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비교하고 있습니까, 비유하고 있습니까?
와인과 여인: ‘와인(臥人)’은 누워 있는 ‘여인(女人)’이다!
당신은 비교하고 있습니까, 비유하고 있습니까?
"창의성은 새로운 것들의 옛날식 조합과 옛날 것들의 새로운 조합을 통해 생겨난다”는 미국의 조직이론가, 칼 웨이크(Karl Weick)의 말이나 “아이디어란 ‘기존 요소들’의 ‘새로운 결합’이다”라고 생각하는 제임스 웹 영(James Web Young)의 말, 또는 창의성은 만날 것 같지 않은 이질적 요소의 충돌이나 갑작스러운 만남(Creativity comes from unlikely juxtapositions)”에서 유래한다고 말한 전 MIT Media Lab, 니콜라스 니그로폰테(Nicholas Negroponte) 소장의 말에는 모두 공통점이 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관계없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이상의 이질적 요소가 만날 때 생긴다는 점에서 이들은 공통적인 의견을 갖고 있다. 관계없는 이질적 요소를 뒤섞거나 버무려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유가 바로 아이디어이자 창의성이며 메타포(metaphor), 즉 은유법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질적이지만 공통점을 찾아 새롭게 연결함으로써 지금 여기서 미지의 저기로 인식의 지평을 열어가는 사유의 촉매제가 바로 은유법이다. “은유의 본질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종류의 사물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M. 존슨과 조지 레이코프가 쓴 《삶으로서의 은유》에 나오는 말이다. 예를 들면 《공부는 망치다》 책 제목처럼 공부를 망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망치의 관점에서 공부를 바라볼 때 이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린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대상을 삼켜서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라고 《은유의 힘》에서 주장한 장석주 시인의 말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와인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포도의 즙을 발효시켜 만든 서양 술”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결국 와인은 포도로 만든 서양술이다. 와인을 이런 식으로 정의하면 인간의 상상력은 여기서 그친다. 와인을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는 인식의 지평을 열어가려면 와인을 다르게 정의해야 한다. 와인을 다르게 정의하는 방법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은유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은유법은 겉으로 보기에는 닮지 않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닮은 점이 있음을 찾아내서 두 가지를 이전과 다른 관계로 연결시켜 색다른 상상력의 세계로 유도하는 수사학적 비유법이다. 와인바에 가면 모든 와인은 왜 누워서 보관하는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재미있는 발상을 시작해본 적이 있다. 물론 코르크 마개가 건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라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상하는 상상력은 논리의 세계가 고꾸라진 지점에서 시작된다. 누워 있는 와인을 보고 혹시 '와인'의 '와'가 누울 '와(臥)'가 아닐까라고 엉뚱한 발상을 하기 시작해보자. 와인과 여인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생각하면 생각지도 못한 닮은 점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메타포의 위력이다. 전혀 닮지 않은 것 같지만 파고들어가 생각해보면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와인과 여인을 예를 들어 메타포의 위력을 살펴보자. 관계없었던 와인과 여인이지만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게 되고, 와인과 여인 사이에 존재했던 경계가 붕괴된다. 와인과 여인 사이에 상호 침투가 일어나 와인에 대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면서 포도로 만든 서양술이라는 생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게 함으로써 와인에 대한 새로운 사유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무엇이든지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바로 직격탄이 날아온다. 분명하게 직유법으로 말해달라는 노골적인 대화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은은하고 은근한 사유가 은밀히 싹틀 수 있는 사유의 텃밭이 없어지고 있다. 누워 있어서 와인(臥人)이라는 호기심으로 시작한 와인에 대한 은유적 표현은 와인과 누워 있는 여인의 닮은 점을 찾아내는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와인은 여인’이라는 놀라운 메타포를 개발하게 된 것이다. 누워 있는 와인을 보면 호기심이 생기듯, 누워 있는 여인을 보면 남자들도 호기심이 생길 것이다. 저 여인이 왜 누워 있을까?
와인과 여인의 첫 번째 공통점은 와인이나 여인은 모두 누워 있을 때 사람의 호기심을 끌어 댕긴다는 점이다. 포도즙으로 만든 서양술로서의 와인은 호기심과 상상력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와인을 포도주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더 이상의 호기심을 갖지 않으면 와인은 그저 식사 중에 마시는 술의 한 종류일 뿐이다. 하지만 와인을 와인(臥人)으로 해석, 누워 있는 여인에 비유하면 와인은 여인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고 여인은 와인 입장이 되어 둘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상호 침투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와인은 여인 입장이 되어 여인과의 공통점을 찾게 되는 것이고 여인은 와인 입장이 되어 와인과의 닮을 점을 찾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는 아주 가까운 관계로 돌변하기 시작한다. 와인은 여인을 삼키고 여인은 와인을 삼켜 역지사지 입장에서 서로를 비틀고 꼬아서 색다른 관계의 지평을 열어간다.
둘째 와인과 여인의 공통점은 숙성과 성숙에 있다. 포도가 포도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속성보다 숙성의 기다림을 견뎌내야 한다. 일정기간 숙성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와인의 풍부한 맛이 생겨난다. 마찬가지로 산전수전을 겪어가면서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이라는 친구를 사귀면서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인간적 풍비를 더해갈 때 한 여자는 형언할 수 없는 인간미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성장을 넘어 성숙해지는 비결은 오로지 숙성밖에 없다. 숙성의 길을 포기하는 순간 졸속과 기교가 판을 치면서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숙성은 격을 높여 품격을 낳는다. 품격 높은 와인일수록 오랜 기간 숙성을 통해 포도가 잉태하고 있는 자연의 기운을 고스란히 안으로 품는다. 그런 와인을 마실수록 그윽한 맛과 향이 진하게 드러난다. 여인도 인고의 세월을 겪으며 성숙한 여인일수록 함께 얘기할 수 있는 체험적 공감대가 깊어서 인간적인 매력이 묻어난다. 숙성된 와인과 성숙한 여인은 그래서 공통점이 있다.
셋째, 혹독한 조건에서 자란 포도로 담근 와인일수록 와인의 맛이 그윽하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카리스마로 바꿔낸 코코 샤넬처럼 여인도 시련과 역경을 견뎌낸 여인일수록 그 아름다움을 형언할 수 없다. 지금 즐기고 있는 풍경도 곤경이 낳은 자식이고, 내가 누리는 남다른 경력도 역경이 만들어준 소중한 선물이다. 환경이 열악할수록 포도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 스트레스가 바로 포도의 당도로 연결되어 형언할 수 없는 독창적인 와인 맛을 내는 원동력이 된다. ‘스트레스받은’에 해당하는 영어 ‘stressed’를 뒤집으면 놀랍게도 ‘디저트(desserts)’가 된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포도의 당도를 높여주는 보약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여인일수록 베일에 싸인 신비의 마력과 형언할 수 없는 내공을 지닌다. 모든 ‘아름다움’은 앓고 난 사람이 보여주는 ‘사람다움’에서 비롯된다. 깊은 맛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윽한 와인 맛에 빠지듯 세월의 내공으로 사람을 품어주는 여인의 매혹적인 인간미의 마력에 빠져들면 그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
넷째, 좋은 와인일수록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품격 높은 와인일수록 마시기 최소 몇 시간 전에 열어 놓고 공기 중에 산소와 접촉할 시간을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와인은 마음을 열지 않는다. 오랫동안 병 속에 갇혀 있으면서 품고 있었던 깊은 맛이 겉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비교적 넓은 병에서 자유롭게 산소와 접촉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여인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마음이 닫히면 몸도 다친다. 와인이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시기 전에 2-3시간을 산소와 접촉하는 디캔팅(decanting)을 하듯 여인도 오랜 기간 동안 정성을 들여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빗장 걸린 마음의 문(?)을 열어준다. 급하다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가장 말하기 좋은 시기는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다.
다섯째, 좋은 와인과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꼬달리(caudalie)가 오랫동안 유지된다. 꼬달리는 불어로 “와인을 삼키거나 뱉어낸 이후에도 계속되는 와인의 미각, 후각적 자극의 길이를 측정하는 단위”다. 한 마디로 꼬달리는 와인을 마시고 난 후에도 빈 잔에 남아있는 와인 특유의 잔향(殘香)이다. 좋은 와인일수록 와인을 마시고 나도 그 진한 꼬달리가 빈 잔에 그대로 남아있다. 와인을 다 마시고도 빈 잔을 돌리면 진한 향기가 진동을 한다. 그만큼 좋은 와인은 겉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연으로부터 받은 사계절의 기운을 안으로 품고 있다 은은하 고 은근하게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매력적인 여인일수록 한 번 만났어도 그 여인의 이미지가 깊게 각인되면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잠깐 만났지만 그 여인의 어투와 몸짓, 그리고 전반적으로 다가왔던 강렬하지만 은은한 아우라뿐만 아니라 인간적 면모가 선명한 이미지로 오랫동안 뇌리에 자리 잡는다. 옷차림과 외모는 물론 전반적인 모습에서 풍기는 한 여인의 뇌쇄적인 이미지는 그 사람을 만난 남자를 미지의 세계로 자꾸 데려가려는 상상력이 날개를 펼친다.
여섯째, 좋은 와인일수록 감각적으로 남은 그 맛의 기억은 코와 입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기회가 되면 다시 마시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와인 마니아의 욕심이다. 어떤 와인은 처음 마셔봤지만 그 맛과 향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입안을 가득 채우면서 목구멍을 타고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든다. 스쳐 지나간 와인은 언젠가 또 인연이 될지 모르지만 스며든 와인은 깊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연인으로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다시 만나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첫 만남에서 받은 강한 인상은 묘한 매력을 풍기면서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꼬달리가 오랫동안 남는 와인일수록 그 향기가 가시기 전에 다시 마시고 싶은 충동을 자제할 수 없듯이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보고 또 봐도 다시 보고 싶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와인이든 사람이든 매혹적인 모습에는 인간적 자제력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숨겨져 있다. 또 만나고 싶게 만드는 끌림의 원동력은 자기만의 독창적인 칼라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자기다움의 DNA를 뿌린 결과다. 즉 뿌림이 끌림을 낳는다. 독창적인 칼라나 스타일에 끌리기 시작하면 이제 아예 쏠림현상이 발생한다. 마음의 쏠림은 신체의 꼴림을 가져와 마음을 움직여서 몸이 가닿고 싶게 만드는 욕망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제 몸과 마음이 통제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상태가 될 때 완전히 넋이 나가는 홀림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일곱째, 동일한 와인과 여인일지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지에 따라서 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와인의 종류와 빈티지가 같은 와인이라도 누구와 어디서 마시느냐에 따라 와인의 맛과 향은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동일한 와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날의 기분과 분위기에 따라서 혀끝에 감도는 미각과 콧속으로 다가오는 향은 비슷하기도 하지만 다르게 와 닿는 점도 많다. 마찬가지로 지금껏 만나온 여인이지만 언제 어디서 만나느냐에 따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같은 와인과 여인도 이럴진대 다른 와인과 여인은 탄생 배경과 제조과정에 따라서 칼라와 스타일이 다종 다양하다. 저마다의 특성과 고유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 와인과 여인을 같은 와인과 여인이라는 범주로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만큼 저마다의 고유한 칼라와 스타일로 만나는 사람에게 언제나 색다른 감흥을 주기 때문이다.
“요리란 그 재료를 먹어 버림으로써 사라지게 하는 일, 음식을 먹는 이의 몸 안에 묻는 흥겨운 장례식이다.”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 읽기, 쓰기, 고독, 그리고 연대에 관하여》 에 나오는 말이다. 요리를 장례식에 비유한 메타포다. 와인을 포도로 만든 서양술로 정의할 때와 와인은 여인으로 은유할 때 와인에 대한 상상력의 차이는 천지차이다. 세상을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보려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한 가지 방법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거나 기존 개념에 담긴 나의 신념을 바꿔서 재정의하는 것이다. 은유는 기존 개념을 재정의해서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어준다.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기보다 “스스로 비유를 만들 수 있는 것만이 나의 앎이고, 내가 아는 것만이 나의 삶이에요. 남이 만든 비유를 사용하는 건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것과 같아요.” 이성복의 《무한화서》에 나오는 말이다. 남이 만든 비유를 반복해서 사용한다는 의미는 남의 생각에 세 들어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만의 독창적인 사유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사용하는 비유를 그대로 사용하는 수준을 넘어서 나만의 독창적인 은유를 개발해야 한다. ‘비유’는 막힌 ‘사유’를 뚫어주는 ‘치유’다. 남과 비교하는 데 일생을 낭비하다 비참해지지 말고 나만의 독창적인 비유를 개발해서 비전을 추구하자. 내가 고민하는 화두를 풀어내는 비유를 개발할수록 놀라운 상상력은 발동되고 미지의 세계로 다가가는 거리는 좁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