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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과 '진담' 사이,
'상담'이 필요하다

모든 발언(發言)은 언제나 맥락을 배경으로 태어난다

농담과 진담 사이상담이 필요하다   

 

모든 발언(發言)은 언제나 맥락을 배경으로 태어난다. 어떤 맥락에서 그런 발언을 했는지를 알면 발언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발언이 이루어진 맥락을 거세하고 발언으로 드러난 텍스트 메시지만을 드러내면 발언자의 진의와 관계없이 심각한 의문의 표현으로 구설수에 오를 수 있다. 전달하는 사람은 청중이 재미있게 들을 수 있도록 성인 수준에 맞는 농담을 던진다.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전달자의 진의(眞意)와 진의에 대한 청중의 의미 해석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만약 강사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진의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할 때 농담은 진담으로 받아들여져 성적 비하 발언이나 청중을 무시하는 언사로 오해되는 경우가 생긴다. 농담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의미를 오해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농담이 어떤 맥락에서 통용되는지를 청중이 올바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똑같은 메시지라도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무슨 사연과 배경을 품고 있는지, 그것을 통해 공감하려는 강사의 전달 의도가 무엇인지를 청중이 이해하지 못할 때 여기서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은 심각한 오해의 다리를 건너가 돌이킬 수 없는 불통의 장벽을 만든다. 똑같은 메시지를 비슷한 청중을 대상으로 전달하는데 한쪽 청중은 폭풍 반응과 함께 무한 감동을 불러일으키지만 또 다른 청중의 일부는 심각한 오해로 받아들여 자신들을 무시했다는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보인다. 맥락을 파악할 것이라는 가정 위에 던진 화두가 맥락 없이 겉으로 드러난 텍스트 메시지만을 탈취해서 받아들일 때 오해를 넘어 청중 비하 발언으로 오점을 남길 수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후자의 입장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전달자의 설명이 부족했거나 전후좌우 맥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나 무드를 조성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도 해본다. 오해가 발생한 몇 가지 발언을 그것이 사용된 맥락과 함께 되짚어본다.



1. 와인(wine)바에 와인이 누워 있다. 왜 와인은 누워서 보관할까. 와인에서 '와'는 누울와(臥)자이기 때문이다. 와인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기 위해 은유법을 활용하여 표현한 재미난 상상력의 예에 해당된다. 와인을 ‘포도로 만든 서양술’이라고 정의할 때와 와인을 은유법을 사용하여 ‘와인은 여인’이라고 정의하는 경우, 와인에 대한 전자와 후자의 생각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와인을 여인으로 정의하기 위해 논리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좀 더 에로틱하게 상상하면서 은유법의 사용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이 과연 성적 비하 발언에 해당될까? 독서를 책을 읽는 행위라고 정의한 국어사전과는 다르게 ‘독서는 피클’이라는 은유법을 사용해서 정의할 경우 독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지평이 열린다. 이 말처럼 와인은 ‘포도로 만든 서양술’이라는 틀에 박힌 생각을 깨트리고 와인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와인은 여인이라는 은유법을 사용한 맥락을 충분히 설명, 청중의 이해를 도모하려는 진의가 왜곡되어 전달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메타포(metaphor), 즉 은유법은 겉으로 보기에는 닮지 않았는데 자세히 관찰하면 관계없는 두 가지 사이에 닮을 젊을 찾아내서 연결시키는 수사법이다. 독서와 피클, 와인과 여인도 겉으로 보기에는 닮은 점이 없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놀라운 공통점이 존재한다. 평범한 단어를 은유법을 사용하여 다시 정의하는 순간,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고 이전과 다른 생각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한다. 와인을 여인에 비유한 사실 자체가 듣는 사람에 따라 여성 비하 발언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2. 메리 올리버라는 작가가 휘파람 부는 사람에서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은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이라고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은 두 가지 능력이 아니라 한 가지 능력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질문이 많아진다. 사랑할 때는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비 오는 날 우산은 갖고 출근했는지 등 온통 사랑하ᆞ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하루 종일 질문을 한다. 하지만 사랑이 식으면 질문이 없어진다. 사랑할 때 자주 묻던 질문도 이제 욕이 포함된 무관심으로 표출된다. 예를 들면 밥은 먹었는지는 밥은 처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는 자뻐져 잤는지 등과 같이 사랑이 무관심으로 바뀌면서 사용하는 말도 바뀐다는 사례를 들었다. 사랑이 식어서 나오는 후자의 말을 듣고 청중은 자신들에게 욕을 했다고 오해한다. 사랑이 식었을 때 사람은 그만큼 상대방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끈끈한 관계는 경계가 생기고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긴다는 맥락으로 이해해주기를 기대했지만 기대는 사정없이 무너졌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자기 체험이 없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설명해서 의미를 머리에 꽂지만 자기 체험이 있는 사람은 감성적으로 설득하면서 의미를 심장에 꽂는다. 의미가 머리에 꽂히면 골 때리가 의미가 심장에 꽂히면 의미심장해진다고 했는데 ‘골 때린다’는 비하 발언으로 청중을 무시했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우리가 재미없는 이유 중의 하나로 재미있게 놀면 “놀고 자빠졌네”라는 비아냥 소리를 듣고 옆 사람과 장난하면 “너 지금 장난하냐?”라는 항의식 발언을 듣는다는 사례를 들었다. 이 사례도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놀지도 못하고 장난도 못 치고 엄숙하고 근엄하게 진지한 자세로 공부만 해서 재미없고 창의성이 부족해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농담으로 던진 화두였다. 이 역시 청중을 무시하는 욕설로 오해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3.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 책을 쓴 적이 있다. 인간은 나무만도 못하다는 점을 인문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의도가 일부 반영된 책이라고 설명했다. 영하 20도 되는 혹한의 겨울밤에 나무 옆에 가서 홀딱 벗고 하룻밤을 나무 옆에서 자고 나면 사람은 얼어 죽지만 나무는 얼어 죽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나무는 인간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전제와 가정으로 나무의 위대한 인문학저 교훈을 설명하면서 청중에게 던진 농담, “여러분은 나무만도 못한 인간이에요”라는 말이 진담으로 받아들여졌다. 과연 강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청중을 향해 나무만도 인간이라고 말했을까? 나무가 살아가는 방식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부각하기 위해 던진 농담 한 마디가 전후좌우 맥락을 떠나서 청중 비하 발언으로 낙인찍히는 순간이다. 나무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표현도 우리가 나무에게 많이 배워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한 반어적 표현인데 그냥 맥락 없이 받아들여여서 생긴 오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오해는 개념 간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발생했다. 병마개와 병뚜껑, 방망이와 몽둥이, 엉덩이와 궁둥이 등의 개념적 차이점을 대부분의 사람이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던진 “여러분은 거의 개념이 없으신 것 같아요”라는 말도 진담으로 받아들여져 심각한 오해의 불씨를 키운 발언이 되었다. 개념이 없는 인간이라는 말을 강사가 어떤 자세와 태도로 청중을 향해서 던지는지,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의도로 사용하려는지 의중을 파악했다면 그런 오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해’라는 말도 사랑이 싹트는 초반에 하는 말과 어느 정도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하는 ‘사랑해’와 사랑이 식어갈 때 하는 ‘사랑해’는 똑같은 말이지만 천지차이가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개념이 없는 인간, 생각이 없는 사람들만 왔다고 말하는 강사의 진의는 주어진 화두를 재미있게 풀어가기 위해 던진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표현들이다. 우리가 무의식 중에 사용하는 이런 흔한 말의 미묘한 차이를 모를 경우 우리는 생각을 적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개념 없는 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 오해의 불씨를 키운 것이다.  

  


4.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이미지를 보여준 다음 바로 숨기고 나서 방금 본 로댕과 똑같은 자세로 생각하는 자세를 취해보라고 요청했다. 우리가 흔히 봤지만 실제로 자세히 보지 않아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똑같은 자세를 취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청중에게 요구한 실험이다. 로댕은 오른쪽 팔꿈치를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청중은 편한 대로 오른쪽 팔꿈치를 그냥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로댕과 같은 자세로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런 청중들에게 농담 삼아 웃으면서 던진 말, “여러분은 생각이 없는 인간 같아요”라는 말이 청중 비하 발언으로 심한 항의를 받았다. 과연 강사는 청중들에게 진짜 생각이 없는 인간이라고 야단을 친 발언일까? 또 다른 사례도 곤혹스러웠다. 우리 생각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늘 다니던 곳에만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이런 생각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장스망(agencement)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영어로 번역하면 배치(arrangement)라는 의미다. 내가 마주치는 사물이나 환경과의 배치가 바뀌지 않으면 내 생각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1년 365일 중에서 여러분이 가장 자주 가는 곳 두 군데를 이야기해보라고. 아침에 학교 갔다가 저녁에 집에 간다는 대답이 나왔다. 그래서 화답한 말이 “학교에 갔다가 집에 가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되신 거예요”다. 우리 생각을 바꾸려면 우리가 자주 가는 곳을 바꿔야 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농담으로 여러분 학교에 안 가도 되는 날은 학교 가지 말고 집에 안 가도 되는 날은 자주 집에 가지 마세요라는 농담을 던졌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집에 가지 말라는 말을 했다고 청중이 화가 난 모양이다. 나의 진의는 우리가 자주 가는 곳을 바꿔야 우리 생각이 바뀐다는 의도로 말한 것이다. 강사가 집에 가지 마라고 한 말이 정말 청중들에게 집에 자주 가지 마라고 강권한 표현일까. 집사람이 집에 있으면 들뢰즈의 아장스망처럼 남편은 집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집사람과 집이라는 아장스망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남편으로 하여금 집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방법은 집에 자주 들어가지 말아야 한고 웃으면서 농담을 던졌건만 이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여 집에 가지 말라고 했다고 항의를 하는 청중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할 뿐이다.     



5. 지식을 창조하는 재미있는 방법을 융합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지식산부인과 의사라고 트위터 자기소개란에 써 놓았다. 그런데 한 의사가 나타나서 의사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일반 의사는 아니고 지식산부인과 의사라고 대답했더니 의사 자격증이 있냐고 물어봐서 정말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화답한 적이 있었다. “이 미친놈아 내가 만든 건데 무슨 자격증이 필요하냐?” 미친놈이라고 욕했다고 강사의 자질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어서 이런 의사가 우리 주변에 정말 많다고 이야기하면서 전문가일수록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하는 일에 대해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이 많다는 사례를 지식산부인과 의사를 예를 들어 설명하는 과정에서 “공감능력 없는 인간쓰레기”같은 전문가에게 당했던 사건을 재미있게 에피소드로 소개한 것이다. 공감 능력이 없는 인간쓰레기라는 표현도 거친 표현임을 인정한다. 다만 이런 말로 청중을 비하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 아님을 무슨 의도로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려는 진의를 조금이라고 이해하면 웃어넘길 수도 있는 표현이 아닐까? 강사가 정말 화를 내면서 청중에게 던진 말이 아니라 공감 능력이 없는 전문가 사례를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해 중간중간에 섞은 양념 같은 농담과 표현에 기분이 나빴다면 이 또한 무릎 꿇고 사과를 드려야 하는 게 맞는 것일까. 지식산부인과 의사 사건 이후에 또 다른 사람이 트위터에 나타나서 “윤봉길 의사도 의사냐?”라고 나를 공격하는 사람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이걸 물고 늘어지면서 윤봉길 의사가 정말 의사냐고 시비를 걸면서 한양대에 이런 무식한 교수님이 계신다는 막말을 했던 사람을 트위터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재수 없는 인간이 또 나타났다”는 표현을 쓰면서 농담을 한 것인데 이 말도 청중 비하 발언으로 항의를 받았다. 긍정적인 언어는 맥락이 없어지면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강사와 청중은 모두 어떤 맥락에서 무슨 의도로 저런 언어를 그 상황에서 사용했는지를 한 번쯤 더 생각해보면 서로 간의 오해와 불신의 싹을 자라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을까.     



6. 막걸리 하면 퍼뜩 떠오르는 단어를 생각해보라고 했다. 비 오는 날, 파전, 등산과 같은 말을 떠올렸다. 만약 우리가 막걸리에 대한 글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막걸리를 마시면서 연상되는 단어를 연결해서 글을 쓸 것이다. 막걸리를 등산 갔다 와서 비 오는 날 파전을 먹었던 추억이 떠오를 것이다. 우리가 막걸리에 대한 상상력이 이 모양 이 꼴인 이유는 막걸리를 늘 마시던 방식으로 마셨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발상이 아니라 연상이다. 막걸리에 대한 새로운 글을 쓰려면 막걸리와 관련되어 연상되는 단어를 바꿔야 한다. 예를 들면 막걸리 안주로 스테이크를 먹어보는 색다른 시도를 한다든지, “막걸리를 새벽까지 마시고 학교를 못 갔던 경험이 있어야” 막걸리와 새벽을 연결시켜 세계 최초의 새로운 글을 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반응은 “막걸리를 새벽까지 마시라”고 했다. 막걸리를 새벽까지 마시고 취해서 학교를 못 갔던 아픈 경험을 강조하기 위해 했던 발언은 역시 맥락성을 잃고 막말이라는 항변이 들어왔다. 이 말도 막걸리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쓰려면 이전과 다르게 막걸리를 새롭게 마셔야 한다는 경험을 강조한 표현일 뿐이지, 실제로 막걸리를 새벽에 마셔서 학교 가지 말라는 논리로 전달한 의도는 아니다. 그만큼 우리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막걸리를 마시지 않으면 막걸리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차원에서 농담으로 전한 사례인데 이 말도 진의와 다르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농담으로 던진 말이 진담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생긴 부담을 해소하는 방안은 무엇일까? 전달자가 던진 농담을 청중은 진담으로 오해하면서 생긴 문제로 인해 이해와 오해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이해해줄 것이라고 가정한 표현이 오해를 불러오고 청중 비하 발언으로 이어진 사례에서 커뮤니케이션에서 발생하는 생각지도 못한 사고(事故)를 심각하게 사고(思考)해보는 발판이 되었다. 농담과 진담 사이에 존재하는 심각한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상담도 요청해본다. 찬반양론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점은 강사는 본래 청중을 비하 또는 무시하는 발언을 한 의도가 없었다. 문제는 농담을 표현하는 방식과 그것이 사용되는 특정한 맥락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전제되지 않을 때다. 강사의 청중 이해 부족에서 생기는 문제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똑같은 농담도 어떤 청중에게는 통하지만 다른 청중에게는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강사의 농담이 농담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농담을 통해 전달하려는 진의를 청중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한 배경과 맥락적 정보가 청중의 수준에 맞게 제공되어야 한다. 강사의 의중과 의도는 청중에게 오리무중(五里霧中)으로 다가갈 수 있다. 강사의 의중과 의도를 청중이 오해하지 않도록 전달하기 위해서는 의미 이해에 적합한 사례나 에피소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 사례나 에피소드는 강사에게는 직접 겪은 당사자적 체험이지만 청중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낯선 경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농담과 진담 사이에 생긴 오해의 씨앗이 허심탄회한 상담을 통해 해소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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