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간관계의
사회 역사적 합작품이다

인간관계에 대한 반성과 성찰(1)

인간관계에 대한 반성과 성찰(1):

인간은 인간관계의 사회 역사적 합작품이다


인간관계는 우연한 마주침의 산물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람,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읽는 책들이 나를 말해준다.” 괴테가 한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어떤 공간에서 해보는 체험, 그리고 내가 읽는 책을 물어보면 된다. 인간관계가 인간을 바꾼다는 의미이고, 어떤 공간에서 무슨 체험을 했는지, 무슨 책을 읽고 무엇을 깨달았는지가 나를 결정한다. 특히 인간은 인간관계의 사회적 합작품이다. 나는 내가 노력해서 만들어진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과 환경의 합작품이다. 인간관계가 인간을 만든다. 문제는 살아가면서 미래 어떤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를 지금 여기서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86-87쪽).”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에 나오는 말이다. 미래라는 타자, 어떤 미래의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면서 타자라는 선물을 들고 올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분명한 점은 내가 어떤 타자를 만나든 나는 타자를 만나는 순간부터 새로운 나의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어떤 타자도 만나지 않고, 자주 가는 곳은 언제나 정해져 있으며, 읽지 않거나 읽더라도 같은 분야의 책만 반복해서 읽는다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타자가 지옥이라면 나의 미래는 타자를 만나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옥처럼 느껴지는 타자도 만날 수 있지만 무한한 깨달음을 주는 타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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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마주친 기회들이 전환의 경로를 제시한다.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최적의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경로 안에서 마주치는 경험과 관계망 안에서 자신의 선호와 기준에 따라 하나의 답을 만들어가는 것이 ‘어쩌다 전환의 기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62쪽). 제현주의 《일하는 마음》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전환의 경로를 제시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과 마주치는 경험과 관계망 안에서 자신과 코드가 맞는 또는 자신과 생각하는 방식이 맞는 사람을 만나는 기술이 바로 ‘어쩌다 만남의 기술’이다. 내가 필요한 사람, 내가 만나야 될 사람을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상상하면서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껏 내가 만난 많은 사람은 미리 계획하고 구상해서 만났다기보다 우연한 기회에 어떤 모임을 나갔거나 어떤 일을 같이 하는 과정에서 마주친 사람이다. 우발적 마주침이 내가 찾던 사람이라는 깨우침을 준 사건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이 나라는 사람을 바꿔간다. 지인의 소개로 모임에 나갔다가 명함을 교환하면서 서로의 관심사를 이야기하다가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공감되는 바가 크면 모임의 계기를 만들어 또 만남을 이어간다. 매번 같은 사람을 만나지만 모임 때마다 다른 차이로 다가오는 사람일수록 또 만나고 싶어 진다. 앞으로 어떤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는 지금 여기서 알 수 없는 가능세계다. “모든 마주침은 우발적이다. 그 기원들에서 그러할 뿐 아니라(마주침은 보증되어 있지 않다) 그 효과들에서도 그렇다. 달리 말해, 모든 마주침은 비록 일어났지만,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78쪽). 알튀세르의 《철학과 맑스주의》에 나오는 말이다. 일어났던 마주침의 관계가 내가 만든 인간관계이며, 그 관계가 오늘의 나를 만들어온 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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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만남의 기술’은 어디선가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도 아니고 만남의 대가가 자신의 노하우를 일방적으로 가르쳐준다고 생기는 기술도 아니다. 그야말로 어쩌다 만난 마주침이 가져다준 사람 관계에 대한 깨우침이자 가르침이다. 마주치는 사람 중에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신기하게도 나와 비슷한 고민으로 안간힘을 쓰면서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많다.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놀랍게도 추구하는 가치관이나 지향하는 인생관이 비슷한 사람, 한 두 마디 해보면 인생에서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금방 알 수 있는 사람과 조우한 것이다. 나와 코드가 통하는 사람과의 만남도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즐기는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보다 오랫동안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과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어떤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점프하는 방식이나 현재 지니고 있는 가치관의 틀을 ‘부수는’ 방식이 자신과 같은 사람과 만나기는 힘들다”(215쪽). 우치다 타츠루의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에 나오는 말이다. 생각이 같은 사람과의 인간관계도 필요하지만 생각하는 방식의 특이함을 공유하는 만남은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옥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레비나스가 말하는 ‘나의 미래를 바꾸는 진정한 타자’다. 나는 나의 미래가 결정하고 나의 미래는 내가 누구를 만나는지가 결정한다. 나의 미래는 지금까지 만난 사람과 다른 타자와의 마주침이 결정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날지 지금 여기서 예측할 수 없다. 레비나스가 《시간과 타자》에서 이야기하는 핵심은 나의 미래는 내가 미래에 만나는 타자와의 관계가 결정한다. 인간도 인간관계의 약자라면 인간관계 맺음 방식과 그것의 성격에 따라 관계 속의 인간의 미래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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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는 다람쥐 쳇바퀴가 아니라 동심원이다.


“타자는 하나의 위협적인 세계의 가능성을 표현하면서 등장하며, 이 세계는 타자 없이는 펼쳐지지 못한다. 나? 나는 나의 과거 대상들이며, 나의 자아는 바로 타자가 만든 한 과거의 세계에 의해 형성되었을 뿐이다. 타자가 가능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한 세계이다”(485-486쪽).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 나오는 말이다. 타자를 지옥으로 생각하는 사르트르와 다르게 들뢰즈는 타자를 과거에 머물러 있는 나를 새로운 미지의 영역으로 이끌고 갈 ‘가능세계’로 본다. 타자와의 지속적인 마주침이 과거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는 나를 새로운 ‘가능세계’로 탈바꿈시켜주는 동력이다. 들뢰즈는 나와 다른 타자를 억압하고 타자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제거하려는 만남보다 나에게 색다른 깨우침을 주는 마주침을 강조한다. 동일한 사람을 반복해서 만나도 오늘 만난 그 사람을 내일 만나도 또 다른 사람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는 진정한 인간관계는 오늘의 이 사람이 내일의 이 사람으로 다시 나타나는 동일성의 무한 반복이 아니라 오늘의 이 사람이 내일은 전혀 다른 그 사람으로 나타나는 차이의 반복이다. 똑같은 사람을 매일 만나도 늘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는 관계가 진정한 인간관계를 통한 배움이 일어나는 관계다. 타자 없이 펼쳐지지 않는 나의 미래는 지금 여기서 알 수 없는 예측 불허의 세계다. 내가 알 수 있고 알아야 하는 사실은 나를 새로운 가능세계로 이끌어줄 타자와의 만남에 따라서 나의 미래가 이전과 다르게 전개될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타자와의 관계가 가져올 미래는 레비나스가 말했듯이 손으로 거머쥘 수 없는 불확실한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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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앞으로 나아가거나 발전하지 못하고 늘 제자리에 있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말한다. 다람쥐 쳇바퀴는 아무리 돌려도 늘 그 자리에서 뱅뱅 돈다.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는 열심히 앞으로 달리지만 자신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걸 모르고 돌린다. 다람쥐 입장에서 쳇바퀴는 자신에게 재미를 주는 놀이기구지만 놀이기구를 갖고 노는 다람쥐는 어제나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같은 놀이기구를 무한 반복할 뿐 달라지는 게 없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는 것과 비슷하게 사람은 런닝 머쉰 위를 열심히 달린다. 아무리 달려도 자신은 늘 그 자리에서 있다. 《차이와 반복》을 쓴 철학자 들뢰즈 입장에서 보면 다람쥐 쳇바퀴는 어제와 차이가 없는 일을 무한 반복하는 동일성의 패러다임이다. 동일성의 패러다임에 비추어 보면 내가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지가 미리 결정되어 있고 나는 그 기 준에 얼마나 부합되는 일을 동일하게 잘하느냐가 성과 판단의 근거로 작용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정해진 네트워크 안이나 기존의 인맥 안에 있는 사람을 반복해서 만난다. 색다른 사람과 우연히 마주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에 반해서 나선형을 그리면서 파고들거나 어제와 다른 반경을 그리면서 확산되어 나가는 동심원은 어제와 전혀 다른 곳으로 심화되어 나가거나 확산된다. 들뢰즈 입장에 따르면 나선형의 동심원은 어제와 다른 차이를 낳는 차이 생성의 패러다임이다. 차이 생성의 패러다임에 비추어 보면 동일한 일은 반복되지 않는다. 어제와 다른 일이 다른 의미를 생산하면서 반복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사람을 반복해서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이 사람은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다. 당사자도 어제의 내가 아니라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른 사람이다. 같은 사람을 다르게 만나기도 하지만 이제까지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인간관계의 깊이를 심화시킴은 물론 폭도 함께 넓혀나가는 과정이 나선형의 동심원 패러다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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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의 변화가 ‘관계’ 속의 ‘인간’을 바꾼다


예측할 수 없이 우연히 만들어지는 인간관계가 관계 속의 인간을 바꾸어 나간다. 인간의 변화는 곧 관계의 변화를 전제한다.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 사람만큼의 변화밖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맺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 입니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그렇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렇습니다”(239-240쪽). 신영복의 《담론》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관계의 깊이가 성장할 수 있는 인간의 높이를 결정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높이를 결정한다. 나의 성장 높이는 내가 맺는 인간관계의 높이가 결정한다. 존재가 관계를 결정하지 않고 관계가 존재를 결정한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관계를 포기하고 자기 혼자 독불장군식으로 성장하는 높이를 추구하면 바람에 휘말려 줄기가 꺾인다. 어깨동무하는 잔디가 어깨를 자기 욕심으로 높이 자라면 잔디 깎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베인다. 나는 혼자 성장하는 독립적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성장하는 관계의 다른 이름이다. 나의 실력도 나 혼자 발휘하는 독립적 역량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함께 주고받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102).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관계가 낳은 역사적 산물이 인간인 이유다. 인간은 독립적 공간에서 혼자 노력해서 탄생한 개체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아무런 내왕이 없는 '순수한 개인'이란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처럼 소설 속에나 있는 것이며, 천재란 그것이 어느 개인이나 순간의 독창이 아니라 오랜 중지(衆智)의 집성이며 협동의 결정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264쪽).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다른 인간과 그 사람과 만난 공간, 그리고 함께 보낸 시간의 합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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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a Becoming)입니다. 칸트의 “물物 자체”(ding an sich)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물 자체라는 생각은 순전히 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으로서, 그것이 맺고 있는 전후방 연쇄(lok-age)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475쪽).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 따라 위치는 물론 본질과 운동방향도 바뀐다. 일상에서 만나는 존재는 독립적 개체로 존재하지 않고 개체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개체들과의 관계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부단히 변신한다. 예를 들면 도서관에 놓여 있는 책 한 권도 책 한 권의 개체로 존재하지 않고 그 책을 쓴 저자, 책을 내준 출판사, 책을 읽는 독자가 언제 어디서 어떤 관계로 만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책으로 부단히 생성된다. 《공부는 망치다》라는 책은 책 한 권의 독립적 개체로 그 가치를 판정할 수 없다. 책을 쓴 저자가 어떤 문제의식으로 그 책을 쓰게 되었으며, 책을 낸 편집자의 편집 방향에 따라서 어떤 점이 수정되었는지, 그리고 저자의 손을 떠나 세상에 나와서 수많은 독자와 만나면서 전해준 메시지와 그 감흥은 모두 다를 것이다. 똑같은 책인데 누가 어떤 관점에서 읽어내느냐에 따라 책은 수없이 재탄생되면서 부단히 생성되고 발전한다. 한 권의 책은 그냥 독립적 개체로서 종이책에 머무르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서 부단히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친다. 책은 그래서 물 자체가 아니라 생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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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도 인간관계의 산물이라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인성도 인간성의 약자다. 인성은 그래서 인간과 인간이 만나 맺은 인간관의 사회 역사적 산물이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成) 것이지요”(40쪽). 마찬가지로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인성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인간적 성격의 줄임말이라면 인성을 바꾸는 방법 또한 개인을 관계없는 공간에 집어넣고 일방적으로 바꾸려는 교육은 올바른 방법이 되지 못한다. 인성은 인간성의 산물, 즉 인간과 인간의 만남 속에서 생긴 역사적 산물이기에 그것을 바꾸는 방법 또는 인간적 관계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인성은 인간관계의 산물이기에 인간관계를 바꿔주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한 사람의 인성 또한 변화되지 않는다. “좋은 관계란 서로를 변화시키면서, 변화되는 관계이다”(309쪽). 이성복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 나오는 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변화를 위한 자극을 주고받을 때 관계는 관망하는 관객이 아니라 관심으로 보살펴주며 혼자서 해낼 수 없는 관문을 열어가는 가능성의 세계다. 좋은 관계라야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사람은 역시 인성 또한 좋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환대해주거나 호의를 베풀어주는 관계는 상대방과의 수평적 인간관계를 쌓아나가기 어렵게 만든다. 부담되는 관계가 지속될수록, 자신이 지금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인식이 들 때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46쪽). 은유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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