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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은 학원이 아닙니다

대학원은 학원이 아닙니다


학부나 학원에서 배웠던 지식,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나 가치관을 가정부터 다시 재고해보는 공부가 바로 대학원 공부의 시작입니다. 대학원은 학부나 학원과 다르게 다음과 같은 공부를 하는 학문 공동체입니다.



대학원은 대충이라는 해충을 잡아내는 각성의 텃밭입니다


첫째, 대학원은 무엇보다도 패러다임(paradigm)과 방법론(methodology)을 배우는 곳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이자 내 생각을 지배하는 멘탈 모델(mental model)이 패러다임입니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앎에 이르는 과학적 탐구 방법론도 바뀝니다. 패러다임이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라면 방법론은 그런 세계관이 믿는 진리에 이르는 길입니다. 방법론은 방법(methods)에 관한 방법에 관한 과학철학적 탐구입니다. 어떤 방법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방법과 기법(techniques), 그리고 절차(procedures)나 과정(processes)도 달라집니다. 학부나 학원에서는 주로 방법이나 기법, 절차나 과정을 배우면서 어떻게 외우고 지식을 습득하는 길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주로 배웠다면 대학원에서는 이런 방법과 기법을 지배하는 논리적 가정을 의문시하면서 이런 방법이 과학철학적으로 맞는 방법인지를 따져 물어보는 공부를 하는 곳입니다. 더불어 방법의 적실성과 타당성을 덤으로 알게 됩니다.



둘째, 대학원은 대충 생각하는 습관을 버리는 시기입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잠시 보여준 다음 사진을 가리고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방금 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똑같은 자세로 생각을 해보라고. 수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해봤지만 로댕의 모습과 똑같은 자세로 생각하는 사람을 보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은 사람은 모두 오른손 팔꿈치를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감췄던 그림을 다시 보여줍니다. 자세히 보면 로댕은 자신의 오른쪽 팔꿈치를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왜 사람들은 로댕의 생각하는 모습을 수없이 봤다고 생각하는데 로댕의 모습을 안 보여주고 로댕과 똑같은 자세로 생각해보라고 하면 못할까요? 평소에 대충 보는 습관 때문입니다. 대충 보면 대충 생각합니다. 대학원 공부는 내 몸에 사는 ‘대충’이라는 해충을 잡아내는 각성의 과정입니다.



대학원은 습관과 타성의 벽을 깨부수는 학문적 터전입니다


셋째, 대학원은 습관과 타성의 벽을 깨는 공부를 하는 곳입니다. 한 여비서가 타자기를 열심히 두드리며 문서를 타이핑하고 있다. 세상과 기술변화에 부응해서 타자기는 이제 컴퓨터 키보드와 모니터로 바뀌었습니다. 여비서는 타자 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컴퓨터 키보드로 모니터에 문서를 타이핑해서 일정한 분량을 입력하고 나면 왼손으로 모니터를 오른쪽으로 확 밀어버립니다. 순간 모니터는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참고: 타자 치는 습관을 키보드 치는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한 여비서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Qd9pjU8kOYw). 타자기를 사용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기술이 혁명적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날 방식으로 습관적으로 반복합니다. 타성과 고정관념의 포로가 된 것이고 통념의 덫에 걸려 웬만한 결단과 결행으로는 생각을 바꾸기에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습관적(習慣的)으로 반복하면 습관의 적(賊)에 지고 맙니다. 습관의 덫에 걸리지 않으려면 관성이 끌고 가려는 길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야 합니다. 대학원 공부는 타성에서 벗어나 관성대로 따라가지 않으려는 안간힘입니다. 



넷째,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말이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 데 토끼가 전속력으로 달려와서 부딪쳐 죽습니다. 농부가 농사일을 그만두고 나무 밑동이만 쳐다봅니다. 토끼가 다시 올 것이라는 가정을 갖고 오지 않는 토끼를 기다립니다. 어떤 착각에 빠져 되지도 않을 일을 공연히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과거의 어떤 성공체험이 미래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환경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성공체험을 버리지 않고 반복해서 적용하려는 어리석음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대학원은 과거의 공부 방식으로 성공했던 성취에 도취되지 않는 공부를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언제나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를 되새겨보고 통념도 통렬하게 비판하는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명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갈매기는 근시(近視)라서 아무리 높이 날아도 멀리까지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특히 위인이나 유명한 사람이 남긴 명문이나 명언을 그대로 믿는 성향이 있습니다. 공부는 당연한 가정조차 의문을 던져 파헤쳐보면서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누워서 떡먹기”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누워서 떡을 먹다가 기도가 막혀서 죽을 수 있습니다.



대학원에서의 공부는 목숨을 걸고 자기를 발견하는 미()완성입니다


다섯째, 대학원에서는 공부는 개념을 습득하는 과정입니다. 개념 습득은 기존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라 기존 개념을 재개념화 시키거나 나의 신념을 반영하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과정입니다. 기존 개념을 나의 방식으로 재정의하는 공부가 가장 소중한 공부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먼저 정의(定義) 하지 않으면 누군가 정의(定義)한 세계에 속박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원에서의 공부는 남이 정해놓은 정의를 외우는 과정이 아닙니다. 학부나 학원에서는 주어진 정의를 누가 정확하게 외우는지가 학업성취도의 관건입니다. 하지만 대학원은 세상의 모든 개념을 재개념화 시켜 다시 정의하며 공부하는 곳입니다. 직원을 배우로, 직업을 연기로, 일터를 무대로, 제복을 무대 의상으로, 방문객을 관객으로 개념 변경을 시도한 디즈니는 혁신적인 성과를 거둔 적이 있습니다. 피곤해서 일터에서 일하다 피곤해서 조는 직원은 있어도 연기하다 무대 위에서 조는 배우는 없습니다. 개념이 바뀌면 사고가 바뀌고 사고가 바뀌면 일터에서 일하는 방식도 바뀝니다. 언어가 틀에 박히면 생각도 틀에 박혀서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공부는 개념으로 생각하며 사고력을 개발하는 과정입니다. 사고력은 전적으로 내가 구사할 수 있는 개념적 사용력에 달려 있습니다.



여섯째, 대학원에서 하는 공부는 목숨을 거는 위험한 결단이자 결연한 결행입니다. 취미로 공부하는 대학원생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어딘가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 타기 공부도 부실합니다. 공부는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자신을 찾아나가는 자기 발견의 과정입니다. 공부는 나다움을 찾아 떠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美) 완성입니다. 양(羊)이 무럭무럭 커가는 모습(大)에서 느끼는 흐뭇한 모습이 공부로 느끼는 감동이자 행복한 삶입니다. 김공재 시인의 ‘용감한 단추’처럼 단추 구멍에 모가지를 걸어야 합니다. “단추가/단추 구멍에/모가지를 걸었다/붙들고/싶은 게 생기면/다 걸어야 한다/그렇게 배웠다.” 그렇게 목숨 걸고 공부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하기 위한 수단적 가치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 공부를 통해 나를 찾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내 안에 있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 그래서 전 세계에 어디에도 없는 나를 찾는 과정, 그것이 바로 공부하는 과정입니다. “자기 자신이 되라. 다른 사람의 자리는 이미 다 찼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가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 함께 길을 걸어가는 이유는 개성이 넘치는 학문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입니다.



대학원은 삶으로 앎을 구원하는 공부가 이루어지는 격전의 현장입니다


“달걀을 삶으면 애초의 원형 그대로입니다. 세 개의 달걀은 세 개의 달걀로 제각기 따로 있습니다. 달걀을 깨어 함께 찌면 모든 것이 하나로 섞입니다. 세 개의 달걀은 개체의 모양을 상실하고 그냥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달걀 프라이는 어떻게 될까요? 보십시오. 노른자위들은 따로 지만 흰자위는 서로 구별 없이 하나로 붙어 있습니다. 세 개의 달걀은 세 개의 달걀 인체로 있으면서도 하나로 결합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잃지 않고서도 남들과 어울리려면, 개성을 가진 채로 조직 안에서 활동하려면, 삶은 달걀이나 달걀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달걀 프라이를 하듯이 하나로 이어진 하얀 바다 위에 노랗게 떠 있는 아르키펠라고(群島)처럼 살아야 합니다”(120-125쪽). 이어령의 《길을 묻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대학원에서의 공부는 너무 자신의 개성을 내세우고 다른 전문가와 어울리지 않는 삶은 달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자신의 개성을 잃고 뒤섞인 달걀찜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나의 핵심(노른자위)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어울려 아름다운 학문공동체(흰자위)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하얀 바다 위에 떠 있는 노른자위처럼 빛나는 자기중심을 갖되 함께 살아가는 터전(흰자위)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동시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공부의 완성은 책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는 현장이 공부의 무대입니다. 대학원에서의 공부가 책상 지식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즉 앎으로 삶을 증명하려는 창백한 지식인을 만드는 과정에 있다면 여기서 양산되는 이론은 무기력합니다. 이론(理論)은 현장을 왜곡하는 이론(異論)으로 전락합니다. 먼저 알고 나중에 행동하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공부, 앎과 삶이 철저하게 구분되는 공부, 지식과 지식에 칸막이가 쳐져서 소통과 왕래가 없는 공부, 지(知)와 정(情)이 분리되어 주객(主客)을 구분하는 공부는 창백한 지식인만을 대량 양산할 수 있습니다. 진짜 공부의 완성은 삶으로 앎을 증명하려는 실천적 지식인 양성에 두어야 합니다. 이들은 입으로 앎을 증거 하지 않고 몸으로 앎을 창조합니다. 이들은 앎이 삶을 구원하기보다 삶이 앎을 구원하는 공부를 합니다. 절박한 현실적 필요성과 위기의식이 앎을 따라가다 자기만의 체험적 깨달음으로 무장하는  공부하는 직장인인 경우도 있습니다.  앎과 삶이 구분되지 않은 채 온몸을 던져  삶의 최전선에서 앎을 밥먹듯이 먹고사는 프로 대학원생들이 바로 실천적 지식으로 변신하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치는 학생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삶으로 앎을 만들어가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공부를 하는 대학원생을 필요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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