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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臥人)은
누워 있는 여인(女人)이다

나만의 개념사전은 메타포로 의미를 재정의하는 은유 사전

나만의 개념사전은 메타포로 의미를 재정의하는 은유 사전

와인(臥人)은 누워 있는 여인(女人)이다   

 

오늘 아침 문득 떠오른 생각의 파편을 모아보니 참으로 엄청난 깨달음의 보고가 아닐 수 없다 우선 ‘문득’이라는 말은 ‘생각이나 느낌 따위가 갑자기 떠오르는 모양’을 지칭한다. 문득은 또한 들어서 알게 되는 ‘문득(聞得)’의 의미도 갖고 있다. 문득은 물어봐서 알게 되는 문득(問得)으로 쓰일 수도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문득은 사유의 경계나 문을 넘어서면서 새롭게 다가오는 깨달음, 문득(門得) 일 수도 있다. 역시 새로운 깨달음은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온다는 사실,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가는 여정에서 우연한 마주침이 색다른 깨우침을 주며, 깨달음은 스스로를 깨뜨려야 깨우침으로 다가온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는 아침이다. 문득 찾아오는 깨달음은 책을 읽으면서 오는 경우가 많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는데 다른 체험적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다르게 각인시키는 깨달음이다. 알고 있었지만 의식 세계로 꺼내서 내 앎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주는 깨우침이다. “시인은 읽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거예요(이성복, 2015, p.38).” 이런 문장을 만나면 “작가는 읽는 사람을 다치게 또는 아프게 만드는 사람”으로 확장시켜 생각해볼 수 있는 화두를 제공해준다. 



나는 과연 내 글을 통해서 독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 적이 있는가? 내 글을 읽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쳐서 밤잠을 제대고 못 자게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갑자기 반성이 시작된다. 이런 점에서 《정희진처럼 읽기》의 저자, 정희진에 따르면 ‘독서는 피클이다’. 독서는 책을 읽는 행위를 지칭한다. 하지만 이런 뜻풀이는 와 닿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독서의 본질과 핵심을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독서는 피클이다’는 책을 읽기 전의 오이 상태가 책을 읽고 난 후의 피클 상태로 바뀌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오이가 피클이 될 수 있지만 거꾸로 피클이 다시 오이가 될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가 바로 독서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메타포(metaphor), 즉 은유의 위력이다.     


메타포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 관계없는 것을 공통점을 찾아 관계있는 것으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유법이다. 그야말로 이질적 두 가지 이상의 관계에서 문득 전두엽을 때리는 놀라운 깨달음이 다가오는 것이다. 문득 찾아오는 또 다른 깨달음은 어렴풋하게 또는 희미하게 산재하는 산만한 앎에 한 줄기 번개나 천둥처럼 내리치는 각성이다.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적절한 표현이나 실마리를 찾지 못해 뇌리의 한 구석에 버려두었던 단념들이 적절한 표현을 만나면서 전두엽에 불이 켜지고 심장이 뛰는 깨달음을 선사하는 경우가 있다. “스스로 비유를 만들 수 있는 것만이 나의 앎이고, 내가 아는 것만이 나의 삶이에요. 남이 만든 비유를 사용하는 건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것과 같아요”(160). 이성복 시인의 《무한 화서》에 나오는 말이다. 비유를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지가 내 앎의 깊이이자 넓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내 앎의 깊이와 넓이를 심화시키고 확산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내가 직접 내 생각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메타포를 개발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메타포나 은유법을 수없이 고민하면서 나의 사유를 자극하면서 적절한 비유법을 찾아 삼만 리를 헤맸다. 바로 이 문장을 만나는 순간 “비유는 막힌 사유를 뚫어주는 치유”라는 표절성 짙은 문장을 만들었다. 맞다. 비유는 골머리를 앓고 고민하다 더 이상 진전이 없는 나의 사유체계에 스스로 혁명을 일으켜 전혀 다른 사유의 세계로 나를 안내하는 놀라운 사고 혁명의 촉진제다. 비유를 통해 일어나는 사고 혁명은 내 사유체계가 안고 있는 아픔을 치유하는 치유이면서 동시에 이전과 다른 상처를 내 사유의 주름에 남겨 놓는다. 비유는 사유를 자유롭게 하는 비장의 무기다.      



“메타포는 수혈이다. 뛰어난 메타포는 감각의 문으로 들어가 사유의 문으로 나온다. 사유를 건너뛴 감각은 가슴만 물들이지만 사유를 관통한 감각은 머리까지 흔든다”(54쪽).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 나오는 말이다. 메타포는 자기 분야의 앎의 범주를 벗어나야 시작된다. 내가 알고 있는 인식의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이상의 연결에서는 무릎을 칠 정도의 놀라운 메타포가 탄생될 수 없다. 메타포는 경계를 넘나들며 전혀 다른 이질적 분야와의 잡종교배가 이루어질 때 놀라운 사유의 비약이 일어난다. 외부로부터 수혈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해결할 경우 늘 기대에 부응하는 틀에 박힌 해결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껏 생각지도 못한 생각의 지도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전공의 벽을 넘어 다른 세계와의 낯선 마주침이 이루어질 때 사유를 관통하는 감각적 체험이 머리까지 뒤흔드는 놀라운 깨달음을 준다. “와인은 포도주”라고 생각하는 발상과 “와인은 여인”이라고 생각하는 상상의 차이는 쉽게 건널 수 없는 사유의 물결이 존재한다. 와인은 “포도의 즙을 발효시켜 만든 서양 술”이라는 틀에 박힌 교과서적 정의에서는 그 어떤 상상력의 날개도 펼칠 수 없다. 하지만 와인을 보관할 때 눕혀서 보관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호기심의 물음표를 던져 이렇게 물어보았다. 왜 와인은 항상 누워 있을까? 아하! 누울 와(臥)자라서 와인(wine)은 혹시 와인(臥人), 즉 누워있는 여인(女人)과 닮은 점이 없지 않을까? 그래서 이제 와인에 대한 놀라운 상상력의 날개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와인과 여인은 놀랍게도 여러 가지 점에서 닮은 점이 많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은유의 본질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종류의 사물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다”(24쪽). 존슨과 레이코프의《삶으로서의 은유》에 나오는 말이다. 와인을 여인 입장에서, 여인을 와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사유를 통해 닮지 않은 것에서 닮을 점을 찾아내는 비약적 사유가 바로 은유의 마력이다.     


와인바에 가면 모든 와인을 다 눕혀서 보관한다. 왜 와인은 다 누워 있을까? 와인 전문가는 코르크 마개가 건조해지면 틈새가 생겨서 와인을 산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와인과 코르크 마개를 접촉하게 만들기 위해서 와인은 누워서 보관한다고 대답한다. 전문가의 과학적인 생각은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촉발시켜 더 발전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와인이 누워 있는 이유는 와인은 누워 있어서 와인(臥人)이라고 생각한다면 썰렁한 생각이나 엉뚱한 상상이라고 치부한다. 와인을 포도주라고 생각하는 한 와인에 대한 상상력은 거기서 그치다. 와인을 누워 있는 여인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순간 와인과 여인은 갑자기 경계가 무너지면서 놀라운 은유적 상상력이 발동되기 시작한다.           



와인과 여인의 첫 번째 공통점은 와인이나 여인은 모두 누워 있을 때 사람의 호기심을 끌어 댕긴다는 점이다. 포도즙으로 만든 서양술로서의 와인은 호기심과 상상력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와인을 포도주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더 이상의 호기심을 갖지 않으면 와인은 그저 식사 중에 마시는 술의 한 종류일 뿐이다. 하지만 와인을 와인(臥人)으로 해석, 누워 있는 여인에 비유하면 와인은 여인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고 여인은 와인 입장이 되어 둘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상호 침투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와인은 여인 입장이 되어 여인과의 공통점을 찾게 되는 것이고 여인은 와인 입장이 되어 와인과의 닮을 점을 찾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는 아주 가까운 관계로 돌변하기 시작한다.     



둘째 와인과 여인의 공통점은 숙성과 성숙에 있다. 어느 정도 숙성이 되어야 와인 맛이 좋고 여인은 인간적 풍미가 난다는 점이다. 값이 싼 와인은 오래 지날수록 맛이 상해서 오랫동안 보관하고 마실 수 없다. 하지만 비싼 와인일수록 오랜 기간 와인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마실수록 그윽한 맛과 향이 진하게 드러난다. 여인도 어느 정도 성숙한 여인일수록 함께 얘기할 수 있는 체험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인간적인 매력이 묻어난다. 숙성된 와인과 성숙한 여인은 그래서 공통점이 있다.     



셋째, 혹독한 조건에서 자란 포도일수록 와인의 맛이 그윽하듯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카리스마로 바꿔낸 코코 샤넬처럼 여인도 시련과 역경을 견뎌낸 여인일수록 그 아름다움을 형언할 수 없다. 지금 즐기고 있는 풍경도 곤경이 낳은 자식이고, 내가 누리는 남다른 경력도 역경이 만들어준 소중한 선물이다. 환경이 열악할수록 포도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 스트레스가 바로 포도의 당도로 연결되어 형언할 수 없는 독창적인 와인 맛을 낸다. 스트레스 받은'에 해당하는 영어 ‘stressed’를 뒤집으면 놀랍게도 ‘디저트(desserts)’가 된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포도의 당도를 높여주는 보약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여인일수록 베일에 싸인 신비의 마력과 형언할 수 없는 내공을 지닌다. 깊은 맛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윽한 와인 맛에 빠지듯 세월의 내공으로 사람을 품어주는 매혹적인 인간미의 마력에 걸리면 그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     



넷째, 좋은 와인일수록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좋은 와인일수록 최소 몇 시간 전에 열어 놓고 공기 중에 산소와 접촉할 시간을 갖지 않으면 와인은 마음을 열지 않는다. 오랫동안 병 속에 갇혀 있으면서 품고 있었던 깊은 맛은 갑자기 열리지 않는다. 여인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마음이 닫히면 몸도 다친다. 와인이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시기 전에 2-3시간을 산소와 접촉하는 디캔팅(decanting)을 하듯 여인도 오랜 기간 동안 정성을 들여 마음을 끌어야 비로소 빗장 걸린 마음의 문(?)을 열어준다. 급하다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가장 말하기 좋은 시기는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다.     



다섯째, 좋은 와인과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꼬달리(caudalie)가 오랫동안 유지된다. 꼬달리는 불어로 “와인을 삼키거나 뱉어낸 이후에도 계속되는 와인의 미각, 후각적 자극의 길이를 측정하는 단위”다. 한 마디로 꼬달리는 와인을 마시고 난 후에도 빈 잔에 남아있는 와인 특유의 잔향(殘香)이다. 좋은 와인일수록 와인을 마시고 나도 그 진한 꼬달리가 빈 잔에 그대로 남아있다. 와인을 다 마시고도 빈 잔을 돌리면 진한 향기가 진동을 한다. 마찬가지로 매력적인 여인일수록 한 번 만나고 나도 아름다운 미모뿐만 아니라 인간적 면모가 선명한 이미지로 오랫동안 뇌리에 자리 잡는다. 옷차림과 외모는 물론 전반적인 모습에서 풍기는 한 여인의 뇌쇄적인 이미지는 그 사람을 만난 남자를 미지의 세계로 자꾸 데려가려는 충동이 느껴진다.     



여섯째, 좋은 와인일수록 와인을 마시면서 느낀 맛의 기억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기회가 되면 다시 마시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와인 마니아의 욕심이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다시 만나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첫 만남에서 받은 강한 인상은 묘한 매력을 풍기면서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꼬달리가 오랫동안 남는 와인일수록 그 향기가 가시기 전에 다시 마시고 싶은 충동을 자제할 수 없듯이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보고 또 봐도 다시 보고 싶은 느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와인이든 사람이든 매혹적인 모습에는 인간적 자제력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숨겨져 있다.     



일곱째, 동일한 와인과 여인일지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지에 따라서 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와인의 종류와 빈티지가 같은 와인이라도 누구와 어디서 마시느냐에 따라 와인의 맛과 향은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그날의 기분과 분위기에 따라서 동일한 와인이라고 할지라도 혀끝에 도는 미각과 콧속으로 다가오는 향은 비슷하기도 하지만 다르게 와 닿는 점도 많다. 마찬가지로 지금껏 만나온 여인이지만 언제 어디서 만나느냐에 따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같은 와인과 여인도 이럴진대 다른 와인과 여인은 탄생 배경과 과정에 따라서 다종 다양하다. 저마다의 특성과 고유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 와인과 여인은 같은 와인과 여인이라는 같은 범주로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만큼 저마다의 고유한 칼라와 스타일로 만나는 사람에게 언제나 색다른 감흥을 주기 때문이다.    

  


와인이 포도주에서 여인으로 연결되면서 비약적인 상상력이 발동되었던 것처럼 은유는 두 가지 사에 존재했던 관계를 새로운 국면으로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숙고하는 것이 손전등이라면 행동하는 것은 전조등이다. 행동의 빛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훨씬 더 멀리까지 비춘다. 그러므로 흥미롭고 새로운 장소로 나아가려면 고민의 손전등을 꺼야 한다”(270쪽). 롤프 도벨리의 《불행피하기 기술》에 나오는 말이다. 숙고를 손전등에 비유하고 행동을 전조등에 비유한 은유법이다. 이처럼 은유법을 사용하면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비슷한 말의 차이점을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다. 앉아서 고민하면서 계속 생각해봐야 자기 주변만 어렴풋하게 비출 수 있는 손전등 밖에 안 되지만 나가서 직접 행동해보면 내 생각이 얼마나 잘 못되었는지, 어떤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는 쓸데없는 생각이었다는 점도 깨달으면서 갑자기 세상을 멀리까지 비출 수 있는 전조등과 같은 깨달음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서 김승희 시인의 ‘새벽밥’이라는 시를 인용하면서 은유의 본질을 비틀기와 뒤틀리기로 정리한다.      

새벽밥/김승희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 무르익고 있습니다.     



“은유는 비틀기입니다. 밥은 별 앞에서 자신의 원래 정체성이 뒤틀리고, 별은 밥을 맞이하려 스스로를 비틀어 놓습니다. 뒤틀린 틈새를 허용하고 또 끼어들어 둘은 상대방을 의지하며 새로 태어납니다. 새로 태어남, 바로 창조입니다”(203쪽). 숙고는 손전등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뒤틀리고, 손전등은 숙고를 맞이하기 위해 스스로를 비틀어 놓은 거다. 뒤틀린 틈새를 허용하고 또 끼어든 상대방을 의지하며 숙고는 손전등으로 창조되고 행동은 전조등으로 창조된다. 메타포의 위력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타자의 정체성으로 뛰어 들어가 변신함으로써 자신을 재탄생시키는 창조의 마법에 있다.    

 

김영민 교수는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서 뱃살은 “상반신과 하반신에 걸쳐 있는 이 무책임한 비무장지대”(221쪽)라는 재미있는 메타포를 사용한다. 뱃살이 뒤틀려 비무장 지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뛰어들었고, 비무장 지대는 뱃살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뒤틀어 놓은 거다. 뱃살에 대한 수만은 정의를 접해보았지만 이처럼 놀라운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비유법을 본 적이 없다. 뱃살과 비무장 지대는 갑자기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침투하며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메타포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던 둘 사이에 관계의 다리가 건설되면서  경계가 붕괴되고 상호 침투가 일어나면서 이종결합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의미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 순간 관계없는 두 가지 사이에 놀라운 관계있음이 발견되면서 둘 사이에 존재하는 사유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99쪽).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 나오는 책에 관한 은유법이다. 책과 심장은 정상적인 발상으로는 가까이 갈 수 없는 두 가지 별개의 사물이다. 하지만 작가는 책을 다른 사람의 몸 안에 뛰는 심장에 비유하면서 심장박동을 일으키지 않는 책은 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책과 심장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통해 책의 본질을 드러내고 책과 심장 사이의 비유사성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한다. 김용규는 《생각의 시대》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한다.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원관념의 본질(보편성)을 드러내고, 비유사성을 통해 의미의 변환 내지 확장을 창조해낸다”(158쪽). “책은 심장”에서 원관념은 책이고 보조관념은 심장이다.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책의 본질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고,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비유사성을 통해 색다른 의미를 찾아내는 창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나만의 은유 사전을 만들자    

 

“우선 A는 B다”형식의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왼쪽 A에는 가급적 추상명사를 쓰고 오른쪽 B에는 보통명사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왼쪽 추상명사, 예를 사랑이나 열정, 용기나 도전과 같은 추상명사는 구체적인 실체가 보이지 않는 명사다. 이런 추상명사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와 닿게 하기 위해서는 추상명사의 의미를 연상할 수 있는 보통명사로 표현하면 왼쪽의 추상명사는 오른쪽의 보통명사가 지니고 있는 속성으로 그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열정은 자동차 엔진”이라는 은유법을 쓰면 열정이라는 추상명사는 엔진이라는 보통명사가 지니고 있는 속성에 비추어 그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 수 있다. “도전은 오뚝이”라는 은유법은 도전의 핵심은 도전하다 실패할지라도 다시 오뚝이처럼 좌절하지 않고 일어나서 다시 도전하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하루에 3-4개의 추상명사를 선정,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보통명사로 표현한 다음 양자 사이의 닮은 점을 찾아서 써보는 노력을 계속한다면 은유적 사유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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