각을 반영한 사전이다. 예를 들면 나에게 사랑은 추상명사도 보통명사도 아닌 동사라고 생각한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에 도전할 때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도 더위를 조금이라고 식혀주기 위해 물을 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랑은 이렇게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나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뭔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작은 정성이나 배려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그러니까 목마른 사람에게 건네주는 물 한 바가지나 다름없다.




이외수 작가는 《글쓰기의 공중부양》에서 인간에게는 네 가지 눈이 있다고 얘기한다. 육안(肉眼)은 얼굴에 붙어 있는 육체적인 눈이고 뇌안(腦眼)은 두뇌에 들어 있는 과학적인 눈이다. 심안(心眼)은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감성적인 눈이고, 영안(靈眼)은 영혼 속에 간직되어 있는 전체적인 구조를 꿰뚫어 보는 혜안(慧眼)이다. 뇌안으로 책을 정의하면 “일정한 목적, 내용, 체재에 맞추어 사상, 감정, 지식 따위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한 저자의 생각의 산물”이 된다. 심안으로 책을 정의하면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거울”이나 “마음의 밭을 가는 쟁기” 또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이렇게 정의하면 책은 단순한 물리적 실체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거울이나 쟁기 또는 창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똑같은 ‘육안’과 ‘뇌안’을 갖고 있지만 남다른 성취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남이 갖고 있지 않은 ‘심안(心眼)’을 갖고 있다.



 마음 사전은 육안과 뇌안보다 심안으로 만든 사전이다. 햄버거를 보고 맛있다고 생각하는 눈은 ‘육안’이며, 햄버거가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눈은 ‘뇌안’이다. 햄버거를 육안으로 정의하면 바라보면 빵과 고기로 만든 음식물이다. 뇌안으로 햄버거를 정의하면 살찌게 만드는 지방이 많이 포함된 패스트 후드다. 과학적 분석으로 포착되지 않는 깨달음을 보는 눈은 ‘심안’에서 비롯된다. ‘심안’은 한마디로 사물을 머리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눈이다. ‘심안’을 갖고 있는 사람은 깊은 관심과 뜨거운 애정을 갖고 다른 사람과 사물을 바라본다. 햄버거를 먹을 때 겉으로 드러난 영양성분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햄버거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시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이다. 심안으로 햄버거를 정의하려면 햄버거에 감정이입을 해서 내가 햄버거 입장이 되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햄버거는 이제 단순한 먹거리나 한 끼를 때우는 음식물이 아니다. 햄버거는 소의 희생으로 나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눈물겨운 음식이다.


“생각은 가슴이 합니다. 가슴에 두 손을 얻고 조용히 생각합니다. 누구도 머리에 손을 얹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이란 잊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가슴에 담는 것입니다. 생각은 애정이며 책임이며 포옹입니다”(230쪽). 신영복의 《처음처럼》에 나오는 말이다. 생각 사(思)를 분석해보면 밭전(田)과 마음 심(心)의 합성어다. 밭을 의미하는 전은 본래 인간의 숨골을 뜻하는 상형문자라고 한다. 그래서 생각 사의 윗부분은 머리나 이성을 아랫부분은 가슴이나 감성을 의미한다. 생각한다는 말은 머리와 가슴이 동시에 관여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생각은 머리가 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생각은 곧 그래서 논리적 생각을 의미했다. 마음사전은 머리로 하던 생각을 가슴으로 하는 생각으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개념에 대한 체험적 느낌을 중심으로 나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작업이 마음사전이다. 



마음사전은 내 생각에 들어 있는 단어를 정의하는 사전이 아니다. 마음사전은 생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이나 현상, 느낌이나 생각을 상대 입장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 달라고 아우성을 칠 때 내가 받아 쓴 사전이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정의하려는 자만과 오만에서 벗어나 사물과 사람이 말하고 싶은 내면의 욕망을 겉으로 드러내는 과정에서 표현된 솔직 담백한 단어들의 향연이다. 마음사전은 사물이나 현상이 존재하는 이유를 물어봤을 때 스스로 말하고 싶은 내용을 역지사지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받아쓴 사전이다. 예를 들면 의자는 피곤한 사람들,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라도 앉아서 쉬면서 편안한 휴식을 제공해주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 의자는 힘들고 지쳤을 때 잠깐이라도 의자에게 의지해서 위로받을 수 있는 활력 충전소다. 머리로만 생각해서 정의한 수많은 개념들을 나의 따뜻한 가슴으로 다시 관심을 갖고 애정을 부여할 때 세상의 모든 개념은 나에게로 다시 다가온다. 사물이나 현상 또는 이미 국어사전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단어들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이나 문제가 무엇인지를 물아일체나 역지사지가 되어 가슴으로 생각해볼 때 그동안 간과 했던 속 깊은 심정이 떠오를 것이다. 


심안으로 쓴 이외수 작가의 개념 정의를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고독은 선잠결 객지에서 들려오는 기적소리이며, 환희는 봄날 햇살 속에서 어지럽게 펄떡거리는 만국기다. 참담은 저물녘 낯선 도시에서 만나는 막다른 골목이며, 비애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한 번도 울리지 않는 휴대폰이다. 이처럼 마음사전은 단어를 논리적인 생각으로 정의하는 사전이 아니라 가슴으로 생각하면서 심안으로 정의하는 사전이다. 고독이라는 추상명사가 기적소리라는 보통명사로 들리며, 환희라는 추상명사가 만국기라는 보통명사로 펄떡거린다. 참담이라는 추상명사도 일상에 만나는 막다를 골목으로 느껴지고, 비애라는 추상명사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아서 홀로 쉬고 있는 휴대폰의 외로움으로 묘사된다. 마음사전에는 이처럼 관념적 추상명사보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보통명사를 사용하여 시적으로 표현한 정의가 많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되기 이전에 가슴으로 와 닿는다. “심장이 오늘 깨달은 걸 머리는 내일쯤 가서야 이해한다."  미국의 작가 제임스 스티븐슨(James Stevenson)의 말이다. 


마음사전은 심장으로 오늘 느낀 점을 머리로 생각하면서 논리적으로 정의한 사전이라기보다 심장이 느낀 오늘의 깨달음이 사라지기 전에 받아 적은 체험적 기록이다. 흥부전에 등장하는 제비 다리를 고쳐주는 장면에서 흥부와 놀부의 대응방식은 다르다. 한 마디로 흥부는 부러진 다리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다리를 고쳐주며 제비와 나를 동일시하는 정서가 발동된다. 이때 부러진 다리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는 측은지심이 바로 마음으로 느껴지는 공감이다. 한편 놀부는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부자가 된 흥부를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자기도 부러진 제비 다리만 고쳐주면 부자가 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멀쩡한 제비다리를 부러뜨려 고쳐주고 부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처럼 나와 다른 것과 나를 분리해서 계산하고 판단하는 정서는 생각이다. 마음사전은 놀부의 계산과 이해타산을 따지는 판단이 개입된 생각이 아니라 흥부의 측은지심으로 부러진 제비 다리를 돌보는 마음으로 정의한 사전이다.   



나만의 마음사전을 만들자 


마음사전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단어를 나의 체험적 느낌으로 다시 정의하는 사전이다.  기존의 국어사전이 논리적 의미로 정의된 이성 사전이라면 마음사전은 나의 주관적 감정이나 기분 또는 느낌으로 정의하는 감성사전이다. 본문에서 예를 들었던 영화 「세 얼간이」에 나오는 주인공 난초가 정의한 기계의 의미가 바로 마음사전에 들어 있는 기계의 의미다. 이외수 작가가 고독을 기적소리로, 환희를 만국기로 정의하는 방식이 바로 마음사전에서 단어나 개념의 의미를 정의하는 방식이다. 마음사전은 넓은 의미에서 앞서 논의했던 신념 사전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사전은 논리적 타당성을 따져 개념을 재개념화 시키는 신념 사전과는 다르다. 마음사전은 논리적 타당성이나 근거가 없어도, 또는 언어적 설명이 불가능할지라도 몸이 반응해서 느끼는 감정이나 측은지심으로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개념의 의미를 기록한 사전이다. 신념 사전이 머리로 정의한 사전이라면 마음사전은 가슴으로 정의한 사전이다. 신념 사전이 철학자의 개념사전에 가깝다면 마음사전은 시인의 감성사전에 가깝다. 신념 사전에는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판단이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면 마음사전에는 내가 몸으로 체험하면서 가슴으로 느낀 밑바닥 정서가 담겨있다. 흔히 사용하는 단어를 나의 체험적 느낌이나 그 단어가 지칭하는 사물이나 현상 입장에서 심안으로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며 정의하는 연습을 반복하면 나만의 마음사전이 탄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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