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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文體)는
육체(肉體)의 고통이 낳은 무늬다

사르트르가 헤세를 찾아간 까닭은?

문체(文體)는 육체(肉體)의 고통이 낳은  무늬다

사르트르가 헤세를 찾아간 까닭은?


문체는 오로지 그 사람의 글에서만 묻어나는 스타일이다. 스타일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그 근원은 내면에서 뿜어 나오는 아우라에서 비롯된다. 괴테는 괴테 특유의 문체가 있고 톨스토이는 톨스토이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특유의 문체가 있다. 스피노자는 안경알을 깎는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철학의 흔적을 남겼고, 니체는 정신적 고통의 얼룩을 자기 특유의 철학적 색깔로 글을 남겼다. 헤세는 두 번의 자살기도와 세 번의 결혼을 경험하면서 스위스로 망명하는 아픔을 동서양을 통합하는 글쓰기로 흔적을 남겼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읜 자유(?)를 얻은 사르트르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세기의 로맨스를 경험하며 다양한 지적 편력 끝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보다 더 무거운(1Kg 정도의 무게라는 일화도 있다) 《존재와 무》를 남겼다. 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철학자나 문학가들은 윤리적인 딜레마를 논리적인 모순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참고)를 글쓰기에 담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인 작품에는 저마다의 사건과 사고(事故) 속에 담긴 사연과 남다른 사고(思考)의 흔적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이들은 앉아서 고민하지 않고 몸으로 고생하면서 신체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으며, 글쓰기를 참을 수 없는 고역으로 생각하지 않고 즐거운 고통으로 받아들였다. 한 마디로 시대를 넘어 심금을 울리고 영혼을 움직이는 모든 작품은 고생과 고통 체험을 고뇌라는 매개체로 숙성시킨 사회 역사적 산물이다. 오늘 만나고 싶은 두 사람, 사르트르와 헤세도 마찬가지다. 


추석 연휴기간에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과 사르트르의 작품을 같이 읽어가면서 미성숙한 한 인간적 존재가 실존적의 의미를 찾아 몸부림치는 자기발견 여정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수레바퀴 아래에서》, 《데미안》, 《유리알의 유희》를 다시 읽으면서 헤세가 필생의 과제로 추구했던 양극단의 단일성을 몸으로 읽어내며 유영(遊泳)했다. 《유리알의 유희》를 제외하면 나머지 헤세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읽어내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읽기 쉽다고 해서 각각의 작품이 지향하는 의미도 가볍다는 것은 아니다. 헤세의 작품에는 일관된 문제의식과 주제가 흐른다. 헤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바로 동양과 서양, 이상과 현실, 성공과 실패, 좌절과 절망, 밝음과 어둠, 여성과 남성, 음과 양의 양극단 사이에 놓인 한 인간이 사투를 벌이며 조화와 통합을 추구하는 여정을 그려낸다. 그리고 노벨문학상까지 거부했던 사르트르의 자서전인 《말》과 《구토》를 읽으면서 사르트르가 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을 펼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고 했다. 《말》과 《구토》를 통해서 오늘날의 사르트르가 어떤 삶을 살면서 어떤 공부를 해왔고 그래서 그가 글쓰기를 통해서 지향하려는 지적 욕망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한 사람이 남긴 작품에는 그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가 삶을 살아내면서 어떤 사투를 벌이며 고통 체험을 했는지, 그 속에서 고독을 벗 삼아 고뇌했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어느새 작가들의 세계로 잠입하고 있었다.



사르트르의 《말》은 1부가 ‘읽기’이고 2부가 ‘쓰기’다. 소제목만 봐서는 읽기와 쓰기 방법에 관한 책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다. ‘읽기’를 통해 깨달은 관념적 앎으로 구체적 현실을 이해하는 방법을 깨달은 사르트르는 ‘쓰기’를 통해 육체보다 문체를 남기기 위해 혼을 다해 글 쓰는 운명을 개척한다. “남들이 나를 읽는다는 것은 내가 그들의 눈 속으로 뛰어든다는 말이다. 남들이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내가 보편적이면서도 독특한 언어로 변모해서 그 모든 사람들의 입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나는 가장 깊숙한 불안을 준다(209쪽).” 사르트르에게 글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생각이 독자의 눈으로 뛰어드는 것이고 저자의 메시지가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즉 읽기는 저자와 독자가 혼연일체가 되는 뜨거운 격정이다. 단순이 저자의 글을 눈으로 읽고 입으로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메시지가 독자의 몸을 관통하면서 전율하는 깨달음을 각인시키는 과정이다. 현실에 나가서 직접 인생을 체험하는 시간보다 할아버지 서재에서 책 읽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사르트르에게 책을 통해 형성한 관념이 체험을 통해 깨달은 각성을 능가했다. 


사르트의 삶을 통해 습관화된 읽기는 자연스럽게 쓰기로 연결된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다시 태어났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166쪽).” 사르트르에게 글쓰기는 작가로서 살아가는 삶의 수단이 아니라 삶을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해내는, 즉 존재 이유를 밝혀내는 필생의 과업이었다. 사르트르는 글 쓰는 사르트르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밝혀나가는 걸 필생의 과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작가로서의 나의 계율은 상처처럼 몸속에 꿰매져 있다. 하루라도 글을 안 쓰면 그 상처 자국이 근질근질하다. 너무 쉽게 써도 역시 근지럽다(176쪽). 그는 살아있다는 증거, 살아가려는 의지, 살아내려고 발버둥 치는 모든 노력의 근저에는 글쓰기가 자리 잡고 있다. "한 줄이라도 쓰지 않는 날은 없도다. 이것이 내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270쪽).” 사르트르라는 인간 존재의 본질은 그의 부모가 사전에 결정된 그 무엇이 아니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밝혀나가면서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 나갔다. 사르트르에게 글쓰기는 기법과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담아내는 생존전략이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은 그의 자전적 소설, 《구토》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구토》는  로캉탱이라는 프랑스의 한 고독한 지식인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일기체로 써 내려간 이 소설이다. 그가 책을 출판한 20세기 초 유럽은 근대사회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합리주의가 지배하면서 이성과 논리를 중심으로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명백한 존재 이유를 밝히는 과학적 연구가 주종을 이루던 시기였다. 한 마디로 우연이나 우발성보다 과학적 분석과 예측을 토대로 인간의 합리성과 객관성을 철저하게 신봉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인간은 철저하게 우연성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본질적인 것, 그것은 우연이다. 원래,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존재란 단순히 '거기에 있다'는 것뿐이다. 존재하는 것이 나타나서 '만나'도록 자신을 내맡긴다(245쪽).”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그 누구도 사전에 결정할 수 없다. 오로지 인간은 세상으로 우연한 기회에 던져진 우발적 산물이지 필연적으로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인간의 본질이 사전에 결정되었다면 인간은 오로지 결정된 각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피조물에 불과하다. 다행히 인간은 무의미한 존재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그 존재의 본질을 결정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 존재가 존재의 본질, 즉 실존을 새롭게 재조명해나가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구토》라는 자서전적 일기 소설을 펴낸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구토, 즉 세상에 대해 구역질이 날 정도로 마음이 불편한 각성 체험을 통해 존재와 존재의 본질, 실존의 의미를 해명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은 우연히 바닷가 조약돌에서 첫 번째 구토감을 느낀다. “지난날 내가 바닷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이제 잘 생각이 난다. 그것은 시큼한,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그 얼마나 불쾌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그 조약돌 탓이었다. 확실하다. 그것은 조약돌에서 손아귀로 옮겨졌다. 그렇다.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손아귀에 담긴 일종의 구토증(27쪽).” 흔히 우리는 내가 조약돌을 만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약돌 입장에서 보면 조약돌이 나를 만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조약돌이라는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을 때 로캉탱은 구토감을 느낀 것이다. 그가 구토감을 느낀 이유는 조약돌이라는 부조리한 존재에 대한 실존적 반응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조약돌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존재는 특별한 이유 없이 공연히 세상에 내던져진 우연성의 산물이라는 부조리 때문에 구토가 일어난 것이다. 존재의 속성이 우연성의 산물이라는 점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는 말이다. 이 말에 이어서 자신도 우연히 세상에 내던져진 여분의 존재라는 사실이 더욱 구토를 일으키게 만든 장본인이다.


나를 비롯해서 우연히 존재하는 세상은 왜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주인공 로캉탱의 속을 뒤튼 것이다. 더욱 구토를 일으키는 심각한 이유는 자신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왜 존재하는지를 알 수 없다는 부조리에 대한 답답함 때문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조리한 감정으로 수많은 존재를 우연히 만나는 조우(遭遇)가 인간은 더욱 구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 나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르트르에 따르면 존재의 본질은 지금 여기서는 밝혀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알 필요도 없다고 한다. 다만 지금 내가 알 수 있고 알 필요가 있는 단 한 가지는 ‘실존’하는 인간인 나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 즉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은 사유하는 생각 속에서 일어나지 않고 행동하는 주체적 존재와 함께 탄생되는 것이다. 실존은 앉아서 고민하는 생각의 산물이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실천의 산물이다. 나의 실존은 오로지 실천을 통해서 해명될 뿐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행동이 존재를 결정한다(to do is to be)”고 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의미 없이 우연히 태어난 존재이기에 의미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나의 존재 이유, 본질은 그 누구도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정할 수 없다. 오로지 나의 본질은 내가 책임지고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과 조우(遭遇)한다. 헤세의 문학적 숙제는 《유리알의 유희》에서 잘 나타난다. 유리알의 유희란 존재의 양극 사이에서 인간이 어떻게 균형을 잃지 않고 조화로움을 지켜 갈 수 있는가를 끈질기게 탐구하는 것이다. 존재의 양극단에서 어느 한 곳에 편중되지 않고 그 경계에서 질서와 조화의 꽃을 피워낼지를 평생의 목표로 삼은 헤세는 혼돈과 질서, 양과 질, 절망과 희망, 삶과 죽음, 어둠과 밝음, 동양과 서양, 선과 악이라는 양극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난한 탐구 여정을 고삐를 늦추지 않고 평생을 걸어갔다. 그것이 바로 《유리알의 유희》다. 인간의 실존도 양극단의 경계와 경계가 만나 새로운 관계로 발전하면서 그리고 동시에 사이 속에 존재하는 차이가 존중되면서 부단히 재형성되는 것이지 누군가가 미리 계획해놓은 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유리알의 유희》는 바로 양극단의 조화와 균형 속에서 지극이 높은 사고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실존적 결단이자 몸부림이다.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찾아 우리는 매일 어제와 다른 목적지로 여행을 떠난다.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책에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은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마지못해서 하는 불행한 소년을 등장시킨다. 그 주인공 이름이 바로 한스 기벤라트다.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146쪽).” 수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굴러가는 바퀴, 그 바퀴 밑으로 짓눌리며 반복되는 억압적 자유를 참고 견뎌야 하는 한 소년의 우울한 일생이 그려진다. 수레는 나의 의도나 의지와 관계없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기성사회의 틀에 박힌 전통이나 권위다. 바퀴는 그 힘으로 끌려가면서 억압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수동적인 존재들을 의미한다. 수레바퀴는 그래서 지루하고 험난한 삶을 지칭하며, 거역할 수 없는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낙타처럼 어쩔 수 없는 현실 사회의 억눌린 자유를 의미한다. 《수레바퀴 아래서》 보다는 《수레바퀴 밑에서》가 헤세가 의도했던 뉘앙스나 의미에 더 가깝게 다가가는 이유는 ‘아래서’라는 말보다 ‘밑에서’라는 말이 더 처절한 사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밑바닥의 실상을 떠따올려 주기 때문이다. 



온갖 시달림을 당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한스는 결국 극심한 부담감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흘러가는 강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상황,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 부모님과 선생님이 기대하는 미래를 구현하기 위해 버티고 견디며 힘든 공부를 해왔던 한스의 죽음은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모든 수험생들의 자화상이다. 한스는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보다 더욱 불행했던 우리 시대의 아픈 수험생이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7쪽)” 그는 존재의 본질을 알기도 전에, 아니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파악하기도 전에 기존 권위적 전통과 기성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에 억눌려 자기다운 삶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단명한 안타까운 사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9쪽).” 한 사람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사회와 세상을 품고 있는 우주다. 우리 모두는 그 누구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오솔길을 걸어가는 소우주다.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에로, 어쩌면 무에로 던져졌다. 그리고 측량할 길 없는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172쪽).” 다시 사르트르의 우연성의 산물로서 인간 존재의 본질이 헤세 작품에도 드러난다. 세상에 내던져진 돌멩이에 불과하지만 그 돌멩이도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해 수많은 방황을 할 것이다. 지금 여기서의 돌멩이와 내일 저기에서의 돌멩이도 저마다 살아가는 이유를 매일매일 새롭게 발견하며 존재의 모습을 바꿔갈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오늘 세운 계획대로 내일을 살아가고 살아간 결과대로 내가 결정되는 삶이 펼쳐 치지 않는다. 오늘 내가 알 수 있는 일은 나는 오늘과 다르게 내일 나의 존재 이유를 찾아갈 것이며, 그 이유나 본질은 지금 여기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오늘의 나를 덮어 씌우고 있는 세상의 기준과 틀을 깨고 내가 만들어가는 기준과 틀을 세우려고 안간힘을 쓸 뿐이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짓부수어져야 했다(218쪽).” 지금을 깨부숴야 내일이 열린다. 실존적 몸부림인 것이다. 안간힘 쓰는 저 절한 행동과 실천 속에서 나의 실존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목표 추구나 목적의식은 그 속에 나를 가둬버릴 수 있다고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경고하고 있다. “스님은 지나칠 정도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도 행위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202쪽).” 깨달음을 추구하지만 거기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망실할 수 있다.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 사람은 오로지 찾고자 하는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어서,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202-203쪽).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스스로 자기발견을 위한 지적 탐험을 떠나는 싯타르타는 친구 고빈다나부터 부처 고타마의 가르침에서도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방황을 거듭한다. 기생 카람라와 빠져 아들을 낳기도 하고 상인 카마스와미에게 부와 허세를 익히지만 진정한 지혜는 누군가에게 배울 수도 가르칠 수도 없음을 깨닫는다. 진정한 깨달음은 강물에서 뱃사공을 하는 바주데바와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평생 뱃사공으로 강물을 건너 다니면서 흐르는 강물에서 삶의 많은 부분을 깨달은 것이다. 항상 낮은 곳으로 그것도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의 목적지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바다다. 하지만 바다에 도달한 강물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수증기가 되어 가장 높은 곳으로 비상했다가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신다. 윤회의 전형을 강물이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싯다르타는 지혜는 누가 누구에게 가르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가 한 곳에 머물러 어떤 스승에게 배우기를 멈추고 고행을 자초한 이유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자네, 농담을 하는 건가? 고빈다가 물었다.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닐세.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이미 젊은 시절부터 나는 이따금씩 예감했으며, 이 때문에 내가 그 스승들 곁을 떠났던 거야(206쪽). 아인슈타인도 비슷한 명언을 남긴 적이 있다. ”지식은 학교교육을 통해서 가르칠 수 있지만 지혜는 평생을 통해 시행착오나 우여곡절의 경험을 통해서만이 몸으로 체득할 수 있다.” 지혜는 왜 전달할 수 없을까?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화시킨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머리 속에 정리된 지식은 입으로 말할 수 있지만 몸으로 겪은 체험적 지혜는 오로지 당사자가 몸으로 겪는 수밖에 없다. “비극은 남의 것을 대신 체험할 수 없고 단지 자기 것밖에 체험할 수 없는 고독한 1인칭의 서술이라는 특질을 가지며 바로 이러한 특질이 그 극적 성격을 강화하는 한편 종내에는 새로운 '앎' ― '아름다움' ― 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283쪽).”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에 나오는 말이다. 내 삶의 비극적 체험은 언어로 정리할 수 없다. 오로지 몸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헤세도 《데미안》 서문에 비슷한 글을 남겼다. “내 유년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되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우리들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을 아무도 보지 못한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균열은 다시 늘어난다. 그것들은 치료되고 잊혀지지만 가장 비밀스러운 방안에서 살아 있으며 계속 피 흘린다(26쪽).” 몸에 새겨진 상처 덕분에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육화 된 지혜를 얻는다. 몸으로 깨달은 체험적 지혜는 저마다의 상황에서 사건과 사고를 경험하면서 탄생한다. 나의 체험적 지혜는 내가 경험한 상황적 맥락에서만 통용되는 일리다. 그 일리가 보편성을 띠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이유는 비슷한 상황에서 고뇌했던 흔적을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체험적 지혜는 언어로 문서화시키거나 일반화시킬 수 없는 이유는 《아픈 몸을 살다》라는 책을 쓴 캘거리 대학교 아서 프랭크 (Arthur W. Frank)가 구분한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의 차이점을 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질환은 체온, 혈압, 혈당 수치나 피부 상태를 생리학적으로 환원하여 제시하는 의학적인 용어라서 주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치로 환산된다. 반면에 질병은 질환을 앓아가면서 환자가 느끼는 공포와 절망,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처럼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다. 똑같은 질환을 앓고 있어도 그것에 대해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고유함을 목격하고 차이를 전부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돌봄이다”(82쪽). 나의 질환은 동일한 범주에 있는 다른 환자의 객관적 수치와 비교할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해 내가 느끼는 고통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비교될 수 없는 특수한 고유함이 있다. 질환은 말로 전달할 수 있는 지식이지만 질병은 오로지 몸으로 증거 할 수밖에 없는 지혜다.


세상으로 내던져진 돌멩이처럼 인간의 존재는 우발적이었다. 누구도 나의 존재 이유를 사전에 설정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금부터 그 이유를 찾아 나서는 주체적 자유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신영복 교수님에 따르면 자유는 자기의 존재 이유다. 내가 왜 태어났으며,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아 평생의 체험적 깨달음을 글로 남긴 사르트르와 헤세의 문체에서 각자 다른 고행의 길을 걸어갔지만 비슷한 목적지를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작품 속에서 만났던 문장 속의 고뇌는 시간과 공간의 벽과 한계를 넘어 지금 여기서도 은은한 향기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을 헤세의 《유리알에 유희》에 나오는 다음 글로 두 사람의 인간적 조우를 마감하려고 한다.


“아침이 되자 크네히트는 금붕어를 보려고 연못가에 앉아 명암이 있고 

신비로운 색채들이 어우러진 조그맣고 서늘한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짙은 청록과 잉크 빛 어둠 속에서 금빛 물체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온 세상이 마법에 걸려 영원히 잠들고 꿈의 궤도로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이따금씩 유연하고 탄력 있으면서도 

깜짝 놀라게 하는 움직임과 함께 저 잠든 듯한 어둠을 뚫고 

수정과 황금의 번쩍이는 빛이 비쳐 나왔다(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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