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새겨진 언어적 상처와 문신의 역사를 들여다보다
언어는 상처이자 문신이다(1부):
내 몸에 새겨진 언어적 상처와 문신의 역사
삶의 얼룩과 무늬가 언어의 비늘로 몸에 새겨진다
한 아이가 엄마의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오며 울음을 터트린다. 아이가 세상으로 보내는 첫 번째 욕망의 언어다. 편안했던 안전지대인 엄마 뱃속에서 험난한 세상으로 나오면서 마주친 두려움을 온몸으로 감지하는 순간 아이는 자신을 돌봐달라고 우렁차게 울어댄다. 거의 절규에 가까운 아이의 울음은 처음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상징의 언어다. 나오자마자 본능적으로 엄마 젖을 빨면서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을 울음과 표정으로 표현하면서 엄마와 미미하지만 작은 소통을 시작한다. 늘 자신의 곁에는 엄마의 포근한 품이 기다리고 있음을 감지한 어린아이는 울음과 더불어 웃음이라는 언어를 배우고 점차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babbling)를 시작한다. 옹알이는 생후 4~6개월의 영아가 주어진 공동체가 사용하는 구체적인 단어나 문장 이전에 아이기 반복해서 표현하는 동일한 또는 다양한 소리를 말한다. 옹알이는 단순한 울음이나 웃음소리가 아니고 아이가 언어를 배우는 전 단계에서 시도해보는 음성 놀이다. 아이는 다양한 옹알이를 엄마와 주고받으면서 자신이 내는 옹알이에 재미를 느낀다고 한다. 이런 옹알이를 내면 엄마가 거기에 맞게 반응하고 강화 자극을 제공해줌으로써 아이는 옹알이를 반복한다. 옹알이는 아이에게 구체적인 언어를 표현해서 소통하기보다 엄마와 재미있게 시간을 만들어가는 놀이다.
아이가 옹알이를 할 때 엄마가 어떤 반응을 보여주는지에 따라 아이의 옹알이 유형과 방식은 달라진다. 엄마는 아이의 옹알이를 가까이서 몸으로 감지하고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아이가 옹알이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욕망의 물줄기를 잘 포착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의 옹알이가 요구하는 욕망에 반하는 방향으로 반응을 보여주면 아이는 더 큰 울음소리로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님을 표현한다. 점차 아이는 자신의 옹알이로 엄마와 소통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방법을 터득해나간다. 영아기를 거쳐 유아기를 통과하는 시기에 아이는 해당 공동체가 요구하는 언어 사용방법을 몸으로 익히며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시작한다. 나는 어린 시절을 충북 음성에서 자랐다. 중학교 때까지 학교 가는 시간을 빼고는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겨울에는 비닐하우스로 상추와 토마토, 오이와 각종 야채와 과일을 재배하면서 농경체험을 몸으로 익혔다. 소를 들판으로 끌고 나아가 풀을 뜯어 먹이는 동안 나는 풀밭에 누워 맑은 하늘을 보며 무한 상상을 즐기기도 했다. 호미로 밭을 매고, 쟁기로 밭을 갈고, 낫으로 풀과 벼를 베고, 삽으로 흙을 고르는 일을 하며 몸으로 농기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때 배웠던 수렵, 어로, 채취, 농경 관련 언어는 나의 유년시절 언어적 비늘을 만들어 내 몸에 각인시켰다. 나의 생태학적 상상력을 잉태한 언어적 사유도 이 당시에 자연과 함께 지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새겨지는 것처럼 사람의 몸에는 언어의 비늘이 새겨진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누구와 무슨 경험을 축적하며 살아왔는지에 따라 내 몸에 새겨지는 언어의 비늘도 달라진다. 언어의 비늘은 내가 살아가면서 경험한 슬픔이나 아픔의 얼룩과 즐거움과 기쁨의 무늬로 직조된다. 내리막과 오르막, 실패와 성공, 절망과 희망, 혼돈과 질서, 밑바닥과 정상, 걸림돌과 디딤돌, 배경과 전경, 어둠과 밝음처럼 삶은 음양(陰陽)이 연주하는 이중주곡이다. 집안 사정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국비로 운영되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나는 새로운 언어적 상처를 받으며 새로운 용어를 익혀야 했다. 내 전공이 전기용접인 데다 한국전력에서 운영하는 특성과 공고라서 학교에서 배우는 거의 많은 단어가 전기를 만들고 공급하며 통제하고 조정하는 언어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전기 용접을 전공으로 선택하면서 몸으로 용접기술을 익혔다. 전기용접과 가스용접, 용접할 때 용접봉을 녹여 철판을 붙일 때 위에 생기는 슬래그(slag), 용접 시 사방으로 튀는 불꽃을 스패터(spatter)라는 용어를 배운 것도 용접을 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용접 작업에서 용착 부분에 생기는 띠모양의 볼록하게 된 얼룩과 무늬를 비드(bead)라고 한다. 용접이 얼마나 정교하게 잘 되었는지를 판단할 때 겉으로 드러난 비드를 보면 알 수 있다. 비드는 물고기 비늘처럼 생겼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새겨지고 용접한 흔적에 비드가 얼룩이나 무늬로 새겨지듯, 사람의 몸에는 그가 경험하면서 배운 언어적 얼룩과 무늬가 몸에 상처로 아로새겨진다.
용접공의 세계에 고시 언어가 각인되다
후배 구타 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맞고 교무실에 반성문 쓰면서 보냈던 회색빛 청춘은 급기야 나를 교문 밖의 음주 세계로 끌어냈다. 당시에 마셨던 소주와 동해 백주(소주와 고량주 사이의 알코올 함유량을 지닌 술), 그리고 양주를 마실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해서 마셨던 캡틴 큐나 하야비치 등을 개포동 달밤을 벗 삼아 포장마차에서 마셨던 추억은 양지의 언어보다 음지의 언, 예를 들면 좌절과 절망, 밑바닥과 걸림돌, 어둠과 배경에 상응하는 언어로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했었다. 졸업 후 평택화력발전소에 근무하면서 이어졌던 밤무대와 유흥가 언어는 회색빛 청춘의 그늘을 아련한 삶의 얼룩으로 내 몸에 아로새겨주었다. 만나는 사람이 발전소 기능공과 전기 생산 관련 기술자들이며 그들의 삶의 행동반경은 틀에 박힌 일상의 반복을 넘어설 수 없었다. 나 역시 그들과 어울리며 지냈지만 희망과 용기의 언어보다 좌절과 절망의 언어를 몸으로 배웠으며, 긍정과 인정이나 도전보다 부정과 불평,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얼룩진 생각과 언어로 질풍노도의 20대를 보냈다. 정상에 오른 사람이 주고받은 고급언어보다 밑바닥을 인생을 살면서 현실을 탓하고 불평불만을 터트리는 언어로 불우한 인생을 원망하는 언어가 내 삶을 지배했다. 그러다 운명적인 책 한 권을 만나면서 내 인생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했다. 밥 먹고 회사 출근하고 퇴근해서 술 마시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꿈을 꾸며 비상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장본인은 바로 책 한 권이었다.
“내 유년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되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우리들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을 아무도 보지 못한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균열은 다시 늘어난다. 그것들은 치료되고 잊히지만 가장 비밀스러운 방안에서 살아 있으며 계속 피 흘린다”(26쪽).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나 역시 운명의 칼자국과 방황으로 생긴 균열은 깊은 감정의 골로 내 몸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하지만 내가 만난 한 권의 책은 그 어떤 칼로 새긴 자국보다 강렬했다. 고시 체험 수기집이었는 데 그 속에 공고생이 고시 패스한 수기를 읽고 지금까지 생각했던 운명의 향방이 하루아침에 결정타 한 방을 맞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길로 좋아하던 술을 끊고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했다.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을 가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나의 사고체계에 고시 관련 언어들이 입력되기 시작했고 대학입시를 위해 공부해야 될 수많은 과목을 접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대강 배웠던 국영수는 물론이고 고문(古文)이라는 과목은 나에게 그야말로 고문(拷問)의 언어로 다가오면서 심한 언어적 상처를 남겼다. 전기용접과 발전소 관련 언어로 가득 찼던 내 머리는 종교적 개종을 하면서 새로운 언어가 입력되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온통 혼돈의 도가니였지만 고시 합격 후에 펼쳐질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벌써 하늘을 날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에 입학한 사건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방향 전환의 계기이자 이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운명이 바뀌는 디딤돌이었다. 사실은 법학과에 진학해서 사시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대학 입학학력고사 점수가 나오지 않아서 교육분야 행정고시를 보려고 교육 관련 학과를 찾다가 만난 학과가 교육공학과였다. 공돌이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는 교육공(工) 학과의 ‘공(工)’을 보는 순간 말없는 교감이 이루어지면서 포근한 연대를 나 혼자 생각하게 되었다. 때로는 잘 못 탄 기차가 올바를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는 파울로 코엘료의 말이 생각난다. 진로를 결정하고 진학을 결심한 게 아니라 내 학력고사 점수로 갈 수 있는 곳을 찾다가 교육공학과로 진학하게 된 운명적인 판단과 선택이 오늘의 나를 만드는 우발적 사건이었던 셈이다. 진로에 맞는 진학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진학 후에 진로를 찾아가는 결정적 사건이 오늘의 나를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교수의 길로 안내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를 한양대학교로 이끌었던 고시를 향한 집념은 복학 후에 다시 한번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진도는 나가지 않고 재미없는 공부를 계속해서 합격한 들 내 인생이 과연 행복할 것인지 의문을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의 두 번째 운명을 바꾸는 역사적 사건을 감행한다. 고시 공부하던 책을 달밤에 밖에 쌓아놓고 기름을 부어서 불살라 버리는 일명 분서갱유 사건을 감행한다. 그 사건 이후로 내 머릿속에 박혀있던 고시 관련 각종 법률용어가 한꺼번에 빠져나가고 인문학적 사유에 상처를 내는 새로운 언어로 다시 빈 머리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한 분야에 빠지면 언어의 콩깍지가 끼기 시작한다
고시를 포기한 이후 내 머리는 교육공학 전공 언어와 교육학 관련 개념, 그리고 인문과학적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다양한 문사철(文史哲) 관련 책을 읽으면서 물갈이를 시작했다. 교육(education)과 훈련(training), 교수-학습(teaching-learning), 수업(instruction), 효율성과 효과성(efficiency and effectiveness), 체계적인 수업(systematic instruction), 수업 설계(instructional design), 교육목적과 목표(educational goals and objectives), 교육내용과 방법(educational content and menthod) 그리고 수업 매체(insteuctional media), 교육평가와 피드백(educational evaluation and feedback), 교육혁신과 전파(educational innovation and diffusion of innovation)를 비롯해서 교육학 관련 유관 과목을 공부하면서 나의 언어는 교육학적이고 교육공학적인 언어 편중으로 내 사유체계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교육을 매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공부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고 그걸 매개로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치 있는 일임을 몸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잘못 탔던 기차가 어느새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데리고 가고 있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은 교육학 또는 교육공학적 관점으로 처리된 패러다임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대상으로 상대는 물론 세상을 바꾸는 교육이야말로 나의 전부를 걸고 평생을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라는 생각이 내 몸을 파고들어 관통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전공 책을 중심에 두고 관련 논문이나 인접 유관 분야의 다른 책을 같이 읽어가면서 깊이 파고드는 개념을 습득함과 동시에 이전과 다른 관점으로 내 분야를 들여다보는 인식의 넓이를 확산하는 공부를 계속했다. 용접공이 주로 보고 듣고 배웠던 언어의 세계에서 고시의 세계로 탈바꿈을 하면서 청소되었던 내 머릿속은 이제 또 다른 언어로 물갈이를 시작했다.
이홍우 교수의 《교육의 목적과 난점》과 《교육과정 탐구》는 교육공학적 사유에 물든 틀에 박힌 사고에 교육의 본질을 다시 고민하게 만드는 교육학적 상처를 남겨주었다. 이홍우 교수가 번역한 존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은 경험의 본질에 입각한 교육의 올바른 방향성에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윤석철 교수의 《프린시피아 매네지멘타》와 《삶의 정도》를 통해 경영학적 상처를 받았으며, 윤노빈의 《신생철학》을 통해 관념적인 철학자에게 날리는 통렬한 피와 땀과 눈물의 철학적 상처를 받았다. 박이문 교수의 《하나만의 선택》과 일련의 시리즈 전집을 통해 오로지 공부 그 자체의 의미를 두고 재미있게 공부해가는 철학도의 가슴 뛰는 탐구 여정을 고스란히 맛보았다. 김영민 교수의 글쓰기 철학이 담긴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을 통해 서구적 형식 중심의 논문 글쓰기 방식에서 탈피하여 잡된 글쓰기 방식을 통해 사유체계를 구축해나가는 인문학적 다른 글쓰기의 전형을 배웠다. 글쓰기는 이렇게 해도 된다는 문신을 온몸에 새기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어령 박사의 《디지로그digilog》를 통해 문명을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통합적 사유의 상처를 받았으며 《보자기 인문학》과 《가위바위보 문명론》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인문학적 통찰력과 수사학적 충격을 받았다.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담론》, 《처음처럼》 등을 통해 제시하는 개인과 사회의 역사적 관계를 꿰뚫는 동양고전의 지혜는 내 사유체계의 관계론적 혁명을 일으켰다. 신영복 교수의 저작으로부터 배운 언어적 충격은 관계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관계론적 사유였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는 없다.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서 존재 가치를 지닌다.
석사과정 공부할 때 나의 학문적 언어는 두 번의 큰 충격을 받으며 전혀 다른 언어로 공부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 주인공이 바로 프리초프 카프라다. 그가 쓴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개정판)》,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개정판)》, 《생명의 그물》은 현대 물리학을 동양철학 입장에서 재조명하거나 유기체제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면서 객관적인 물리학 세계에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을 제시한 탁월한 저서다. 프리초프 카프라를 통해 동서양을 넘나드는 융합적 사유의 전형을 배우면서 객관적인 언어도 주관적 신념으로 오염될 수 있음을 배웠다. 두 번째 나에게 지적 충격을 주면서 새로운 언어적 선물을 제공해준 학자는 자연주의적 탐구를 창시한 Guba와 Lincoln이다. 통계학을 전공했던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실증주의적인 사고방식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참다운 앎에 이르는 방법론적 대안을 《자연주의적 탐구(Naturalistic Inquiry)》에 집대성해서 제시하였다. 논문을 읽다가 우연히 만난 자연주의적 탐구 방법론은 나의 학문적 탐구 여정에 일대 파란을 일으킬 정도로 지적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그 후에 참된 앎에 이르는 과학철학을 더 깊게 공부하면서 교육공학 연구방법론을 자연주의적 탐구 방법론에 비추어 조명하는 석사논문을 쓰게 되었다, 자연주의적 탐구 방법론은 나의 앎과 앎에 이르는 방법론적 탐구 열정에 불을 지피는 전기를 마련했다. 그때부터 나는 자연주의적 탐구 방법론 관련 모든 책과 논문을 저자와 직접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미간행 출간물까지 받아서 먼동이 터오는 새벽까지 정말 신나게 공부했던 깨달음의 추억이 온몸을 강타했던 그 시절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시절 사유체계에 일대 변혁이 일어나는 새로운 언어의 바다로 내 몸을 던져버렸다. 한 분야에 빠질 때마다 그 분야의 언어로만 바라보는 콩깍지가 끼기 시작한다. 다르게 바라보기가 불가능해지는 역기능과 함께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관점으로 이전과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사용하는 언어도 바뀐다
자연주의적 탐구 방법론의 미국 중심의 실증주의적 연구방법론의 역기능과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의 의미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대안적 방법론이다. 예를 들면 비빔밥을 미국 사람이 처음 먹을 때는 고사리, 시금치, 무나물, 콩나물, 기타 산나물을 차례로 먹은 다음 밥을 한 숟가락 먹고 고추장을 적당히 먹고 배를 흔들어 비빔밥 맛을 보지 않을까라는 추측을 해본다. 비빔밥 맛은 비빔밥을 구성하는 독립적인 재료를 물리적으로 혼합해서 생기는 맛을 능가한다. 서구의 실증주의적 패러다임에서 주로 쓰는 언어는 통제와 조정, 분석과 분해, 인과관계와 설명이라는 개념이다. 그들은 비빔밥을 연구할 때도 이런 논문 형식을 취한다. “시금치와 고사리 맛이 비빔밥 맛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주로 ~가 ~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쓰면서 시금치와 고사리 이외의 다른 변수는 철저하게 통제하고 조정하면서 오로지 시금치와 고사리가 비빔밥 맛에 미치는 영향만을 따로 떼어서 독립적으로 연구하려고 한다. 또 다른 예는 “무나물과 콩나물, 그리고 들기름의 상호작용이 비빔밥 맛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다. 전자의 연구와 다른 점은 상호작용이다. 비빔밥 맛은 비빔밥에 동원되는 모든 재료와 양념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독립적 개체가 지닐 수 없는 고유한 맛이다. 비빔밥 재료들의 예측할 수 없는 상호작용으로 언어화시킬 수 없는 독특한 맛을 내는 것이다. 하지만 실증주의 연구 방법론은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변수만 엄격하게 통제하고 다른 변수는 관심 밖으로 제외하고 연구를 진행한다. 이런 연구는 통계적으로는 유의미하지만Statistically significant) 실제적으로 무의미하다(Practically no significant).
실제로 경험할 수 있고 경험한 것만 증명할 수 있다는 실증주의적 연구방법론은 파리를 연구할 때도 전체를 부분으로 분해시켜서 분해된 부분을 분석한다. 예를 들면 파리학과 1학년 때는 파리학 개론을 배우고 2학년 때는 파리 앞다리론, 3학년 때는 파리 뒷다리론을 배운다. 마지막 4학년 때는 파리 인턴십이나 실습을 하고 파리 학사(學士) 자격을 딴 다음 “이제 모든 걸 알 것 같다”는 깨달음을 얻고 졸업한다. 사실 파리 학사의 정확한 정의는 “들은 적은 있으나 설명할 수 없는 상태”다. 학사는 4년 동안 파리에 대해서 배운 점은 많지만 막상 설명하려고 하면 설명이 안 되는 절름발이 지식인이다. 파리 학과 학사는 호기심이 생겨서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한다. 이때부터는 전공을 선택해서 해당 분야를 전공하는 교수님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예를 들면 파리 학과 앞다리 전공 석사과정 학생은 파리 앞다리를 파리 몸에서 뗴어낸 다음 약 2년간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쓴다. 전형적인 석사논문은 “파리 앞다리 움직임이 파리 몸통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형태를 띤다. 파리 앞다리는 파리 몸에 붙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실증주의적 연구방법론의 치명적인 한계는 파리 앞다리를 파리 몸통에 붙어 있을 때 파리 앞다리와 파리 몸통이 맺는 구조적 관계를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파리 앞 다리를 몸통에서 떼는 순간 파리 앞다리는 죽은 다리다. 죽은 다리를 실험실에서 2년간 연구해봐야 파리에 대한 어떤 앎도 무용지물이다. 참고로 파리 앞다리를 연구한 석사에게 파리 뒷다리나 다른 부위를 물어보면 안 된다. 앞다리 전문가는 앞다리만 알고 다른 부위는 전문적으로 모르는 문외한이다. 파리 학과 석사는 이제 무엇을 모르는지 알 것 같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박사과정에 입학하면 파리 앞다리 세부 전공을 선택해야 한다. 석사보다 더 구체적인 전공분야를 파고들어 관련 학술대회 가서 발표도 하고 학위논문을 쓰기 전에 학술지에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파리 학과 박사과정 학생은 파리 앞다리 발톱을 전공 부위로 선정, 파리 앞다리 발톱 학술대회 가서 이런 논문을 발표한다. “파리 앞다리 발톱 성분이 파리 앞다리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다. 전공 부위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논문은 ~가 “~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다. 우여곡절 끝에 박사학위 논문, “파리 앞다리 발톱 상태가 파리 앞다리 관절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드디어 박사 학위를 수여받는다. 파리 학과 발톱 박사는 “나만 모르는지 알았더니 남들도 다 모르는 군“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파리 학과 발톱 박사는 파리 학과 교수가 되는 게 꿈이다. 이제 파리 학과 박사는 파리를 특수부위로 세부 전공으로 나눠서 더욱 미세하게 파고들어 세계적인 논문을 다수 써야 교수 응시 자격이 주어진다. 예를 들면 파리 학과 교수는 박사가 전공했던 파리 앞다리 발톱 부위를 더 세부적으로 파고들어 파리 앞다리 발톱에 낀 때를 연구한다. 때도 학파가 있다 까만 때 학파, 파란 때 학파, 누런 때 학파처럼 때에 대한 진리설이 다른 학파끼리 학술대회에서 서로 격론을 벌 안다, 하지만 평행선을 그으면서 소통할 길을 영원히 찾지 못하고 통섭을 주장하지만 서로에게 통증만 남기고 심한 불통 상태로 헤어진다. 파리 학과 교수가 쓰는 논문은 ”파리 앞다리 발톱에 낀 때 성분이 파리 앞다리 발톱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다. 이렇게 논문을 쓰고 나면 대학교수는 ”어 차피 모르는 것 끝까지 우겨야 되겠다“고 다짐한다.
파리 학과를 졸업한 학부생은 물론 석사와 박사, 그리고 교수는 모두 파린 전문가지만 파리 전체를 아는 전문가가 아니다. 파리 부위별 전문가다. 문제는 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 가서 파리의 삶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다양한 변수들 간의 역학관계를 조사해야 한다. 하지만 실 중의적 패러다임이 사용하는 언어는 전체로부터 부분을 뗴어내서 그 부분을 분석한 다음 전체를 이해하려는 사고방식이 담겨 있다. 관심을 갖고 있는 부위만 연구대상으로 삼고 나머지 부위는 움직이지 못하게 통제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원인을 분석해서 선형적 인과관계로 설명한다. 자연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복잡한 생태계 속에서 다른 생명체는 물론 주변 환경과 예측할 수 없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간다. 생명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명체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에서 분리 독립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놓고 관찰하면서 다른 생명체나 환경과 어떤 상호작을 주고받는지를 관찰하고 관찰해서 조사하고 분석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자연주의적 패러다임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단선적 인과관계가 설명보다 원인과 결과가 구분되지 않는 ‘호혜적 인과관계’ 속에서 생명체가 주고받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탄생된 개념이다. 자연주의적 패러다임은 설명보다 이해, 통제보다 관찰, 분석보다 종합, 부분보다 전체라는 언어를 선호한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언어도 바뀐다. 언어가 바뀌면 생각은 물론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가 바뀌는 것이다.
철학적 사유와 언어로 나의 전공을 다시 들여다보다
사람의 얼룩과 무늬를 연구하는 인문학적 사유는 사람을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교육학, 특히 교육공학에게 더없이 소중한 밑바탕 사유로 뿌리를 내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문사철(文史哲) 비중을 굳이 따지자면 철학-역사-문학의 순이었다. 특히 학문적 진리탐구를 안내하면서 참된 앎에 이르는 과정을 밝혀내는데 관심을 두는 자연주의적 탐구 방법론(methodology) 덕분에 과학철학(philosophy of science 분야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과학철학에 대한 관심은 참된 앎에 이르는 과학적 앎이 어떤 탐구 과정을 통해서 밝혀내는지를 흥미롭게 파헤쳐주었다. 석사과정에서 애지중지하며 읽었던 앨런 차머스의 《현대의 과학철학》과 H. I. 브라운의 《새로운 과학철학》은 과학철학적 정초를 다지는데 튼실한 기본서였다. 이어서 박이문 교수의 《과학철학이란 무엇인가》는 과학철학의 학문적 본질과 방향성을 가늠하는 좋은 참고도서가 되었고 칼 포퍼, 토머스 새뮤얼 쿤, 임레 라카토슈의 《현대 과학 철학 논쟁 -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대한 옹호와 비판》은 과학철학의 학문적 논쟁사를 하나의 큰 흐름으로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던 책이다. 과학철학은 사실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 전문 분야의 학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패러다임이라는 언어를 익숙하게 만들어주면서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 후에 나온 제임스 래디먼의 《과학철학의 이해》와 신중섭 외의 《과학철학 -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은 최근까지의 과학철학의 학문적 관심사를 이슈별로 공부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과학철학을 공부하면서 앎에 이르는 참된 방법 관련 언어를 많이 배웠다. 내가 전공하는 교육공학의 중심은 교육이지만 그것의 가능성을 구현하는 핵심 기반은 사실 기술(technology)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은 과학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한 기술적 수단이나 방법만을 지칭하지 않고 교육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순수학문을 실용적으로 적용하는 모든 과정을 지칭하기도 한다. 과학철학이 앎에 이르는 과학적 방법론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기술철학(philosophy of technology)은 교육공학의 학문적 정체성을 새롭게 조명해보고 기술이 교육과 맺는 관계성을 새롭게 탐구하려는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기술은 하나의 수단을 넘어선다. 기술은 인간의 의사소통과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유력한 행위자다. 기술은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동적으로 동원되는 객체나 수단을 넘어선다. 기술 역시 인간의 목적 달성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행위자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하나의 행위자로 바라보는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NT: Action-Network Theory)은 이런 점에서 교육공학의 학문적 정체성을 해명하는 새로운 언어이자 접근방법이다. 기술철학을 공부하면서 교육공학의 뿌리를 철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언어를 습득했다. 프레더릭 페레의 《기술철학(philosophy of technology)》은 기술철학 전반을 이해하는 개론서로 입문적 성격을 띤 책이다. 이드헤(Ihde)의 기술철학 입문(Philosophy of technology: An introduction)과 스카프와 두섹(Scharff & Val Dusek의 기술철학(Philosophy of technology), 그리고 벨기에 기술철학자 마크 쿠켈베르그(Coeckelbergh)의 기술철학 입문(Introduction to philosophy of technology)과 송성수 외의 《욕망하는 테크놀로지 - 과학기술 학자들 '기술'을 성찰하다》는 모두 기술철학의 핵심 이슈와 논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책이다. 과학철학으로 앎에 이르는 참된 방법론을 익히는 언어를 배웠다면 기술철학으로 내가 공부하는 전공분야의 정체성의 단초가 되는 언어를 배웠다. 만약 내가 과학철학과 기술철학적 언어를 배우지 못했다면 여전히 교육공학을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밖에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과학철학과 더불어 나에게 철학적 사유의 본질과 개념적 충격을 가장 많이 안겨준 철학자는 니체와 미셀 푸코였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II》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격정의 바다를 건너며 과거의 전통을 부수고 시대를 꿰뚫는 새로운 철학을 정초 하려는 니체의 전복주의적 철학 언어를 배웠다. 이성중심의 서양철학적 전통을 깨부수고 그 위에 신체가 오히려 커다란 이성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은 작은 이성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신체적 욕망이 지향하는 디오니소스적 격정을 철학의 중심 테마로 끌어들였다. 장편의 산문시이자 드라마를 넘어서서는 인생 파노라마이며 풍부한 메타포를 동원해서 자신의 철학적 지향점을 향해 돌진하는 니체 특유의 언어 사용 방식과 문법, 그리고 독특한 개념을 배우면서 니체의 문신을 내 몸에 아로새겼다. 의욕이 없어지고 나태해지려는 잡념이 조금이라도 찾아들면 니체를 잡고 그가 온몸으로 건져 올린 철학적 언어의 날카로움에 스스로를 노출시켜보곤 했다. 운명애를 지칭하는 아모르파티(amor fati),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지금 이 상태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영원회귀, 어제와 다른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 등과 같은 철학적 개념을 창조해서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체계를 건축했다. 힘에의 의지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저기로 가려는 상승작용의 의지이자 나에게 없었던 힘을 주는 의지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적 의지이다. 나는 이름 석자로 자신의 본질적 경쟁력을 드러내는 힘에의 의지를 나력(裸力, Naked Strength)이라고 명명하고 《니체는 나체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레지날드 J. 홀링데일의 《니체 - 그의 삶과 철학》은 니체 삶 전반을 통독하면 왜 니체가 특정 시기에 특정 주제에 몰입해서 위대한 작품을 남겼는지 그 뒤안길에서 사연과 배경을 간파할 수 있다.
이영남의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 - 한 젊은 역사가의 사색 노트》라는 책을 우연히 읽고 푸코에 사유방식과 학문적 탐구 자세에 빠져들었다 그 후로 《광기의 역사》 《지식의 고고학》, 《감시와 처벌》, 그리고 《성의 역사 1-4》를 읽어내면서 철저한 임상적 역사가로 미시적 현상을 중심에 두고 역사적 발전과정을 탐구하는 미시사적 역사탐구 언어를 배웠다. “알아야만 하는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호기심인 것이다. 앎에 대한 열정이 지식의 획득만을 보장할 뿐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되도록이면 아는 자의 일탈을 확실히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23쪽). 《성의 역사 2》에 나오는 말이다. 푸코는 이전의 학문적 성과를 무너뜨리고 그곳에서 다시 고달픈 학문적 탐구를 다시 시작한다. 지식의 획득을 위한 호기심이 아니라 알고 있는 지금의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탈의 호기심을 위해서다. 푸코에게 배운 마지막 언어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배운 자기 배려다.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기가 이 자기 실천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의 하나이고 중심 테마이기도 합니다”(132쪽). 자기 배려는 기존의 자기를 파괴하고 이전의 나와 전혀 다른 자기로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그려진 이상적인 자기 상이다. 푸코에게 배운 방법론적 언어는 고고학(archaeology)과 계보학(genealogy)이다. 한 시대가 어떤 특정 법칙이나 관계를 진리로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파헤치는 것이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이었다. 예를 들면 고고학을 통해 광인의 의미가 시대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인식되어 왔음을 밝힌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광인은 예언자였다가 17세기는 괴물, 그리고 18세기 근대는 치료가 필요한 환자로 전락하는 과정을 고고학적으로 탐구한다. 이런 고고학적 방법은 계보학적 방법론으로 발전시켜 역사적으로 버림받아서 침묵으로 묻힌 텍스트를 복원하고 거기에 관여된 권력관계를 밝혀낸다. 푸코는 그래서 모든 지식은 객관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고 특정 권력집단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권력관계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