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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이 곧 '함'과 '삶'이 되는 이유는?

움베르또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앎의 나무》를 읽고

생명체는 앎과 삶과 함을 어떻게 하나의 존재방식으로 엮어가고 있는가?

움베르또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앎의 나무를 읽고     

     

앎은 생명체가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가기 위해 보여주는 생존 방식이다. 알고 나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알아가는 인식의 과정은 한 생명체가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 보여주는 행동방식이다. 즉 인식은 행동방식이 그것으로 탄생된 행동 지식이다.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한 앎을 근거로 행동하고 완벽한 계획을 수립한 다음 실행에 옮기는 선지 후행(先知後行)의 지행일치(知行一致)를 거부하고 인지 생물학적 인식론을 주장하는 움베르또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앎의 나무》에 담겨 있는 핵심적인 주장을 논의해본다. 이들이 주장하는 앎은 철학적 인식론을 연구하듯 현실과 무관한 창백한 연구실에서 탄생되지 않았다. 그들의 인지 생물학적 인식론은 생명체의 기나긴 역사적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생태계 현장에서 오랫동안의 관찰과 통찰로 건져 올린 사회 역사적 산물이다. 찰스 다윈과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을 배격하고 진화는 자연 표류(natural drift)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이들은 자연과 사투를 벌이면서 때로는 우발적 마주침과 무한 표류를 경험하면서 자기 존재의 고유함을 어떻게 지켜왔는지를 유구한 생명체의 역사를 통해 도발적인 주장을 펼쳐낸다. 나아가 자신들이 창안해낸 독특한 개념 체계와 사유체계로 새로운 생명체의 인식과 행동과 존재의 삼각관계를 파격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생명체의 특이성은 ‘구조 접속’을 통한 ‘자기 생성’의 결과     


움베르또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앎의 나무》에 따르면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자신(auto)을 제작(poiesis)하는 오토포이에시스, 즉 자기 생성(autopoiesis)의 역동적 실체다.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세포에 비추어 오토포이에시스를 생물학적으로 다시 정의를 내리면 끊임없는 생성 활동을 하면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만들어내는 세포 활동 자체’를 뜻한다. 자기 생성 체계로서 세포는 주변 환경과 부단히 상호작용을 거듭하면서 자신을 역동적인 다른 개체로 구성하는 핵심 주체다. “생물을 특징짓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말 그대로 지속적으로 생성하는 데 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생물을 정의하는 조직을 자기 생성 조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56쪽). 자기 생성 개념에 따르면 유전자가 결정한 대로 환경변화에 관계없이 결정된 유전자 체계의 운명대로 살아가는 생명체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환경이나 다른 생명체와의 부단한 상호작용을 통해 어제와 다른 나로 자기 변신을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생성한다.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생성할지는 지금 여기서 결정할 수 없다. “자기 생성 체계의 가장 독특한 점이란 말하자면 자기 옷을 스스로 여민다는 사실, 곧 자신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자신을 주위 환경과 다른 것으로 구성한다는 사실이다”(58쪽). 자기 생성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 에너지원이 바로 구조 접속(structural coupling)이다. 구조 접속이 끊어지면 생명체의 자기 생성을 위한 에너지원이 차단된다는 의미다. 개체와 환경의 구조 접속이 끊어짐으로써 에너지원의 유입이 끊기면 생명체로써의 고유한 특성을 더 이상 생성할 수 없어지고 결국은 생명성을 상실한다는 의미다.   

  

이런 점에서 생명체의 자기 생성을 위한 분투노력은 살아가기 위한 생존투쟁이며 그것으로 한 생명의 특이성은 살아나는 것이다. 자기 생성의 멈춤은 곧 생명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생명체가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모든 활동은 다른 생명체나 환경과 무관하게 홀로 작동하는 독립적인 활동이 아니다. 생명활동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 그리고 생명체가 살아가는 주변 환경과 구조 접속된 채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구조 접속이란 무엇인가? “개체와 환경의 재귀적 상호작용은 둘의 상호 섭동으로 나타난다. 이런 상호작용에서의 환경의 구조는 자기 생성 개체의 구조에 변화를 유발할 뿐, 그것을 결정하거나 명령하지 않는다. 이것은 거꾸로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개체와 환경이 해체되지 않는 한, 이런 재귀적 상호작용은 구조 변화를 서로 주고받는 역사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조 접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91쪽). 다시 말해서 구조 접속이란 생명체가 주변 환경과의 재귀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생명 조직을 잃지 않고 부단히 자신의 신경계 구조를 변화시키는 활동이다. 주변 환경이 생명체에 주는 모든 자극을 섭동이라고 한다. 섭동이 생명체에 자극을 주면 기존 생명체의 구조에 변화가 일어나고 일어난 구조는 다시 환경에 영향을 주어 환경에도 구조 변화가 일어난다. 생명체와 환경이 주고받는 이런 상호 작용을 재귀적 상호작용이라고 한다.      



여기서 ‘재귀적’이라는 말은 생명체와 환경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일방향적으로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생명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속성을 말한다. 즉, 환경으로부터 섭동으로 영향을 받은 생명체의 구조가 변화되고, 반대로 이 생명체의 구조 변화는 환경의 구조 변화에 영향을 되돌려줌으로써 변화된 환경의 구조는 다시 생명체 구조 변화에 영향을 주고받는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생명체가 살아간다는 뜻이다. 구조 접속을 통한 생명체의 구조 변화와 환경의 구조 변화는 서로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구조 변화의 무한 표류를 거듭하면서 언제 어떤 생명체가 또 다른 생명체나 환경과 어떤 구조 접속을 통해 어떤 구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를 모르기 때문에 구조 변화의 표류하고 보는 것이다.  

   

구조 접속을 보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 무거운 바벨을 들고 벤치 프레스를 하면 가슴 근육이 생기고 데드 리프트를 하면 어깨 등 근육과 기립근, 그리고 허리와 허벅지 근육의 구조 변화가 일어난다. 너무 무거운 바벨을 들다가 왼쪽 부위 허리 근육에 무리가 가면 당분간 왼쪽에 힘을 주지 못하고 오른쪽 허리 부위 근육으로 버티면서 살아가는 신체 구조의 변화가 일어난다.  또한 의자에 앉았는데 오른쪽으로 의자가 기울어지는 문제가 발생하면 내 몸은 자연스럽게 의지의 기울기에 맞게 내 몸의 구조 변화가 일어나 의자 구조와 내 몸의 구조가 접속해서 구조 변화를 재귀적 상호 작용을 통해 일으킴으로써 주어진 환경변화에 적응해간다. 생명체의 구조 변화는 일생일대의 큰 사건일 수도 있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역사일 수도 있다. 환경변화가 낳은 섭동이 한 생명체의 신체구조 변화를 일으키지만 구조 변화를 겪는 당사자 입장에서 바라보면 견딜 수 없는 아픔의 연속일 수도 있다. 이전 상태와 다르게 변화된 신경계의 구조 변화는 다시 현상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일정기간의 적응 노력이 필요하다. 생명체의 구조 접속을 통한 자기 생성은 생명체가 살아있는 한 계속되는 영원한 미완성인 셈이다.      



생명체의 진화는 자연선택이 아니라 ‘자연 표류’의 결과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선택(自然選擇, natural selection)의 결과다. 자연선택이란 특수한 환경 하에서 생존에 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이, 그 환경 하에서 생존에 부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에 비해 생존과 번식에서 이익을 본다는 이론이다. 자연도태(自然淘汰)라고도 한다. 다윈의 자연선택을 진화론적으로 계승한 사람이 바로 《이기적 유전자》를 리처드 도킨스다. 자연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생명체일수록 유전자 역시 잘 보존될 수 있다는 입장이 바로 도킨스의 진화론적 관점이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자이고 우리는 유전자들의 생존 기계인 것이다”(68-69쪽).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가 유전자가 만든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 내가 아무리 무슨 노력을 해도 나는 변하지 않는다. 내 운명은 이미 유전자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기적으로 작용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는 이기적 생존 기계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결정론은 내가 나의 노력으로 결정되지 않고 유전자가 결정하는 헤테로포이에시스(heteropoiesis)로 보면서 유전자를 나를 결정하는 절대적 신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움베르또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구조 접속을 통한 자기 생성은 유전자가 품고 있는 결정된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고 그때그때의 개체와 환경이 주고받으며 이루어지는 구조 접속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섭동 작용으로 생명체의 구조에 변화가 생기면 그 생명체가 몸담고 있는 환경의 구조 변화로 이어지고, 이러한 구조 변화는 또다시 생명체들의 구조 변화를 촉발한다. 그렇게 두 개체의 상호작용이 반복적으로 이뤄지면서 서로의 상태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으로 변화해간다. 이런 구조 변화의 연속을 구조 변화의 표류라고 한다. “생물이 환경 안에서 겪는 개체 발생적 구조 변화는 언제나 환경의 표류와 어울리는 구조적 표류일 것이다”(120-121쪽). 구조적 표류의 연속은 생명체의 진화를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생물이 삶을 시작해서 죽기까지 자기가 속한 부류의 정체 및 자신과 환경의 구조 접속을 보존한 채 겪는 과정이다. 중략. 개체 발생은 생물과 환경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역사 속에서 상호작용이 유발하는 생물의 구조 변화를 통해 선택된 경로를 밟는다”(147쪽). 생명성은 결국 환경과 주고받는 구조 접속 과정에서 발원된다. 구조 접속의 유형과 성격은 생명체가 놓여 있는 환경과의 관계가 결정한다. 이런 관점에서 구조 접속과 구조적 표류는 생명체의 진화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 모르게 만드는 예측불허의 변수다. 산꼭대기에서 양동이로 물을 쏟아붓는다고 거정 해보자. 쏟아진 물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어떤 자국을 내며 어떤 움직임을 보여줄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물이 흘러가다 만나는 장애물, 부는 바람과 물이 흐르는 땅의 굴곡 상태에 따라 예측불허의 방향으로 물은 흘러가면서 흔적을 남길 것이다. 이런 상상이 바로 움베르또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앎의 나무》를 통해 다윈의 자연선택이나 리처드 도킨스의 유전자 결정론을 부정하고 싶은 주장하고 싶은 내용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진화는 자연 표류(natural drift)”라는 주장이다. “자연 표류란 오직 그때그때 갈 수 있는 길만을 따라간다. 자연 표류 속에서 유기체들의 모습은 때때로 큰 변화 없이 이어지는가 하면 때때로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유기체와 환경이 그때그때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렸다, 유기체와 환경은 따로따로 변한다. 곧 유기체는 생식 단계마다 변화하고 환경은 또 다른 역동성에 따라 변화한다”(128-129쪽). 유기체가 지금 이 순간 환경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유기체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표류를 지속할지를 결정한다. 유기체가 결정하는 방향이나 의도대로 표류 통로를 결정할 수 없다. 유기체의 표류 방향은 유기체와 환경이 시시각각 맺고 있는 관계의 양상에 따라 결정된다.   

    

“진화란 자기 생성과 적응이 보존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자연 표류다. 중략. 진화란 오히려 방랑하는 예술가와 비슷하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실 한 가닥, 깡통 한 개, 나무 한 토막을 주어 그것들의 구조와 주위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그것들을 합친다. 그가 그렇게 합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저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서로 어울리게 연결해 놓은 부분들이나 형태들로부터 온갖 복잡한 형태들이 생겨난다. 여기에는 어떤 계획도 없으며 그저 자연스럽게 표류하는 가운데 생겨났을 뿐이다”(135쪽). 그러므로 마투라나와 바렐라에게 환경이란 고정된 상태에서 생명체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체도 고정된 환경에서 정해진 유전자 구조에 따라 사전에 결정된 통로를 통과하는 정체된 개체가 아니다.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에 의해 끊임없이 환경이 역동적으로 변화되듯, 생명체도 환경변화에 맞물려 저마다 다른 변화를 거듭한다. 이런 상호작용을 통한 변화로 생명체는 자기 존재의 조건을 창조하고 다음 구조 변화의 기반을 만들어 간다. 생명체와 환경이 주고받으며 변화를 일으키는 역동적 관계야말로, 다윈의 자연선택설이나 도킨스의 유전자 결정론으로 막혀있던 생명체의 정체성이 새롭게 모색될 수 있는 가능성의 관문으로 열리면서 생명체의 표류하는 예술성이 새롭게 부각되는 것이다. 생명체는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가지 않고 지금 여기서 새로운 자기 삶의 조건을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역동적인 주체다.      



존재와 행동과 앎은 나눠지지 않는다     


마투라나와 바렐라 같은 인지 생물학자들이 바라본 앎의 세계와 본질은 기존의 심리학적 앎이나 철학적 인식과 어떤 점에서 다를까? 저자들은 단순히 외부 세계를 지각하는 인식 주체의 객관적인 인식 현상만을 탐구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은 인식 현상의 본질을 해명하기 위해서 생명의 기원으로 파고들어간다. 그들은 가장 원시 생명체에서 고등 동물까지 최초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세포 활동을 관찰하면서 인식이란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표상이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생명체가 또 다른 생명체나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일어나는 구조 접속을 통한 끊임없는 자기 생성 활동 과정으로 정의한다. 인식 능력이 없다고 가정하는 단세포 생물에서 출발해 수십억조 개의 세포들이 결합한 '메타 세포체'로 변화한 생명체들, 특히  가장 고등의 신경계 세포를 지닌 사람까지 추적 조사하면서 이들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사물을 인식하고 행동하면서 대물림을 통해 자신들의 행동방식으로 문화적으로 전수해오고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파고들어가며 질문을 던진다. “학습이란 유기체의 작업방식과 환경의 작업방식이 줄곧 어울려 있는 구조 접속의 표현”(195쪽)이다. 생명체는 수동적으로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 한 다음 어떤 행동을 보여줄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인식한 다음 행동하지 않고 그들의 인식 행위 자체가 이미 환경이나 다른 생명체와 부단히 상호작용하면서 효과적으로 행동하는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생명체의 앎은 그 생명체가 살아가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유기체의 인식활동이란 유기체가 살아가는 구조 접속의 영역 안에서 감각 작용적 상관관계로서 일어나는 활동”(188쪽)이다.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체가 인식하는 세계는 수백만 개의 운동 뉴런과 수천억 개의 중간 뉴런, 수천만 개의 감각세포로 구성된 신경계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낸 세계 일 뿐이다. 신경계로 인식할 수 있는 범위는 생명체에 따라 다르고 인식방식도 전혀 다르다. 개의 신경계가 사물을 인식하는 범위와 개미의 신경계가 사물을 인식하는 범위는 물론 저마다의 신경계로 사물을 인식한 결과도 차이가 난다. 어떤 신경계로 바라본 인식 결과가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생명체들은 저마다의 신경세포로 외부 사물을 감각적으로 인식하여 저마다의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생명체가 인식할 수 없는 범위는 수많은 세포로 구성된 신경계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그 능력 범위일 뿐이다. “신경계란 생물의 계통 발생적 역사를 거쳐 유기체 안에 확립된 특별한 세포 집단이며 감각 부위와 운동 부위의 여러 지점들을 접속하는 구실을 한다”(185쪽).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계통발생적 역사를 갖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감각 부위와 운동 부위를 연결하는 지점을 개발해왔다. 아메바의 신경계는 자기 고유의 먹이를 인식해서 잡는 행동방식을 개발해왔고, 말미잘은 말미잘 나름의 신경계를 감각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해서 먹이를 잡는 방식을 개발해왔다. 물론 가장 고등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사람의 특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신경계를 개발, 외부의 사물을 인식해서 때로는 위험에 대처하고 사전에 준비하는 행동방식을 개발해온 것이다.      



여기서 “신경계(그리고 유기체)는 어느 누가 설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개체들이 자기 상태들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겪어온 계통 발생적 표류의 결과다. 따라서 신경계란 자신의 내부 관계들을 통해 정의되는 개체로 보아야 한다”(191쪽). 모든 생명체는 신경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감각 작용만큼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신경계가 인식할 수 없는 불가지(不可知)의 세계는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신경계가 계통 발생적 표류를 거듭해오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개발해온 것이다. 특정 생명체가 지금 여기서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하며 행동하면서 존재 자체의 특이성을 신장시키는 가능성은 신경계가 외부 세계와 구조 변화를 겪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마투라나와 바렐라에 따르면 단세포 생물이든 고등동물이든 신경계가 외부 사물을 지각해서 행동하는 방식은 머리로 생각해서 어떤 행동을 하겠다고 결정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오랜 구조적 표류를 겪으면서 몸에 배고 태어나서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몸에 밴 행동방식, 즉 행동 지식 때문이라고 한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생물로서의 구조 접속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일) 바로 그 생물의 존재 영역에서 일어나는 인식활동이다. 경구로 나타내 지면, 삶이 곧 앎이다. 다시 말해 생명활동이란 생물로서 존재하는 데 효과적인 행위이다(197쪽). 말미잘이 파도치는 물결 속에서도 먹이를 잡는 행동은 외부 사물을 인식한 다음 잡겠다고 생각해서 일어난 결과가 아니다. 아메바가 먹이를 보고 잡아먹겠다고 결심해서 행동에 옮기는 것은 아니다. 생명활동이란 생물이 존재하기 위해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생긴 효과적인 행동이다. 앎이란 곧 효과 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34쪽).     


“인식이란 효과적인 행위다”(37쪽). 즉 한 생물이 특정 환경에서 자신의 세계를 산출함으로써 그 환경에서 생존을 지속케 해주는 행위로 인식을 이해하는 것이다(38쪽).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나 환경과 부단한 구조 접속을 통해 자기를 생성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통해 생명체마다 독특한 신경세포와 신경계를 발달시켜 왔다. 그 신경계를 바탕으로 각 생명체마다 독특한 자신들의 감각 기관이 만들어낸 환경을 산출한다. 생명체마다 자신들의 감각기관이 인식하는 세계는 저마다 다르다. 이런 점에서 콥 폰 웩스쿨(Jakob von Uexküll)과 토마스 A. 세벡 (Thomas A. Sebeok)가 구분한 ‘벨트(welt)’와  '움벨트(Umwelt)'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벨트가 객관적인 세계라고 본다면 움벨트 용어는 주로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는 주관적  세계다. 움벨트는 각각의 동물들이 지니고 있는 신경계로 세상을 인식하고 느끼는 감각 세계다. 사람의 움벨트는 개미나 모기의 움벨트와 다르다.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누구의 세계 인식이 더 적절하거나 맞다고는 할 수 없다. 주디스 콜과 허버트 콜은 《떡갈나무 바라보기》에서 움벨트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동물들이 바라보는 세계의 다름을 해명하고 있다.      



움벨트가 시사하는 바는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감각기관이 달라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시사점은 각기 다른 감각기관으로 바라본 세계는 또 다른 감각기관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한 생명체의 신경계가 아직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는 우주 자연 삼라만상에 아직도 널려 있다. 결국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여전히 인식하는 세계보다 더 있다는 가능성 앞에 인식의 한계를 자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인식하는 세계가 절대적인 세계이고 다른 생명체가 인식하는 세계는 그렇지 않다는 오만도 버려야 한다. 박쥐가 초음파로 상대를 인식하지만 사람은 그런 초음파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개는 냄새로 멀리 떨어진 또 다른 생명체를 인식할 수 있는 감각기관을 갖고 있지만 사람은 그런 냄새 감각 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감각 체계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행동하며 존재가치를 드높여 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생명체가 보여주는 인지 활동의 본질이며 주어진 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행동방식이다.  

   


앎의 앎과 사랑으로 매개된 앎이 세상을 바꾼다     


어제와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방법은 나 혼자 불가능하다.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자기 생성도 결국 나와 다른 자기와 구조 접속을 통해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그렇게 구조 접속을 통해 서로의 구조 변화를 겪으며 함께 구축한 세계에서 우리라는 공동체가 태어난다. “우리가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세계를 산출하는 바로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되는 것이다”(279쪽).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가운데 하나의 공동체로 태어난다. 공동체 안의 우리는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극복하고 피워낸 합작품이다. 생명체는 이기적 생존을 목표로 살아가면서도 이타적인 사랑을 베풀며 함께 공생하는 삶을 추구하기도 한다. “타인과 공존하고 싶으면 그들에게 확실한 것 또한 (그것이 아무리 하찮게 보인다 해도) 우리 것만큼 정당하고 타당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확실성이 그렇듯이 타인의 확실성 또한 한 존재 영역에서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리 매력 없게 보인다 해도) 그들이 보존한 구조 접속의 표현이다. 따라서 공존하려면 더 넓은 관점을 가져야만 한다. 곧 양쪽이 만나 공동의 한 세계를 내놓을 존재 영역을 찾아야만 한다”(276쪽). 나의 영역만 주장하는 독재적 입장표명이 아니라 내 것만큼 다른 사람의 존재가치도 소중함을 인정하고 그 존재가 거주할 공간을 비워두는 배려가 뒤따를 때 공존의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지금 당장 여기서의 삶을 넘어 여기보다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상정하고 거기에 이르는 여정을 함께 할 때 공동체는 지속 가능해진다.  

     


“우리의 세계가 타인과 함께 산출한 세계임을 알게 되면, 타인과 다투더라도 그들과 계속 공존하고자 하는 한 우리에게 확실한 것을(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고집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275쪽). 타인과 함께 산출한 세계는 타인과 함께 할 때 지속 가능하다. 공존 욕구가 존재하는 한 존재는 다른 존재의 욕구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의 욕구만이 생존 욕구임을 고집할 때 공동체는 무너진다. “다툼이란 언제나 상호 부정이다. 다툼은 양쪽이 서로 자기 것을 확신하는 한, 다툼이 생긴 영역에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다툼을 극복하려면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영역으로 옮아가야만 한다. 이 앎에 대한 앎이야말로 사람다움에 바탕을 둔 윤리의 사회적 명령(imperative)이다”(276쪽).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지 않고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 자리라고 우기는 앎은 그냥 ‘앎’이다. 다툼을 극복하고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은 ‘앎에 대한 앎’이다. 앎에 대한 앎을 공유하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공동체가 윤리적 공동체인 셈이다. 앎은 나 혼자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앎이다. 앎에 대한 앎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윤리적 결단이요 도덕적 판단력이다.     


“누구나 다 아는 이 세계는 ‘오직 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타인과 함께 산출한 ‘어느 한 세계’ 임을 깨닫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중략. 앎의 앎은 우리를 얽어맨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면 더 이상 우리 자신이나 타인 앞에서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275쪽). 앎의 앎은 앎을 알기 전의 생각과 행동으로 살아가면 위험하다는 경각심을 전해준다. 앎은 곧 살아감이고 살아감은 무수한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내가 어떤 판단과 행동을 해야 되는지 알았기에 그 앎은 나의 행동으로 연결되고 그 행동의 연속은 내 삶을 구성한다. 앎을 알면 알기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앎의 앎은 나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앎이고 존재가치는 더불어 살아갈 때 비로소 빛이 난다는 각성이다. 앎의 앎은 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파고드는 앎이다. 앎을 알면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숙고한다.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대안이 무엇인지를 선택하기 전에 전후좌우 맥락을 다양한 선택지에 위에 올려놓고 판단한 다음 옳다고 믿는 신념대로 행동한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의 핵심은 바로 앎을 잘 못 아는 데, 앎을 모르는 데 있다.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앎이 아니라 앎의 앎이다. 폭탄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앎이 아니라, 우리가 폭탄으로 무엇을 하려 하느냐가 그것을 쓰느냐 마느냐를 결정한다. 우리는 이런 깨달음을 무시하거나 못 보게 억누르면서, 우리의 일상 행위에 대한 책임을 떠맡지 않으려 한다”(279쪽). 앎의 앎을 무시할 때 나는 당분간 편하게 살 수 있을지 몰라도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은 나의 행동 때문에 피해를 보거나 아픔을 경험할 수 있다.     



나의 앎으로 이루어진 행동이 타인에게 불편을 줄 수 있다는 앎에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매개되어 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앎의 앎도 필요가 없어진다. 오직 사랑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앎이라야 개인을 넘어 관계, 관계를 기반으로 공동체를 완성한다. “사랑은 뿌리 깊은 생물학적 역동성의 하나다. 사랑은 유기체의 한 역동적인 구조양식을 규정하는 감정으로, 사회적 삶의 작업적 응집성을 낳는 상호작용들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단계다”(278쪽). 사랑이 개입되어야 유기체도 역동적인 구조 접속을 통해 사회적 삶을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의 멤버십이 생긴다. 사랑이 관여되어야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를 구축하려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가진 세계란 오직 타인과 함께 산출하는 세계뿐이다. 그리고 오직 사랑의 힘으로만 우리는 이 세계를 산출할 수 있다”(278-279쪽).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야 타자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가 생기고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측은지심이 발동된다. “사람들 사이의 생물학적 일치 때문에 우리는 타인을 볼 수 있고, 또 우리 곁에 타인이 있을 자리를 비워둔다. 이런 행위를 가리켜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좀 약하게 표현하면 일상생활에서 내 곁에 남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77쪽). 내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을 내 ‘곁’으로 받아들이는 게 사랑이라고 한다. 물리적으로 거리가 떨어졌던 ‘옆’이 심리적으로 가까이 다가와야 ‘곁이 탄생한다. 내 곁에 나와 다른 남이 존재할 때 나 역시 어제와 다른 나로 탄생할 수 있다.      



“사랑 없이, 타인을 받아들여 우리 곁에서 살도록 놓아두는 일 없이, 사회적 과정과 사회화, 나아가 사람다움이란 있을 수 없다”(277쪽). 사람다움은 사람과 사람이 사랑으로 만날 때 탄생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순간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 다른 생각의 구조를 갖고 있는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이전과 다른 구조 접속이 일어난다. 이전과 다른 구조 접속은 나의 생각이든 행동이든 이전과 다른 구조적 변화를 유발한다. 구조 변화는 고통이 동반되는 사건이다. 그 사건을 견뎌낼 수 있는 원동력도 바로 나를 사랑으로 받아주는 사람이 곁에서 보살펴주기 때문이다. 평소에 유심히 살펴봐야 사랑으로 보살펴줄 수 있다. 살핌 없이 보살핌도 없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사랑 없이, 남을 받아들임 없이 사회적 과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77쪽). 오직 사랑으로 타자를 받아들일 때 나 역시 이전과 다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다. 받아들임의 과정을 구조 접속에 비추어보면 이전과 다른 나로 탄생하는 역사적 터닝포인트다. 다른 사람과의 구조 접속 없이 나는 거듭날 수 없다. 그것도 사랑으로 매개된 구조 접속이라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과 접목할 수 있다. “타인과 공존하면서 만들어내는 이 세계는 우리가 사람다운 것이라 부르는 것을 산출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적 행위는 윤리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세계를 산출하는 데 이바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의 이 연결이야말로 궁극적으로 타인의 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성찰인 모든 윤리의 바탕을 이룬다”(276쪽).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윤리적인 삶인지를 끊임없이 성찰할 때 저자들이 주장하는 자기 생성과 구조 접속을 통한 재탄생도 타인과 공존하는 사람으로 연결된다. 사랑과 윤리적 판단은 이런 점에서 생명체가 생태계 속에서 공존하는 삶을 살아가는 전제조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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