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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불감증을 치료하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불감증은 질병, 치료는 공감 명심보감

공감은 불감증을 치료하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불감증은 질병치료는 공감 명심보감    

  

공감 불감증은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이성복 시인의 ‘그날’이라는 시에 나오는 문구다. 공감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가 공감 불감증에 걸려 있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공감 불감증은 엄밀히 말해서 무관심이나 공감하지 못하는 아픔을 간파하지 못하는 인지 불능 상태다. 공감은 본래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배워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은 일차적으로 상대방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느끼는 측은지심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아픔이 무엇인지 모르면 느낄 수 없다. 우선 나로 인하여 또는 그 어떤 원인으로 인하여 타자가 겪고 있는 아픔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공감은 그냥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힘든 과정을 가슴으로 느끼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공감 불감증은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무관심으로 생긴 생활습관이자 타자에 대한 무지가 낳은 심각한 질병이다. 그런데 아무도 그 질병에 걸렸는지 모르고 지내왔다. 타인의 공감 불감증을 탓하기 이전에 자신도 역시 공감 불감증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불감(不感)은 공감(共感)으로 역전되기 시작한다.     



“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 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7쪽).” 우치다 다쯔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에 나오는 말이다. 무지가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라는 통찰력은 무릎을 치는 깨달음이다. 나태의 결과 자연스럽게 생기는 무지가 아니라 알고 싶지 않다는 각오와 다짐으로 꾸준히 노력해야 생기는 것이 바로 무지라는 통찰력은 상식과 통념을 뒤집어엎는 역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은 공감에 대입해도 여전히 일맥상통한다. “공감 불감증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공감에 관한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공감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 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공감 불감증입니다. 공감 불감증은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 우리는 지금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노력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오랫동안 한결같은 노력을 해온 결과 얼마나 심각한 공감 불감증에 걸려 있을까? 공감에 관한 사고(思考)를 바꾸지 않으면 인간관계에 반복해서 사고(事故)가 누적된다. 관계 속에 생긴 상처는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공감 불감증으로 상처 위에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더해진다. 지금까지 무관심했거나 모르고 있었던 공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과 공감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무지 상태를 깨우치는 새로운 처방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공감 불감증은 질병치료는 공감대 형성을 위한 명심보감(銘心寶鑑)


공감능력이 뒷전으로 밀릴 때, 공감에 대해 딴전을 피우고 있을 때, 지금 아픔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아우성은 어느 순간부터 귓전을 때리기 시작한다. “군자는 태평할 때에도 위태함을 잊지 않고, 순탄할 때에도 멸망을 잊지 않으며, 잘 다스려지고 있을 때에도 혼란을 잊지 않으니 이로써 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가정과 나라를 지킬 수 있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하편에 나오는 ‘안불망위(安不忘危)’를 말하는 이야기다. 편안(便安)한 가운데서도 늘 위험(危險)을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늘 스스로를 경계(警戒)하여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어려움에 대처(對處)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공감에 적용해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문제의식을 잃지 않고, 내가 상대를 위해서 뭔가를 한다고 생각해도 그것에 진심이 담긴 행동인지를 뒤돌아보며, 즐겁고 행복한 관계 속에서도 실수한 점이 없는지를 반성해봄으로써 가까운 인간관계일 수록 무례함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우리 모두가 걸려 있는 공감 불감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안불망위(安不忘危)의 자세로 임해야 됨을 명심하고, 따뜻한 정감이 오고 가는 튼실한 인간관계를 만들어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이 바로 공감 명심보감(銘心寶鑑)이다.                    



공감대 형성을 위한 명심보감은 오리무중 했던 인간관계를 오색찬란하게 빛나게 할 수 있도록 누구나 발휘해야 될 5가지 역할과 과제로 구성되어 있다. 공감은 결국 오감이 작동할 때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된다. 그 오감은 바로 통감, 예감, 실감, 교감, 체감이다. 이러한 오감이 가장 잘 발휘될 때 누구나 공감 명심보감을 애용하는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모범이 될 수 있다. 첫째, 인간관계 무풍지대에서 책임을 통감하는 공감 예보관이다. 둘째, 인간관계 사각지대에서 위기를 예감하는 공감 파수꾼이다. 셋째, 인간관계 사막지대에서 현장을 실감하는 공감 사령관이다. 넷째, 인간관계 접경지대에서 유대를 교감하는 공감 협력관이다. 마지막으로 인간관계 불감 지대에서 행복을 체감하는 공감 전도사다. 이를 요약하면 아래 표와 같다.   

   

무풍지대에서 인간관계 책임을 통감하는 공감 파수꾼

공감 파수꾼은 생각하는 머리가 다르다     


인간관계 무풍지대는 공감은 나와 아무런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폭풍전야의 위기 지대다. 공감 무풍지대는 없다. 공감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무풍지대는 한 사람의 공감 불감증으로 상대는 이미 속 깊은 상처를 받아 견디기 힘든 위기일발의 상황이다. 공감은 몰라도 된다는 자만심이나 인간관계를 위협하는 상처의 흔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그런 위기 자체를 무시하는 위기가 가장 심각한 위기다. 인간관계 무풍지대는 아예 공감대를 형성하는 노력이 오히려 인간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딴 세상이다. 인간관계 무풍지대에서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공감대를 형성하는 노력이 인간관계를 쌓아나가는 방해요인이 될 수 있으며, 공감을 기반으로 맺어지는 인간관계일 수록 감정적인 편견이 개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 무풍지대는 아무런 소요나 소동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느 순간 작은 상처로 인해 폭발할 수 있는 잠복상태다. 이런 상황이 잠복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이런 인간관계 무풍지대에서 임중도원(任重道遠)의 자세가 필요하다. 인간관계 사각지대는 실제로는 복잡한 인간관계로 인해 많은 아픔이 싹트는 온상이지만 감지 못해서 발생하는 위험지대다. 이런 위험지대에 살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면서 부담감만 갖지 말고 책임감을 통감할 때 발 벗고 나설 수 있는 용기도 생기는 법이다. 즉 자신이 저지를 인간관계의 위기에 대해 느끼는 무거운 책임감과 가야 될 길이 멀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은 한 번이라도 인간관계로 인해 다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상처에 대해서 예상해 본 적이 있는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동안의 인간관계로 받은 상처가 누적되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심각한 문제가 잔존하거나 숨어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된 곳이 인간관계 무풍지대다. 공감은 일방적으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감정이 아니라 각자의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함께 성장하기 위해 맺는 감정의 연대다. 공감 파수꾼은 공감도 정확히 알아야 생긴다고 가정한다. 인간관계의 위기가 숨어 있는 무풍지대를 정확히 파악할 때 우리가 책임져야 되는 부분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각지대에서 인간관계 위기를 예감하는 공감 예보관

공감 예보관은 바라보는 눈높이가 다르다     


인간관계 사각지대는 언제든지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위험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이나 사고의 영향을 감지하지 못하는 위기일발(危機一髮)의 무대다. 자동차 리어 뷰 미러(rear view mirror)를 통해 봐도 사물이나 현상을 잘 볼 수 없는 구역을 사각지대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가까운 인간관계라고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더 잘 못 볼 수 있는 위험지대가 인간관계 사각지대다. 인간관계 사각지대는 상대방이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무시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이 다치는 아픈 관계다. 인간관계 사각지대를 알면서도 부담감만 느끼고 발 벗고 나서서 먼저 사과하거나 책임지지 않을 때 인간관계 사각지대는 자주 상처를 주고받는 온상이 된다. 사각지대는 사고의 온상이다.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보지 못하는 곳이 바로 사각지대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 사실은 심각한 위기가 잠복하고 있는 사각지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관계 사각지대에서 상대방에게 반복해서 상처를 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의식 중에 내뱉은 한 마디가 상대방에게는 심한 상처를 준 적은 없는지? 공감의 사각지대에서도 위험한 인간관계를 품고 있음을 예감하는 눈, 공감 예보관으로서의 내가 바라보는 인간관계의 눈높이가 나를 지켜보는 다른 사람의 공감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공감은 우선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 시작한다. 



“그 사람의 눈에는 심장이 올라와있다.” 박용하 시인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는 시의 한 구절이다. 눈을 바라보면 눈에 올라와 있는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다. 불안해서 뛰는 심장박동인지 감동받아서 뛰는 심장박동인지 눈이 말해준다. 공감은 심장에서 느끼는 감동이지만 눈으로 나타난다. 공감은 심장에서 시작되지만 눈에 나타난 심장박동을 느낄 수 있을 때 인간관계 위기를 예감하는 공감 예보관으로 거듭날 수 있다. 공감은 가까운 인간관계일 수록 더 조심하지 않으면 거리감으로 전락하거나 이질감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공감 예보관은 보통 사람들이 감지하기 어려운 인간관계의 위기를 감지해서 상실감이 생기기 전에 공감대를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는 사람이다.     



사막지대에서 인간관계 현장을 실감하는 공감 사령관

공감 사령관은 듣는 귀가 다르다     


인간관계 사막지대는 소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아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인간관계가 반복해서 일어나는 위험지대다. 사막에서 자랄 수 있는 식물은 극히 한정적이다. 마찬가지로 잦은 인간관계 실패로 무심한 잡초가 자라면서 관계가 경계로 뒤바뀐 위험지대가 바로 사막지대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의도했든 무의식적으로 행해졌든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보다 괴로움이나 아픔을 줄 수 있다. 인간관계 속에서 빈번하게 날아가는 화살은 본인은 상대방이 느끼는 의도대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은 의도가 오도(誤導)되어 오해(誤解)하는 경우다. 비판의 빵을 나눠 먹으면서 지금보다 나은 대안을 모색하려고 발언했지만 그것이 상대방에게는 비난의 화살로 인식될 수 있다. 좋은 의도로 선보였지만 의도와 무관하게 오도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인지조차 하지 못할 때 관계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자란다. 인간관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실수를 실감하고 그 해답의 실마리도 가까운 곳에서 찾아내는 좌우봉원(左右逢源)의 지혜가 필요하다. 


공감 사령관은 인간관계 실패가 자주 벌어지는 사막지대에서 거리감 두지 말고 현장감을 실감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인간관계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을 직접 만나서 그들의 고충을 귀담아 들어주고 있는가? 당신은 인간관계 속에서 자주 반복해서 아픈 상처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원인을 강구하지 않고 미봉책으로 대응하고 있지는 않는지? 공감은 귓전을 울리는 야전에 실제로 내려 가봐야 비로소 감지할 수 있다. 인간관계로 성장하는 우리는 모두 듣는 귀가 달라야 한다. 인간관계로 인해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자주 접촉해서 그들의 고충이 무엇인지를 귀담아 들어주어야 한다. 반복해서 인간관계로 인해 상처 받지 않도록 아픔의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는 공감 사령관으로 거듭날 때 우리는 모두 따뜻한 인간관계 속에서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는 선봉장이다. 공감 사령관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넘어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 뛰어들어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귓전을 울리는 야전이 바로 공감 사령관이 살아가는 터전이다.    

 


인간관계 유대를 공감하는 공감 협력관

공감 협력관은 느끼는 가슴이 다르다    

 

인간관계 접경지대는 대화를 주고받는 당사자들 넘어서 그들에게도 직간접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다른 사람과 만나는 접점이다. 안전 접경지대는 이해당사자의 인식과 관심이 달라서 인간관계에 자주 경계가 생길 수 있는 국경지대다. 접경지대는 두 사람이 만나서 교감을 넘어 인식과 관심을 달리하는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이질감이 소속감으로 바뀌는 중간지대다. 두 사람의 인간관계를 넘어서 여러 사람들이 관여되는 인간관계는 그만큼 더 복잡한 이해관계가 개입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합의에 도달하기 어렵다. 인간관계 접경지대에서 이질감 느끼지 말고 유대감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나의 입장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왜 그런 주장을 고수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조건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것인지를 알면 의외로 공감대는 쉽게 형성될 수 있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나와 의견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에 왜 그런 주장을 고수하려고 하는지를 생각하는가? 공감은 두 사람 사이를 넘어서 집단적 연대와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인간관계의 접착제다. 이질적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비책을 마련하는 것이 공감 협력관의 중요한 책임과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공감은 뜨거운 가슴으로 만나는 터전에서 자란다인간관계로 성장해가는 우리는 느끼는 가슴이 달라야 한다. 타인의 불편함과 불안감, 불만족스러움 등 나와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주고받는 모든 사람이 느끼는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하는 측은지심이 공감 대역을 넓히고 고양시키는 원동력이다. 공감 협력관으로서의 우리는 누구보다도 인간관계에서 공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감성적으로 설득해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당사자는 물론 간접적인 영향력을 받는 사람들도 감동시키는 마음 도둑이다. 공감 협력관은 당사자간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공감은 물론 한 공동체가 집단적 연대의식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인간관계 맺음 방식을 총체적으로 디자인하는 책임자다. 공감은 심장으로 바라보는 심안(心眼)에서 비롯된다. 심안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뇌안(腦眼)이 아니라 측은지심으로 받아들이는 심안에서 공감이 자란다.   

   


인간관계로 행복을 체감하는 공감 전도사

공감 전도사는 말하는 입과 실천하는 손발이 달라야 한다     


인간관계 불감 지대는 행복이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으며 불평을 쏟아내는 욕구불만 지대다. 세 잎 클로버가 주변에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세 잎 행복 클로버를 짓밟고 다니는 와중에 인간관계 불감 지대는 탄생한다. 인간관계 불감 지대는 일상에 치여 살면서 정말 소중한 인간관계가 주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불행의 온상이다. “가장 통렬한 아픔도 가장 즐거운 기쁨도 사람에게서 온다”는 신영복 교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인간관계는 아픔의 온상이기도 하지만 기쁨의 원천이기도 하다. 인간관계 불감 지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너무 매몰되어 사람과의 만남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이다. 인간관계 불감 지대에서 허탈감만 느끼지 말고 행복감을 체감하는 공감 전도사가 필요하다. 


공감 전도사는 안불망위(安不忘危), 편안한 인간관계에서도 위험(危險)을 경계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당신은 하루 일과 중에서 인간관계가 가져다주는 일터의 행복에 대해서 얼마나 자주 피부로 느끼고 다른 사람과 교감하고 있는가? 인간관계의 질을 높이고 공감으로 소통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비결이라는 점을 얼마나 자주 모색하는가? 공감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성전이다. 인간관계로 행복한 성전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입과 실천하는 손발이 달라야 한다. 공감은 입으로 상대방이 느끼게 할 수 있지만 손발을 움직여 타자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와 닿지 않는 격세지감이 될 수도 있다. 건강한 인간관계가 즐거운 삶을 살면서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나가는 원동력이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그동안 쌓아온 소중한 인간관계가 무너지고 넘을 수 없는 벽을 쌓는다. 행복한 인간관계를 구축해나가는 공감 전도사로서의 우리는 행복은 반드시 관계 속에서 느끼는 만족감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몸소 보여주는 솔선수범의 리더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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