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사전은 단어와 결부된 상상력을 품은 연상 사전
비상하는 상상력, 연상능력이 좌우한다
개념사전은 단어와 결부된 상상력을 품은 연상 사전
사상(思想)은 연상(聯想)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 따르면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하나의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이다”(45쪽). 모든 생각은 연상이다. ‘아파트’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어떤 사람은 윤수일의 아파트가 노래가 연상되고 아파트 평수나 주상복합인지의 여부, 그리고 강남에 있느냐, 강북에 있느냐, 한강변 아파트냐 도심 아파트냐 등 저마다 아파트와 연상되는 이미지나 개념이 바로 아파트에 관한 그 사람의 생각이다. 나는 아파트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땀 흘리는 모습이 연상된다. 학비를 벌기 위해 한 때 건설현장에서 벽돌을 날아본 체험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아파트와 관련된 생각의 수준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아파트와 관련해서 몸으로 느낀 체험적 깨달음의 산물이다. 즉 아파트에 관한 연상 수준은 그 사람이 아파트와 관련해서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몸으로 체험한 삶의 결론이다. 특정 개념과 연관되어 떠오르는 이미지의 수준과 깊이가 바로 그 사람의 상상력 수준과 깊이를 결정한다. 체험적 상상력이 공상이나 허상, 망상이나 몽상, 환상이나 허상으로 흐르지 않고 구체적인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돌파력이나 불굴의 의지와 만나는 순간 위대한 창조가 시작된다. 신영복 유고집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에 보면 사상과 연상 관계에 대한 의미심장한 통찰이 나온다. “그 사람의 사상은 그가 주장하는 논리 이전에 그 사람의 연상 세계, 그 사람의 가슴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떤 연상 세계를 그 단어와 함께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봐요”(65쪽). 단어와 연상되는 세계의 차이는 단어와 관련된 체험의 깊이와 넓이의 차이다.
한 사람의 생각을 알아보려면 그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와 그 언어에 담고 있는 연상의 세계를 알아보면 된다. 예를 들면 막걸리 하면 연상되는 단어가 파전, 비 오는 날, 등산 등이 떠오르면 그 사람의 막걸리에 대한 사상의 깊이와 넓이는 비 오는 날 파전으로 막걸리를 마셔봤거나 등산 후에 마신 막걸리를 벗어나 심화되고나 확장될 가능성이 없다. 막걸리에 대한 연상력은 막걸리와 관련된 체험의 깊이와 넓이에 비례한다. 막걸리에 대한 글은 막걸리에 대한 알고 있는 사실과 막걸리를 마셔본 체험을 능가하지 못한다. 막걸리 안주로 파전이나 두부김치를 먹지 않고 스테이크를 먹어본 사람은 막걸리에 스테이크를 연결시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력이 생긴다. 막걸리와 스테이크는 아무에게나 연상되지 않는다. 언어는 또 다른 언어와 만나면서 사고의 깊이와 넓이를 심화시키거나 확장시킨다. 언어와 체험이 만날 때 색다른 개념적 사유와 상상력이 촉발되는 이유다.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260쪽).”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말이다. 나도 모르게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진부해졌다는 것은 내 삶도 그에 못지않게 진부해졌다는 것이다. 언어와 삶 이전에 언어는 사고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외국어로는 아는 것만 말할 수 있지만 모국어로는 알지 못하는 것도 말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말은 도구적 기호에 그치지 않는다(144쪽).” 황현산의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 나오는 말이다.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나 매체를 넘어선다. 언어는 삶 자체이며 사고 혁명을 일으키는 주체다.
고등학교 다닐 대 용접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위해 숱한 밤을 벗 삼아 용접 실습을 한 적이 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을 때, 나는 내 인생의 첫 번째 실패 체험이자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용접기 온도조절을 잘 못 해서 철판에 구멍이 뚫어지고 말았다. 결과는 테스트를 해보지 않아도 불합격임이 불 보듯 뻔했다. 순간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밤을 밝혀가며 실습했던 지난여름과 겨울의 시간이 지나갔다. 한 여름 뜨거운 열기와 용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견딜 수 없는 고통인지를 해본 사람만이 안다. 그나마 추운 겨울날에 하는 용접은 무한한 위안이다. 냉기가 감도는 용접 실습실에서 3천 도를 오르내리는 불꽃과 사투를 벌이면서 용접을 하다 보면 추운 몸도 용접의 열기에 녹아 따뜻한 온기를 품을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지난 시절 힘들게 노력했던 많은 시간이 한순간의 실수로 용접 기능사 자격증 시험에 실패했다. 그 순간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떨어진 용접기능사 자격증 시험, 철판에 뚫어진 구멍을 더 크게 뚫어서 보름달처럼 만들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좌절감과 상실감을 뒤로하고 하던 용접을 계속하면서 철판에 보름달만 한 구멍을 뚫어버렸다. 그 후로 나는 철판을 생각하면 보름달이 연상된다. 내가 만약 시인이라면 전혀 관계없는 철판과 보름달을 연결시켜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며 한 편의 멋진 시를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시인의 상상력은 책상에서 배운 공상과 망상 또는 환상과 몽상에서 얻어진 능력이 아니다. 시인의 시적 영감은 춥고 배고팠던 아픔,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추억, 참고 견디기 어려웠던 슬픔이 서려있는 지난 체험을 기반으로 핀 상상력의 꽃에서 유래된다.
용접하면서 철판에 구멍을 뚫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철판과 보름달이 연상되지 않는다. 철판에 구멍을 직접 뚫어본 체험을 해본 사람만이 관계없는 두 가지를 연결시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체험적 상상력이라야 창조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사람의 생각은 그와 함께 연상되는 연상 세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 사람의 사고 수준, 사상의 깊이와 넓이는 특정 단어와 관련해서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연상 세계를 보면 알 수 있다는 신영복 교수의 통찰은 나에게 지적 충격이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가 내 사고의 한계이자 삶의 한계라고 생각한 비트겐슈타인의 통찰과도 일맥상통한다. 철판과 용접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한때 하루 일과의 많은 부분을 함께했던 일상적 사물이자 사연을 품고 있는 일과였다. 하지만 철판을 용접으로 녹여 붙여본 체험이 없는 사람에게 철판과 용접은 국어사전에 나오는 관념적 단어나 개념에 불과하다. 더욱이 철판 용접에 실패하고 좌절과 절망에 휩싸인 순간, 국가 공인 자격증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철판에 다시 용접봉을 녹여 구멍을 뚫어본 아픈 체험은 전혀 관계없는 철판과 보름달을 연상시켜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들어주는 창작의 공작소 역할을 한다.
한 사람의 생각은 자기 삶의 결론이다
한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경험하면서 깨달은 체험적 지혜의 역사적 산물이다.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생각은 그 사람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삶을 바꾸지 않고 독립적 공간에서 사람을 대상으로 생각을 바꾸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교육적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의 뿌리는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삶의 현장에 있다. 신영복 유고집, 《손잡고 더불어》에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은 자기 삶의 결론(p.244)”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까지의 내 삶의 결과가 내 생각으로 축적된다. 모든 사람의 생각은 모든 사람의 삶의 결론이다. 그러니까 모든 생각은 저마다의 삶이 반영된 가치 있는 생각이다. 쓸데없는 생각은 없다. 다만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생각만이 있을 뿐이다. 때가 되면 모든 생각은 저마다의 생각의 뿌리에서 건져 올린 문제의식과 사연과 배경으로 빛을 내기 시작한다. 모든 생각은 연상이다. 아파트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어떤 사람은 윤수일의 아파트가 노래가 연상되고 아파트 평수나 주상복합인지의 여부, 그리고 강남에 있느냐, 강북에 있느냐 한강변 아파트냐 도심 아파트냐 등 저마다 아파트와 연상되는 이미지나 개념이 바로 아파트에 관한 그 사람의 생각이다. 나는 아파트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땀 흘리는 모습이 연상된다. 학비를 벌기 위해 한 때 건설현장에서 벽돌을 날아본 체험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아파트와 관련된 생각의 수준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아파트와 관련해서 몸으로 느낀 체험적 깨달음의 산물이다. 즉 아파트에 관한 연상 수준은 그 사람이 아파트와 관련해서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몸으로 체험한 삶의 결론이다.
“우리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때는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고, 우리가 쓰러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이 말은 윌리엄 워즈워스의 《서곡》에 나온다. ‘시간의 점(Spot og time)’이란 내가 살아오면서 내 몸에 각인된 직간접 체험의 총량이다. 시간의 점이 긍정적 추억으로 각인될 수도 있고 좋지 않은 부정적 추억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성공하고 승리의 쾌감을 맛보았던 시간은 당연히 생각만 해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반면에 실패하고 좌절하며 절망했던 시간의 점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내 삶의 어둔 측면의 역사를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시인 워즈워스도 어린 시절 알프스를 여행하며 만났던 장면이 너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시를 쓸 때마다 당시의 장면이 떠오른다고 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만난 다양한 사람과의 사연,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온 산전수전의 체험, 그리고 그런 체험적 고뇌가 녹아 있는 책을 읽으며 내 몸에 생긴 시간의 점이 선을 만들고 그 선이 다시 면을 만든다. 여기서 선이 모여 만든 면은 바로 한 사람의 면모(面貌)를 결정한다. 그 사람의 면모는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점과 점이 연결되어 만든 선의 합작품이다. 한 사람의 사상의 깊이와 넓이도 결국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직간접 체험의 깊이와 넓이, 체험과 관련된 다양한 기억의 밀도 및 강도와 직결된다. ‘시간의 점’은 내 몸에 축적된 과거의 기억이다.
“기억의 폭이 좁을수록 미래를 폭넓고 독창적으로 구상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기억을 먹여 살리는 방법은 몸을 먹여 살리는 방법만큼 중요하다.”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뭔가를 암기하는 능력보다 살면서 몸에 각인된 각양각색의 체험적 얼룩과 무늬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점은 과거의 기억이 미천할수록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힘도 천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기억은 과거로 머물러 있지 않다. 어렸을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판에서 뛰어놀았던 기억, 회색빛 청춘을 보내면서 무수한 방황과 시행착오 끝에 찾은 한 줄기 희망, 우연히 집어 든 한 권의 책이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했던 계기, 학창 시절 나의 단점보다 강점을 칭찬해주며 꿈과 용기를 심어준 스승과의 운명적 만남. 이 모든 것이 내 몸의 기억창고에 저장된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책에서 배울 수 없는 다양한 도전을 통한 성취 체험과 생각지도 못한 실패와 좌절 체험 역시 내 삶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드는 시간의 점이다. 이런 시간의 점이야 말로 창작의 원료다. 시간의 점이 긍정적인 추억으로 간직되었든 부정적인 추억으로 간직되었든 창작을 통해 얼마든지 아름다운 무늬로 재생될 수 있는 시간의 점들이다. 생각만 해도 지난 시절의 기억이 구체적 모습으로 떠오르는 건 많은 사람이 그만큼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강렬한 추억의 이미지가 내 몸에 각인되었다는 증거다. 기억 창고에 저장된 체험의 흔적이 넓고 깊은 사람은 그만큼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도 연결시켜 상상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연상 세계는 개념과 색다른 체험적 사연의 합작품이다
과거의 기억은 체험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 체험을 표현할 언어나 개념을 동반한다. 겨울 얼음판에 빠져 양말이 젖어본 사람에게 양말은 그냥 양말이 아니다. 추운 겨울에 얼음이 깨지면서 빠져버린 양말을 모닥불 쪼여가며 말리던 추억은 양말에 얽힌 엄동설한의 겨울과 시린 발, 그리고 집에 가면 혼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연상되는 개념이다. 양말은 누구나 신는 보통 명사가 아니라 얼음에 빠져 추위에 떨며 걱정하던 사연을 담고 있는 고유명사다.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는 순간은 고유명사에 한 개인의 체험적 사연이 반영될 때다. 그 순간 누구나 만날 수 있는 국어사전의 보통명사가 아니라 나의 특수한 체험적 추억이 스며들어 있는 고유한 개념이다. 함민복 시인의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에 보면 조카와 나누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엉뚱한 짓을 잘하는 조카가 있다.
“너 커서 뭐 해 먹을래?”
“김치.”
“그런 것 말고.”
“그럼 된장국, 감자, 파......”
“아니, 그런 것 말고라니까.”
“그럼, 멸치.”
여기서 함 시인이 조카에게 물어본 “뭐 해 먹을래?”는 무슨 밥이나 음식을 해먹을 거냐고 물어본 게 아니다. 이게 바로 우리말이 갖고 있는 묘미이자 상대가 이해하기 어려운 난점일 수도 있다. 여기서 “뭐 해 먹을래?”라는 질문은 “뭐 해서 밥 먹고 살래?”라는 질문과 같은 의미다. 그런데 그 말뜻을 모르는 어린 조카는 당연히 먹는다는 의미에 사로잡혀 계속 음식 이야기로만 대답을 반복한 것이다. 조카는 아직 “뭐 해 먹을래?”가 품고 있는 다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못한다. 어린 조카는 “뭐 해 먹을래?”라는 말과 연상되는 단어는 ‘음식’이지 직업을 연상시킬 만큼의 ‘경험’과 ‘지식’ 수준이 되지 못한다. 여기서 시인이 포착한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조카가 대답하는 음식 관련 단어 속에 그 또래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돈가스, 햄버거 같은 육류가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도회지 아이들이 즐겨 먹는 돈가스나 햄버거를 먹어본 적이 없는 조카는 그런 단어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시인은 “고향을 떠나 어렵게 살고 있는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에 맘이 저렸다”고 표현한 것이다.
“산이라는 문자가 생기면 마치 산을 다 알았다는 듯이 생각합니다. 이 산이나 저 산이 모두 같은 산이라는 개념을 낳습니다(164쪽).” 가와이 하야오, 다치바나 다카시, 다니카와 슌타로의 《읽기의 힘, 듣기의 힘》에 나오는 말이다. 책상에서 배운 개념에 나의 신념이 추가되지 않으면 관념으로 전락할 수 있다. 똑같은 산이라는 개념에 담긴 우리들의 체험은 다를 수 있다. 나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오르면서 네팔에서는 적어도 4000m 정도 높이가 되어야 산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4000m가 안 되면 산이 아니라 구릉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의 두발로 직접 오르면서 올랐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얼마나 빨리 더 높이 오를 것인지를 따지는 등산(登山) 패러다임이 아니라 산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어 산을 즐기는 입산(入山) 패러다임으로 올랐던 등정 체험담을 담고 있다. 산은 내가 정복할 대상이 아니라 나를 품어줄 자연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산은 나와 함께 힘든 삶을 살아오면서 만났던, 나를 위로해주고 격려해주었던 동반자였으며 때로는 스승이었다. 산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이미지는 한 겨울 눈이 빚어낸 설산의 아름다운 장관이다. 한라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정상에 올랐을 때 구름에 쌓여 신비에 가려진 백록담을 감상하며 한라산 소주를 기념으로 마셨던 추억이 연상된다. 나에게 한라산은 제주도에 있는 그냥 산이 아니라 다시는 구경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아름다운 설경을 품은 산이며, 정상에서 한라산 소주를 마션던 추억이 담긴 산이다. 산 하면 떠오르는 가장 강렬한 또 다른 이미지는 2015년도에 올랐던 킬리만자로다. 5000m가 넘는 정상 등반에 도전하면서 인간 한계를 체험했던 킬리만자로는 나에게 얼마나 빨리 정복할 것인지 그것이 타산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따져는 계산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킬리만자로는 쉽게 넘을 수 없는 태산(太山)이었다.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르는 여정은 고도의 차이를 몸이 어떻게 반응해서 적응해나가는지를 몸과 대화하며 온몸으로 느끼는 열정의 시간이었다. 킬리만자로는 정복의 대상으로 오르는 등산(登山)이 아니라 산과 혼연일체가 되어 함께 삶을 생각하고 대화하는 입산(入山)이다.
모든 단어는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다
“태양을 잃었다고 울지 마라. 눈물이 앞을 가려 별을 볼 수 없게 된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말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태양만 있는 게 아니다. 태양이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까만 밤일수록 더욱 빛나는 별이 있지 않은가. 태양이 없어진 낮은 절망이지만 태양이 없어진 밤은 오히려 별에게는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좋은 기회다.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난다”는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가 떠오르는 이유다. 고 신영복 교수님은 한겨레 신문에 연재했던 [신영복의 그림 사색] 야심성유휘를 가슴 따뜻한 희망의 언어로 다음과 같이 해석해준다. “이 말은 밤하늘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은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위로입니다. 몸이 차가울수록 정신은 더욱 맑아지고 길이 험할수록 함께 걸어갈 길벗을 더욱 그리워합니다.”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 희망을 잉태하는 어둠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힘은 어둔 시절을 많이 보내본 체험적 깨달음이 아니고서는 생각해낼 수 없는 사유의 힘이다. 남다른 경력은 역경이 뒤집혀 탄생된 산물이고 희망도 절망이 피워낸 꽃이 아니던가. 삶은 성공하는 체험으로 승승장구만 하지 않는다. 어둠을 배경으로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시간의 축적이 자신도 모르게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성취 체험의 원동력으로도 작용하지 않는가. “양(陽)이 그 절정에 도달하면 음(陰)을 위해 물러나고, 음(陰)이 그 절정에 이르면 양(陽)을 위해 물러난다(p.143).” 동양철학을 기반으로 물리학을 새롭게 들여다보는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에 나오는 말이다. 주역에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온다.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음이 극에 달하면 양으로 변하고 양이 극에 달하면 다시 음으로 변하면서 음양의 선순환이 하루하루의 삶을 만들어간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 날 아침에 신문을 읽다가 우연히 만난 글귀다. 이 제목은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1864-1900)가 쓴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라는 책에 나오는 글귀다. 최근에 이 문장이 화두가 된 것은 소설가 문지혁 씨가 자신의 첫 소설집, 《사자와의 이틀 밤》을 내면서 썼던 작가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오늘 아침에 만난 시궁창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때렸고 폐부를 찌르듯 파고들었다. “어떤 단어들은 지 몸속에 이미 자신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쓰고 보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음미하고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것들, 그 자체가 의미를 생성하고 소통을 내포하는 것들, 새초롬히, 라는 말을 들으면 눈썹을 내리깐 채 딴청을 하는 모습이 떠오르고 이지러진, 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히 그믐달을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진연주, 2015, p. 16).” 시궁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나 역시 시궁창과 관련해서 내가 겪었던 체험과 함께 당시에 느꼈던 서러운 추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시궁창이라는 단어 역시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논리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음미하고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단어다. 나에게 다가온 시궁창이라는 단어는 약 30여 년 전의 아픈 체험을 연상하게 만든다.
시궁창에서 외로움을 견디며 밤하늘을 올려다본 경험이 세상을 내다보는 색다른 창을 만들어준다. 한 때 수도 전기 공고를 졸업하고 평택화력발전소에서 2년간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 발전소 연료는 아스팔트 포장할 때 쓰는 방카 C유라는 까만 기름이었다. 발전소 운전조작 실수였는지 기계의 오작동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방카 C유가 시궁창으로 유출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정식 근무지로 발령을 받지 않고 주로 업무보조로 일하는 사회초년생 시절을 보내면서 처음 직면한 난관이 바로 시궁창으로 흘러간 방카 C유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당시 나는 한여름 밤의 무더위 속에서 모기와 사투를 벌이면서 시꺼먼 기름 청소를 하면서 나를 내려다보는 대졸 출신의 상급자들을 올려다보았다. 나와 비슷하게 입사했지만 대졸자라는 이유로 나보다 높은 위치에서 바닥에서 청소하는 나를 내려다보며 지시하는 그들의 모습에 분노와 함께 말할 수 없는 적개심과 반항심을 갖게 되었다. “니가 시스템 탓하고, 세상 탓하고, 그런 세상 만든 꼰대를 탓하는 거 다 좋아. 좋은데 그렇게 남 탓 해봐야 세상 바뀌는 거 아무것도 없어. 그래 봤자 그 사람들 니 이름 석자 하나 기억하지 못할걸, 정말로 이기고 싶으면 필요한 사람이 되면 돼. 남 탓 그만하고 니 실력으로.” 낭만 닥터 김사부에 나오는 대사의 일부다. 아마 내가 공부를 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도 밑바닥에서 지시받으며 살아가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공부에 대한 불온했던 꿈을 꾸기 시작한 것도 시궁창 밑바닥에서 하늘을 올려다본 경험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창을 갖게 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나만의 연상 사전을 만들자
연상 사전은 특정 개념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를 정리한 사전이다. 연상 사전은 한 사람이 특정 개념과 관련해서 어떤 체험을 했는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념을 기반으로 싹트는 상상력의 수준과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사전이다. 연상 사전은 한 개인의 체험적 흔적을 반추하면서 개념이 품고 있는 사연을 통해 인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사전이다. 연상 사전을 작성하는 방법은 한 가지 개념에 대해 연상되는 단어나 이미지가 어떻게 바뀌어 나가는 지를 인생의 시기별로 작성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파트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예전에는 윤수일의 아파트 노래가 떠올랐지만 지금은 아파트는 부의 상징적 수단이 되어서 “몇 평짜리 아파트냐?” “주상복합 아파트인지 그냥 평범한 아파트인지?” “강북에서 분양하는 아파트인지, 강남에서 분양하는 아파트인지?” “한강변에 위치해서 조망권이 좋은 아파트인지, 아니면 도심과 가까운 아파트인지?” 하지만 누군가에게 아파트는 한 여름 뙤약볕을 이겨내며 일하는 노동자의 땀 흘리는 모습이 연상될 수 있다. 한 사람이 특정 개념에 대해 연상하는 깊이와 넓이가 바로 그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상상력 수준이다. 이전과 다른 상상력을 갖고 싶다면 틀에 박힌 일상 언어에 관한 나의 색다른 체험의 깊이와 넓이를 심화시키고 확장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연상 사전의 역사적 변천과정은 곧 그 사람의 상상력 발전사와 직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