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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쓸모’는
‘언어의 쓸모’가 결정한다

인격(人格)은 언어 사용의 품격, 언격(言格)이 결정한다

사람의 쓸모는 언어의 쓸모가 결정한다.


지금보다 쓸 모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언어의 쓸모를 바꿔야 한다. 언어의 쓸모를 다르게 바꾸면 사람의 쓸모도 바뀐다. 쓸모가 다른 사람은 역시 언어의 쓸모가 다르다. 언어의 쓸모는 다양한 생각 또는 독특한 생각을 다른 사람이 의미심장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기만의 방식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방식이다. 언어의 쓸모가 다른 사람은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언어를 구사한다. 많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생각이지만 그 생각을 어떤 언어로 동원해서 표현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생각으로 대접받는다. 자기만의 언어를 창조한 사람이 그 누구도 걸어가지 않은 길을 가는 선구자다.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은 자기 방식으로 세계를 재창조한 사람이다. 그들은 자기 언어로 자기 생각을 가장 독창적으로 표현한 사람이다. 언어를 쓸모 있게 다루는 사람이 쓸모 있는 사람으로 기억된다. 생각의 쓸모는 언어의 쓸모가 결정하고 언어의 쓸모가 사람의 쓸모를 결정한다. 내가 특정 단어를 모르면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세계도 당연히 모른다. 내가 모르는 단어는 곧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세계도 모른다는 뜻이다. 세계를 다르게 보려면 다르게 바라보는 생각의 매개체, 언어를 바꿔야 한다. 내가 어떤 언어적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언어는 세상을 내다보는 안경이다. 사람은 가끔씩 생각이 맴돌다가 밖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경우가 있다. 언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꺼져가는 생각의 불씨도 되살리는 불쏘시개다. 맴도는 생각과 적확한 언어가 마주치는 순간 생각의 불씨는 되살아나고 상상력은 날개를 달고 비상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언어의 쓸모는 극대화되고 사람의 쓸모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의 품격, 즉 언격(言格)이 그 사람의 인격(人格)을 결정하는 이유다. 인격을 높이고 싶다면 사용하는 언어의 품격을 높이면 된다. 



내가 모르는 단어만큼 세계도 알 수 없다


만약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각한 바를 표현할 수 없고 생각한 바를 표현할 수 없으면 세상의 모든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 때문에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내가 세상을 내다보는 세계의 한계를 규정한다. 내가 모르는 단어만큼 세계도 알 수 없다. 단어를 모르면 그 단어가 표현하는 세계도 모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다면 인간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관점을 가질 수 없다. 언어는 그래서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The limits of my language are the limits of my worlds)”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인간이 단어를 통해, 말을 통해 표현할 수 없는 것 이상의 고차원적 생각이란 존재치 않는다. 철학자들이 이전 철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함과 동시에 또는 이전 철학의 한계와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새로운 철학적 사고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이유다. 기존 개념으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표명하는 데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한계를 극복하고 철학적 입장을 대변할 적절한 개념을 창조한다. 이런 개념 창조의 역사가 바로 철학의 역사다. 철학적 문제의식을 적절하게 표현할 만한 언어가 부족하면 철학자가 고심 끝에 개념을 창조하듯, 내가 체험한 특정한 깨달음을 적절하게 표현할 개념이 부족하면 자기만의 신념이 담긴 개념을 창조한다. 기존의 개념으로는 그런 색다른 체험을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개념이 부족하다면 색다른 체험은 그저 한 사람의 개인적인 기억으로 끝난다. 개인의 기억이 집단적 추억으로 공유되기 위해서는 체험적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면 이전과 다른 개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언제나 세상은 내가 보유한 개념적 넓이와 깊이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을 뿐이다. 언어의 한계가 사고의 한계이며, 사고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로 결정된다.



언어의 한계가 곧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한계를 결정한다. 이 말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면 인식의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언어의 한계를 정복하는 사람이 세계의 한계를  정복한다. 언제나 언어가 문제다. 언뜻 생각해보아도 언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고는 거기서 멈추고 소통은 단절되며 공동체 의식도 형성되지 않는다. 아이디어가 아무리 많아도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해서 표현할 적확한 단어가 없으면 아이디어는 사장된다. 아이디어 현실로 구현시키려면 우선 단어부터 바꿔야 한다. 타이어는 갈아 끼우면서 언어는 왜 새로운 단어로 바꾸지 않는가. 단어가 없으면 그 순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단절되고 자기 입장에서 쉽게 단정해버린다. 달리 표현할 단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마추어는 언어 동원력에서도 초보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도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언어의 차이다. 아마추어는 언어가 빈약하다. 언어가 빈약하니 생각도 미천하고 생각도 미천하니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도 좁다. 프로는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도 기존 생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빠른 판단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생각과 언어로 주어진 문제를 다르게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아마추어는 기존 생각과 언어로 주어진 문제 상황을 묘사해보고 마땅한 대안을 모색하지만 틀에 박힌 테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아마추어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과 언어로 주어진 상황을 묘사하고 대안이 무엇인지를 기술해보려고 노력한다. 프로는 지금의 생각과 언어만으로는 주어진 문제 상황을 묘사하고 대안의 이미지를 구상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간파한다. 그래서 바로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 그 분야의 대가를 찾아가거나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다른 생각과의 부단한 접속을 시도한다. 여기서 습득한 색다른 개념으로 복잡한 생각을 순화시켜 쉽게 표현하거나 어려운 생각을 명쾌하게 정리한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생각의 차이는 결국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의 차이다. 



언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이다


하나의 언어에 꽂히면 꽂힌 언어대로 세상을 꽃피운다. 지식과 생태학이 만나는 순간 세상은 지식생태학자의 눈으로 채색된다.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지식의 창조와 공유, 그리고 활용과 소멸과정을 바라본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회와 하나의 커다란 생태계로 묶여 돌아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호혜적 공동체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미물에 지나지 않았던 생명체의 움직임이 미묘한 미동에 불과했지만 그 움직임이 종국에는 거대한 파장을 일으킬 잠재력으로 보인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의 정체가 떨어진 나뭇잎이 아니라 생태계의 거대한 순환에 동참한 위대한 결단으로 보인다. 흔들리는 생명체의 모든 움직임이 살아가려는 안간힘으로 읽힌다. 불타는 단풍이 혹한의 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자신의 전부를 불태우는 열정으로 보인다. 불타는 단풍을 떨궈내고 나목으로 혹한의 겨울을 맞이하는 나무를 보면 새봄의 희망을 싹 틔우려는 결연한 의지로 이해된다. 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저마다의 위치에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을 하고 있다는 각성이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험한 발상이었음을 각성하게 만들어준다. 어떤 언어적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언어는 콩깍지다. 언어라는 안경을 끼면 세상은 그때부터 내가 보고 싶은 방식대로 보인다. 본래는 언어는 편견의 산물이다. 독립된 공간에서 태어난 중립적인 언어는 없다. 모든 언어는 언어에 담긴 개인의 주관적 관심과 시대적 문제의식의 잉태하고 태어난다. 세상을 남다르게 보기 위해 자기만의 언어를 창조한다. 창조된 언어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안경으로 작용한다. 내가 창조한 언어에 담긴 문제의식대로 세상의 문제는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 어떤 철학과 열정을 담아내느냐에 따라 근거 없는 관념도 나의 신념으로 재탄생된다. 나의 신념이 반영된 언어를 사용하면 그 순간부터 세상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대로 보인다.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을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는 언어를 가지려는 이유다. 이들은 모두 상상력과 창의력이 남다를 뿐만 아니라 색다르다. 색다른 생각을 매개로 다른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은 독창적인 언어가 필요하다. 상상력과 창의력도 언어가 없으면 공상과 허상, 망상과 몽상으로 전락한다. 위대한 상상이 날개를 달고 비상하려면 위대한 언어와 짝을 이루어야 한다. 언어로 짝을 맞추지 못하는 생각은 죽은 생각이다. 생각에 언어라는 옷을 입혀주어야 비로소 세상으로 나와 빛나기 시작한다. 모든 생각은 언어가 지배하고 언어는 생각을 창조한다. 언어 없이 사고 없고 사고 없이 창조 없다.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꿀벌은 밀랍으로 집을 짓고 살지만 사람은 개념으로 집을 짓고 산다.” 내가 어떤 개념으로 집으로 짓고 살아가는지에 따라 내 생각도 다르게 성장한다. 니체의 주장은 “언어는 존재의 집”(220쪽)이라고 규정한 하이데거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존재가 머무는 집이 언어라는 이야기는 어떤 언어로 집을 짓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생각과 삶도 달라진다는 의미다. 희망의 언어로 집을 지으면 희망적인 존재가 되고 절망의 언어로 집을 지으면 절망적인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이 말은 인간의 사고 수준은 언어 수준과 사용 방식이 결정한다는 말이다. 언어는 공동체가 거주하는 집을 짓는 도구다. 언어로 집을 지었는데 그 집에 거주하는 구성원이 언어를 모르면 같은 집에서 연대의식을 나누며 살아갈 수 없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언어를 모르면 소통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당 공동체와의 소속감이 생기지 않는다. 



단어는 생각의 불씨를 되살리는 불쏘시개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단어는 언젠가 내가 공부해서 또는 무의식 중에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 언어다. 지금의 단어로는 내 생각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단편적인 사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똑같은 현상도 다른 언어로 표현하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어떤 단어는 막혔던 하수구가 뚫리듯 복잡하게 꼬여 있는 생각을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하지만 내가 익힌 단어는 이미 오래전에 배운 예전의 단어들뿐이다. 이때부터 생각이 틀에 박이기 시작한다. 틀에 박힌 언어로는 머릿속의 멋진 생각을 담아낼 수 없다. 틀에 박힌 언어를 만지작거리고 있어 봤자 색다른 생각을 멋지게 표현해낼 재간이 없다. 이럴 땐 타성에 물든 식상한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로 내 머릿속을 재정리해야 한다. 기존의 식상한 개념을 버리고 새로운 개념으로 무장하지 않는 이상 색다른 생각을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리의 사고는 현재 가용한 단어 사용의 깊이와 넓이에 비례해서 깊어지고 넓어진다. 틀에 박힌 신념을 품고 있는 개념으로는 스쳐 지나가는 상념을 익숙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그친다. 하지만 보다 높은 사고력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불씨를 되살리는 색다른 단어가 필요하다. 자신이 아무리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어도 그 생각을 적확한 언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지 못한다면 사상누각으로 전락하는 생각일 뿐이다. 위대한 생각은 생각 자체로 증명되지 않는다. 위대한 생각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생각은 언어라는 옷을 입어야 한다. 똑같은 생각도 어떤 언어라는 옷을 입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식된다. 위대한 생각은 위대한 언어를 만났을 때 비로소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창조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언어는 생각을 현실로 바꾸는 마법사와 같다.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생각은 세상으로 태어나기 이전의 관념이나 마찬가지다. 생각에 걸맞은 단어를 만나는 순간 아이디어는 불꽃을 튀기며 기존 세상과 단절하고 비상하는 디딤돌이 된다. 



단어는 이처럼 단호하고 날카롭게 생각을 담고 있는 그릇이자 매개체다. 단어 사용이 단호하고 날카로운 사람의 사고는 명쾌할 뿐만 아니라 촌철살인의 지혜를 담는다. 사고가 명쾌한 이유는 사고에 걸맞은 단어를 선택해서 표현하기 때문이다. 단어 선택이 바로 내 사고의 성격과 방향까지도 결정해준다. 낯익은 단어는 익숙한 생각을 불러오지만 낯선 단어는 날 선 생각을 낳는다. 벼르고 별러서 골라낸 한 단어가 드디어 골머리를 앓던 생각의 물꼬를 터준다. 벼르던 언어가 벼리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떠오른다. 단어를 벼리면 벼린 단어가 어느 순간 내 생각을 기가 막힐 정도로 정밀하게 담아낸다. 언제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늙어가는 생각이 낡아지지 않도록 익숙한 단어가 낯선 개념을 잉태하도록 꾸준히 벼리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벼린 단어가 내 몸 안에 들어와 색다른 신념을 품은 낯선 개념으로 잉태되어야 우리의 생각도 새로운 생각의 자손을 출산한다. 익숙한 세상을 낯설게 보려면 거기에 상응하는 언어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내 생각이나 느낌을 적확하게 담아내는 단어를 사용할 때 갑자기 불꽃이 튀면서 발상은 새로운 관문을 뚫고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날아간다. 잠자는 생각에 파란을 일으키는 단어가 날아들면 생각은 불꽃을 튀기며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비상하기 시작한다. 단어는 그래서 꺼져가는 생각의 불씨를 되살리는 불쏘시개다. 나에게 단어는 세상을 다르게 만나려는 단호한 언어이며, 틀에 박힌 생각의 파편을 의미의 거미줄로 엮어내려는 개념 창조의 원료다. 단어는 나아가 틀에 박힌 생각을 흔들어 깨우는 촉매제이자 꺼져가는 생각의 불씨를 되살리는 촉진제다. 단어에 대한 깊은 관심과 남다른 애정이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려는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인격(人格)은 언격(言格)이 결정한다.


한 사람의 품격을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의 언어를 보면 된다. 언어의 품격, 즉 언격(言格)이 그 사람의 품격을 좌우한다. 품격을 높이고 싶은가? 방법은 하나다.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을 언어의 품격을 높이면 된다. 사용하는 언어가 미천한 사람의 품격은 보나 마나다. 천박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경우는 없다. 생각과 느낌은 모두 언어를 매개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언어 사용 수준이 한 사람이 인품을 가늠하는 수준으로 작용한다. 천박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생각도 미천하고 인격은 무너져 있다. 사용한 언어는 빈약해지고 사고는 더불어 천박해진다. 천박한 사람은 천박한 사람과 어울린다. 천박한 언어 공동체가 결성되는 셈이다. 여기서 주고받는 언어가 그 공동체의 사고 수준을 결정한다. 언어 없는 생각의 표현은 발설이나 낭설에 불과다. 사고의 정련은 언어의 조탁과 단련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것도 고급언어를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익힌 언어 사용 습관이 결정한다. 정련된 언어 없이 생각하려는 사람, 감동적인 언어 없이 꿈을 꾸는 사람, 가슴 뛰는 언어 없이 성공을 쟁취하려는 사람에게 미래는 걱정과 우려를 넘어 심각한 위기와 암담한 미래가 그려질 뿐이다. 깊은 사고와 사려 깊은 행동, 나아가 독창적인 생각과 경이로운 성취의 뒤안길에는 언어가 자리 잡고 있다. 그 비밀의 열쇠를 캐내는 사람만이 나를 중심에 세우고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간다. 



요즘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생각 좀 해보자”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여 비교하고 분석해서 따져보는 전두엽 기능이 마비상태다. 인스턴트 정보, 현란한 영상과 감각적 메시지가 후두엽에 들어왔다가 전두엽으로 이동하기도 전에 또 다른 정보가 후두엽으로 입력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제 뇌는 인스턴트 정보에 팝콘 튀듯이 반응하는 팝콘 브레인으로 변질되어 간다. 뇌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몰입해서 생각하는 기능을 상실해간다는 각종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깊은 사색을 하면서 책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언어를 습득하는데 책은 거의 읽지 않고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이나 이미지로 생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텍스트에 담긴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 단어나 개념이 품고 있는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생각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문맥 속의 특정 단어나 개념의 의미를 포착한다.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으로 공부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영상이나 이미지로 찰나의 정보를 포착할 뿐이다.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메시지나 직설법으로 전달되는 의미가 와 닿지 않으면 바로 다른 사이트로 옮겨간다. 책도 영상 보듯이 훑어보다 막히는 문장이나 어려운 개념이 나오면 바로 덮어버린다. 읽지 않으니까 개념이 없어지고 개념이 없으니 책이 안 읽히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개념이 없으니 생각과 느낌을 달리 표현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늘 틀에 박힌 방식으로 생각을 밀어내고 감정을 발설한다. 점차 사람이 천박해지기 시작한다. 인격이 없어지는 이유는 사용하는 언어의 품격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언어 사용 방식과 수준이 생각하는 방식과 수준을 결정하고 그것이 곧 한 사람이 걸어가는 자기만의 방식을 좌우한다. 언어 경작을 통해 내 생각을 거듭나게 만들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언어의 세계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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