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언어는 현장의 현실에서 나온다
언어는 상처이자 문신이다(2부):
내 몸에 새겨진 언어적 상처와 문신의 역사
낯선 세계와의 우발적 마주침, 깨우침의 언어를 낳다
석사과정 시절 나의 인식체계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분야는 사회학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역작 《구별짓기 상-하》을 통해 문화적 취향은 개인적 선호도의 결과가 아니라 집단적이고 계급적인 산물이라는 점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으로 풀어서 밝혀냈다. 아비투스란 특정한 환경에 의해 형성된 성향이나 사고, 인지, 판단과 행동 체계로서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행위나 취향을 뜻한다. C. 라이트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지적 장인으로서의 학문적 자세와 취해야 할 태도 전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책으로 학자가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자질과 역량에 관한 깨우침을 준 선물 같은 책이었다. 사회학적 언어는 교육공학을 공부하는데 필요한 비판적 언어의 중요한 역할을 가르쳐주었다. 《현대 사회학의 위기》를 저술한 앨빈 굴드너에게 사회학자가 갖추어야 할 성찰적 상상력을 배웠다.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그 사람이 몸담고 있는 사회체계와 구조적 관계 속에 놓고 성찰하는 자세와 태도는 사회학자를 넘어 공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대학원을 한양대학교에서 마치고 유학을 가서 지적 충격은 주로 전공 밖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면서 받았다. 정형화된 패턴 안에서 주어진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교육적 방법을 강구하는 교육공학의 기본 바탕을 언제나 인문사회과학적 사유체계로 쌓고 싶었다. 공부에 대한 흥미도 전공 안에서보다는 전공 밖에서 받는 다양한 지적 충격으로 유지되었다.
유학시절에 받은 지적 충격은 두 가지 점에서 새로운 학문적 언어를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지적 충격으로 교육공학의 인식 깊이와 지평을 심화하고 확대하는 방법을 배웠다. 첫 번째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피터 체크랜드의 체제적 사고와 실천(Systems thinkg, systems practices)과 연성 체제 방법론의 적용(soft systems methodolgy in action)이라는 책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공부한 체제 철학과 방법론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현상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근간으로 주어진 체계를 어떻게 하면 개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경험적으로 탐구하는 접근방법이 주를 이루었다. 복잡한 전체를 구성요소로 분해해서 분석한 다음 그 결과를 다 합쳐서 전체를 이해하려는 체계적인 접근방법이었다.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체계는 그걸 인식하는 사람과 무관하게 이미 밖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객관적 대상이다. 그걸 발견하는 과학적인 방법만 정교하게 개발된다면 어떤 체계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에 파리 연구나 비빔밥 연구에서 예를 들었던 실증주의적 방법론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체제 철학과 방법론이었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체제 철학과 방법론은 현상학과 해석학에 기반을 연성 체제 철학과 방법론이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체계는 구성요소로 분해시켜 분석할 수 없는 전체다. 체계는 개별적 구성요소들의 산술적 합을 능가한다. 체계는 나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주관적 구성체다. 내가 어떤 관점으로 외부의 체계를 마음속으로 구성해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체계로 이해된다는 입장이다. 실증주의적 체제 철학과 방법론은 미국 중심의 실증주의적 언어로 구축되고 연성 체제 철학과 방법론은 독일 중심의 현상학적-해석학적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유학시절에 만난 두 번째 지적 충격은 우연히 연구실에서 밤늦게 공부하다 만난 혼돈이론(chaos theory)이다. 지금 여기서의 몇 가지 조건과 도구를 활용해서 미래 상태를 정확히 예측하려는 기존의 과학적인 접근이 갖는 어리석음과 자만에 경종을 울린 혼돈이론과 우발적으로 마주쳤지만 그 끌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급기야 혼돈이론을 기반으로 미국 교육공학회지에 논문을 싣기도 했다. 평범한 교육공학도의 세계로 잠입한 혼돈이론은 내가 세상을 내다보는 다른 언어적 렌즈를 선물로 주었다. 제임스 글릭의 《카오스》가 혼돈이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폭발시킨 장본인이다. 혼돈이론을 설명하는 언어, 예를 들면 초기 조건에의 민감성(sensitive Dependence on Initial Condition), 대중적인 언어로 나비 효과라고 부르는 개념은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노턴 로렌즈가 1972년에 미국 과학부흥협회에서 실시한 강연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그의 논문 제목은 “예측가능성-브라질에서의 한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는가?”였다. 초기 몇 가지 변수만으로도 미래 현상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기존의 과학적 자신감은 잘못된 자만심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개념이다. 한 가지 개념으로 받은 충격은 기존 개념을 제거하고 새로운 신념으로 무장하게 만든다. 김용운의 《프랙탈과 카오스의 세계》는 20세기 과학의 한계를 카오스 이론적 입장에서 재조명하며 일상에서 발견하는 카오스의 세계를 흥미롭게 펼쳐낸다. 혼돈이론적 언어를 장착시킨 이후 혼돈은 나쁜 것이고 질서로 빨리 전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울 수 있었고 창조적 질서는 혼돈에서 유래한다는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었다. 팀 하포드의 《메시 Messy - 혼돈에서 탄생하는 극적인 결과》라는 책은 혼돈과 무질서를 구체적인 경영에 적용하면서 완벽한 계획과 통제가 오히려 경영의 비효율성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그는는 오히려 혼란스럽고 엉망진창인 상태를 뜻하는 ‘메시(messy)’라는 개념을 통해, 혼돈의 시기에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혁신의 비밀을 설명한다. 혼돈이론은 정확한 계획과 사전 설계를 통해 학습결과를 예측해서 산출해내려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는 격변하는 시대변화를 주도하는 교육이 될 수 없음을 자각케 해준 각성 사건이었다.
혼돈이론은 나중에 복잡성 과학(Complexity Science)으로 발전하면서 더욱 우리 삶과 밀착된 상태로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간다. 복잡성 과학은 일리야 프리고진과 이사벨 스텐저스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대화》과 스튜어트 카우프만의 《혼돈의 가장자리》는 복잡성 과학에 비추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을 추구하는 전통적인 과학관에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탐색한다. 김용운의 《카오스의 날갯짓 - 복잡성 과학과 원형 사관으로 본 한국》과 존 L. 캐스티의 《복잡성 과학이란 무엇인가》도 이런 접근을 대중을 상대로 쉽게 설득하는 입문서다. 에드가 모랭의 《복잡성 사고 입문》에 따르면 복잡성과 애매모호함을 제거하고 단순성과 명료함을 추구하면서 발전한 근대 과학의 근본적인 문제는 거대하고 복잡한 현실을 협소하고 단순한 틀 속에 집어넣고 공식화하고 절단하는 접근하는 이성의 폭력과 자만에 있다. 모랭은 이러한 지식의 맹목성과 폭력을 비판하면서 이성의 오류와 착각, 맹목의 원인을 찾아내려 한다. 브렌트 데이비스의 《복잡성 교육과 생태주의 교육의 계보학 - 구성주의를 넘어선》은 복잡성 과학을 교육분야에 적용했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다룬다. 모랭도 지적했듯이 근대 과학이 근거하는 단순성 패러다임은 현상과 사건, 인간의 맥락과 총체성, 다차원성과 복잡성, 현상에 개입하는 우연성 등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복잡성 과학에서 배운 언어를 학습과정에 대입해서 단순한 학습의 복잡성을 복잡성 과학에 비추어 설명한 학습 복잡계 논문도 구상해보았다. 복잡성 과학은 학습 현상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과 이해가 지니는 한계나 문제점을 극복하고 보다 거시적이고 지속 가능한 자발적 학습 메카니즘을 어떻게 주어진 시스템에 장착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단초가 될 것이다.
진실의 언어는 현장의 현실에서 나온다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322쪽). 니코스 카잔 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말이다. 책상에 앉아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공감할 수 없다. 기껏해야 책상에서 공부만 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연민의 정을 품고 그들의 힘든 생활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뿐이다. 밑바닥 인생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밑바닥 삶이 어떤 것인지를 기억해낼 수 있는 과거의 경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경험을 언어로 표현한 들 여전히 다른 나라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내가 살아온 삶만큼 글을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다. 내 삶을 능가하는 글은 읽을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다. 조르바가 환멸을 보내는 대상은 손발을 움직여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보지도 않고 그들의 삶을 관념적으로 판단하려는 책상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야생의 삶에서 몸으로 익힌 야성보다 책상머리에 관념적 논리로 재단하며 배운 지성이 삶의 무기다. 책상에서 지성을 연마한 사람들의 언어는 현장감이 없다. 밑바닥 인생을 살아본 사람들의 언어에는 허위와 가식과 과장이 없다. 그들의 언어는 곧 그들이 살아가는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 논리로 조합한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한 신체 언어라서 더욱 심장을 파고든다.
학부와 석사, 그리고 박사를 줄곧 쉬지 않고 약 10년 동안 책상에서만 공부했다. 내 앎의 원천은 주로 책이었다. 책을 머리로 읽으면서 축적한 앎으로 석사 학위 논문을 썼고 실험과 통계를 기반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꿈에 그리던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교로 가기 전에 현장 체험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삼성으로의 입사를 결심했다. 직무는 그동안 배운 기업교육 관련 안목과 접근으로 삼성 그룹 전체의 교육담당자 육성체계를 수립하고 직접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그들을 육성하는 업무다. 그리고 그룹 전체의 학습조직화를 통한 조직 변화와 리더십 육성체계를 수립하고 개별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이다. 처음으로 배웠던 지식을 적용해서 실무에 적용하려는 처음부터 어디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했다. 책에 나온 대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다 팀장님에게 몇 번이나 수정 피드백을 받았다. 예를 들면 책에서는 목적을 먼저 결정하고 수단을 나중에 결정해야 한다는 난공불락의 철칙을 배웠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수단을 먼저 결정하고 목적은 이미 어렴풋하게나마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수단과 방법을 포함해서 전략을 먼저 결정해야 전에 예산을 추정할 수 있고 결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단과 목적의 도치가 실제 현장에서는 아름다운 역전으로 요구된다. 현장에서 체험적으로 적용하는 가운데 깨달은 살아있는 교훈 없이는 이론적 지식의 무력함과 관념적 사유의 허무함을 동시에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진짜 앎의 언어는 머리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몸의 언어로 체험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삼성에서의 5년간 현장체험을 통해 처절하게 깨닫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삼성에서의 5년간 직장생활을 접고 안동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교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책상에서 글을 읽고 머리를 써서 연구하다 우주의 미세한 한 부분을 알게 되었다는 이유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장에 가보았다. 그동안 머리로 깨달은 앎으로 삶을 기획하고 실행해보았지만 함 앞에서 무참히 무너지는 앎의 무력함을 몸으로 깨달았다. 개념으로 신념을 쌓았지만 무력한 관념의 파편이었음을 격전의 현장에서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다시 책을 읽고 읽은 대로 실천하고, 실천하는 대로 몸이 말하는 글과 책을 쓰기 시작했다. 책상머리에서 머리로 조립한 지식으로 지시하기보다 격전의 현장에서 몸으로 깨달은 체험적 지혜로 지휘하는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마주침으로 색다른 깨우침을 얻으며 삶으로 앎을 증명하고 몸에 밴 앎으로 해보려고 오늘도 안간힘을 쓴다. 삶의 언저리에서 안간힘을 쓰며 쓰는 글을 사랑한다. 더불어 시선을 높이고 관점을 바꿔서 세상을 바라보는 특이한 연구도 사랑한다. 새로운 지식을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잉태하고 출산하는 과정을 연구하는 지식산부인과 의사는 이렇게 해서 탄생한 나의 다른 이름이다. 지식경영학이나 지식창조학과 산부인과학의 융복합적 노력의 산물이다. 즐거운 학습을 방해하는 각종 학습 질환을 진단하고 처방해서 건강한 지식을 창조하는 학습건강 전문의 사이기도 하다. 한의학적 건강 개념을 차용하여 학습건강을 증진시키는 연구도 늘 가슴이 설렌다. 나는 많은 아이디어를 자연에서 얻는다. 자연 생태계에서 사람의 생각과 조직을 변화시키는 원리를 파헤치는 지식생태학자가 된 이유다. 인간 학습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가기 위해 종횡무진 오늘도 학문적 칸막이를 부수고 경계 넘나들기를 즐긴다.
언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이다
드디어 2001년 2학기부터 모교의 교수가 되어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에서 후배를 만난다. 생태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나만의 독창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지식생태학을 구축하는 학문적 탐구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하나의 언어에 꽂히면 꽂힌 언어대로 세상을 꽃피운다. 지식과 생태학이 만나는 순간 세상은 지식생태학자의 눈으로 채색된다.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지식의 창조와 공유, 그리고 활용과 소멸과정을 바라본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회와 하나의 커다란 생태계로 묶여 돌아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호혜적 공동체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미물에 지나지 않았던 생명체의 움직임이 미묘한 미동에 불과했지만 그 움직임이 종국에는 거대한 파장을 일으킬 잠재력으로 보인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의 정체가 떨어진 나뭇잎이 아니라 생태계의 거대한 순환에 동참한 위대한 결단으로 보인다. 흔들리는 생명체의 모든 움직임이 살아가려는 안간힘으로 읽힌다. 불타는 단풍이 혹한의 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자신의 전부를 불태우는 열정으로 보인다. 불타는 단풍을 떨궈내고 나목으로 혹한의 겨울을 맞이하는 나무를 보면 새봄의 희망을 싹 틔우려는 결연한 의지로 이해된다. 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저마다의 위치에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을 하고 있다는 각성이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험한 발상이었음을 각성하게 만들어준다. 어떤 언어적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언어라는 안경을 끼면 세상은 그때부터 내가 보고 싶은 방식대로 보인다. 본래는 언어는 편견의 산물이다. 독립된 공간에서 태어난 중립적인 언어는 없다.
모든 언어는 언어에 담긴 개인의 주관적 관심과 시대적 문제의식의 잉태하고 태어난다. 세상을 남다르게 보기 위해 자기만의 언어를 창조한다. 창조된 언어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안경으로 작용한다. 내가 창조한 언어에 담긴 문제의식대로 세상의 문제는 보이기 시작한다. 2006년도에 출간된 《지식생태학》은 제자들과 함께 개정 증보 작업으로 《지식생태학: 생태학, 죽은 지식을 깨우다》로 재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지식생태학자의 눈으로 교육현장을 바라보고 생태학적 패러다임으로 업무현장을 생태계로 전환하는 설계 전략과 접근을 담아냈다. 지식생태학적 언어로 심리학적 학습과 철학적 지식을 다시 재개념화 하면서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 어떤 철학과 열정을 담아내느냐에 따라 근거 없는 관념도 나의 신념으로 재탄생된다. 나의 신념이 반영된 언어를 사용하면 그 순간부터 세상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대로 보인다.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을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는 언어를 가지려는 이유다. 이들은 모두 상상력과 창의력이 남다를 뿐만 아니라 색다르다. 색다른 생각을 매개로 다른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은 독창적인 언어가 필요하다. 상상력과 창의력도 언어가 없으면 공상과 허상, 망상과 몽상으로 전락한다. 위대한 상상이 날개를 달고 비상하려면 위대한 언어와 짝을 이루어야 한다. 언어로 짝을 맞추지 못하는 생각은 죽은 생각이다. 생각에 언어라는 옷을 입혀주어야 비로소 세상으로 나와 빛나기 시작한다. 모든 생각은 언어가 지배하고 언어는 생각을 창조한다. 언어 없이 사고 없고 사고 없이 창조 없다.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꿀벌은 밀랍으로 집을 짓고 살지만 사람은 개념으로 집을 짓고 산다.” 내가 어떤 개념으로 집으로 짓고 살아가는지에 따라 내 생각도 다르게 성장한다. 니체의 주장은 “언어는 존재의 집”(220쪽)이라고 규정한 하이데거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존재가 머무는 집이 언어라는 이야기는 어떤 언어로 집을 짓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생각과 삶도 달라진다는 의미다. 희망의 언어로 집을 지으면 희망적인 존재가 되고 절망의 언어로 집을 지으면 절망적인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이 말은 인간의 사고 수준은 언어 수준과 사용 방식이 결정한다는 말이다. 언어는 공동체가 거주하는 집을 짓는 도구다. 언어로 집을 지었는데 그 집에 거주하는 구성원이 언어를 모르면 같은 집에서 연대의식을 나누며 살아갈 수 없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언어를 모르면 소통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당 공동체와의 소속감이 생기지 않는다. 지식생태학 언어로 지식생태학을 연구하는 학문공동체 집을 지었다. 그 집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생태학적 언어를 새롭게 개발하거나 기존 언어를 다르게 바라보며 재개념화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지식생태학을 학문적으로 더욱 굳건하게 정초 하기 위해 아직도 나무와 숲, 생태학, 그리고 생태계에 살아가는 생명체의 분투기 관련 책을 끊임없이 읽고 생태학적 언어를 아직도 익히며 공부한다. 나무 관련 책을 인문학적 관점으로 읽으면서 재해석하고 주변의 나무를 관심 있게 관찰한 결과를 생태학적 감수성으로 재구성해내서 쓴 책이 바로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이다.
내 몸에 각인된 언어적 상처, 아름답게 꽃 피우다
그동안 몸으로 경험하며 깨달은 미래의 인재상을 구상하며 고뇌하다 쓴 책이 바로 《브리꼴레르 : 세상을 지배할 '지식인'의 새 이름》다. 브리꼴레르라는 개념은 《야생의 사고》를 쓴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에게 빌려왔다. 브리꼴레르는 해당 분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데로 불구하고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가용한 지식과 활용 가능한 주변의 도구를 이용해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맥가이버형 인재를 의미한다. 브리꼴레르는 책상에서 공부해서 인재가 된 책상 똑똑이(Book Smart)가 아니라 자신이 일하는 현장에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경험하면서 몸으로 익힌 체험적 지혜를 지닌 실천적 지식인(Street Smart)을 지칭한다. 브리꼴레르는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개념을 기반으로 출발했지만 궁극적인 지향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는 아레테(arete), 즉 미덕을 갖춘 최고 경지의 전문성과 프로네시스(phronesis), 영어로는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를 추구한다. 브리꼴레르라는 개념과 아레테, 그리고 프로 네시스를 융합, 미래 사회가 길러내야 될 바람직한 인재의 자질과 핵심역량을 제시했다. 나도 모르게 내 몸에 각인된 언어적 상처는 융합의 꽃을 피우며 새로운 열매를 맺기도 한다. 브리꼴레르는 맥가이버처럼 역발상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문제 해결사이자 주변의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편집하고 가공해서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창조하는 지식의 연금술사다. 브리꼴레르와 아레테, 그리고 프로네시스는 내 몸에 각인된 가장 강력한 언어적 상처이자 문신이다.
지식의 연금술사로서의 브리꼴레르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제시하는 리좀 (rhyzome)과 다양체(multiplicity)를 추구한다. 《천 개의 고원》은 책 제목 그대로 수많은 개념의 고원을 넘나드는 언어적 향연이다. 리좀은 나무의 줄기의 구분이 모호해진 상태에서 뿌리가 어디로 뻗을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다른 뿌리와 무한대로 수평적 접속을 이어가는 활동을 말한다. 리좀은 우발적 접속을 통해 어떤 방향으로 뻗어나갈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내포한다. 지식생태학, 지식산부인과 의사, 학습건강 전문의사도 개념과 개념의 우발적 접속, 즉 리좀으로 이루어진 조어다. 우발적 접속은 이전과 다른 다양체를 양산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이 낯선 곳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주름, 즉 다양체multiplicity)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한다. 나는 책을 읽고 생긴 주름으로 글을 쓰고 그걸 모아서 책을 쓰는 주름이 생겼다. 사람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다양한 마주침으로 자신에게 익숙한 주름을 만들어 자신의 고유함을 증명하는 다양체를 지닌다. 어제와 다른 다양체를 지니기 위해서 오늘은 어제와 다른 책을 읽고 다른 글을 다른 방식으로 쓰는 주름을 만들기 위해 분투노력한다.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기존의 안락한 삶의 터전(영토)을 버리고 낯선 영토로 떠나는 탈영토화를 반복해서 시도하지 않는 이상, 나의 다양체는 차이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할 때 어제와 다른 다양체가 탄생된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어야 되는 이유다. 내가 만든 다양체가 곧 내가 살아가는 삶의 얼룩과 무늬를 결정한다. 이진경의 《노마디즘 1, 2》를 입문서로 삼아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읽어내는 주름을 다르게 만들어가려고 노력한다.
나는 전문성이라는 언어에 남다른 관심이 있다. 브리꼴레르도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진정한 전문가가 누구일까를 연구하다 만난 우발적 마주침의 결과다. 내가 생각하는 전문가의 미래와 전문성의 본질을 가장 적확하게 연구하는 학자와 그 본질은 바로 도날드 쉰의 《전문가의 조건》에 잘 담겨있다. 진정한 전문가는 책상에서 배운 지식을 축적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시행착오도 경험해보고 판단 착오를 줄일 수 있는 다양한 체험적 연습 기회를 가져야 한다. 성찰적 실천(Reflection-in Action)을 통해 새로운 행동을 만들고, 실천적 성찰(Reflection-on-Action)을 통해 행위 결과에 대한 성찰을 반복할 때 이전과 다른 전문성이 탄생된다. 성찰적 실천(reflection-in-action)은 실천적 앎(knowing-in-action)을 낳은 원동력이며, 실천적 앎은 현장 변화를 촉진하는 실천적 이론(theory-in-action)을 낳는 씨앗이다. 지식은 책상과 책에서 나오지 않는다. 지식은 실천하는 도중(knowledge-in-practices)에, 그리고 그런 실천 중 성찰 과정(reflection-in-practices)에서 나온다. 도날드 쉰에게 배운 전문성에 대한 새로운 언어는 전문가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다르게 보는 눈을 제공해주었다. 도날드 쉰이 말하는 실천적 앎은 마이클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개인적 지식(personal knowledge)은 엄밀히 말하면 ‘인격적 지식’이다. 나는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 바를 분명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뿐이다. 알고 있지만 몸에 체화되어 있어 문서화가 불가능한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에는 지식을 창조한 사람의 열정과 문제의식이 배어 있다. 전문가는 객관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축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숙고와 성찰을 통해 판단하고 실행하면서 내재화된 지식을 체화시키는 사람이다. 폴라니는 전문가가 갖춰야 할 진정한 지식의 본질에 관한 새로운 언어, 즉 인격적 지식으로 무장할 것을 강조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언제나 앎과 삶과 일 사이에서 고민한다. 앎과 삶, 그리고 일의 삼각관계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 정립을 하면 조화롭게 균형을 맞추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호혜적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대체로 앎과 삶과 일은 세 가지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앎의 세계는 삶과 분리된 채 독자적인 논리로 발전하고 삶과 일 역시 철저하게 구분되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통념이 있다. 나아가 앎은 일하는 가운데 생긴다기보다 별도의 독립된 공간과 시간을 투자해서 취득한 앎이 일에 적용되는 가운데 앎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가정한다. 과연 그럴까? 이런 딜레마 관계를 풀어가는데 도움을 주는 단서를 칠레의 인지생물학자인 움베르토 마투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앎의 나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에게 인식, 앎은 효과적인 행위라서 앎과 함은 구분되지 않는다. 즉 인식(앎)은 나의 행동(활동)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라는 경구를 남겼다. 전통적인 인식론에 따르면 무엇인가를 안다는 인식은 주체가 외부의 대상을 수동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앎의 나무》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은 인식하는 나와 나의 행동, 그리고 인식대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가운데 인식주체가 인식 객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역동적으로 자기를 생산하던 생명활동을 통해서 인식대상 혹은 세계를 지각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접속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자기 생산(autopoiesis) 개념을 창안했다.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체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머리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생산을 통해 형성된 몸에 밴 행동양식 때문이다.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행동을 몸에 배게 생명체는 어제와 다른 자기 생산을 거듭하는 것이다. 세상은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보다 자기 생산을 통해서 몸에 밴 행동양식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이끌어간다. 머리보다 몸, 생각보다 행동이 세상을 바꿔나간다는 점도 앎의 나무에서 배운 소중한 교훈이다.
나는 언어로 오염된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한 사람이 특수한 상황에서 얻은 체험적 깨달음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은 개인의 노력에 따라 달라질까? 아니면 그 사람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언어적 용법에 따라 선택하는 행위일까? 언어는 한 사회가 특수한 용법으로 사용하기로 합의한 사회적 약속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체험적 언어도 엄밀히 말하면 그 체험이 일어난 공동체의 언어다. 내가 체험하기 이전부터 언어는 존재해왔다. 어떤 언어로 나의 독특한 체험을 표현할 것인지는 내가 결정할 수 없다. 이미 규정된 공동체의 언어적 용법을 흉내 낼 뿐이다. 예를 들면 어떤 놀이를 할 때 하면 안 되는 규칙이 그 놀이를 하는 공동체의 규약에 따라 다르듯이, 언어는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인식된다. “언어는 환경의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당위, 즉 코드 안에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언어 습득이란 환경의 코드를 세뇌당하는 일이다. 언어를 습득하면 동시에 특정 환경의 동조를 강요당하게 되어 있다. 언어의 의미는 환경의 코드 속에 있다(35쪽).” 지바 마사야의 《공부의 철학》에 나오는 말이다. 환경의 코드는 주어진 환경에서 옮다고 믿는 신념체계나 가치 판단 기준이다. 이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나 신념체계가 바로 코드다. 언어를 습득해서 사용한다는 의미는 환경의 코드가 요구하는 대로 흉내 내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다. 환경 코드에 부합되지 않는 언어를 구사하면 그 사람은 그 환경에 동조하지 못하고 퇴출당한다.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다른 사람이 언어를 어떻게 쓰는지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환경 코드가 요구하는 언어를 습득한다. 내가 무의식 중에 사용한 언어 선택은 이미 내가 해당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언어 코드의 의미를 내 신체에 무의식적으로 각인시켜온 덕분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어떻게 언어를 사용하고 그들이 특정 언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암묵적으로 배운 결과 나 역시 그런 언어적 문법과 코드에 길들여진 것이다.
그래서 지바 마사야는 “언어는 타자에 의해 강제적으로 우리 몸에 새겨졌다. 언어란 상처다. 언어의 형태가 우리 몸에 새겨졌다, 그것은 문신”(126쪽)이라고 주장한다. 나의 사고는 결국 다른 사람의 언어,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언어적 코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언어적 사고다. 언어적 사고는 다른 사람들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반복해서 흉내 내면서 습득한 타자의 사고다. 새로운 언어가 내 몸으로 들어와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 위에 핀 꽃이 언어적 사고다. 언어적 사고는 새로운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이전과 다른 사고를 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가는 사고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내가 만든 언어가 아니기에 그 언어로 사고하는 나는 타자의 사고로 움직이는 나다. 타자들이 합의한 언어적 문법과 코드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나의 사고는 타자로부터 사고의 기본 방향을 설정당했다. 예를 들면 이것은 책상이라고 하자고 합의한 것이며, 저것은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노을이라고 명명한 것을 나도 사용하는 것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합의한 언어적 코드를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나 역시 그 환경에 점차 동조되는 것이다. 동조가 더욱 강하게 전개될수록 나는 언어로 오염된 현실에 휩싸여 다르게 보기가 불가능해진다. 환경 코드와 동조가 된 내 몸은 나도 모르게 해당 환경이 요구하는 언어 용법을 무의식적으로 따른다. 더 나아가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인지,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왜 그것을 그때 사용해야 되는지를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사람들의 합의로 정해진 것을 나는 따라서 사용할 뿐이다.
그래서 나의 모든 사고는 항상 특정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언어적 필터를 통과하면서 형성된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이미 언어로 오염된 현실 속에서 내 몸이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경험은 언어를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언어적 조종을 받는다. 어떤 환경, 즉 언어적 가상현실이 인간을 지배하는가 하면 해방하기도 한다. 즉 언어는 인간을 조종하는 리모컨이다(40쪽).” 지바 마사야의 같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이처럼 언어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내 생각을 지배하는 리모컨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언어를 사용하여 이런 방식으로 소통하면 대화의 문이 열린다고 언어적 리모컨은 명령하고 통제한다. 언어를 매개로 현실을 바라보고 세상을 해석하며 타자와 관계를 구축해나간다. 특정 환경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해당 공동체에서 비로소 나는 언어로 소통하며 멤버십을 획득한다. 이때부터 비로소 사람은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지 않고 언어로 재해석된 현실을 살아간다. 그냥 현실이 아니라 언어로 오염된 현실이다. 언어라는 필터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언어로 오염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해당 환경과 동조가 된 기존 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나 환경과 마주쳐야 한다. 즉 환경 코드가 요구하는 언어 용법을 바꾸기 위해서는 나는 어제와 다른 환경에 나를 의도적으로 배치시켜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 방식으로 표현하면 안락한 현재의 영토를 벗어나 낯선 마주침을 즐기는 다른 영토로 나를 탈영토화 시킬 때 내 몸에는 다른 언어적 상처가 생길 준비가 된 것이다.
틀에 박힌 나를 틀 밖으로 끄집어내다
특정 언어에 지나치게 오염되면 그 언어로 구축된 현실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살아간다. 이제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은 환경과 동조되어 틀에 박힌 방식으로 반복해서 사용하는 언어와 결별하고 새로운 언어로 오염된 현실을 정초 하는 것이다. 기존 언어 사용 방식에 의문을 던지고 질문을 퍼부으면서 당연한 가정을 부정하는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내가 몸담고 있는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만들어서 내 몸에 이식한 것이다. 그 언어가 내 몸에 이식되는 순간 언어적 상처가 생기고 문신이 새겨지는 것이다. 이제 그 상처 위에 돋은 새살에 다른 언어로 이전과 다른 상처를 내는 아픈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란 기존 언어로 길들여진 타성과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언어로 오염된 현실을 다르게 바라보며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코드로 굳어진 언어 사용 방식과 개념에 부여된 의미를 해체해보고 나의 방식으로 언어적 의미를 재 진술해보는 노력이 바로 공부다. 누군가 정의한 언어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의 방식으로 재정의해본다. 사전에 나와있는 정의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나의 체험적 의미로 재정의하는 노력이 반복될 때 기존 언어와 불협화음이 일어나고 언어적 위화감이 조성된다. 익숙한 언어적 동조에서 낯선 언어와의 불안한 동거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사용해서 기존 언어적 코드를 전복하거나 어긋나려는 시도를 통해 언어적으로 오염된 현실에 묶여 살던 나를 해방시키는 방법을 모색 보려고 한다. 첫 번째 언어 사용 문법을 새롭게 배우는 방법은 아이러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적 가정이나 근거를 의심하고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며 깊이 파고드는 방법이 아이러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근거나 가정을 의문시해보고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동안 이루어진 대화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은 적당한 나이가 되면 결혼해야 한다는 의견을 받는 대화가 있다고 가정해본다. 아이러니는 이런 의문으로 주어진 대화에 찬물을 끼 얻고 판을 뒤엎는다. 결혼은 왜 반드시 해야 되는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든 사람은 도대체 어떤 근거로 제도의 당연함을 주장했을까? 결혼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어떤 상태를 결혼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처럼 결혼은 반드시 해야 된다는 근거를 파고들어 의문을 던진 다음 그것이 가정하는 당연함에 시비를 거는 것이 아이러니다. 이처럼 아이러니는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언어적 행동에 반기를 들어 저항함으로써 대화를 새로운 국면으로 끌고 가는 전략이다. 한 마디로 아이러니는 잘 차려진 밥상을 갑자기 뒤엎으면서 무심코 동조했던 올바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무심코 따라 했던 타자의 언어 사용을 흉내 내는 일을 그만두게 함으로써 새로운 언어적 상처를 입히는 일이 바로 아이러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에 따르면 ‘아이러니스트(ironist)’는 언어적 필터로 오염된 현실에 갇혀 사는 자신을 두려워한다. 아이러니스트는 낯선 만남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면서 자신을 지배하는 기존의 언어적 코드나 문법 체계를 의문시하고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아이러니스트는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의 의미를 부단히 재진술하면서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새로운 언어를 다시 창조한다. 언어적 창조야말로 자아를 재창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기존 언어적 사용 방식에서 벗어나 기존 언어적 의미를 재진술하거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함으로써 세상을 이전과 다르게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나간다. 하지만 아이러니스트는 세계를 자신의 언어로 묘사하는 일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고 가정한다. 아이러니스트는 진리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오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로티는 이런 아이러니스트의 대표적인 사례로 프루스트, 니체, 하이데거를 꼽았다. 특히 프루스트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마주치는 것들에 대해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재정의를 시도하는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전형적인 아이러니스트로 사례로 꼽는다.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이전과 다르게 변화시켜나가는 아이러니스트는 끊임없는 재서술(redescription)을 통하여 자아 창조를 추구한다. 아이러니스트의 전형적인 예로는 자신만의 메타포(metaphor)나 어휘를 사용하여 독창적인 시를 쓰는 시인(poet)을 든다. 겉으로 보기에는 닮은 점이 없지만 닮은 점을 찾아내어 두 가지 개념을 연결시켜 사유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메타포는 언어적 의미를 재진술하거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이 하나다.
두 번째 언어적 상처를 만들어 기존 언어 사용 문법을 전복하는 방법은 유머다. 아이러니가 근거를 의심하고 언어적 코드 자체를 전복하는 것이라면 유머는 기존 언어 사용 관점이나 시각을 바꿈으로써 언어 코드에서 어긋나려고 애쓰는 방법이다. 하나의 주제에서 폭넓게 가지를 뻗어가며 한눈을 팔게 만드는 언어적 사용 방식이 바로 유머다. 아이러니가 기존 언어 사용 문법이 겉돌게 만드는 전략이라면 유머는 기존 언어 사용 문법을 비틀어 다른 가능성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륜에 대한 찬반양론을 벌이며 격론을 벌이던 대화 상황에 끼어들어 불륜은 음악이 아닐까라는 화두를 던진다. 아이러니가 불륜은 과연 나쁜 것인지, 근거나 가정을 뿌리째 흔들어 기존과 전혀 다른 생각으로 유도하는 전략이라면 유머는 불륜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대화에서 불륜을 바라보는 시각을 비틀어서 전혀 다른 관점에서 불륜을 재해석하게 만들어버린다. 아이러니가 불륜의 전제와 근거를 깊이 파고들어 불륜이라는 개념적 의미를 뒤흔들어버린다면 유머는 불륜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틀어 이전과 다른 관점에서 불륜을 재해석해보게 만든다. 따라서 유머가 계속될수록 불륜을 생각해보는 의미가 무한대로 확산되면서 틀에 박힌 불륜에 대한 관점이 수평적으로 다양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수직적 깊이를 추구하며 깊이 파고들어 새로운 언어적 사용 가능성을 추구하는 아이러니와 수평적 확산을 추구하며 기존 언어 사용 방식을 전혀 다른 개념과 연관시켜 언어적 의미를 새롭게 진술하는 유머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우리 몸에 상처를 남기고 문신을 새긴다. 불륜에 대한 옮고 그름을 따지는 이전의 논의에서 갑자가 불륜을 음악으로 해석하는 장면에 사람들을 몰아넣음으로써 불륜에 대해 원래 말하려던 방향성을 비틀어 한눈을 팔게 만드는 방법이 바로 유머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