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辭典)은 죽어가는 사전(死典)이다
늘 손에 들고 살던 영한사전이나 한영사전, 누구나 책상에 꽂혀 있는 국어사전은 사전(死前)에 보기 어려울 정도로 더 이상 개정판이 나오지 않고 있다. 개정판 사전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더 이상 사람들이 국어사전을 사지 않고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알고 싶은 단어의 의미를 익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포털 사이트에서 사전 검색 서비스를 시작한 2000년대 초반 이후 종이사전의 위기는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그 후 우리나라 국어사전 시장은 거의 죽어버렸다. [태평로]라는 조선일보 칼럼에 ‘국어사전 개정판을 낸다는 것’이란 글을 쓰는 조선일보 김태익 논설위원에 따르면 국어사전의 차이가 국가 간 지력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어사전 자체가 판매되지 않으니 출판사의 사전 출간팀도 해체되었다. 이제 국어사전을 출간한 출판사는 없어진 셈이다. 한 마디로 “언어는 성장사업이지만 사전은 사양산업(27쪽)”이라서 그럴까. 더욱 심각한 사실은 국민 세금으로 만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1999년 초판 발행 이후 한 번도 개정판을 낸 적이 없다고 한다. 편찬 인원도 99년 당시 90여 명에서 2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지식에 대한 지식’을 정리한 사전은 학문의 기초를 이루는 벽돌이요, 사회 구성원 전체가 믿고 이용하는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분수대]라는 칼럼에서 ‘좋은 사전을 갖고 싶다’라는 칼럼을 쓴 중아일보 박정호 논설위원의 말이다.
사전 편찬이 돈이 되지 않는 한 가지 이유로 지속적인 개정판을 내지 않는다면 국가적으로 언어의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종이사전을 찾는 사람들이 사라지면서 사전 출판사들은 문을 닫았고 사전 편찬자들은 하나둘씩 맥이 끊기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2017년 사전 편찬이 갖는 의미와 가치에 관한 책 한 권이 출간되었다.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포털 사이트 다음의 어학사전 기획자인 정철이 사전 편찬 관련 전문가들을 만나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사전 편찬 세계에 숨은 뒷이야기를 인터뷰를 통해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콘셉트는 “말의 뒤를 따라 걷는 가장 느리고 성실한 기술자들, 사전 편찬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데 두고 있다. 《검색, 사전을 삼키다》를 통해 몰락하는 국내의 종이사전의 현실을 지적했던 저자는 한국어사전을 비롯 각종 백과사전과 외국어 사전을 편찬했던 사전 편찬자 5명을 직접 만나 그들의 애환을 들어봤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사전 편찬의 산역사였다. 저자는 "사전 편찬에 관한 경험과 기억이 이미 많이 지워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져 가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 사전 편찬을 통해 한 나라의 말과 언어를 되살리는 일이 가장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국가는 자국민의 언어생활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가적인 차원에서 국어사전을 지속적으로 개정하는 노력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국어사전은 한 나라의 사상적 기반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개념적 기반을 제공해준다. 모든 사상적 기반은 언어를 기반으로 축조된다. 정제된 언어가 풍부할수록 사상적 기반도 튼실하게 구축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의 말과 언어생활에 참고가 되는 표준 국어사전뿐만 아니라 비슷한 말 사전, 우리말 속 뜻 사전, 우리말 어원사전을 비롯해 다양한 관점에서 저마다의 생각과 느낌으로 단어의 의미를 새롭게 드러내거나 다시 정의하는 사전은 언어생활은 물론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다.
한 가지 다행인 사실은 2016년 10월 한글날에 맞춰 ‘우리말샘’(개방형 한국어 지식 대사전) 서비스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방식을 따라서 분야별 다양한 전문가 의견도 수렴했다고 한다. 99년 나온 《표준국어대사전》이 보유하고 있는 50만 어휘에 신어·방언·전문용어 50만 단어가 추가된다고 하니 표제어 100만의 방대한 ‘낱말 창고’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언어도 시대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생어(生語)가 되는가 하면 죽어 사장되는 사어(死語)가 되기도 한다. 언어는 진공관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한 사회에서 특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일정한 약속을 해서 합의한 상징체계이자 기호다. 그런데 언어는 기호로서의 의미를 넘어 한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체계를 담고 있는 신념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일하는 사람을 ‘근로자’로 부를 것인지 ‘노동자’로 부를 것인지에 대해서도 한 사회는 갈등을 빚는다. ‘노동자’라는 말을 쓰면 왠지 종북이나 친북을 지향하는 불순한 사고를 지닌 사람을 오해해서 ‘근로자’라고 써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노동자’라는 말을 써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용어 하나에 대한 의미부여가 다른 이유는 특정 어휘에 대한 가치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박일환, 2018). 이처럼 언어는 당대의 사회가 요구하는 역사적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같은 단어라도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로 각색되어 전용되기도 한다. 사전을 지속적으로 개정해야 되는 이유는 기존 단어의 의미 변화를 반영해야 될 뿐만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신어(新語)들을 적절히 해석해서 모두가 합의하는 보편적인 의미로 재정의하는 노력을 부단히 전개해야 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사전은 완성된 바로 그 순간 낡기 시작”(38쪽)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은 디지털로 사전 검색 서비스가 존재해도 사전 편찬은 여전히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사전 출판사 중의 하나인 이와나미(岩波) 출판사가 2018년 초에 일본어 사전 '고지엔(広辞苑)' 7판을 내는 걸 보고 한국과 다른 사전 강국임을 실감했다. 일본은 분야별 마니아층이 두터운 나라인데 사전도 예외는 아니다. 각종 사전(辭典·事典)만 1만 종 넘는 '사전 왕국'이다. 다른 책과는 다르게 사전은 한 사람의 저자가 외롭게 공부해서 편집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사전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의 목적을 공유하고 저마다의 분야에서 깊은 애정을 갖고 오랫동안 단어와 사투를 벌이며 의미를 정련하는 집단적 노력의 산물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전은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상이 요구하는 단어, 기존의 단어에 대한 의미 변화를 재정의하는 부단한 노력의 반복만이 좋은 사전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종이사전이 점차 팔리지 않고 있다. '고지엔'도 1998년 5판은 100만 부나 팔렸지만, 2008년 6판은 50만 부로 급격히 떨어지고, 급기야 7판은 상반기까지의 판매 목표를 20만 부로 잡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놀라운 사실은 인터넷으로 단어 검색이 되는 시대에도 불구하고 값비산 종이사전을 사기 위해 아직도 약 2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1만 5000엔(보급판 9000엔)을 투자한다는 점이다. 고 지엔은 일본 사람의 일상적 삶과 더불어 통용되고 있는 단어를 담고 있다. 단어는 당대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반영한다. 사전(辭典)은 그래서 사전(思典)이다.
하지만 국어사전(辭典)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사전(思典)에서 단어의 의미가 점점 죽어가는 사전(死典)으로 바뀌고 있다. 국어사전을 읽고 눈물 흘리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수많은 개론서에 나오는 전공 용어 대한 개념 정의를 읽고 감동받은 사람이 있는가? 국어사전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다. 개론서에 등장하는 용어 정의를 읽고 너무 와 닿는 정의라고 느끼기에는 쉽지 않다. 국어사전은 개념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정의해놓은 뜻풀이 사전이다. 구체적으로 국어사전은 그런 한국어 낱말을 모아 그 뜻, 어원, 품사, 다른 말과의 관계 따위를 한국어로 풀이한 사전이다. 마찬가지로 개론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개념에 정의도 기존 정의를 편집하여 조합된 또 다른 정의에 지나지 않는다. 개론 책을 읽고 감동받은 사람이 없듯이 국어사전을 읽고 감동받은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다. 국어사전이나 개론서나 마찬가지로 개념이나 원리가 갖는 의미를 논리적으로 정의한 사전이나 책이다. 누군가에게 의미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을 계속하면서 머리에 심으면 골치가 아프고 심하게는 골 때리고 졸음을 불러온다, 그런데 개념이나 현상과 그 현상이 드러나는 보이지 않는 구조나 원리를 자신의 체험적 사례에 비추어 감성적으로 설득하면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심장에 심으면 의미심장(意味深長)해진다. 국어사전은 낱말이나 용어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정의한 사전이지 그 낱말이나 용어에 담긴 개인적인 체험적 느낌을 감성적으로 정의한 사전은 아니다. 국어사전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뜻풀이 사전이지만 그 뜻풀이 과정에서 개인의 체험과 주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은 배제되어 있다. 그래서 이해는 가나 와 닿지 않는 정의다. 그리고 동일한 단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
국어사전에는 남이 정의한 단어들이 가나다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국어사전의 단어들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뿐이다. 이전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면 내가 체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방식대로 기존의 단어를 재정의 해봐야 된다. 세상의 모든 개념은 개념과 연관된 한 개인의 사연이나 문제의식, 열정과 용기가 담기는 가운데 신념으로 재탄생한다. 개념에 대한 누군가의 논리적 정의는 이해는 되지만 심금을 울리지는 못한다. 앎에 개인의 문제의식을 파고드는 집요한 열정이 녹아있지 않아서 그렇다. 국어사전에 정의되어 있는 수많은 개념들이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는 가나 정의를 읽으면서 심금을 울리거나 심장에 꽂히는 의미심장함은 없다. 누구나 다 알 수 있지만 모두가 감동하지 않는 논리적이고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정의라서 그렇다. 정상에 벗어나 있거나 정상에 문제를 제기하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의 개념은 정상적인 사유체계에 비정상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이 쓰는 개념이 바뀌면 그에 따라 생각도 바뀐다. 정상적(正常的)인 사람과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정상(頂上)’을 정복하기 어려워진다. ‘정상(頂上)에 올라간 사람은 정상(正常)이 아니다. 정상(頂上)’에 오르고 싶다면 우선 정상적(正常的)인 무리에서 일탈하고 정상적(正常的)인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 정상 분포 곡선에 포함되어 있는 약 80%의 사람들이 주로 쓰는 개념은 그들만의 사유체계를 반영한 언어다. '정의(正義)'로운 사람은 기존 ‘정의(定義)’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사물이나 현상의 올바른 뜻을 다시 정의해서 나만의 생각사전을 만들어간다. 정상적(正常的)인 사람들이 정의(定義)해놓은 수많은 개념 속에 갇혀 살수록 정상(頂上)을 정복할 수 있는 비정상적(非正常的)인 생각을 하기 참으로 어려워진다. 내가 먼저 이전과 다르게 정의(定義) 하지 않으면 누군가 정의(定義)한 세상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디. 세상은 내가 정의(定義) 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세상을 다르게 보고 싶으면 나만의 ‘정의(定義)’로 정리된 특유의 ‘개념사전’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접하는 많은 사전(辭典)은 죽어가는 사전(死典)이 되고 있다. 나만의 정의를 담고 있는 사전(辭典)을 사전(死前)에 만들지 않으면 남이 정의한 세상대로 살아가게 된다. 사전(事前)에 사전(辭典)을 재정의 하지 않으면 나는 누군가 정의한 세계에 속박되어 조종당하고 통제당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남의 생각 속에 조종당하면서 영원히 남의 인생을 살지 않으려면 내 생각과 관점으로 재정의한 나만의 생각사전을 만들어야 한다. 나의 인생을 살고 싶으면 지금 당장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나 개념을 푸념조로 말하지 말고 나의 신념과 철학을 담아서 재정의해야 한다. 왜 나만의 생각사전을 만들어야 하는가? 첫째, 정의가 바뀌면 관점이 바뀐다. 세상은 개념적 렌즈로 보인다. 내가 어떤 개념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서 개념에 담긴 산의 신념대로 보인다.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세상을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둘째, 정의가 바뀌면 생각이 바뀐다. 남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남다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고 남다른 개념은 남다르게 개념을 정의하는 가운데 비롯된다. 남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남다른 개념을 보유하고 있다. 개념은 생각의 원료다. 남다른 개념 사용 능력이 남다른 발상과 연상을 좌우한다. 내가 갖고 있는 개념의 깊이와 넓이가 내가 발상하고 연상할 수 있는 사고의 깊이와 넓이를 좌우하고 마침내 내가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좌우한다. 셋째, 나만의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재료를 확보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개념이다. 나의 신념과 철학이 담긴 개념이 있어야 내 삶을 담아내는 글을 쓸 수 있다. 생각사전은 내 생각이 담긴 사고의 창고다. 사고의 창고에 축적된 개념으로 문장이 만들어지고 문장이 문체를 만들어간다. 문체는 내 삶의 얼룩과 무늬가 반영된 나만의 스타일이다. 나의 신념을 담아 정의한 개념이 곧 나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문체를 만들어간다.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해왔던 단어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보라면 동어 반복적 형태를 띠는 국어사전식 뜻풀이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면 ‘생존(生存)’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생명(生命)을 유지하고 있음”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런데 ‘생존’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명’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어야 한다.‘생명’을 다시 찾아보니까 “목숨이나 생, 또는 사물의 존립에 관계되는 중요한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다시 ‘목숨’을 찾아보니 “생물의 생활하는 원동력 또는 생명이나 수명”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렇게 국어사전에 등장하는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면 한 단어를 정의하기 위해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정의하는데 동원된 다른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정의하고 싶은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로 정의되어 있다. 사전에 나열되어 있는 개념에 대한 정의는 다른 개념을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정의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개념을 정의하는 데 동원되는 개념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지금 정의하고 있는 개념의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모순에 빠질 수 있다. 김애란 작가의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럼, 아저씨는 결혼까지 했는데 아직도 여자를 잘 모르겠어." "음, 그렇구나. 실은 최근에 저도 궁금해서 인터넷 사전에서 '여자'라는 단어를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 이라고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여성'이라고 쳤더니 '성의 측면에서 여자를 이르는 말'하고 뜨는 거예요. 나 참, 어쩌라고." "사전은 원래 동어 반복적이야. 그래서 어떤 작가들은 자기만의 사전을 따로 쓰기도 하지." "누가요?" "시인들이 그렇지."
예를 들면 ‘행복’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1. 복된 좋은 운수
2.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
국어사전에 따르면 행복을 우선 “복된 좋은 운수”라고 정의하고 있다. ‘복된’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복을 받아 기쁘고 즐거운” 상태가 ‘복된’이라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럼 “좋은 운수”에서 ‘운수’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행복이 “복된 좋은 운수”라면 행복은 결국 ‘운수’인가? ‘운수’는 무슨 뜻인가? 다시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운수’란 “이미 정하여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天運)과 기수(氣數)”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럼 ‘운수’가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운’과 ‘기수’가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한다. ‘천운’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나 매우 다행스러운 운수”라고 정의되어 있고 ‘기수(氣數)’는 “저절로 오고 가고 한다는 길흉화복의 운수”라고 뜻풀이가 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행복이라는 의미를 국어사전을 통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복에 대한 뜻풀이 과정에 동원되는 또 다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의가 이어지고 있다. 소설가 김훈은 국어사전의 이런 정의방식을 ‘동어반복의 거대한 시스템’이라고 한다.
“우리 갖고 있는 사전이라는 것은 동어반복의 거대한 시스템입니다. 이 동어반복의 지옥을 벗어나서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모습을 직접 포착하고 그것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학과 자연과학의 목적은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156쪽).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 나오는 말이다. 그는 이어서 ‘노랗다’는 단어가 국어사전에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를 지적하면서 국어사전에 관해서 뼈 있는 한 마디 쓴소리를 한다. “노랗다는 말을 찾아보면 ‘개나리 꽃빛이다’라고 쓰여있어요. 이것은 수박의 색깔을 DNA로 설명하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노랗다가 개나리 꽃빛이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죠. 새로운 나온 사전에는 ‘노랗다’를 “빛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전개되는 색의 스펙트럼 중 세 번째 층위다”고 써 놓았어요. 과학의 탈을 쓰고 있을지언정 설명 또한 비참하고 불쌍한 동어반복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하느냐. 언어나 과학의 힘으로 이것을 어떻게 넘어서서 실물 그 자체를 우리가 만지고, 그것을 경험하고 또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그것은 문학의 문제이고 또 자연과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동어반복에 갇히면 우리는 거기서 평생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우리 인식의 영역을 넓혀나갈 길이 없는 것이죠. 이것이 말을 다루는 자가 말 앞에서 느끼는 고민입니다“(161-162쪽). 동어반복의 강도와 빈도는 추상명사일수록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행복이 전형적인 예에 해당된다. 추상명사의 정의는 또 다른 추상명사로 동어반복의 거대한 시스템 안에 묶여 있다. 추상명사의 동어반복적 정의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은 추상명사를 보통명사 또는 동사로 생각하는 방법이다.
국어사전에 등장하는 모든 추상명사는 본래 구체적인 일상에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체험적 느낌이나 생각과 관련된 무수한 사례들이 귀납적으로 축약되어 정리된 개념이다. 예를 들면 행복이라는 추상명사를 이해하려면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나 그들이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들을 떠올려 볼 수 있어야 한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흔하게 접하는 보통명사일 수도 있고 매일매일 실천하는 동사가 될 수도 있다.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복은 똑같은 일을 해도 지겨워하지 않으면서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반전을 꿈꾸는 설렘이다. 행복한 사람은 오늘이 언제나 내가 살아가는 마지막 날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매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를 만들며 살아간다. 행복이라는 추상명사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 보여주는 구체적인 모습이나 행위 또는 습관을 통해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행복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며, 나아가 보통명사가 아니고 동사다. 행복은 추상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나 상태가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성취감이자 충일함이다. 행복이 추상명사가 아니고 보통명사인 이유는 행복은 거창한 계획을 세워서 달성해야 될 원대한 목표나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관념적으로 논의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오히려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동적인 순간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작은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모든 일을 덕분에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없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때문에’ 안 되었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기보다 ‘∼덕분에’ 오히려 좋은 기회를 잡아서 이전과 다른 인생의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살아가야 되는 이유를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어떤 일이든지 행동하면 행복해지고 행복하면 행운도 따라온다. 앉아서 행복해질 궁리만 거듭하면 머리만 아프고 행복은 멀리 도망간다. 행복은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몸을 움직여 느끼는 동사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보통명사를 넘어 동사인 이유는 행복은 매 순간 내가 하는 행동에 따라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남과 나누는 행동 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누군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선의를 베푸는 과정에서도 얼마든지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 행복은 거창한 무엇인가를 성취해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원대한 목표가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는 살아가는 삶 자체다. 행복은 무엇인가를 달성해야 되는 목표나 목적지에 있는 결과가 아니라 행복이라는 목적지로 가는 수많은 간이역에서 느끼는 모든 과정에 있다. 행복은 해 질 녘 저녁노을과 해 뜨는 일출광경을 보고도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는 순간에 찾아드는 작은 기쁨이다. 행복은 또한 혹한의 추위를 나목으로 견디다 마침내 새봄을 맞이하여 새싹을 틔우는 나무를 보면서 느끼는 숙연함이다. 아침에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있고 내가 보고 느낀 점을 생각하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감에 젖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살아가면서 매 순간 내가 느끼는 의미의 밀도가 행복의 척도이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찮은 일, 보잘것없는 일, 그리고 늘 보고 지나간 일에도 감동을 하고 감탄사를 연발했다면 나의 하루는 행복한 하루인 것이다. 우리말에 ‘죽인다’는 말은 실제로 ‘사람을 죽인다는’ 의미도 있지만 생각지도 못한 감동과 즐거움을 줄 때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감탄사이기도 하다. 내가 얼마나 행복했느냐는 내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죽인다’는 말을 몇 번이나 연발했는지와 직결되어 있다. 행복은 간단하게 정의하면 하루 동안 내가 연발한 감탄사다. 행복은 보통 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지난한 과제이거나 거창한 계획을 통해서 어렵게 이룰 수 있는 추상적 담론이 아니다. 오히려 행복은 지금 갖고 있는 것,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는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는 보통명사이자 작은 실천에서도 얻을 수 있는 감탄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