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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다’는 붙여 쓰고
‘꿈 깨다’는 띄워 쓰는 이유

꿈 깨야 꿈꿀 수 있다!

꿈 깨야 꿈꿀 수 있다!

꿈꾸다는 붙여 쓰고 꿈 깨다는 띄워 쓰는 이유는?     

     

‘꿈꾸다’는 붙여 쓰고 ‘꿈 깨다’는 띄워 쓴다(65쪽). 김정선의 《동사의 맛》에 나오는 말이다. 왜 그럴까.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미묘한 차이다. ‘꿈꾸는’ 일은 ‘꿈’과 ‘꾸다’가 가까이 있어야 하고, ‘꿈 깨는’ 일은 ‘꿈’과 ‘깨다’가 멀리 있어야 그런 걸까? 꿈꾸는 일은 자다가도 꿀 정도로 언제 어디서든 쉽게 꿀 수 있기 때문이고, 꿈 깨는 일은 큰 맘먹고 용기 내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깨지기 때문일까. 꿈을 꾸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꿀 수 있기 때문에 가까이 붙어 다니지만, 한 번 꾼 꿈을 깨는 일은 쉽게 깨지지 않아서 꿈과 깨다는 거리가 멀어진 것이 아닐까. ‘꿈’과 ‘꾸다’는 좋은 사이라서 가까이 있고 싶어 하고, ‘꿈’과 ‘깨다’는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깨야 되니까 가까이 있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가까이 붙어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꾸던 꿈이 깨질 수도 있으니 아예 멀리 떨어져 깨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꿈을 꾸어 오려면 꾸어주는 사람과 꾸어오는 사람 사이가 좋아야 하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야 한다. 반면에 한 번 꾼 꿈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붙잡고 있는데 자꾸 그 꿈을 깨라고 하니까 그 사이가 멀어진 것은 아닐까.    

 


한 때 나는 고시를 공부해서 인생 역전을 꿈꾸었던 적이 있다. 공고생이 고시에 합격하는 꿈같은 이야기를 책에서 접한 후 바로 내가 갈 길이 여기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고시에 합격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자는 불온한 꿈을 품은 적이 있다. 꿈을 꾸는데 책 한 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발전소 밑바닥 청소를 해가며 힘든 인생을 살던 나에게 공고생의 고시 합격은 꿈같은 감동의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그 길로 고시를 향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사표를 써서 책상 속에 몰래 숨겨놓고 결단의 칼을 갈기 시작했다. 한 순간에 생긴 꿈이었다. 고시합격에 이르는 꿈같은 길이 내 인생을 밝혀줄 등불이었고 어두운 밤하늘을 비춰주는 북두칠성이었다. 꿈꾸는 인생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었지만 그 꿈이 잘 못된 꿈이었다는 걸 아는 데는 비교적 오랜 시간이 흘렀다. 우여곡절 끝에 한양대학교에 입학한 후 고시의 꿈을 이어가다 또 다른 결단의 순간을 맞이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 복학해서 고시를 향한 꿈이 과연 내가 가면 행복한 길인지를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우선 공부하는 과정 자체가 그리 즐겁지 않았다. 한정된 분량의 책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 독서의 반복이 나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줄 리가 만무했다. 내가 하면 신나는 일이 아니었다. 설혹 고시에 합격을 하더라도 그 후에 걸어가는 길이 심장을 뛰게 만들 정도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한 결과 또 한 번 인생의 방향 전환을 위한 결연한 결단과 결행을 감행했다. 고시 공부하던 책을 달밤에 쌓아놓고 기름을 부어 불살라버리는 역사적인 사건을 감행했다. 고시 합격을 통해 인생역전을 꿈꾸는 삶이 잘못된 꿈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꿈꾸는’ 인생이 ‘꿈 깨는’ 인생으로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바뀐 것이다. 고시 체험생 수기집을 읽고 ‘꿈꾸는’ 인생을 시작했지만 그 꿈이 잘 못된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 그 꿈을 깨는 데는 또 다른 오랜 방황의 시간이 필요했다. 한 번 꾼 꿈을 깨는 데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꿈이 깨지는 순간, 또 다른 꿈이 잉태되기 시작한다. 다시 꿈꾸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꿈을 ‘꾸는’ 일과 꿈을 ‘깨’ 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꿈을 꾸는 일은 없었던 꿈을 남에게 빌려오는 일이다. 바라던 꿈이든 그렇지 않든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나 사고를 만날 경우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 꿈은 없다가도 갑자기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 즉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는 각성 사건을 경험하는 순간, 평생을 통해 꾸어야 할 꿈이 갑자기 생기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그 꿈이 잘 못된 꿈일 수도 있음을 또 다른 각성 사건을 통해 뒤늦게 깨달을 수도 있다. 한없이 가까이 붙어있던 '꿈꾸기'가 어느 순간부터 그 꿈이 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꿈은 ‘꿈꾸기’를 포기하고 방황을 거듭하면서 ‘꿈꾸기’는 ‘꿈 깨기’로 방향 전환을 시작한다. 내가 꾸었던 꿈이 진정한 나의 꿈인지를 멀리서 바라보기 위해 ‘꿈’과 ‘깨기’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아니라 밀어내는 힘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꾸었던 꿈이 깨지는 아픔을 경험하면서 꿈과 깨기는 떨어져서 서로의 아픔을 온몸으로 경험하다 다시 꿈을 찾는 순간이 다가온다. 그때 ‘꿈’은 또다시 ‘꾸기’를 시작해서 ‘꿈꾸는’ 인생의 또 다른 서막을 열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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