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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는 생각의 불씨를
되살리는 불쏘시개다

내가 모르는 단어는 내가 모르는 세계다

단어를 잡으면 우주가 걸려든다     


사람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의 이면에도 사연이 숨어 있다. 그 사연을 이해하면 사건을 전후좌우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사고는 내가 당한 일이지만 사건은 내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이다. 사건 속에는 말 못 할 사연이 숨어 있다. 그 사연을 읽어내면 사건의 전모를 밝혀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와 의도를 읽어내야 단어가 잉태하고 있는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한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품고 있는 단어와 무관하지 않다. 틀에 박힌 생각을 반복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쓰는 언어가 틀을 깨지 못하고 익숙한 세상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의 단어는 사연은 없어지고 뜻풀이만 되어 있다. 단어의 의미를 안다고 그 단어가 꿈꾸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모르는 단어는 내가 모르는 세계다”라고 주장하는 백우진의 《단어와 사연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하나의 단어를 붙잡으면 하나의 우주가 걸려든다.” 단어는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다. 단어는 국어사전에 정의된 대로 언제나 같은 의미로 쓰이지 않고 동일한 단어라고 할지라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다. 우리가 언어를 공부해야 되는 이유는 똑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로 쓰이는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단어를 잡으면 단어가 꿈꾸는 우주를 품을 수 있다. 단어로 소통되지 못하면 둘 사이의 관계는 단절되고 불통된다.



철학자 들뢰즈가 영화, '세 얼간이'를 본 까닭은?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개념은 “∼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다. 예를 들면 사랑이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사랑은 누군가 이미 정의한 개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군가 정의한 사랑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일상적 삶에서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이다. 사랑의 본질과 핵심, 그리고 사랑하는 방법은 이미 정해져 있다. 어떻게 누군가 또는 뭔가를 사랑하는지는 이미 본질적으로 정해져 있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현실로 얼마나 정확하게 구현하느냐의 문제다. 이것이 바로 철학자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는 동일성에 종속된 개념의 재현이다. 모든 개념의 본질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삶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반복해서 물어봐도 삶의 본질을 정의해놓은 이상이나 궁극적 이데아를 따라가는 삶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대답한다.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정답을 다시 한번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반복해도 동일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동일성에 종속된 개념의 재현이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정의되어 있는 “복된 좋은 운수” 또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을 그대로 내 삶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다. 이미 이상적인 행복의 본질은 경험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초월적 세계에 이데아나 이상으로 존재한다. 나는 그 이데아가 정의한 행복한 삶을 얼마나 동일하게 반복하느냐에 따라 내 삶이 결정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개념은 모두 사전이나 개론서에 정의된 의미를 품고 있다. 개념 이해도는 책에 나와 있는 개념의 의미대로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하고 그대로 삶에 옮겨 실천하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추구하는 누구나 동의하고 보편적으로 합의하는 개념 일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의 문제의식은 동일한 사랑이나 행복이라고 할지라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함께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따라 천차만별의 삶이 펼쳐질 수 있다는 들뢰즈의 차이의 반복을 따라간다. 지금 여기서는 이미 정해져 있는 개념에 따라 얼마나 정확하게 현실적으로 재현하는가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 누구가 수용하고 동의하는 보편적인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똑같은 사랑과 행복이라는 개념도 사람이 실제로 경험하는 다양한 세계에서 보고 느끼며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식되고 구현된다. 보편적인 개념은 존재하지 않고 사람에 따라 다른 신념이 가미된 이념이 중요해진다. 사랑과 행복의 의미는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차이가 반복된다. 내가 사하라 사막에서 느낀 사랑의 의미는 폭염을 뚫고 달리는 외 중에 자신도 작렬하는 태양빛을 견디며 땀 흘리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기꺼이 물 한 명 몸에 뿌려주는 작은 행동이다. 나에게 행복은 2007년 4월 죽음의 일보 직전에 갈 정도로 심하게 다친 교통사고 후 얼마간의 회복기간을 거친 다음 처음 마셔본 와인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전율감이었다. 사랑과 행복은 국어사전이나 누군가 철학에서 말한 보편적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과 행복은 저마다의 상황에서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체험이자 주관적 신념이 반영된 이념이다. 누군가 정의한 개념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경험하면서 몸으로 느낀 개념의 의미는 다를 수 있다. 드라마가 같은 주제를 보여줘도 매번 다른 이유는 그것이 실천되고 있는 상황적 맥락이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낳는 반복이 반복되고 있다. 기존 개념으로 포섭되지 않는 차이, 지금 여기서 결정할 수 없는 차이가 무한 반복되는 가운데 매번 다른 의미를 양산한다.    

 

영화, 「세 얼간이」에 보면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기계’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보라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난초는 다음과 같이 자신이 체험한 기계에 대해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예를 통해 감성적으로 정의한다. “인간의 수고를 덜어주는 건 다 기계라고 할 수 있죠. 일을 좀 더 쉽게 만들어주거나 걸리는 시간을 줄여주는 것이 기계입니다. 더운 날 버튼을 누르면 시원한 바람이 나오죠. 선풍기... 기계죠! 멀리 떨어진 친구와 이야기할 수 있는 전화기도 바로 기계죠! 수백만의 단위를 몇 초 만에 계산하는 계산기도 기계죠! 우리는 기계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펜촉이나 바지의 지퍼 같은 것도 다 기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답을 들은 교수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분필을 던지며, “그래서 정의가 뭔데? 시험에도 그렇게 쓸 건가?” 라며 소리 질렀다. 그런 대답은 기계공학보다 상대나 예술대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정의라면서 야단을 친다. 난초가 내린 기계라는 개념에 대한 정의는 책에 나오는 보편적 정의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체험하면서 보고 느낀 주관적 신념이 반영된 정의다. 그 정의는 다른 사람에게 동일하게 반복될 수 없는 난초라는 주인공이 겪은 개별적 경험에서 얻은 정의다. 기계에 대한 정의는 난초가 내린 정의가 정답은 아니다.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상황에서 기계를 다르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초의 기계에 대한 정의는 난초라는 사람이 자신이 경험한 느낌과 교훈을 토대로 주관적 신념을 반영한 기계에 대한 이념적 표현이다.     



난초의 기계에 대한 정의가 마음에 들지 않은 교수는 옆의 동료 학생에게 기계에 대한 정의를 다시 물어본다.  암기만큼은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한 학생이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계란 연결되어 있는 물체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상대적 운동이 발생합니다. 그 말은 즉, 힘과 운동이 전달되고 변형됩니다. 나사와 너트, 지렛대 원리를 이용한 지레, 도르래의 회전 등이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구조는 더 복잡할 수도 덜 복잡할 수도 있는데 움직이는 요소들로 결합되어 구성이 되어 있거나 바퀴나 지레, 캠과 같은 단순한 기계적 요소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기계에 대해 책에 나오는 대로 암기해서 대답한 학생에게 교수는 “최고의 답안이네”라는 평을 내린다. 사실 후자의 학생이 대답한 기계의 정의는 자신의 정의가 아니라 책에 나오는 교과서적 정의다. 이미 정답이 정해져 있는 기계에 대한 정의를 누가 더 정확하게 그대로 기억해서 토해내느냐를 보는 시험이 바로 동일성의 반복에 근거한 교육이다.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는 차이의 반복과는 다르게 여기서는 이미 정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학생이 해야 될 유일한 숙제는 그 정의를 그대로 외우고 동일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개념의 재현이다. 개념이 정의되어 있는 기계적 본질과 성격을 그대로 토해낼 때 기계는 시공을 초월해서 동일하게 반복 재생산된다. 차이가 반복되어야 이전과 다른 정의가 탄생되고 그런 정의가 출현해야 이전과 다른 사유를 촉진하는 개념을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동일성이 패러다임에 갇혀 기존 개념을 무한 반복할 경우 다름과 차이는 사장되어야 할 악덕 관습이 될 것이다.   

  


동일성의 패러다임으로 바라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모든 개념은 관념의 파편이자 통념의 재생산일 뿐이다. 한 마디로 기존 개념으로 배우는 신념이나 새로운 다짐을 이끌어내는 집념을 유도하지는 못한다. 개념은 이전과 다른 사유를 촉진하는 일종의 생각의 양념이다. 개념이 담고 있는 의미가 정해져 있고 불변할 경우 개념을 통해서 새로운 지적 충격을 받는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특이한 신념을 포함하고 있는 개념은 이념이다. 개념은 만고불변의 정체성과 진리를 지니고 있지만 이념은 상황적 특수성과 한 개인의 주관적 신념을 담고 있다. 개념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이념은 상황과 시기에 따라 다른 신념을 포함한다. 어떤 개념을 만났을 때 별다른 지적 충격을 받지 않고 익숙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내가 접하면서 생각했던 의미를 능가하는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부란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는 개념 정의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은 없다. 학문이나 기술이 무슨 뜻인지로 모르는 사람에 공부에 대한 이런 정의는 무의미할 뿐이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공부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전과 다른 공부를 통해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으로 진출하기는 불가능하다. 공부에 대한 기존 개념을 그대로 간직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유일한 생각과 행동은 남보다 학문이나 기술을 더 빨리 배우고 익혀서 남다른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에 놓여 있다. 공부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이전과 다른 정의를 만나는 순간이다. 공부를 은유법으로 표현한 《공부는 망치다》는 충격 이전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왜 공부가 망치일까? 곰곰이 생각하다 우연히 만난 공부와 망치의 공통점에서 사유의 단서를 마침내 찾아낸다. 공부도 망치도 뭔가를 깨부수는 도구이자 수단이다. 망치는 못을 박는 도구도 되지만 원하지 않는 뭔가를 깨부수는 도구이기도 하다. 공부도 마차가지다. 기존 고정관념이나 타성을 새로운 공부를 통해 깨부순다.



내가 모르는 단어는 내가 모르는 세계다     


공부의 본질을 공자나 맹자, 또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처럼 위대한 성인이 정의한 의미도 의미심장할 수 있다. 공부라는 개념으로 사람들에게 낯선 지적 자극이나 충격을 주려면 공부에 자신만의 신념을 담은 이념으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개념으로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알고 있던 개념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거나 몰랐던 개념을 새롭게 깨닫기 때문이다. “삶의 보편적인 의미라는 것은 없으며 오로지 개별적인 상황이 지닌 유일한 의미만 있을 뿐, 그 의미는 첫째 사람마다 다르고 둘째 날마다 다르며, 정말로 시간마다 다르다.” 빅터 프랭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 에 나오는 말이다. 개념도 마찬가지다.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미를 들어보면 그때마다 다른 의미로 사용할 때 무한한 차이를 낳는 반복이 반복되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른 개념적 의미가 어떤 사연과 배경을 품게 되었는지를 아는 과정은 한 사람의 우주를 이해하는 일이다. “내가 모르는 단어는 내가 모르는 세계다. 하나의 단어를 잡으면 하나의 우주가 걸려든다.” 언어 탐식가 백우진의 《단어의 사연들》에 책 앞과 뒤표지에 나오는 말이다. 단어에 걸려든 우주가 사람을 놀라게 한다. 나에게 용접은 청춘을 불사른 아픔의 우주가 담겨 있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했던 용접에는 알 수 없는 분노와 어쩔 수 없는 한탄의 곡성이 엮여있고, 하기 싫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야 되는 강제적 명령이다. 용접은 나의 회색빛 청춘을 담고 있는 상징어다. 아직도 지나가다 용접한다는 가게 간판을 접하면 여전히 80년대 초반의 방황하는 젊음이 품고 있는 막연한 일상을 말없이 떠올리게 만든다. 한 여름의 폭염 속에서도 3천 도가 넘는 용접의 열기를 견디는 일은 차라리 불가마 속에서 땀을 빼는 사우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추운 겨울날 맞이하는 용접은 한기로 싸늘한 추위를 느끼는 내 몸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난로나 다름없었다. 똑같은 용접이지만 계절에 따라 지옥과 천국을 오르내리는 정반대의 스펙트럼에서 용접은 나의 청춘을 불태웠던 뜨거운 원망이자 분노의 상징이었다.     



한 회사가 경영위기에 처하자 대대적인 경영혁신을 선언하면서 대표이사는 모든 임직원들에게 회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전략을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냈다. 그 전문의 마지막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지금 기업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새로운 위기에 처해 있다.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난국을 타개하지 않으면 존립자체가 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한 위협요인이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런 미증유(未曾有)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모든 임직원은 안트레프레너(entrepreneur)로 거듭나야 한다. 안트레프레너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직장인으로 임했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서 스스로 오우너십(ownership)을 갖고 위기극복에 다 같이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회사 내에 산재한 지식을 한 곳으로 모으는 지식경영(Knowledge Management)을 추진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상실한다. 이제 정보와 지식은 물론 지혜를 축적, 우리 회사 특유의 핵심역량(Core Competence)을 개발해나가면서 경쟁사가 모방할 수 없는 단독적인 차이(Singular Difference)를 드러내지 않으면 고객과 시장은 우리를 외면할 것이다. 단독적인 차이는 벤치마킹(benchmarking)해서는 만들어낼 수 없다. 우리 회사의 고유한 경쟁력은 남들이 걸어가지 않은 길을 가는 패스 브레이킹(Path Breaking)에서 나온다. 호시우보(虎視牛步)의 정신으로 다 같이 한 방향으로 걸어갈 때 우리 회사의 비전은 반드시 실현된다고 믿는다.      


경영혁신 선언문을 이메일로 받은 신입사원은 빨간 줄로 표시된 단어의 뜻을 알 길이 없다. 학교 다닐 때 나름 사자성어 공부를 했다고 하지만 전대미문, 시시각각, 호시우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거기다 안트레프레너는 불어 같기도 하고 영어 같기도 하다. 오우너십은 주인의식을 의미하는 것 같긴 한데 왜 주인은 한 사람인데 우리보고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주인의식은 주인을 의식하라는 이야기인가? 지식과 경영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지식경영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그리고 핵심역량은 어떤 역량인지 알 길이 없다. 거기다 차이는 알겠는데 단독적인 차이는 어떤 차이를 말하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벤치마킹은 벤치에 앉아서 마킹을 그만두자는 것인지, 그리고 패스, 즉 길을 브레이킹, 파괴하자는 의미는 어떻게 하자는 주장인지 지금까지 내가 공부한 개념으로는 짧은 이메일 메시지이지만 모르는 개념이 천지다. 언어를 모르면 소통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당 공동체와의 소속감이 생기지 않는다. 언어는 공동체가 거주하는 집을 짓는 도구다. 언어로 집을 지었는데 그 집에 거주하는 구성원이 언어를 모르면 같은 집에서 연대의식을 나누며 살아갈 수 없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언어를 정복하는 사람이 세상을 정복한다. 언제나 언어가 문제다. 언뜻 생각해보아도 언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고는 거기서 멈추고 소통은 단절되며 공동체 의식도 형성되지 않는다. 아이디어가 아무리 많아도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해서 표현할 적확한 단어가 없으면 아이디어는 사장된다. 아이디어 현실로 구현시키려면 우선 단어부터 바꿔야 한다. 타이어는 갈아 끼우면서 언어는 왜 새로운 단어로 바꾸지 않는가. 단어가 없으면 그 순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단절되고 자기 입장에서 쉽게 단정해버린다. 달리 표현할 단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마추어는 언어 동원력에서도 초보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도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언어의 차이다. 아마추어는 언어가 빈약하다. 언어가 빈약하니 생각도 미천하고 생각도 미천하니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도 좁다. 프로는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도 기존 생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빠른 판단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생각과 언어로 주어진 문제를 다르게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아마추어는 기존 생각과 언어로 주어진 문제 상황을 묘사해보고 마땅한 대안을 모색하지만 틀에 박힌 테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아마추어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과 언어로 주어진 상황을 묘사하고 대안이 무엇인지를 기술해보려고 노력한다. 프로는 지금의 생각과 언어만으로는 주어진 문제 상황을 묘사하고 대안의 이미지를 구상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간파한다. 그래서 바로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 그 분야의 대가를 찾아가거나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다른 생각과의 부단한 접속을 시도한다.     


단어는 생각의 불씨를 되살리는 불쏘시개다     


“‘지금 자신의 시고 방식’은 자신에게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경험이나 사고의 양식이다. 그런데 눈앞에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한다는 건, 요컨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금 자신의 사고방식’이 쓸모없다는 뜻이다. 이는 페이퍼 나이프로는 생선포를 뜰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쓸모없는 도구를 만지작거리고 있어 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런 건 단호하게 버리고· 식칼로 바꿔 잡아야 한다.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란 요컨대 '페이퍼 나이프를 버리고 식칼로 바꿔 잡는 것‘이다”(112쪽). 우치다 타츠루의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을 언어로 바꿔서 다시 써봐도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지금 자신의 언어’는 자신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일상 언어나 책에서 배운 개념이다. 그런데 눈앞에 신기한 현상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 현상을 적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건, 요컨대 그 현상을 표현하는 데 ‘지금 자신의 언어’로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이는 틀에 박힌 언어로는 머릿속의 멋진 생각을 담아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틀에 박힌 언어를 만지작거리고 있어 봤자 색다른 생각을 멋지게 표현해낼 재간이 없다. 이럴 땐 타성에 물든 식상한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로 내 머릿속을 재정리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란 요컨대 기존의 식상한 개념을 버리고 새로운 개념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논리적 사고는 현재 가용한 언어적 깊이와 넓이에 비례해서 깊어지고 넓어진다. 지금 갖고 있는 개념으로는 스쳐 지나가는 상념을 포착할 수 있지만 보다 높은 사고력을 구사할 수 없다.      



논리적인 사람은 지금 동원 가능한 개념 사용능력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생각을 이전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 부단히 공부한다. 나의 사고방식에 부착되어 있는 문제나 한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 접속해서 그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를 배우는 길이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단어는 언젠가 내가 공부해서 또는 무의식 중에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 언어다. 지금의 단어로는 내 생각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단편적인 사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똑같은 현상도 다른 언어로 표현하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어떤 단어는 막혔던 하수구가 뚫리듯 복잡하게 꼬여 있는 생각을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단어는 이처럼 단호하고 날카롭다. 단어 사용이 단호하고 날카로운 사람의 사고는 명쾌하다. 사고가 명쾌한 이유는 사고에 걸맞은 단어를 선택해서 표현하기 때문이다. 단어 선택이 바로 내 사고의 성격과 방향까지도 결정해준다. 낯익은 단어는 익숙한 생각을 불러오지만 낯선 단어는 날 선 생각을 낳는다. 벼르고 별러서 골라낸 한 단어가 드디어 골머리를 앓던 생각의 물꼬를 터준다. 벼르던 언어가 벼리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떠오른다. 단어를 벼리면 벼린 단어가 어느 순간 내 생각을 기가 막힐 정도로 정밀하게 담아낸다. 언제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늙어가는 생각이 낡아지지 않도록 익숙한 단어가 낯선 개념을 잉태하도록 꾸준히 벼리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벼린 단어가 내 몸 안에 들어와 색다른 신념을 품은 낯선 개념으로 잉태되어야 우리의 생각도 새로운 생각의 자손을 출산한다. 단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떤 단어가 나가면 이전과 다른 사유의 지평을 열 수 있다는 걸 확신할 때 갑자기 튀어나온다. 단어는 그래서 꺼져가는 생각의 불씨를 되살리는 불쏘시개다.      


“나는 죽음의 공포에 삶의 욕구로 반응했습니다. 삶의 욕구는 낱말의 욕구였습니다. 오직 낱말의 소용돌이만이 내 상태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낱말의 소용돌이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글로 표현해냈습니다.” 헤르타 뮐러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의 일부다. 그는 《숨그네》에서 수용소의 배고프고 고달픈 생활을 시적 표현을 통해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명작을 썼다. “배고픔은 항상 있다. 늘 거기에 있으므로 제가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온다. 이 인과 법칙은 배고픈 천사의 손에서 탄생한 졸작이다. 배고픈 천사는 일단 나타나면 본때를 보인다. 정확도는 높다. 삽질 1회=빵 1그램”(96쪽). 헤르마 뮐러의 《숨그네》에 나오는 말이다. 삽질 1회마다 빵 1그램이 생긴다는 절묘한 표현 속에 빵을 먹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한 인간의 처절한 배고픔이 뼈마디마다 숨어 있다. 헤르타 뮐러는 “사실 배고픈 설움을 표현할 적절한 말은 없다”(28-29쪽)고 주장한다. 배고픔의 정도는 계량화시킬 수 없다. 오로지 배고픈 당사자가 몸으로 느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겪는 배고픔은 다양하게 표현될 욕망을 찾아 헤맨다. 그녀는 “배고픔을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입천장이 당긴다”(28쪽) 또는 “배고픈 천사는 입 안에, 내 천장에 오롯이 매달린다. 그건 배고픈 천사의 저울이다(97쪽)라는 표현 속에서 단어를 절묘하게 선택해서 배고픔을 시적으로 묘사해낸다. 배고픈 천사는 나의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배고픔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우아하게 다가간다. 게 눈 감추듯 배고픔을 해소하는 음식을 먹어치운다. 하지만 먹어치울 정도의 음식은 언제나 일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언저리 언어를 배우면 진저리 치며 진실을 깨닫는다.      


언저리에 머물러본 사람, 밑바닥 인생을 살아본 사람, 방황의 터널을 드디어 빠져나온 사람의 언어는 무거운 체중이 실려 있다. 그들의 삶을 모두 언어로 녹여낼 수 없지만 삶으로 앎을 증명해내려는 안간힘의 흔적과 얼룩이 언어에 고스란히 숨어 있다. 우리는 그런 언어에 숨어 있는 한 사람의 인생, 한 세상의 언어를 파고들어 의미의 껍질을 깨고 곱씹어 해석해내야 한다. 닫힌 세상, 막힌 혁신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 개념을 다른 의미로 재정의 하며,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 나에게 단어는 세상을 다르게 만나려는 단호한 언어이며, 틀에 박힌 생각의 파편을 의미의 거미줄로 엮어내려는 개념 창조의 원료이자, 사고가 쪼개지면서 색다른 생각을 종합적으로 구상해내려는 아이디어다. 언어에 대한 애정이 다른 삶을 살아가려는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언저리 언어를 배우면 진저리 치며 진실을 깨닫는다. 언저리 언어는 언저리 아픔과 사연을 담고 있다. 삶을 언어화시켰지만 그 언어에는 여전히 담기지 못하는 삶의 복잡성과 애매성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화시킬 수 없는 숱한 현장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언어의 세계로 탐구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우리의 언어 세계로의 여행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美)완성 교향곡이다. 언어의 세계로 떠나는 탐구 여행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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