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도 편견과 선입견의 산물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한 사람은 한 세상이다
인간관계도 편견과 선입견의 산물일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은 저마다의 사건과 사고를 경험하면서 고유한 자기 정체성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누구를 만나 어떤 인간적 자극을 받고 자라왔는지, 어떤 체험적 각성을 통해 자신을 부단히 재탄생시키며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면서 무슨 경험을 쌓고 살아왔는지를 편견 없이 알아내는 일이다.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다시 생각해보면 그 사람의 아픔을 가슴으로 공감하는 일이다. 이해가 머리에서 이루어질 때 복잡한 생각이 개입되면서 나의 방식으로 상대를 재단하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처럼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가장 큰 오해일 수도 있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182쪽).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내 입장에서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오해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해한 결과와 상대가 이해한 결과 사이에 오해의 깊이가 깊어질 때 관계는 다시 끊어지고 경계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해는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에서 이기적으로 해법을 찾아보려는 발상인지도 모른다. 객관적인 이해는 그래서 원래부터 불가능한 꿈이다. 주관적인 사람이 또 다른 주관을 갖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은 자기 주관에 비추어 상대를 오해하는 과정의 반복이지 않을까. 다만 오해의 정도와 수준을 어떻게 줄여나갈 수 있을지가 우리가 만들어가는 인간관계의 숙제다. “관계는 근본적으로 이기를 지향하고 있다. 가령 인간과 의자의 관계, 제공하는 쪽과 제공받는 쪽의 생각은 묘하게 어긋나곤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의자에게 체온을 주었다 여기지만 의자가 기억하는 건 무게이다”(68쪽). 이규리의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나는 상대를 배려해서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상대는 배려보다는 우려를 하고, 도움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많은 메시지도 인간관계 속에서 오해한 결과를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착각일 수도 있다. 모두가 느끼고 있는데 분명하게 말하기 어려운 인간관계의 여러 가지 양상과 그 속에서 겪은 상처에 대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점을 꾸밈없이 써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나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걸러진 오해의 소산일 수 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경쟁상대가 아니라 경청 대상이다
그런데 인간관계가 언제나 이기(利己)만 지향하지 않는다. “이타심利他心은 이기심利己心이다. 그러나 이기심은 이타심이 아니다.” 황지우의 시집 《게눈 속의 연꽃》에 실린 ‘산경(山徑)’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타적 행위도 알고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내 곁에 두고 이기심의 발로라는 것이다. 하지만 본래 이기적인 자세와 행동은 이타적일 수 없다. 이타심으로 시작한 만남의 근원에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애쓰는 이기심이 숨어 있다는 생각은 시적이면서 인간관계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언행의 밑바탕에는 더불어 행복함을 맛보겠다는 이기심의 발로가 숨어 있다.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을 살펴봐도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때 더불어 행복해진다는 점을 알려준다. 첫 번째 질문,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때는 언젠가? 지금 이 순간이다. 두 번째 질문,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무엇인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뭔가를 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너무 먼 미래를 생각만 하지 말고 지금 당장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뭔가를 해주면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진정한 예술이다.” 영화, 위대한 쇼맨의 대사도 있지 않은가. 이타적 베풀기는 결국 나의 행복을 담보하는 이기적인 행위다.
이렇듯 우리가 사람을 만나서 얻는 즐거움은 더불어 행복한 삶을 함께 만들어가는 데 있다. 잠시 나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다른 사람의 세계로 넘어가야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세계와 접목될 수 있다. 때로는 나의 입장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 되기가 실천될 때 비로소 두 사람의 차이는 좋은 사이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서로를 경쟁의 상대나 적대적 관계로 상정하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협력의 파트너로 생각할 때 관계는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내가 만나는 다른 사람을 경쟁 상대로 주시하기보다 경청의 대상으로 관찰할 때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인간적 숨결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인간관계를 난해한 철학적 담론에 비추어 해석하거나 거창한 비전과 계획을 세워 개조하자는 관념적 주장을 늘어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해보았을 것 같은 일상적 인간관계를 들여다보면서 따뜻한 사람 간의 희망의 연대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지, 그리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끼리 어울려 하방 연대를 통해 조용한 관계 혁명을 꿈꾸어보려고 했다. 일상에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자주 만나는 사람들의 안색을 살펴보고 표정을 읽으면서 말하지 않아도 걱정해주고 배려하는 만남의 소중함을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브런치에 올린 글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공감하는 걸 보면서 개인적인 체험적 깨달음이 보편적이 인간관계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느낌을 얻었다. 인간관계도 저절로 스며들고 맺어지는 게 아니라 의지와 의도를 갖고 노력해야 생긴다. 한 마디로 배워야 바람직한 인간관계가 만들어진다.
등지면 악연이지만 등 대면 인연이다
문제는 어느 정도 노력하고 상대를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그동안 공들여 쌓았던 인간관계에 금이 가고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관계가 공허해지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이 향하는 방향만 볼뿐, 그가 어떤 지하수를 길어 올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안다는 것,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신의 편견을 깨고 그와 함께 계단 끝까지 내려가는 숙제를 하는 것이다”(209쪽).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깊이 생각하는 숙고 끝에 상대를 이해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우리는 단편적인 현상이나 모습만 보고 결론을 내린다. 그것도 자신에 유리하거나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결론을 이끌어내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렇게 생각해버린다. 타인이 왜 그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드러난 행동만으로 판단하는 순간 상대에 대한 오해의 싹이 트고 상처 받기 시작한다. 여기 쓴 수많은 이런 사람은 결국 나 역시 이런 사람의 한 부류에 속할 수 있다는 경각심과 함께 지난날 내가 맺어온 인간관계에 대한 정직한 반성이자 성찰이기도 하다. 나도 한순간 이런 사람의 부류에 속할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은 언제나 잠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실한 마음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나의 과거 인간관계를 돌이켜 볼 때 내 삶을 드러내는 진실함이 언어로 묻어 나온다. 그런 언어적 소통이 상대의 신체 속으로 스며들고 진심을 전하는 채널을 만들어간다.
친밀했던 만남 사이에 어느 순간부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고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는 조짐이나 징후다. 겉으로 들리는 육성보다 들리지 않지만 여전히 몸으로 전해지는 울림과 떨림을 고요 속에서 감지해낼 때 관계의 깊이와 수준을 알 수 있다. 관계 속에서 힘들고 지치는 이유는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식어가면서 애정 어린 궁금함, 상대에 대한 물음표가 실종되기 때문이다. 알고 싶은 욕망이 상대를 사랑하게 만든다. 박서영 시인의 ‘업어준다는 것’에 비추어 사람이 사람을 사랑으로 대할 때 어떤 인간관계가 만들어질지를 시사해준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감춰진 울음이 몸에 닿으면서 스며들 듯 서로를 찌르며 상처 주지 않고 눈망울에 맺힌 세월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며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는다. 등지면 악연이지만 등 대면 인연이 시작된다. 등지고 상처 주며 살았던 아픈 과거를 닦아주는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시기다. 인간의 결연한 의지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정현종 시인이 ‘비스듬히’라는 시에서도 노래했듯이 어디 기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 를 받치고 있는” 그런 존재가 인간이다. 비스듬히 서로 기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이 오히려 인간관계를 통해 새로운 기대(期待)를 하며 살아가게 만든다.
우리는 한 사람이지만 한 세상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내면 속에 자리 잡고 살아가는 복잡한 생각을 내 생각으로 재단하고 판단해버릴 때 생각의 다름과 차이는 차별화되지 못하고 차별받고 살아간다. 한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이 말하는 내러티브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러티브에 담긴 사연과 사정을 헤아려보기도 전에 내가 쌓은 경험적 지식으로 판단해버리면서 결국 그 사람의 삶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합리적 논리에 길들여진 나머지 사람마다 몸에 아로새겨진 애틋한 사연을 따뜻한 가슴으로 어루만져주지 못하고 자신이 쌓았다고 생각하는 과학적 지식으로 보란 듯이 눌러버린다. 책으로 배운 관념적 지식으로 한 사람의 복잡한 삶을 평가하려고 할 때 한 사람의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이 걸려 있는 삶의 애환은 객관적 지표로 둔갑하기 일쑤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삶을 살아오면서 오늘의 내가 되기까지 나를 만든 다양한 경험의 합작품이다. 그 경험을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해나갈 것이다. 그러니 한 사람은 지금 여기서 그 사람이 아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를 것이고, 오늘의 나는 다시 내일의 다른 나로 변신을 거듭할 것이다. 그러니 한 가기 기준, 관점, 시점으로 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폭력이고 횡포일 수 있다. 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한 세상이 될 수도 있을 만큼 영향력이 크다.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을 모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어떤 사람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한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세상의 전부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한 세상은 한 많은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 있는 힘은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나 함께 살아감 속에서 나온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내려는 강렬한 열정으로 저마다의 삶을 만들어나간다는 뜻이다. 살아내려는 열정의 단서를 버트런드 러셀의 자서전, 《인생은 뜨겁게》에서 발견했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8쪽). 이 글을 읽고 나를 움직이는 세 가지 열정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다. 잠시 고민하다 러셀의 자서전 문장에 내 생각을 담아보았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한계에 도전하고 싶은 욕망, 타자의 아픔을 사랑하는 공감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이 중에서 타자의 아픔을 사랑하는 공감이야말로 한 사람이 겪은 한 세상을 온몸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공감은 머리로 계산하는 연민과 다르게 역지사지 입장에서 가슴으로 생각하는 측은지심이다. 이해타산을 따지면 손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세계로 스며들어 그들의 아픔을 헤아려보고 내가 어떤 일을 하면 도움이 될지를 숙고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능력이 바로 공감이다. 공감은 다르게 표현하면 지금 내가 누리는 이 모든 혜택도 결국 나 대신 누군가 힘든 일을 하면서 겪어낸 고된 노동의 덕분임을 잊지 않는 미덕이다. 함께 살아감의 밑바탕에 자리 잡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미덕이 바로 덕분에 살아갈 수 있다는 공감능력이다. “우리가 누리는 품위는 모두 그들과 같은 밑바닥 인생들의 혹독한 노동현장과 일상적 가난에 빚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노라”(49쪽).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나오는 말이다. 장미꽃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하얀 안개꽃이 배경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노 커피의 특유한 맛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뜨거운 물속에 잠복근무하고 있는 에스프레소 커피 덕분이다. 덕분에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믿음으로 주변을 돌아보자. 그리고 오늘의 나를 전경으로 만들어준 수많은 배경에게 고개 숙여 고마움을 생각할 때 우리 사이는 더 좋은 사이가 되지 않을까.
인간관계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진리는 인간은 오로지 관계를 통해서만이 성장하고 성숙한다. 오늘의 나는 내가 맺어온 인간관계의 사회 역사적 산물이다. 이 책은 인간관계가 만들어 준 한 인간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인식의 흔적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람과 관계에 대한 저마다의 주장은 우리 모두가 믿고 따라야 할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어쩌면 여기서 말하는 주장도 한 개인의 편견이자 선입견일 수도 있다. 인간이 인간관계를 통해서 경험한 깨달음의 산물이지만 그 자체가 인간적 믿음으로 해석해낸 앎이기 때문이다. 체험적 깨달음으로 생긴 앎도 한 개인의 사회 역사적 인간관계가 만들어준 결과라는 점에서 주관적이고 편향적 시각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를 통해서 깨달은 교훈을 공유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탓하기 이전에 나부터 반성하면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관계는 자아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좋은 사이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 책이 나를 돌아보고 내가 만나는 상대와의 관계를 성숙한 동반자로 만들어가는 데 잠시라고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가 나무생각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