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 대한 반성과 성찰(2)
인간관계에 대한 반성과 성찰(2):
'관계' 없는 ‘관계’는 없다!
알아야 안아줄 수 있다
지나가는 아름다운 여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꼭 안아주면 어떻게 될까? 반대로 지나가는 신사를 모르는 여인이 쫓아가서 안아주면 마찬가지로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 대부분 당사자는 당황하고 황당해할 것이다. 모르는 상태에서 안아줄 수 없다. 내가 상대방을 알아야 안아줄 수 있다. ‘아름답다’의 의미는 ‘알다’(知)라는 동사 어간에 ‘음’ 접미사가 붙어서 생겼다고 한다. ‘알음’(知)에 ‘답다’ 접미사가 붙어서 생겼다는 견해다. 이 견해는 ‘아름답다’의 어원에서 보면 아는(知)것이 아름다움의 본질이 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아름다운’ 사람은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안아 줄 수 있다. 알지 못하는 사람 안아주다가 큰 코 다친다. 상대를 제대로 모르면 안아줄 수 없다.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주기 위해서 우리는 상대방의 아픔을 알아야 한다. 아픔은 사연을 들어봐야 안다. 사연과 배경이 깃들어있는 아픔을 깊이 보듬어줄 수 있어야 비로소 상대를 안아줄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175쪽).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알면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면 더 깊이 알게 된다는 말이다. 애정 없는 타자는 그야말로 나와 관계없는 타인이다. 나와 관계없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도 바뀐다. 관계없음은 알 필요 없음과 동격이다.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그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유발되고 알기 위한 노력이 뒤따른다. 흔히 철학을 지혜(Sophos)를 사랑(Philos)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진리나 지혜를 알면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진리나 지혜를 알게 된다. 그래서 철학(PhiloSophy)도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 아니라 ‘사랑’해서 지혜를 알게 되는 학문이다.
메리 올리버가 《휘파람 부는 사람》에서 이야기한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이 있다. 바로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이다. 사랑하면 질문이 많아지고 질문이 많아지면 더 깊이 알게 된다.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은 두 가지 능력이 아니라 같은 능력이다. 사랑하면 질문이 많아지고 질문이 많아지면 더욱 사랑한다. 시작은 대상이든 사람이든 사랑이다. 사랑하면 질문이 많아져서 알고 싶은 욕망도 멈추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질문이 많아진다. 알고 싶은 게 많아지고 알고 싶은 게 많아질수록 더 상대와 가까워진다. 가까워진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인간관계가 돈독해진다는 것이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대단히 철학적인 가사입니다. 잘 알기 위해서는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 관계가 없다면 애초부터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관계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관계가 애정의 수준일 때 비로소 최고의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애정은 인식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바로 저널리즘이 양산하고 있는 위장된 객관성입니다. 애정이 없으면 아예 인식 자체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애정이야 말로 인식을 심화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279쪽). 신영복의 《담론》에 나오는 말이다. 관계없다고 생각하면 서로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관계가 없어지면 애정의 연대도 끊어지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몰지각한 행동이 일어난다.
부끄러운 인간관계가 건강한 인간관계다
예를 들어보자. 지하철을 타자마자 금방 내릴 것 같은 사람 앞에 서 있었다. 직감대로 그 사람이 다음 역에서 내리는 순간 내가 맡았다고 생각했던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해서 자리 잡기에 실패했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 빈자리로 쏜살같이 움직여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자리에는 자기 앞에 있던 친구를 앉히는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하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156쪽).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관계가 돈독한 사람 사이에는 안면몰수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다. 함부로 행동하면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하고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몰지각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행동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리에 대한 기득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를 무시하고 빠른 속도로 빈자리를 차지한 그 사람은 나와 아무 관계없다고 생각하면서 안면몰수 행위를 보여준 사건이다. 나와 네가 아무 관계없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은 인간적 미덕을 포기하고 몰지각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관계가 없으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끄러워한다는 이야기는 나와 상대가 애정의 연대로 엮여 있어서 나의 미천한 생각과 행동이 마음에 걸려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뜻이다. 자리에 대한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내가 자리를 잡지 못한 이유는 나하고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전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나하고 아무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이나 편리함을 위해 몰지각한 행동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 염치없이 행동하는 이유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고 존중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염치 있게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알기 때문이다. 반대로 염치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순간 그 사람의 사람됨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고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인간관계야말로 서로의 입장을 정확히 아는 관계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관계다. 부끄러워한다는 이야기는 자기 입장에서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먼저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나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인간적 배려의 미덕이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상대방보다 먼저 자세를 낮추고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드러내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해를 구하는 자세와 태도다. 부끄러워해야 사람은 지금 여기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배움을 찾아 공부하고 자신을 능력을 계발한다. 부족함을 부끄러워해야 그걸 채우고 사람됨을 갖추려는 부단한 공부를 시작한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재미’를 즐기는 관계가 아니라 ‘기쁨’을 주는 관계다
재미를 주는 인간관계와 기쁨을 주는 인간관계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선 두 가지 인간관계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쁨과 재미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삶이 위축될 때 우리는 웃지 않는다. 웃을 수 없다. 반면 삶이 고양될 때 우리는 웃는다. 그러면서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다시 보게 된다. 그렇기에 웃음은 삶의 고양의 징표이며 이를 통해 다시 힘을 얻게 된다. 친밀성의 관계에서 서로를 웃게 하는 것은 서로가 기쁜 관계라는 징표가 된다”(169쪽). 엄기호의 《고통의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람은 기쁘거나 재미있을 때 모두 웃지만 그 웃음의 성격은 다르다. “재미는 사람을 웃게 한다는 점에서 기쁨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재미는 현존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나는 기쁠 수 있다. 그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웃을 수 있다. 그렇기에 나를 기쁘게 하는 그의 현존에 대해 나는 감사할 수 있다. 나를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그리고 한다면 더더욱 그의 현존에 감사할 수 있다. 그 감사로 인해 삶은 살아갈만한 것이 된다”(169쪽). 엄기호의 같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나는 재미있지 않다. 기쁨을 주기 위해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려는 상대방의 안간힘을 느꼈을 때 나는 눈물이 날 수 있다. 상대의 안간힘은 나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생존 경쟁일 수도 있다. 기쁨은 상대의 존재 자체로 나에게 전해질 수 있다. 그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나에겐 그의 존재 자체가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런 기쁨을 전해주는 인간관계는 그 자체가 행복의 원천이다.
하지만 재미로 맺어지는 인간관계는 기쁨을 전해주는 인간관계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내가 재미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재미를 느끼는 것은 그의 존재와 더불어 부가적인 행동이나 표정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엄기호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존재 자체가 재밌는 사람은 없다. 어릿광대는 우리를 재밌게 한다. 그러나 광대로부터 오는 재미는 그의 존재가 아니라 그의 표정이나 말투, 행동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재밌게 하려면 끊임없이 행위를 해야 한다. 심지어 아무 행위를 하지 않는 것조차도 웃기려는 의도로 의식적으로 하는 행위에 속한다. 우리는 그의 현존을 재밌어하는 게 아니라 그의 행위로 재밌다고 여기며 그 행위를 소비한다. 기쁨이 타자의 현존과 관련된 것이라면 재미는 타자들 소비한다”(170쪽). 기쁜 인간관계는 만남 자체만으로도 기쁘지만 재미있는 인간관계는 만나면서 상대를 재미있게 만들 준비물이 필요하다. 기쁜 인간관계는 이전과 비교해서 뭔가를 더 기쁜 걸 요구하지 않지만 재미는 비슷한 재미로는 상대를 웃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이전과 다른 재미를 요구한다. 그래서 기쁜 인간관계는 더 기쁜 것을 요구하지 않지만 재미있는 인간관계는 더 재미있는 웃음거리를 요구한다. 더 많이 웃으려면 더 재미있는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한다. 이전과 비교해서 재미있지 않으면 재미있는 인간관계는 거기서 끊어진다. 기쁜 인간관계는 상대를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뭔가를 제공해주어서 기쁜 게 아니기 때문에 이전과 다른 기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쁨을 주고받는 인간관계에서는 상대가 뭔가를 더 하려고 할 때는 걱정하고 염려한다.
기쁜 인간관계에서는 상대가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면 발 벗고 나서서 말린다.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다고 말한다. 상대가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하는 것은 심한 부담감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기쁘게 해 주려는 상대방의 작은 움직임에도 걱정하면서 제발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이제 그만해도 나는 충분히 기쁨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다른 노력을 필요하지 않다고 오히려 상대방에 신신당부를 한다. 이처럼 기쁜 인간관계는 주고받는 거래의 가치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소중함으로 맺어진 관계다. 반면에 재미있는 웃음거리를 주고받는 관계는 이제 그만 웃음을 주어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미있는 인간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까지 본 재미보다 더 재미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개그맨이나 코미디언이 시청자를 재미있게 해 주면 시청자가 그만 재미있게 해달라고 부탁하기보다 더 재미있는 걸로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재미있는 인간관계가 지속되려면 이전보다 더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가중된다. 상대방의 재미있는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기존의 재미없는 인간관계는 끊어지고 더 재미있는 걸 보여주는 사람과의 인간관계가 새로 시작된다. 그래서 엄기호 저자는 재밌는 인간관계의 끝을 예언해준다. “재밌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면 존재감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존재감을 위해 관심을 끌어야 하고, 관심을 끌기 위해 재밌는 인간이 되어야 하고, 재밌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플레 인간이 되었다”(171쪽). 그런데 문제는 재미를 추구하는 인간관계가 갈수록 우리 사회와 공동체의 인간적 밑바탕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재미가 재미있는 이야기에서 나오지 않고 타인의 고통이나 아픔에서 나온다. “타인의 고통을 재미 삼아 즐기고 누군가의 모자람을 조롱하며 웃는다. 누군가의 위선을 폭로하며 웃는다. 잘 나가는 타인의 아픔에 눈물겨워하지 않고 몰래 보기를 통해 나름 통쾌하게 생각하며 혼자 웃음 짓는다. 누군가 망가질수록, 더 괴로워할수록 우리는 재미가 있다”(180쪽). 익명성이 보장되는 네트워크 공간에서 재미는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원료 삼아 반복 재생산되고 무한 공유된다. 이제 우리는 어떤 인간관계를 통해 기쁨을 주는 사이로 바꿔나갈 것인가.
인간은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가? 나를 인정받고 인정받는 나는 또 누군가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관계가 퍼져나갈 때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 속의 인간관계 역시 겸손과 존중의 관계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그 사람과 함께 살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야”(284쪽). 신영복의 《강의》에 등장하는 말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 짧은 시간이라도 함께 하려는 이유는 같이 지내면 지금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행복은 혼자 느끼는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삶의 충만감이다. 행복한 관계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의 노력 덕분에 맺어진 합작품이다.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 관계가 기쁨과 즐거움이거나 배움과 성숙, 성찰의 기회일 때다”(204쪽).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에 나오는 말이다.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늘 언제나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인간관계를 만들어 온 것이다.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떤 문제든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이자 스승이기 때문이다. 스승은 꼭 뭔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라기보다 나로 하여금 이전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자극을 던져주거나 계기를 마련하는 사람이다. 그런 스승은 꼭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연륜과 경험이 풍부할 필요는 없다. 내가 해보지 않은 일, 가보지 않은 곳, 만나지 못한 사람을 먼저 경험하고 나름의 철학과 신념을 갖고 자기 언어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스승이다. 인간관계가 주는 행복은 바로 이런 스승을 만나 배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사랑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함께 걸어 가는 것'입니다. '장미'가 아니라 함께 핀 안개꽃입니다(p.135)." 신영복의 《처음처럼》에 나오는 말이다. 장미꽃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자신이 아름다워서라기보다 하얀 안개꽃이 묵묵히 배경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장미꽃과 안개꽃이 오래가는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장미꽃의 화려한 전경은 안개꽃의 담백한 배경 덕분임을 깨닫고 안개꽃에게 고마워하는 장미꽃의 겸손함이 필요하다. 장미꽃의 화려함에서 사랑을 확인하기보다 화려한 장미꽃을 위해 기꺼이 배경이 되어주는 안개꽃에서 사랑의 본질을 확인한다. 전경으로 드러난 장미꽃이 어느 순간 배경으로 물러나고 그동안 자신을 위해서 묵묵히 봉사해준 안개꽃을 전경으로 떠받쳐줄 때 둘의 관계는 눈물 나는 감동적인 관계로 발전한다. 세상의 모든 풍경도 언젠가 겪었을 곤경 덕분에 드러나는 전경이다. 곤경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풍경이라는 전경도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전경으로 드러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자기 대신 상대방이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묵묵히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내가 된 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내가 전경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수많은 은인들의 배경 덕분이다. 인간관계는 전경과 배경 사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관계다. 어둠의 배경이 밝은 전경을 낳고, 걸림돌의 배경이 디딤돌의 전경을 낳으며, 밑바닥 좌절의 배경이 정상에 느끼는 기쁨의 전경을 낳는다. 마치 모든 커피에 들어가 있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화려한 스타플레이어가 돋보이도록 도움을 주는 어시스트 맨의 존재가 인간관계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다. 남에게 기쁨을 주는 인간관계도 아픔이라는 곤경을 먹고 풍경을 낳는 과정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관계다.
인간관계는 부화뇌동이 아니라 화이부동이다.
“달걀을 삶으면 애초의 원형 그대로입니다. 세 개의 달걀은 세 개의 달걀로 제각기 따로 있습니다. 달걀을 깨어 함께 찌면 모든 것이 하나로 섞입니다. 세 개의 달걀은 개체의 모양을 상실하고 그냥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달걀 프라이는 어떻게 될까요? 보십시오. 노른자위들은 그대로 독립되어 있지만 흰자위는 서로 구별 없이 하나로 붙어 있습니다. 세 개의 달걀은 세 개의 달걀인 채로 있으면서도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잃지 않고서도 남들과 어울리려면 개성을 가진 채로 조직 안에서 활동하려면 삶은 달걀이나 찐 달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달걀 프라이를 하듯이 하나로 이어진 하얀 바다 위에 노랗게 떠 있는 아르키펠라고(群島)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어령의 《길을 묻다》에 나오는 이야기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삶은 달걀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각자의 주장이나 관점을 상대방의 마음을 열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이는 관계다. 독립적 개성은 유지하지만 그 개성이 하모니나 시너지로 연결되지 못하는 인간관계가 삶은 달걀의 인간관계다. 찐 달걀은 뒤섞여서 누가 누구인지를 모를 정도로 각자의 개성을 상실했음은 물론 전혀 다른 제3의 나로 변신하지도 못했다. 한 마디로 죽도 밥도 아닐 정도로 관계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가 찐 달걀의 인간관계다. 마지막으로 달걀 프라이는 자신의 핵심과 본질에 해당하는 노른자위는 그대로 선명하게 보유하고 있으면서 흰자위는 낮은 자세로 하방 연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른 사람과 섞여 연대를 이루고 있지만 자신의 본질을 잀지 않고 유지하는 관계가 달걀 프라이의 인간관계다. 달걀 프라이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간관계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지만 소신과 원칙을 잃지 않고 중심을 지키는 인간관계다. 이에 반해 찐 달걀은 뚜렷한 목적의식이나 가치관 없이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부화뇌동(附和雷同)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