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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식 향연에 참가한
다양한 지식 모습

'쌍심지'를 켜고 '노다지'를 찾다가 '메모지'도 못 찾다

세계 지식 향연에 참가한 다양한 지식 모습

언어유희로 언어를 경작하는 한 가지 방법     


'지'로 끝나는 말 중에서 가급적 세 글자로 된 말을 다 모아봤다. 그리고 이걸 연결시켜 한 편의 글을 써 봤다. 인위적인 냄새가 나긴 하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서 갖가지 지식이 연결되도록 문장과 문장을 이어봤다. 어휘력을 늘리는 한 가지 방법, 개별 단어로 늘어놓으면 모래알이고 구슬이지만 이걸 하나로 꿰면 그 순간 새로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 언어유희로 언어를 경작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언어유희는 우선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를  언어 조합이나 변형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반전의 매력을 던져주는 고차원의 개념 놀음이다. 언어유희로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을 터뜨리게 하거나 무릎을 치는 발상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는 알고 있지만 무심코 지나쳤던 단어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반전의 묘미를 던져주어야 한다. 나아가 언어유희는 똑같은 표현이지만 운율을 맞추거나 배치나 조합을 다르게 함으로써 익숙했던 단어라고 할지라도 전혀 다르게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삶의 활력소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언어유희는 전체 맥락 속에서 한 개체가 지칭하는 상징적 의미를 포착, 촌철살인으로 발상의 전환을 유도하거나 아포리즘 형태의 압축과 절제미로 단순하지만 심오한 의미를 담아내는 고도의 창작 놀음이다. 언어유희의 진정한 매력은 생각지도 못한 허를 찔러 고개를 끄덕이게 하거나 언어적 의미 속에서 통쾌한 재미를 주는 데 있다. 언어유희는 삶의 유희다.  



'철부지'가 길을 나섰지만 '소재지'도 파악 못하다 '거주지'를 잃다

 

한 때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로 지내거나 ‘청바지’ 입고 ‘오렌지’족으로 살며 폼 잡으며 아무런 목적 없이 행패만 부리는 ‘떨거지’로 살기도 하다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아버지’에게 반항하다가 사정없이 두들겨 맞기도 했다. ‘옷가지’를 제대로 챙겨 입지도 않고 ‘반바지’ 차림으로 고삐 풀린 ‘송아지’나 ‘망아지’처럼 ‘갖가지’ 말과 행동으로 ‘싸가지’ 없게 떠벌였던 시절이 있었다. 일정한 ‘거주지’나 ‘주거지’도 없고 전국의 ‘도읍지’나 ‘도심지’를 돌아다니며 방황한 적이 있었다. 나의 ‘소재지’ 파악을 하려고 경찰이 출동했지만 ‘시가지’나 ‘주택지’ 또는 ‘휴양지’나 ‘유원지’를 가릴 것 없이 신출귀몰하기 때문에 나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봄에는 ‘등산지’를 찾아 산에 오르는 운동을 즐기기도 하고 전략적 ‘요충지’나 ‘격전지’에 들려 그 옛날의 총성을 들어보기도 했다. 새로운 문명의 꽃이 피었던 ‘진원지’나 전쟁 중에도 한 곳에 모여 작전을 구상했던 ‘집결지’ 그리고 주민들의 주요 ‘피난지’를 돌며 당시의 아픔을 느껴보기도 했고 전국의 주요 농산물이 나오는 ‘원산지’나 ‘주산지’ 그리고 ‘발생지’나 ‘명산지’를 찾아 지역적 특산물과 지방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알아보기도 했다. 한강이나 낙동강의 ‘발원지’나 ‘수원지’는 어디인지 새로운 사상적 꽃이 피었던 ‘발상지’를 공부하며 역사를 통해 오늘을 되살려 보기도 했다.     



'목적지'를 찾아가다 '바가지' 요금에 무너져 '불모지'로 전락하다


여름에는 ‘허벅지’가 거의 드러나는 ‘핫바지’를 입고 전국의 ‘휴양지’나 ‘피서지’ 그리고 이름난 ‘유원지’를 돌아다녔다. 비가 그치고 햇살이 하늘을 찌르는 한여름에는 ‘경작지’나 ‘농경지’를 돌며 성하(盛夏)의 여름을 이겨내는 농작물의 작황을 둘러보고, 잠시 휴가를 내서 ‘고랭지’ 채소나 ‘목초지’에서 노니는 소나 염소를 보고 ‘구릉지’에 가서 사색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가을에는 ‘고적지’나 ‘유적지’ 또는 ‘명승지’와 같은 ‘여행지’를 찾아다니며 방황을 거듭하다 수많은 ‘경유지‘를 지나 ’근거지‘나 ’본거지‘ 없이 ’목적지‘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때로는 ‘바가지’ 요금을 덮어  씌우는 ‘버러지’ 같은 족속들도 만났지만 ‘해코지’를 당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겨울에는 주로 ‘유배지’나 ‘귀양지’를 찾아다니며 옛 성현들의 고독함을 ‘역지사지’ 입장에서 느껴보기도 하고 ‘저수지’나 ‘급수지’에서 물먹지 말고 물처럼 살자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지도를 바꿔놓은 ‘개간지’나 ‘매립지’, ‘간척지’나 ‘간석지’를 보며 작은 실천의 진지한 반복이 만들어내는 위대한 인간의 노력에 경이로움을 금치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에는 ‘황무지(荒蕪地)’나 ‘불모지(不毛地)’였지만 그리고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미개지(未開地)‘였지만 지금은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서식지‘가 된 사연과 다양한 생명체의 ‘출생지’나 ‘번식지’가 된 배경도 알아보았다. ‘황무지’나 ‘불모지’가  지금은 동식물이 살아가는 ‘중심지’가 되었고 어느 날 ‘별천지’로 다가와 자연의 경이로운 기적을 알게 해주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겨울바다에 들려 ’기항지(寄港地)‘나 ’기착지(寄着地)‘가 담고 있는 적막함과 고요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추해보기도 했다.   

    


'쌍심지'를 켜고 '노다지'를 찾다가 '메모지'도 못 찾다


지식은 ‘쌍심지’를 켜고 ‘근원지’나 ‘연고지’를 추적하며 사투 끝에 창조되는 ‘노다지’나 ‘환타지’일 수 있다. 지식은 저마다의 ‘행선지’를 따라 일정한 영역에 머물러 있는 ‘근무지’나 거기서 자라는 ‘재배지’나 ‘생산지’에서 저마다의 새로운 지식이 부단히 창조되기도 한다. 때로는 수많은 ‘후보지’가 각축전을 벌이다 마침내 ‘개최지’로 결정되면서 새로운 ‘도착지’가 완성되기도 한다. 지식은 한 개인이 독점하고 활용하는 ‘사유지(私有知)’나‘소유지(所有知)’가 아니라 널리 알리고 함께 나누는 ‘공유지(共有知)’다. 지식은 ‘기관지’나 ‘일간지’ 또는 ‘주간지’, ‘월간지’나 ‘전문지’에 그냥 실려 있지 않다. 지식은 그런 잡지에 실려 있는 정보를 내가 몸소 체험하면서 깨닫는 통찰력이 가미될 때 비로소 탄생된다. 어떤 지식은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통해 조사한 결과 탄생하기도 하고, 밤잠을 설치며 쓴 ‘원고지’에서 마감이 임박하여 영감이 떠오르면서 창조되기도 한다. 심금을 울리는 대부분의 지식은 ‘막바지’에 고군분투하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화룡 점점으로 불현듯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지식은 주어진 ‘시험지’와 씨름하다 쓴 ‘답안지’에 들어있기도 하고 ‘질문지’나 ‘메모지’와 ‘편지지’에 잠들어 있다가 우연히 발견되기도 한다.     

 


'문예지'에 신춘문예 데뷔하다 '교정지'도 못 받고 '알거지'가 되다


지식은 ‘학습지’나 ‘소식지’에서 몰래 숨을 죽이고 잠을 자기도 하고, ‘문예지’나 ‘학술지’에서 뜻밖의 경이로운 지식의 광맥이 발견되기도 한다. 고민을 거듭하다 어느 순간 지식은 ‘겉표지’나 ‘속표지’에 잠자고 있는 경우도 있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교정지’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지식은 ‘무크지’나 ‘정보지’ 또는 ‘종합지’에 숨어 있는 경우도 있고, ‘실습지’에서 우여곡절 끝에 탄생되기도 한다. 지식에는 ‘꼬랑지’나 ‘꼬라지’ 처럼 꼴불견인 지식과 ‘코딱지’같이 보잘것없는 지식, 그리고 ‘뚱딴지’같은 허무맹랑한 지식과 거짓으로 포장된 위장된 말을 하다가 ‘알거지’가 전락하는 지식도 있다. ‘보이지’ 않는 부문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투명지’가 있는가 하면 ‘여러 가지’ 지식을 분석해보면 ‘마찬가지’인 ‘한가지’ 지식으로 분류되는 지식도 있다. ‘건전지’처럼 ‘에너지’를 주는 지식도 있고 ‘이미지’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지식도 있다. ‘마사지’처럼 굳어진 생각 근육을 풀어주는 지식도 있다.       



'금배지' 달아보려 노력하다 '이바지'도 못하고 '잔가지'로 전락하다 


‘소시지’나 ‘꿀단지’ 또는 ‘멧돼지’나 ‘통돼지’처럼 맛있는 지식도 있고 ‘꽃가지’나 ‘꽃다지’또는 ‘도라지’처럼 아름다운 지식도 있다. ‘금배지’나 ‘금반지’ 또는 ‘금박지’처럼 화려한 지식도 있고 ‘흙먼지’처럼 더러운 지식도 있다. ‘뗴거지’나 ‘패키지’처럼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지식도 있고, ‘널빤지’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지식도 있다. ‘게딱지’나 ‘등딱지’, ‘골판지’나 ‘장판지’처럼 딱딱한 지식도 있고, ‘스펀지’나 ‘건덕지’처럼 부드러운 지식도 있다. ‘급정지’처럼 빠른 속도로 멈추면서 생명력을 잃는 지식도 있고, ‘엘피지’처럼 폭발하는 지식도 있으며 ‘솥단지’처럼 뜨거운 지식도 있다. ‘솜바지’나 ‘면바지’ 또는 ‘라운지’처럼 푹신푹신한 지식도 있고 ‘콩깍지’까는 것처럼 엉뚱한 지식도 있으며, ‘침팬지’처럼 웃기는 지식도 있다. ‘투표지’처럼 판단을 요구하는 지식도 있고 ‘십이지’처럼 12가지 동물의 형상이 들어있는 지식도 있다. ‘약봉지’처럼 아픈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지식도 있고, ‘젖꼭지’처럼 배고픈 사람에게 허기를 달래는 지식도 있다. ‘달구지’처럼 요란한 지식도 있고 ‘뒤꼭지’처럼 숨죽이고 조용히 숨어 있는 지식도 있다. ‘장딴지’처럼 뚝심이 스며들어 있는 지식도 있고 ‘나머지’처럼 끝까지 남아서 남을 위해 ‘이바지’하는 지식도 있다. ‘솔가지’처럼 삭풍을 이겨내고 은은한 향기를 전해주는 지식도 있고, ‘잔가지’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미묘한 감동을 전해주는 지식도 있다. ‘속바지’처럼 꼭꼭 숨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지식도 있고 ‘손깍지’처럼 다양한 지식이 어울려 튼튼한 믿음을 주는 지식도 있다. 

 

   

'신문지'에 나오려고 '오선지'에 작곡하다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곁가지'로 빠지다


이런 지식의 향연은 언제 ‘그칠지’ 아무도 모르며, 색다른 도전 체험을 하면서 인생의 기념비적인 ‘기념지’가 언제 나올지도 그 누구도 모른다. 지식은 ‘신문지’나 ‘포장지’, ‘마분지’나 ‘습자지’, ‘화선지’나 ‘오선지’, ‘도화지’나 ‘인화지’, ‘문풍지’나 ‘창호지’, ‘도배지’나 ‘화장지’에서 저절로 창조되지 않는다. 지식은 내버려 두었던 ‘우거지’나 딱딱한 ‘누룽지’를 ‘설거지’하다가도 탄생된다. 지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곁가지’나 짜장면과 함께 ‘단무지’를 먹으면서도 불현듯 창조되기도 한다. 지식은 어둔 땅속을 헤매다 ‘두더지’처럼 만날 수도 있고 원칙과 규율을 지키려고 애쓰는 가운데 ‘수호지’에서도 만날 수 있다. 지식은 외국에서 수입한 단순한 이론이나 ‘식민지’적 사고방식에서 탄생되지 않고 여기와 저기, 지금과 나중,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브리지’에서 탄생된다. 지식은 교만하고 자만에 빠져 거만하고 오만한 ‘모가지’에서 탄생되지 않고 오랫동안 숙성시켜 탄생되는 ‘묵은지’에서 창조된다. ‘묵은지’는 쉽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암묵지(暗黙知, tacit knowledge)’이지 쉽게 매뉴얼로 만들 수 있는 ‘형식지(型式知, explicit Knowledge)’가 아니다.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은 다양한 ‘형식지’를 문제 상황에 직접 온몸을 던져 실험하고 모색하면서 체득되는 ‘암묵지’다.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독창적인 칼라와 스타일이 보이는 나만의 고유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불특정 다수가 지니고 있는 지식과 구분되는 ‘분별지’로 부각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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