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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스며듬의 무게다

사랑은 스며듬의 무게다     


스치면 인연이지만 스미면 연인이 된다. 스치는 만남은 당구공 같은 만남이다. 몸의 일부가 당구처럼 순간적으로 부딪쳤다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만남이다. 언제 만났는지 기억도 잘 안나는 만남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며 만난다. 스미는 만남은 짧은 만남이어도 깊은 인상이 남는 만남이다. 그가 던진 한 두 마디가 심장에 박혀 의미심장해지고, 그가 보여준 짧은 미소가 오랫동안 긴 여운이 남는 만남이다. 스미는 만남은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이란 시를 보면 어떤 만남인지 이해할 수 있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 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간장이 꽂게 온몸 사이로 스며들고 마침내 뱃속의 알 사이로 스며들 때 어미 꽃게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눈물겹다. 그만큼 스며들면 속수무책이다. 마음을 휘젓는다. 끌리는 마력에 넘어가 쏠리고 홀린다. 사랑은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스며드는 것이다. 스며든 무게만큼 사랑도 깊어진다.     


사랑의 끝은 질문이 없어진 상태다     


"이타심은 이기심이다. 그러나 이기심은 이타심이 아니다." 황지우 시인의 《게 눈 속의 연꽃》에 나오는 말이다. 남은 도와주고 싶은 이타심은 결국 자신이 기쁘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쁨을 위해 남을 도와주려는 이타심이 생긴다. 타자를 향한 사랑으로 내가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이타심은 결국 이기심이라고 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싶다. 내가 그로 인해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주는 기쁨 덕분에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고 어떤 대상에 대한 애정이 생긴다. 기쁨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랑에서 비롯된다. 알면 사랑하기보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해보자. 궁금한 점도 많아지고 질문도 많아진다. 더 알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알고 싶지 않다. 메리 올리버는 《휘파람 부는 사람》에서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은 두 가지 능력이 아니라 한 가지 능력이다. 사랑하면 질문이 많아진다. 사랑하지 않으면 질문도 없어진다. 도종환 시인의 ‘가구’라는 시에 보면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사랑이 식으면 가구처럼 같은 방에 존재하지만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상대를 알고 싶은 욕망도 사라진다. 사랑이 가구가 되면 서로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사랑이 가구가 되면 관계는 무너지고 경계가 생긴다.      



타자를 볼 수 있지만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 경계가 관계를 악화시킨다. 그 관계 위에는 무성한 잡초가 자라기 시작한다. 관심이 무관심으로 전락하고 관계가 경계로 변질되면서 사랑도 메말라간다. 더 이상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사랑의 조건은 알고 싶다는 대상에 대한 ‘앎에의 의지’다. 사랑의 끝은 질문이 없어진 상태다.” 정희진 작가의 말이다. 사랑과 질문은 동격이다. 사랑하면 알려고 하고 알려면 궁금해진다. 궁금해지면 질문을 던지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더 깊이 알고 싶어 진다. 하지만 사랑이 식으면 질문도 없어지고 알고 싶은 욕망도 사라진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든 누군가 나를 사랑하든 사랑은 관계 사이로 흐르는 윤활유다. 직장인과 장인은 한 글자 차이지만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직장인은 자기 일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질문이 없어진 사람이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장인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지금보다 더 잘하는 방법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평생 멈추지 않는다. 이 정도면 됐다고 만족하지 않는다. 장인에게 만족은 나아지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장인에게는 자기 분야를 사랑하는 자세와 태도가 자기 분야를 성장시키는 지식과 스킬을 앞선다. 자기 분야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자기 분야를 어떻게 성장시킬 것인지를 생각하는 전략과 방법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뭔가를 사랑하면 그것을 잘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은 둘째 문제다. 반면에 직장인은 자기 일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질문을 던지지 않고 어제 했던 방식을 반복한다. 직장인에게 오늘은 빨리 흘러가야 할 시간이고 내일은 오지 말아야 할 지겨움이다. 내일이 설레지 않는 이유는 자기 일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장인은 내일을 기다리며 다른 미래를 꿈꾼다.      


사랑의 무게가 나의 무게다     



“사랑하면 그 대상을 알게 된다”고 주장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따르면 “물체는 제 무게의 중심(重心)에 따라서 제 자리로 기운다. 제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제 자리를 찾는다. 나의 중심은 나의 사랑.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내가 끌려간다”(13,9,10)고 했다. 돌멩이를 공중에 떨어뜨리면 제 무게중심으로 제 자리를 찾아간다. 자기 무게로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그런데 무게감이 없으면 자기 힘으로 살아가기 어려워진다. 바람에 날려 원하지 않는 곳으로 날아갈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유혹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도 있다. 자기가 느끼는 무게감이 바로 존재감이다.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에서 왜 존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다고 느끼는 것일까. 존재감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가 가볍다고 느낀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을 알고 있는 사람은 존재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존재감을 깊이 느낄수록 그 사람의 삶의 무게는 무거워진다. 견딜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삶이 의미 충만해진다. 삶이 무겁지 않으면 허공에 떠다니는 느낌이 들거나 바람에 표류한다고 생각된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나에게 있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나의 존재가 타인에게 의미가 있을 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나를 누군가가 사랑할 때 나의 존재감은 깊어지고 살아갈 이유가 생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때,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 사람은 존재감이 없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야 그 사람을 알고 싶은 욕망도 생긴다. 알면 알수록 인식의 무게가 무거워진다. 앎이 늘어나면서 인식의 무게가 생긴다. 사랑하면 없었던 의미가 생긴다. 삶에서 의미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면서 의미의 무게도 무거워진다. 사랑하면 가치도 높아진다. 보잘것없다고 생각했지만 사랑이 싹트면서 새로운 가치가 부각된다. 가치의 무게가 생기면서 매사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사랑하면 무엇보다도 관계가 깊어진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간다. 관계의 깊이가 앎의 무게를 가중시킨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의미도 머리에 박히기보다 심장에 꽂히기 시작한다. 관계의 깊이가 의미심장함의 무게를 더한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물론 사람과 사물 사이에도 새로운 가치가 생긴다. 없었던 또는 몰랐던 가치가 관계 사이에 자라면서 사람과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사랑하면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와 반드시 해내야 하는 목적과 이유가 생긴다. 사랑하면 신성한 도전이 시작된다. 어려움이 밀려와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성취하려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자기 분야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자기 분야를 기술적으로 향상하는 지식과 전문성을 앞선다.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 분야를 더 잘하고 싶은 욕망도 생기지 않는다.      


사랑은 물음표(?), 혁명은 느낌표(!)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것은 생리이며, 결코 인간적이라 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방식에 숙달되는 것이다”(16쪽). 이성복 시인의 아포리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 나오는 말이다. 사랑은 생리적 본능을 거스르는 불편한 생각이자 행동이다. 짐승은 본능에 충실하게 행동하지만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본능을 거스르는 힘든 행동을 서슴없이 시작한다. 나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다. 사랑은 동물적 본능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생리적인 욕구대로 살지 않고 동물적 본능에 따르지 않고 나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숭고한 마음이 사랑이다. 급류를 타고 사투를 벌이며 뛰어오르려는 연어처럼, 강풍에 맞서 날아가려는 새처럼 사랑은 자연스러움을 거슬러 항거하는 반역이다. 배가 고파도 나보다 다른 사람의 배고픔을 먼저 생각하고 내가 아파도 나보다 더 아픈 다른 사람의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하면 그만큼 생리적 욕구를 참고 본능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타자를 향한 비장한 의지와 결단이 생기는 것도 사랑의 힘이다. 생리대로 살아가는 짐승과는 다르게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혁명을 일으킨다. 혁명은 자연스러움을 거부하고 관성대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타성에 젖어 살아가려는 습관을 거부하는 항거다. 사랑이 없다면 혁명은 중도에 그칠 수 있다. ‘사랑’이 ‘혁명’을 완수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을 똑같은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시간에는 두 가지가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인식되는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크로노스(Chronos)와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되는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카이로스(Kairos)다. 크로노스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흘러가는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똑같은 시간이 흘러가도 내가 심리적으로 다르게 느끼는 기다리는 시간이다. 크로노스가 과거에서 현재로 그냥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미래에서 현재로 당기면서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직장인이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크로노스지만 장인이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크로노스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보내는 물리적인 시간을 가급적 단축하고 빨리 업무 현장을 떠나 일상에서 놀아야 신나는 사람이다. 반면에 장인이 직장에서 보내는 크로노스다. 똑같은 시간이 주어져도 장인은 자기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지고 애를 쓰는 시간으로 보낸다. 직장인에게 업무 시간은 빨리 흘러 보내야 할 시간이지만 장인에게 일하는 시간은 몰입하고 집중해서 자신도 모르게 지나가는 시간이다. 장인은 자신의 일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질문을 던져 지금보다 더 잘하는 방법을 애간장을 태우며 찾아내려도 안간힘을 쓴다. 혁명은 직장인에게 고단한 노동이지만 장인에게는 즐거운 놀이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혁명은 일상 업무이자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찾아내는 유희다. 누구에게나 1년 365일은 주어지는 크로노스이지만 누군가는 똑 같이 주어진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설레는 시간을 보낸다. 물리적 시간(크로노스) 흐름 속에서 맺은 인연의 소중함과 그동안 나누었던 의미심장함(카이로스)에 사람은 많은 깨우침을 얻고 살아간다.    

  

사랑으로 소통해야 소산(所産)도 생긴다     


카이로스를 만들어가는 사랑하는 관계는 소통을 사랑으로 생각한다. 소통은 상대를 알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다. 상대를 안다는 것은 머리로 판단하는 과정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이다. 가슴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상대의 가슴에 맺힌 사연이 범상치 않게 보이고 색다르게 들리기 시작하면서 그 아픈 사연을 사랑할 수 있다. 소통은 상대의 아픔과 슬픔, 숱한 사연과 배경, 어둔 그림자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얼룩을 모두 가슴으로 끌어안는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상대와 진심으로 소통할 수 없다. 사랑 없이 이루어지는 소통은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지 않은 소통이다. 소통은 상대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슬픔을 쓰다듬어주며 어둔 그림자에 빛을 드리워주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얼룩을 덮어주는 사랑이다. 대상이든 사람이든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어제의 대상이 오늘의 대상으로 나타나고 어제의 그 사람이 또다시 오늘 나타날 뿐 나에게 그리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고 소통하려는 사람은 상대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주목하지 못한다. 어제와 다른 말의 의미상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왜 그런 말을 지금 여기서 하는지 그 의미와 가치가 전해주는 의도를 읽어내지 못한다. 사랑하지 않고 전개되는 소통은 시간과 에너지의 소비일 뿐이다. 사랑하지 않고 소통하려는 사람은 상대가 자주 쓰는 말의 의미, 왜 특정 시점에서 말을 더듬는지 그 안에 무슨 아픈 사연이 잠재되어 있는지 눈치 채지 못한다. 사랑으로 소통한다는 것은 대화 도중에 부딪히고 아픈 상처가 드러났어도 도망가지 않는 것이다. 사소한 일로 소통을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사랑으로 소통한다는 의미는 나와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이 함께 발을 딛고 서 있는 주어진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올곧이 응시하는 일이다. 소통을 가로막는 껍데기를 걷어내고 속 깊은 내면으로 함께 파고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따뜻한 가슴으로 만나 소통한다는 것은 혼자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을 기꺼이 꺼내놓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묘안을 찾아보며 감당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다. 사랑으로 소통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살아온 역사를 더듬어 반추해보는 일이며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진실을 캐내는 작업이며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가치에 대해 공감하는 과정이다. 진정한 사랑으로 소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그저 어쩔 수 없이 만나야 될 부담되는 사람이며 의무적으로 시간을 보내야 되는 귀찮은 존재다. 진정한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 소통은 설렘과 기대로 기다려지는 만남이 아니다. 그저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만이 남는 스침이다. 사랑으로 소통하지 않으면 시간은 그저 물리적으로 흘러간다. 사랑하지 않는 가운데 보내는 1시간의 소통은 따분하고 지겹기 그지없는 노동의 시간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동반되는 소통의 시간은 초침과 분침이 돌아가는 움직임조차 가슴 뛰는 음악이며 더 이상 빨리 흘러가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다. 소통을 사랑하기 전에 소통으로 만나는 사람을 사랑해야 같은 시간을 보냈어도 다른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아름다운 소통의 소산(所産)이 생긴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자 동사다     


사랑으로 소통한다는 것은 주고받는 메시지의 표피적 의미를 포착하는 과정이 아니다. 사랑으로 소통한다는 것은 기꺼이 그 사람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가는 탐구다. 그래서 사랑으로 소통한다는 것은 방관자적 삶의 자세로 그 사람을 멀리서 관망하거나 관조하는 게 아니라 기꺼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잠시라도 그 사람의 삶을 살아보는 역지사지다. 사랑으로 소통한 다는 것은 일상의 배경으로 묻혀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우리를 세상의 중심으로 설정하는 일이다. 사랑으로 소통한다는 것은 그래서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진정한 사랑으로 소통하는 일은 따뜻한 진심과 부끄럽지 않은 진정성으로 상대와 내가 혼연일체가 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사랑으로 소통한다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사랑으로 소통에 임할 때 누구에게는 자기 삶의 전부를 고백하는 문제고, 누구에게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힘겨운 결단이다. 누구에게는 과거의 슬픔을 다시 건드리는 문제이고, 누구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다시 한번 반추해보는 견디기 어려운 고백의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소통해야 되는 이유는 그런 소통만이 마음을 열고 속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따뜻한 가슴으로 공감의 연대를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 소통은 소통이 진행될수록 속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가져간다. 결국 소통은 물리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실제로는 소원(疏遠) 해지는 경우가 생긴다.     


사랑으로 소통한다고 해서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푸는 소통을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무조건적 사랑도 결국 그 사랑을 베푸는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상대가 전제될 때 이루어지는 애정과 관심이다.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46쪽). 은유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 나오는 말이다. 한쪽은 계속 수고하고 한쪽은 그 수고로 생긴 편안함을 즐기는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사랑하는 관계는 둘 다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관심과 애정의 연대다. “당신은 내게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었어요.” 영화, 〈이보다 더 좋은 순 없다〉에 나오는 대사다. 사랑하는 사람 덕분에 더 좋은 사람으로 변신하게 만든다는 이 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나를 바꾸는 노력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혼을 앞둔 여인이 결혼을 결심하게 된 배경과 사연을 묻다 그 여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 사람과 함께 살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야”(284쪽).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사랑하는 관계가 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다. 가장 이상적인 관계란 결국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함께 하면 더 좋은 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관계다. 그 관계 속에서 나는 어제와 다른 나로 부단히 재탄생하는 성장 체험을 하는 것이다. “당신이 나를 완성시켜. 그래서 당신이 없으면 난 내가 아니야.”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 나오는 대사다.     



오직 사랑만이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할 수 있으며 사랑으로 소통하는 길만이 힘겹고 견디기 어렵지만 같은 방향과 가치를 가슴에 품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다. 복잡한 문제라고 할지라도 머리로 생각하며 풀기 전에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줄 때 품격도 높아진다. 사랑은 관념이나 추상명사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보통명사이며 매일매일 실천하며 살아가는 동사다. 사랑으로 눈앞의 상대에게 의지(依支)도 하고 사랑으로 눈앞의 상대에게 의지(意志)를 피력해보자. 진정한 사랑은 의지(依支)하는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의 주관적 의지(意志)로 분연히 일어서는 삶이다. 같은 사람을 오늘 만나고 내일 만나도 언제나 남다른 설렘으로 잠들고 색다른 호기심으로 만나자. 매 순간이 경이로운 기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정열적으로 사랑하자. 지금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당신의 하루를 걸고, 당신의 전부를 걸고...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이라는 책에는 세 가지 질문이 나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때는 지금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내 곁에 있는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뭔가를 하는 것이다. 행복한 관계는 먼 미래를 위해 지금 하기 싫은 일을 희생하면서 참고 견디지 않는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로로 얼마든지 우리는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거창한 꿈과 장기적인 성장 전략을 수립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금 여기서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에 힘입어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가

유영만의 관계 반성에 있는 썼던 글과

몇 가지 글을 추가하고 보완해서 

7.29일(월요일)에 나무생각 출판사에서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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