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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이 개념을 만나야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탄생한다

체험이 개념을 만나야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탄생한다

개념 변경으로 다시 태어나는 10가지 성장 체험 이야기(도입의 글)


사람은 그가 만나는 인간과 시간과 그리고 공간의 합작품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을 만나 저마다의 인성을 지닌 인간으로 거듭난다. 인간(人間)은 말 그대로 사람(人)과 사람(人) 사이(間)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색다른 깨달음의 언어를 습득한다. 아무리 다채로운 체험을 했던 사람을 만나도 그가 했던 체험을 적확한 개념으로 표현할 수 없다면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공감대도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그가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인간은 인간이 보낸 시간의 산물이다. 나아가 인간은 누구와 어디서(공간)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누구와 어디서 어떤 경험, 특히 삶에 방향 전환을 이루는 성장 체험을 했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생각이 만들어지고, 그것에 상응하는 개념적 사유가 생기면서 놀라운 각성이 일어난다. 성장 체험은 물리적 시간과 공간의 변화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성장 체험은 한 인간이 이전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거듭나는 방향 전환이 일어난 각성 사건이다. “각성 사건은 목적과 운명적으로 조우하는 경험이자 자신의 소명에 대한 체험이다(윤정구, 2018, 139쪽).” 각성 사건은 한 사람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자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달으며 다시 태어나는 제2의 탄생과정이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날은 세상에 태어난 날과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알게 된 날이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나로 하여금 왜 살아야 하는지,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준 수많은 성장 체험과 그에 상응하는 개념 변경 덕분에 오늘의 내가 탄생한 것이다. 성장 체험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그게 경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에 대해 당신이 실제로 뭘 했는가가 체험이다.” 영국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경험을 한다. 누군가에게 그 경험은 창작의 원동력으로 발아되지만 누군가에게 그 경험은 그냥 지나고 나면 생각나는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는다. 똑같은 경험을 했어도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과거의 기억이나 추억으로 떠오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깊은 체험적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창작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이런 다양한 경험을 포착할 수 있는 개념이 없다면 그것은 생각나지도 않는 관념의 파편으로 모래알처럼 산만하게 떠돌아다니는 잡다한 기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삶은 다른 말로 하면 사건과 사고의 합작품이다. 사건은 내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이고 사고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사건에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연과 배경이 담겨 있고 사고(事故)에는 남다른 사고(思考)를 낳는 원산지 역할을 한다.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의 사연과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당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깨달음의 합작품이 결국 한 사람의 사고 혁명을 일으키는 운동력이 된다. 사건을 일으키고 사고를 당해본 체험이 적확한 개념을 만나면 자기만의 신념이 탄생한다. 복잡했던 현상과 그것을 응시하는 생각도 개념 없이는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포착할 수 없다. 내가 경험했던 그 사건이 나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왜 그것이 그때 일어났으며 그 사건으로부터 내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사고 역시 마찬가지다. 뜻하지 않게 일어났지만 전화위복의 기회, 반면교사로서 배울 수 있는 각성 포인트는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성찰하며 질문을 던질 때 사건과 사고가 던져주는 시사점을 본질과 핵심을 포착할 개념이 탄생된다. 그 순간이 바로 나만의 신념이 잉태되는 소중한 순간이다. 이처럼 개념은 질문을 먹고 자란다. 질문이 따르지 않는 사건과 사고(事故)는 사고(思考)의 발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한 사람은 인간과 공간과 시간이 만들어가는 합작품이라는 생각은 철학자 질 들뢰즈가 《디알로그》에 말하는 아장스망(agencement)이라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아장스망은 영어의 배치(arrangement)와 상응하는 말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살아간다. 시골에서 자라다 서울로 옮겨와서 살면서 시골에서 만났던 익숙한 환경이 주는 배치와 전혀 다른 배치를 서울에서 만난다. 어제의 나와 다른 나는 어제와 다른 내가 만나는 사물이나 현상과의 접촉에서 태어난다. 이전과 다른 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전에 만나보지 못했던 낯선 배치로 나를 노출시켜야 한다. 수많은 기존의 유와 유의 낯선 배치로 나는 이전과 다른 나로 거듭 생성되는 존재다. 예를 들면 나는 어린 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다. 유영만-운동장-축구공으로 배치되었던 삶에서 학교를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로 옮기면서 이전에서 접촉할 수 없었던 낯선 배치가 나를 한 동안 낯선 이방인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낯선 환경과의 부단한 접촉으로 생기는 낯선 배치가 나로 하여금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다. 아장스망으로 생기는 것이 바로 다중체(multiplicity)다. 다중체는 다양한(multiple) 주름(pli)이라는 뜻이다. 배치가 바뀌면 이전에 없었던 흔적이나 주름이 내 몸에 생긴다. 축구선수로 활동했을 때 나는 박지성 선수처럼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잘 다루는 주름, 즉 정신 상태와 신체 근육이 생겼다. 하지만 박지성 선수를 갑자기 운동장이 아닌 수영장, 축구공이 아인 수구 공으로 바꿔 수구 선수로 탈바꿈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박지성 선수는 수구선수로 축적한 주름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물에서 하는 수구선수로서 낯선 배치가 주는 아장스망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낯선 배치가 나에게 주는 이전과 다른 접촉은 내 몸이 갖고 있지 않는 다른 주름을 선사해준다. 낯설었던 배치가 점차 익숙해지면서 이에 상응하는 주름도 생긴다. 나는 이전과 다른 나로 다시 생성된 존재로 부각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공간 속의 다양한 배치로 인해 이전과 다른 주름을 만들어가면서 다중체로서의 나로 거듭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듭할 때마다 나는 이전과 다른 체험적 지혜를 얻게 된다. 책상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깨달음의 교훈으로 낯선 삶에서도 곧 적응하면서 이전과 다른 나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제 인간이 그동안 다양한 노력을 통해 축적한 지식은 인간지능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이 아주 짧은 시간에 순식간에 습득한다는 점이다. 더욱 심각한 위협은 한 번 습득한 지식을 인공지능은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지식과의 경쟁에서 인간지능은 인공지능을 능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인간지능은 인공지능을 능가하는 지성으로 무장, 인공지능이 축적하는 지식을 능가하는 지혜로 무장할 필요가 있다. 지식으로 지시하는 시대에서 지혜로 지휘하는 시대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체험적 각성과 더불어 개념 변경이 혁명적으로 일어나는 사고 혁명인 셈이다. 


그렇다면 지능 및 지식과 지성 및 지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슈퍼제너럴리스트》라는 책을 쓰는 에 따르면 ‘지능’이란 ‘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에 대해 재빨리 정확한 답을 내놓는 능력이지만 ‘지성’이란 ‘답이 없는 물음’에 대해 그 물음을 계속 되묻는 능력이라고 한다. 지하철에서의 자리 잡기 요령을 통해 자료(data)와 정보(information), 지식(knowledge)과 지혜(wisdom)의 차이점을 구분해보자. 자료는 지하철을 타자마자 빈자리가 없으면 금방 내릴 거 같은 표정이나 행동거지를 짓는 모든 산만한 현상을 지칭한다. 이것을 일정한 체계로 조직화시키면 정보가 된다. 자료가 모래알이라고 한다면 정보는 모래알에 시멘트를 섞어서 물로 섞어서 만든 결과물이다. 지식은 정보를 실제 문제 상황에 적용해서 깨달음이 추가될 때 탄생한다.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와 정보를 동원해서 금방 내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앞에 가서 서 있었다. 예측대로 그 사람이 다음 역에 내리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실패를 체험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자리 잡기에 실패했다. 앞에 있는 사람이 내리는 순간, 정말 빠른 속도로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빈자리로 옮기고 자기 자리에는 자신 앞에 있는 친구를 앉히는 게 아닌가. 정말 난생처음 당해보는 실패 체험이다. 정보를 실제 문제 상황에 적용해서 깨달음이 추가되는 순간, 정보는 체험적 지식이 된다. 생각지도 못한 지식은 생각지도 못한 실패 체험을 하는 순간 탄생된다. 앞으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금방 내릴 것 같은 사람 앞에 똑바로 서 있지 않고 다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앞에 있는 사람이 내리는 반대 방향으로 향하면서 약간 사선으로 서 있거나 아니면 옆 사람과 지금 내리는 사람 사이, 중간에 서 있거나 해야 자리 잡기에 반복해서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제 지혜는 이런 지식이 축적되면서 다시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성찰이 반복되면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과 식견, 육감과 혜안이 축적될 때 생긴다. 이제 지하철이 곧 들어온다는 소리만 들어봐도 이번에는 몇 번째 칸에 빈자리가 많을 거 같다는 놀라운 육감적 통찰력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인공지능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실천적 지혜다. 이러한 실천적 지혜가 햄버거를 볼 때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자료와 정보와 지식과 다르다는 점을 식별해낼 수 있다. 인간은 세상을 바라보는 데 네 가지 눈을 갖고 있다. 첫째, 햄버거를 보면 침이 나오는 육안(肉眼)이다. 육안은 말 그대로 머리에 붙어 있는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눈이다. 둘째, 햄버거를 보면 살이 찐다는 점을 알아차리는 뇌안(腦眼)이 있다. 뇌안은 햄버거에 담긴 영양성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눈이다. 보통 육안으로 자료를 관찰하고 뇌안으로 관찰된 자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정보를 만든다. 육안과 뇌안은 대부분의 사람이 갖고 있는 눈이다. 이제 주로 시인들이 갖고 있는 세 번째 눈이 있다. 햄버거를 보면 소의 아픔을 연상하는 심안(心眼)이다. 심안은 말 그대로 타자의 아픔을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에서 가슴으로 생각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눈이다. 햄버거의 원료를 제공해준 소의 아픔을 연상하는 눈은 머리로 생각하는 정보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지식이 주는 깨달음이다. 마지막으로 햄버거를 보면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된다는 깨달음을 지닌 영안(靈眼)이다. 햄버거 수요가 늘어날수록 소고기를 더 많이 더 빨리 공급해야 되므로 소를 더 빨리 기를 수 있는 목장이 필요하다. 목장을 만들기 위해 중앙아메리카 곳곳에서 열대림의 대규모적인 파괴가 진행됨으로써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된다. 소고기 100g을 생산하기 위해 열대 우림 1.5평이 목초지로 변신함으로써 환경파괴는 더욱 가속화되고 그 부메랑으로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된다. 햄버거와 지구 온난화가 연결되었다고 생각하는 현상을 햄버거 커넥션이라고 한다. 영안은 바로 이첨 보이지 않는 이면의 구조적 관계나 연결고리를 찾아냄으로써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바라보는 지혜의 눈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10가지 성장 체험별 개념 변경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연재하려고 한다.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성장 체험 1: 야성은 야생에서 자란다

성장체험 2: 상상력은 체험적 상상력이다

성장체험 3: 어떤 책은 운명을 바꾼다

성장체험 4: 한 순간의 선택이 한 평생을 좌우한다(궁즉통)

성장체험 5: 지식산부인과의사도 의사다(상창교)

성장체험 6: 체험 없는 개념은 관념이다

성장체험 7: 전체를 다 아는 전문가는 없다 

성장체험 8: 선두권에는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성장체험 9: 정상(頂上)에 오른 사람은 정상(正常)이 아니다

성장체험 10: 지금까지 책 중에서 가장 좋은 책다음에 나올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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