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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는 영원히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대학원생 워크숍을 마치고 

학자(scholar)는 영원히 공부하는 학생(student)입니다    

 

지금 여기서 저기를 가고 싶어 기다리는 시간,

그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지만 

이미 내 곁에서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서 기다리는 나와 

미리 가서 나를 기다리는 또 다른 내가

함께 설레며 같이 살아가는 동거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한 학기에 한 번 씩 만나 

책 읽고 글을 써서 토론하고 

교학상장의 즐거움을 만나는 소중한 시간,

바로 K-Camp(지식생태학을 공부하는 대학원 공동체 모임)만의 

특별한 워크숍, 2019년 상반기에 만나는 시간입니다.   

  


나에게도 ‘이익’이 되지만 개인차원의 이익을 넘어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시간, 

더 나아가 그 유익함에 공감하는 연대를 위해

우리는 언제나 치열하게 읽고, 연구하며 쓰는 학자이자 

배움을 멈추지 않고 작은 실천을 진지하게 반복하는 학생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텍스트가 있다. 

이론과 지식에 전적으로 기대어 쓴 

텍스트가 한편 에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이론과 지식에 선행하는 

삶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힘으로 쓴 텍스트가 있다. 

이론과 지식으로 쓴 텍스트에는 

논리적 엄밀성이 있지만, 

머리가 아니라 살갗으로 파고드는 떨림이 없다. 

삶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면한 후에 쓴 텍스트에는 

논리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무게와 깊이를 담은 진심이 있다. 

논리적 글은 두뇌로 쓸 수 있지만 

진심이 담긴 글은 삶으로만 쓸 수 있다. 

노명우 교수가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에 쓴

추천사에 나오는 말입니다.     



살갗을 파고드는 떨림이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온몸이 전율하는 진저리를 경험하고

체중이 실린 언어를 구사하는 공부를 함께 해나가야 합니다.     


창백한 실험공간에서 격전의 현장으로 달려가

현실을 만나고 그 현실 속에서 진실을 캐내기 위해

머리보다 가슴, 가슴보다 손발을 움직여 실천하며

온몸으로 배우는 깨달음의 지혜를 나누는 공부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는 도중에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 있듯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었다”(26쪽).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에 나오는 말입니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조지 오웰이 

더 낮은 밑바닥 현장으로 내려가

막노동 체험을 하며 깨닫는 공부를 했던 이유입니다.     


공부는 수직으로 파고드는 깊이와 

수평으로 넓혀가는 넓이를 동시에 갖추기 위해

전공서적도 읽어야 하지만

인문교양 책도 읽어내는 과정입니다.     


“읽을 수 있는 것을 읽을 때보다 읽을 수 없던 것을 읽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읽고 있는 것이다. 편하게 읽히는 책이라면 이미 읽은 글이거나, 

이미 알고 있는 생각이어서 제게 새로움을 안겨주지 않는 글,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글일 가능성이 클 거라고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글이라면 지금 

이렇게 나의 시간과 존재를 걸고 읽어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29쪽).

강민혁의 《자기배려의 책 읽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혼자 읽기 어려울 때 함께 읽고 토론하며 문맥을 살피고

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의미를 껍질을 파고 들어가 반추해보는

고된 노동의 시간이 바로 진정 책을 읽어내는 시간입니다.     


논문을 준비하는 어수룩한 초보자의 무한 도전에는 

날카로운 비판의 칼자국으로 피가 흐르지만

아픔을 딛고 심기일전하는 계기가 됩니다.     


처음부터 글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개발과 소발이지만 무조건 쓰는 시간에 비례해서

눈물 나는 글발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176쪽).”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쓰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읽는 것은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읽는 노력이기도 하고

쓰는 것은 머리로 쓰는 노력을 넘어서 몸으로 진심을 전달하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읽기와 쓰기가 바로 살갗을 파고드는 진심의 공부입니다.      


논문을 준비하는 학동의 지적 분투기는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주제 파악부터 자료를 수집하고 줄기를 잡아 써나가는 과정은

글쓰기라기보다 애쓰기에 가깝습니다.     



학술지에 논문을 쓰는 졸업한 선배들의 후일담은

차라리 심사위원과 저자가 벌이는 한 판 승부에 가깝습니다.

을의 입장이지만 갑이 요구하는 조건을 무조건 따라가지 않으며

밀고 당기는 저자와 심사위원의 한 판 대결은

사투를 벌이는 사각의 링에서 싸우는 두 명의 복서에 가깝습니다.     


세상에 내 글이 알려지기 위해서는

몰지각한 심사평을 받고 좌절하지 않아야 하며

분통과 울화통이 터지지만 참고 견뎌야 하는 인고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더 치밀한 논리가 필요하고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갈 길은 아직 못 가본 길”입니다.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못 가본 길, 

아직 사람의 족적이 없는 길을 걸어가는 길은

외롭고 힘들지만 함께 걸어가는 길은 

서로에게 힘이 되는 길입니다.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라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이옵니다.”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이 영화, ‘남한산성’에서 한 대사입니다.

우리가 쓰는 논문은 ‘글’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걸어갈 ‘길’입니다.     


그런 길에는 언제나 두려움과 외로움이 엄습합니다.

하지만 두려움 없는 도전은 도파에 불과하고,

외로움이 따르는 시간이라야 창작의 씨앗이 잉태됩니다.



"무엇을 바라보려면 외로워야 한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프랑스 사진작가,

레몽 드파르동(Raymond Depardon)의 말입니다.     

힘들고 외로운 길이지만

내 옆과 뒤에는 같은 길을 걸어가며

응원하며 희망의 연대가 되는

선후배와 동료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길을 여러분과 같이 걸어가는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치열하게 읽고 쓰겠습니다.  

  


“역사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진보도 항상 그때그때의 일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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