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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되면 안 되는 Worst 10

피해야 될 피해 주는 사람 10가지 유형

이런 사람 되지 마세요

피해야 될 피해 주는 사람 10가지 유형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나태함에 빠져 살기도 하고 자신의 잘못인지 모르는 상태로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 배우지 않고 인생의 주연 배우를 꿈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짐’을 너무 많이 해서 ‘짐’이 무거워진 사람, 밥 먹듯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야속’해진 사람, ‘실례’되는 행동을 반복하면서도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고 ‘신뢰’를 깨뜨리는 사람, 잘 못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자책’보다 ‘문책’이나 ‘질책’으로 트집을 잡는 사람, 매사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넘지 말아야 할 ‘사선’을 넘나들며 악플을 다는 사람, 매너 있게 생활하다 자신도 모르게 매너 리즘에 빠져 매뉴얼을 참고하며 틀에 박혀 사는 사람, 타인을 돌볼 줄은 전혀 모르고 자기의 이익만 볼 줄 아는 사람, 감이 떨어져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심지어는 덜떨어진 사람이 되기 쉽다. 이런 사람으로 되기 전에 늘 자신을 반성하고 더 큰 상황적 맥락 속에서 자신을 던져 놓고 성찰하는 습관을 갖지 않는 이상 사람은 피해야 할 피해 주는 사람이 되기 쉽다.      


배우지 않고 인생의 주연 배우를 꿈꾸는 사람    


배움을 멈춘 사람은 성장을 정지당한 사람이다. 반면에 배움에 미친 사람은 언제 봐도 표정은 즐거워 보이고 몸은 가벼워 보인다. 배움으로 깨닫는 즐거움과 행복 덕분이다. 배움을 멈추는 순간 늙기 시작한다. 건강하고 젊게 사는 비결은 한 가지 주제를 비교적 오랫동안 배우고 익히면서 즐거움을 맛보는 사람이다. 배움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설레는 여행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레는 것처럼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배움도 시작하기도 전에 설렌다. 배움을 멈추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사람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는 증거다. 배움을 멈춘 사람은 그만큼 알고 싶은 게 없다는 이야기다. 알고 싶은 게 없다는 이야기는 사람과 세상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배움을 멈춘 사람은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지 않고 한 방에 뭔가를 이룰 수 있는 ‘요행’을 바란다. 사랑하면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알고 싶지 않다. 호기심의 물음표가 없어졌으니 세상은 온통 마침표 천국이다. 마침표 천국에서 배움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주로 쓰는 세 가지 말이 있다. “원래 그래.” “물론 그렇지.” “당연한 거지.” 배움을 멈춘 사람은 사람을 만나도 뭔가 하나라도 더 배우려 하지 않고 만남 자체가 피곤하다는 인상을 풍긴다.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만나는 시간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사실 세상은 배움의 천국이다. 익숙한 세상에서 낯선 세계를 발견할 수도 있고 당연한 생각도 당연하지 않은 게 너무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다. 뭔가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남다른 관심으로 유심히 관찰하는 활동을 습관적으로 반복한다. 지나가다 만난 특이한 간판조차 그에게는 관찰과 공부의 대상이다. 저런 생각을 하기까지 고뇌하며 밤잠을 설친 주인공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배움의 촉수가 살아 움직인다.     



밥은 매일 먹으면서 운동은 매일 하지 않는 사람    

 

운동하기로 결심했는데 아직도 운동을 시작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작심삼일도 못 간다. 내일부터 운동하려고 결심했는데 비가 온다. 참 주변 환경이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한다. 비가 그치면 내일부터 하겠다고 다짐한다. 내일 아침에 운동을 시작하려니 전날 회식하면서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거 같다. 숙취 중에 운동을 하면 오히려 몸에 안 좋을 거야. 술 깨고 내일부터 해야지. 내일이 되면 운동하지 않아도 될 또 다른 핑곗거리를 찾는다. 그래서 내년부터 하기로 결심한다. 새해 첫날 대단한 각오로 운동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온천하에 눈이 내렸다. 빙판길도 생기고 운동하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운동 안 한 만도 못하다는 자기 합리화로 오늘도 운동을 포기한다. 운동에 대한 결심은 이제 결심공판으로 넘어갔다. 운동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운동을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두 환경이 나에게 주는 핑계 선물이다. 밥 먹듯이 운동을 해야 되는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열정적으로 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 해보고 싶지만 과감하게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건강한 몸에서 나오는 힘과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공통점은 몸을 관리해서 자기 관리의 기반을 마련한 사람들이다. 몸이 망가진 사람이 하는 말은 믿을 수 없다. 자기 몸 관리에 실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관리할 자격도 없다. 자기 극복이 선행돼야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난관이 극복된다. 운동을 밥 먹듯이 해야 밥맛도 좋아지고 행동할 수 있는 힘도 생긴다. 행동하는 운동, 행복의 원천이자 지름길이다.     



다짐을 많이 해서 무거운 이 된 사람     


결심은 반복하지만 결단을 내리지 않는 사람, 계획은 늘 수립하지만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 선거 때마다 공약(公約)을 발표하지만 선거 후에는 공약을 실천하지 않아서 공약(空約)을 보여주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 다짐이 많아지면 짐이 된다. 밥을 매일 먹는 이유는 활동 에너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매일 먹는 이유는 실천으로 가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마음만 먹고 결연한 각오로 실천에 임하지 않을 경우 본인도 패배의식이나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다. 마음먹은 일을 밥 먹듯이 실천하지 않다 보면 스스로를 믿는 자신감과 자신의 존재감에도 심한 의심과 회의가 들면서  활기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의 비결은 거창한 계획이나 전략을 하루아침에 실천하는 데 있지 않다.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작은 일도 진심(眞心)을 담아 꾸준히 반복하는 데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움직인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 바로 위대한 성취의 숨은 비결이다. 이들은 크게 마음을 먹지 않는다. 밥 먹듯이 작은 일이지만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일을 반복해서 실천한다. 변하는 방법은 변함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마음과 행동이 동격인 경우가 있다. 바로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행동이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면 마음먹은 대로 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아프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온몸을 던져 행동한다. 내가 내 일을 사랑하면 이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다. 크게 마음먹지 않고도 자신이 할 일을 묵묵히 해낼 뿐이다.     



밥 먹듯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야속한 사람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야속해진다. 점심 약속을 했다. 때가 되어도 연락이 없다. 궁금해서 연락해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 점심시간이 한 참 지나서야 연락이 왔다. 어제 과음을 해서 지금 일어났다고. 갑자기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그동안 갖고 있었던 믿음의 끈이 뚝 끊어지는 기분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런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그리고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는다. 아직도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것일까? 황당한 사건이다. 저녁 약속을 했다. 하루 전에 연락이 왔다. 내일 1시까지 가면 되냐고? 나는 저녁 약속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상대는 점심 약속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미 나는 점심 약속은 있는 상태, 그것도 점심시간을 1시로 약속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카톡을 봤다. 분명 저녁 약속이었다. 상대는 저녁 약속을 까맣게 잊고 다른 일이 약속되어 있다. 점심 약속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후자는 그래도 죄송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다. 다행이다. 아직은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약속은 어떤 상황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쌍방 간의 다짐이다. 그 약속을 위해 어떤 사람은 다른 약속도 뒤로 미룬 채 몇 날 며칠을 기다리며 기대하고 고대한다. 그런데 그 약속을 모르고 있거나 안 지키는 사람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 사람의 면면을 새삼 다시 보게 된다. 그럼에도 한 가지 버리지 않는 기대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해본다. 약속을 남발하는 사람일수록 약속을 지킬 가능성이 희박하다. 언제나 영원히 변치 말자고 다짐했던 약속은 어느새 야속한 규약으로 바뀐다. 그런 약속을 했던 처음의 마음은 이제 마음 어느 구석을 찾아봐도 찾아내기 쉽지 않다. 심지어 왜 그런 약속을 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다시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     



실례를 반복하면서 신뢰를 깨뜨리는 사람  

   

한 사람이 찾아왔다. 위급한 문제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혼자 해내기에는 버거운 상황에 직면하는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뭘 해주면 좋겠다는 모습이다. 한 사람이 메일을 보내왔다. 절박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고 뭔가를 바라는 간절함이 절박함 근처에서 맴도는 거 같기도 하지만 요지는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다. 이런 사람들은 평소에 아는 사람이지만 평소에는 거의 연락이 없다가 어디선가 봤다는 인연으로 청첩장을 보내거나 부고 메시지를 보내며 조사(弔詞)를 알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신뢰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튼실한 접착제다. 신뢰는 믿음을 먹고살다가 누군가 그 믿음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의심스러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근거를 의심하지 않은 채 서서히 깨지기 시작한다. 신뢰는 둘 이상의 사람이 같이 만들었지만 그것이 깨지는 시기는 상대의 의도나 의지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신뢰로 형성된 믿음이 어느 시기부터 무례(無禮)한 실례(實例)가 눈에 띄면서 굳건했던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실례(失禮)로 뒤바뀌기 시작한다. 신뢰가 실례로 변색되면서 하찮은 사소한 일상의 문제도 자신도 모르게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비범한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더 이상 가까이 가기 어려울 정도로 가까웠던 관계에는 어느새 경계가 생기고 관심이 아직도 미미하게 살아남아 있지만 무관심의 잡초가 서서히 자라기 시작하면서 관계는 관심 밖의 경계로 전락해버린다. 그렇게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신뢰가 힘겹게 싹터서 자라기도 하고 무심하게 실례의 잡초가 자라면서 초심으로 간직했던 굳건한 의지(意志)조차 의지(依持)할 수 없을 정도로 난파당하기 시작한다. 오늘도 난파당한 인간관계 속에서 신뢰와 실례 사이를 방황하고 있다. 그 사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고 스며들기도 했다.     



자책(自責)’보다 문책(問責)’을 즐기며 트집을 잡는 사람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또는 밖의 어떤 환경적 요인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스스로 잘못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주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즉 자책보다 문책이나 질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을 경우 사람을 대상으로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그 사람이 일으킨 문제를 파고들어 원인을 분석하고 동일한 실수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우선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스스로 잘 못한 점이 없는지를 깊이 따져보고 반성하는 일을 먼저 한다. 즉 문책이나 질책보다 자책을 통해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과정에 자신도 모종의 책임이 있음을 가정한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도 그럴만한 사연과 배경이 있음을 가정하고 나름대로의 일리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조심해야 될 사람은 모든 문제는 나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발생했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철저하게 자신을 보호하거나 발뺌을 하는 사람이다. 진짜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은 발 뺌을 하기 이전에 발 벗고 나서서 문제 상황을 정리하고 자신도 이런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 제공자 중의 한 명이 될 수 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문제와 싸우지 않고 사람과 싸우면서 말꼬리를 잡고 트집을 잡으며 자신의 고집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경계해야 될 사람이다.     


부정적인 시선(視線)’으로 넘지 말아야 할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사람     


SNS에 글을 쓰면 끝까지 읽어보지도 않고 생각지도 못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댓글로 다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다 읽었지만 글 쓴 사람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자기 관점에서의 비난하는 댓글을 다는 사람도 있다. 댓글만 읽어도 감정에 심한 생채기가 생기는 악성 댓글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언제나 먹구름 속의 태양보다 태양을 가리고 있는 먹구름만 바라본다. 이런 사람들에게 세상은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악전고투의 전쟁터다. 이들은 부정적 메타포를 사용하여 매사를 삐뚤어지게 바라보는 탁월한(?) 시선을 지니고 있다. 긍정의 언어도 많은 데 모든 표현에 부정의 언어가 들어간다. 악플을 남발하는 사람은 건설적인 비판의 빵을 나눠먹기보다 비난의 화살을 날려 상처를 주는데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다. 색다른 생각을 존중해주고 나름의 가치를 인정해주기보다 현실을 모르는 관념적인 생각이라거나 지금 여기의 문제를 전혀 모르는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헐뜯어버린다. 악플을 다는 사람들의 주요 맹점은 스토리의 맥락을 읽어내지 않고 한두 가지 주장을 포착,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도대체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깎아내리는데 모든 힘과 에너지를 집중한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쓴 엄기호에 따르면 이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동행의 언어’보다 ‘동원의 언어’다. ‘동행의 언어’는 저마다 지니고 있는 고통을 곁에서 위로하면서 함께 연대를 지향하는 언어다 하지만 ‘동원의 언어’는 상대방을 고통의 바다에 빠뜨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킴으로써 자신을 부각하기 위해 사용하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언어다.     

 


매너리즘에 빠져 매뉴얼만 찾는 틀에 박힌 사람     


매너 있던 사람이 서서히 매너리즘에 빠진다. 매너가 있던 신입 사원 시절, 색다른 생각도 서슴없이 하고 한계나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미지의 세계에도 과감하게 도전했었다. 어느 순간 매너는 없어지고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정형화된 매뉴얼을 찾는다. 매뉴얼에 없는 불확실한 상황과 위기일발의 딜레마 상황에서도 틀에 박힌 매뉴얼에서 뒤적거리며 가능한 답을 찾는다. 매뉴얼을 참고로 지금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로 머리를 계산을 해서 판단한다. 이전의 경험과 과거에 습득한 지식으로 판단한다. 주로 가방끈의 길이가 길수록 안 되는 이유가 많거나 장황하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지식보다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얼마 안 되는 지식이 한계 너머를 생각하는 상상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생각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면 그것은 뭐 때문에 안 되고, 다른 대안을 제시하면 그건 과거에 자신이 비슷한 경험을 해봤더니 안 된다고 한다. 관례에 없고 이제까지 해오던 관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혀 해보지 않았던 색다른 시도는 위험천만할 수 있다고 시작조차 막아버린다.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들의 핑계다. 한계는 책상에서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한계, 어디서 알 수 있을까. 몸으로 도전해봐야 한계를 알 수 있다. 진짜 한계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몸이 움직이는 도전 없이 한계는 언제나 한계선에 있다. 도전해보기도 전에 한계선을 긋는 사람과 남들이 한계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도전을 시작하는 사람의 사이,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차이의 강이 흐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은 매뉴얼을 버리고 리뉴얼하지 않으면 현상유지조차 힘들어지는 난국이다.     


타인을 돌볼 줄’ 모르고 자기 이익만 볼 줄’ 아는 사람     


인간미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할 때 빛난다. 반대로 인간미가 없어 보이는 사람, 개념이 없고 타인을 존중할 줄도 모르고 배려하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은 돌봄이다. ‘봄(spring)’은 다시 ‘봄(watching)'이다. 익숙한 현상도 다시 보면 다르게 보인다. 늘 만났던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아픔을 보려면 다시 봐야 한다. 다시 잘 보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봐야 한다. 머리로 생각하면서 보는 것과 마음으로 그리면서 바라보는 것은 천지차이다. 머리로 생각하면서 보는 것은 계산이 관여하지만 마음으로 그리면서 바라보는 것은 함께하고 싶은 공감과 긍휼감이 관여된다. 베푸는 것도 습관이다. 비록 작은 것이라도 남과 나누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한 사람은 그런 삶을 살아오면서 생긴 습관 덕분에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베풂보다 폼 잡기를 즐기며 잘 난 체 하는 사람도 습관의 산물이다. 폼 잡는 사람은 따뜻한 마음으로 품기보다 다른 사람의 지식이나 전문성을 퍼다가 자기 것 인양 파는 경우도 많다. 폼은 펌에서 비롯된 것이고 팜으로 위세를 떨치는 것이다. 하지만 품으면 품격도 높아지지만 폼 잡으면 잡았던 혜택도 사라진다. 타인을 따뜻하게 품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도 잘 돌볼 줄 알지만 타인을 더 잘 돌보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날이 확실해진다”(242쪽). 철학자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에 나오는 말이다. 나의 존재감을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을 때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돌봄이 시작된다.     



감이 떨어져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덜떨어진 사람     



어떤 상황에서는 적어도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빠져주어야 나머지 사람들이 더 깊은 대화를 자유롭게 모색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 그 자리에서 자꾸 훈수를 두기 시작하고 충고와 조언을 하기 시작할수록 본인의 품격에 흠집을 낼 뿐이다. 나이가 들면 감이 떨어지기보다 다르게 생각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서 내 입장만 생각하다 보면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감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덜떨어진 생각과 행동을 자행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거나 피해를 줄 수도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자기 편의적으로 상황을 읽으면 자기중심적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맥락을 읽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주변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생각에만 빠져서 전체적인 판세를 보다 종합적으로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신념 보존 편향성(belief perseverance phenomenon)이라고 있다. 한 분야에 오랫동안 몸담고 전문가의 경지에 오른 사람일수록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를 바꾸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자기 신념에 상응하는 사실만을 편향적으로 편집해서 자기 주관을 더욱 강화시키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걸려들면 분위기 파악 능력은 현격하게 떨어진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책을 읽는 목적도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세계에 접목하기 위해서다. 내 신념과 확신도 틀릴 수 있음을 가정할 때 다른 생각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에 힘입어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가

유영만의 관계 반성에 있는 썼던 글과

몇 가지 글을 추가하고 보완해서 

7.29일(월요일)에 나무생각 출판사에서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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