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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으면 영원히 쓸 수 없고
쓰기 시작하면 써진다

한근태 교수의 《당신이 누구인지 책으로 증명하라》를 읽고

쓰지 않으면 영원히 쓸 수 없고 쓰기 시작하면 써진다

한근태 교수의 당신이 누구인지 책으로 증명하라를 읽고     



세상에는 자기 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리처드 세넷이 《뉴캐피털리즘》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일 자체를 위해 어떤 일을 잘 해는” 장인에 가깝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질문이 많은 사람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더 잘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밤잠을 설쳐가면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부단히 궁리에 궁리를 거급하며 자기 일을 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제가 아는 한근태 교수님도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하는 한 작가이자 기업을 대상으로 강연을 즐기시는 명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30권 정도의 책을 쓰면서 정말 자기 일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이 넘치는 분이시다. 자신이 하는 세 가지 일을 아예 운동, 책 읽기, 그리고 책 쓰기고 규정하고 하루 일과를 지극히 단순화시켜 운동하고 책 읽고 책 쓰고 그리고 그 결과로 강연을 한다. 이번에 나온 《당신이 누구인지 책으로 증명하라》도 바로 이런 평상시의 책 읽기와 책 쓰기로 다져진 누적된 생각의 산물이다. 한 교수님은 몇 번 사석에서도 뵌 적이 있다. 언제나 대화 도중에 메모를 하고 궁금하면 질문하고 아이디어를 얻어 끊임없이 메모한다. 그런 기록의 축적이 책 쓰기의 기적을 일궈내는 원동력이다. 일 년에 여기저기서 추천받은 책과 구입한 책을 합쳐 약 500여 권을 훑어보고 그중에 200여 권의 책을 읽고 정리하며 책을 쓰는 다독 가이자 다작 가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글쓰기의 이로움을 넘어 엄청난 혜택을 이런 문장으로 주장한다. “글을 쓰면 팔자가 바뀐다.” “글을 쓰면 인생이 다듬어진다.” “글을 쓰면 전문가가 된다.” “글을 쓰면 늙지 않고 예뻐진다.” “글을 쓰면 남들과 차별화된다.” “글을 쓰면 성장하고 생존한다.” 이런 주장은 공허한 관념적 슬로건이 아니라 저자 자신이 직접 체험하면서 깨달은 교훈이자 각성이며 글 쓰는 작가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글을 쓰면 팔자가가 바뀌고 인생이 다듬어지고 전문가 된다는데 안 쓸 사람이 있을까. 글을 쓰면 늙지도 않고 예뻐지고, 남과 차별화되며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는 유혹 앞에 글을 안 쓰고 배길 사람이 있을까? 이만큼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책을 읽고 글이나 책을 쓰면서 전공을 바꿔 지금까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근원적인 힘과 에너지에 대해 책 쓰고 싶은 사람을 유혹하는 책이다. 구체적으로 글을 쓰면 모호했던 생각이 명료해지고 새로운 차원으로 생각이 정리되며 새로워진다고 한다. 글을 쓰면 핵심을 요약하는 능력이 생기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며, 무엇보다도 자기 수련과 공부가 된다고 한다. 글을 쓰고 책으로 엮어내는 책 쓰기는 몸과 마음과 생각을 건강하고 참신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전문가로 거듭나게 만드는 최상의 공부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래도 책을 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글쓰기를 시작하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시작하라”(189쪽)와 “지금 당장 써라”(194쪽)다. 쓰기 시작하는데 별 다른 준비가 필요하지 않다. 물론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도 필요하고 글 쓰는 도구도 필요하다. 글감도 준비해야 되고 무슨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지도 사전에 생각해야 한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남에게 창피당하지 않을 정도는 돼야 한다. 혹시나 미천한 내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내 글을 누군가가 볼까 봐 두렵기도 하다. 글을 쓰려는 나를 붙잡고 계속 발목을 잡는다. 글쓰기를 목전에 두고 시작하려는 내 마음에 찬물을 끼 얻는 수많은 방해꾼들이 즐비하다. 이런 방해꾼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한 나는 글쓰기를 쉽게 시작할 수 없다. 복잡한 생각도 여기에 한몫을 한다. 쉽게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생각의 복잡함이 한 글자도 못쓰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단순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일단 내가 생각하는 생각이 무슨 생각인지를 생각나는 대로 글로 옮겨보는 것이다. 생각이 밖으로 나와 표현되는 순간 내 생각의 실체나 본질이 밝혀진다. “더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은 동시에 더 훌륭하게 사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86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나오는 말이다. 글을 쓰는 일은 부표처럼 떠돌아다니던 생각을 붙잡아 일정한 논리적 구조와 체계로 정리하는 일이다. “글쓰기는 생각하기이다, 생각하기는 곧 글쓰기다”(100쪽). 남다른 생각을 갖고 남다르게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는 힘은 내 생각을 시간이 날 때마다 글로 적어보고 구조화시켜 단순화시켜 보는 연습에서 나온다.      

나는 한근태 교수님의 책을 읽고 「글쓰기를 가로막는 7가지 방해공작꾼」의 정체를 생각해보았다. 글쓰기를 가로막는 방해꾼을 먼저 살펴보고 이들을 물리치고 글쓰기를 시작하는 방법을 알아본다. 여기서 제시하는 글쓰기의 걸림돌이나 장애요인은 글쓰기에 대한 통념이나 고정관념이다. 통념을 통렬하게 깨부수고 고착화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글을 쓰기 시작하는지를 살펴보자.     

 


영감이 오면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영감이 달려온다     


생각이 있어야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생각이 난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되고 새로워진다”(90쪽). 생각이 없어서 글이 써지지 않는 게 아니라 생각이 너무 많거나 생각이 너무 정리되지 않아서 글이 안 써지는 경우가 더 많다. 생각을 정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생각을 겉으로 끄집어내서 글이나 그림, 또는 어떤 관계도로 표현해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너무 오랫동안 생각만 거듭하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생각을 거듭한다. 그 사이 글은 하나도 못 쓰고 백지만 들여다본다. 이제 머릿속도 백지처럼 바뀐다. 그러니 영감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일단 생각나는 대로 누가 보든 안 보든 내 생각을 쓴다. 우선 한 줄을 쓰면 그 한 줄이 다음 문장에 대한 아이디어를 데리고 온다. 쓰기 시작하면 쓴 글이 다음 글에 대한 생각을 연속해서 불러온다. “생각하니까 글을 쓰는 게 아니고 글을 쓰니까 생각하게 된다는 전도가 일어났다”(236쪽). 강민혁의 《자기 배려의 인문학》에 나오는 말이다. 쓰지 않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글을 쓸 확률도 그만큼 낮아진다. 완벽한 글을 기다리는 동안 완벽하게 글을 쓰지 못한다. 복잡한 생각은 글로 옮겨야 단순해지고 불분명한 생각도 글로 번역해야 명료해진다. 단순하고 명료해진 생각은 다음 생각을 불러다 글로 옮겨진다. 그렇게 꾸역꾸역 글은 문장을 갖추고 한 패러그래프에서 한 페이지를 넘기며 글의 행렬은 계속 이어진다. 뭔가를 확실히 기억해야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과거의 경험이 연상된다. 꽉 막혔던 생각창고에 한 줄기 빛이 들어가면서 관련된 추억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누에고치가 실을 뿜듯 글발이 이어지는 놀라운 체험은 해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다. 우선 펜을 들고 낙서를 시작하거나 키보드로 두드리기 시작하라. 두드림이 닫힌 글감의 문을 활짝 열어젖힐 것이다.   

   


책을 읽은 후에 쓰는 게 아니라 읽으면서 쓰고 쓰면서 읽는다     


남들보다 책을 빨리 쓰는 비결 중의 하나는 지금 쓰고 있는 책의 주제 분야 관련 책을 읽다가 영감이 떠오르면 서슴지 않고 바로 글을 쓰는 것이다. 독후감(讀後感)이 아니라 독중감(讀中感)이라고  할까. 글감은 영감과 함께 다가오지만 영감은 순식간에 도망가버린다. 영감은 어떤 경우 영원히 깜깜무소식일 경우가 많다. 영감은 아무 때나 다가오기 때문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두어야 한다. 책을 읽는 도중에도 연상되는 아이디어나 다른 글감은 그 순간 바로 메모해두었다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나 책에 우선 기록해둔다. 그 글이 어디에 들어갈 수 있을지, 어떤 내용으로 편집해서 다른 글과 합칠지는 나중에 고민해도 된다. 그렇게 읽다가 쓰고 쓰다가 별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또 읽는다. 읽기가 끝난 다음 쓰는 게 아니고 읽으면서 갑자기 다가오는 아이디어는 행간에 메모를 해두거나 별도의 메모 노트에 기록해둔다. 단편적인 메모가 모이면 메모를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시켜 한 편의 글을 완성할지는 그때 가면 떠오른다. 모든 아이디어는 기반이나 텃밭이 있어야 자라기 시작한다. 아이디어는 익숙한 두 가지 이상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엮는 과정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쓰고 쓰면서 읽는, 즉 읽기와 쓰기의 동시 병행이 읽기와 쓰기를 서로 도와주는 쌍두마차다. 읽어야 쓸 수 있고 써야 읽을 게 생긴다. “책 읽기와 글쓰기는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다”(135쪽). 읽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안 읽은 만 못하고, 쓰기만 하고 읽지 않으면 편협한 사고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글의 뼈대를 잡고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구조를 잡아간다     


책은 책 제목과 목차, 그리고 본문으로 구성된다. 순서대로 따지면 책의 제목이 가장 먼저 눈에 띄고, 그다음 책장을 넘기면 목차가 나오며, 목차 순서대로 본문 내용일 펼쳐진다. 그럼 책을 쓰는 순서도 제목을 결정한 다음 목차를 정하고 목차 순서대로 책 내용을 기술하면 되는가? 대답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이다. 왜냐하면 책을 쓰기 전에 어렴풋하게나마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될지는 느낌이 오지만 아직 무엇에 관해 쓸 것인지를 한 마디로 정확히 표현하기는 시기상조인 경우도 많다. 책 제목은 어떻게 결정해야 될지 모르지만 책을 통해 무슨 메시지를 담고 싶은지는 대강의 구상이 서 있을 것이다. 책 제목이 분명하지 않다고 해서 목차도 분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목차’ 역시 ‘목’이 차오를 정도로 쓰고 싶은 하위 주제가 책을 쓰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더 많다. 초기에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목차에 해당하는 하위 주제를 정한 다음 정해준 목차별로 우선 글을 쓰다 보면 나중에 더 좋은 생각도 떠오르른다. 목차의 하위 주제 간 순서나 전체 윤곽에 대한 구조도 글을 써 내려가면서 부각된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후 쓰는 것 같지만 사실 쓰는 것이 먼저이고 생각정리는 그다음이다”(213쪽). 맨땅에 헤딩하면 아프다. 뭔가 조금이라도 써 놓고 뼈대나 얼개를 만든 다음 거기에 살을 붙여 나가다 보면 더 멋진 책의 구조가 드러날 것이다. 구조는 구조화시킬 재료가 있어야 시작된다. 직관력이 뛰어난 작가는 처음부터 무슨 글을 어떻게 쓸지 논리 전개 구조나 프레임을 갖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초보 작가는 글을 쓰기 전에 그런 구도를 갖고 있지 않다. 이럴 때는 생각나는 것부터 우선 쓰기 시작하고 쓴 것을 중간중간에 구조나 관계로 만들어보는 연습을 해보는 게 도움이 된다. 구조(構造)가 분명하지 않다고 쓰기를 미룰수록 글쓰기는 구조(救助) 대상이 되어 영원히 쓰지 못할 수도 있다.  

   


알아서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선공후기(先工後期)가 아니라 선기후공(先期後工)이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어도 내 생각을 글로 쓰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못한다. 비록 불완전한 앎이라고 할지라도 써봐야 어디가 부실한 지를 깨달을 수 있다. 책을 쓰려면 해당 분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모르고는 쓸 수 없다. 알아야 쓸 수 있지만 얼마나 알아야 쓸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가지 현명한 답은 어느 정도(?) 해당 분야에 대한 감이 잡히면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쓰면 모르는 개 뭔지 알게 된다. 모르는 게 뭔지 알면 어떤 분야를 공부해야 할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무지를 깨닫는 순간, 무지를 극복하기 위한 공부가 시작된다. 그 공부는 바로 글쓰기로 연결된다. 한 마디로 알아야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알게 된다. 알던 것도 쓰기 시작하면 더 정확하게 정리된다. 복잡했던 생각도 단순해지고 명했던 논리도 명쾌해진다. 한근태 교수님에 따르면 글을 쓰면 인생이 다듬어지고 글을 쓰면 남들과 차별화되는 최고의 공부가 된다고 한다. 책을 쓰고 나면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공부가 된다. 저자는 아예 책 쓰기는 전문가가 되는 비결이고 해당 분야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강력한 전략이라고 말한다. 공부하는 가장 소중한 방법이 바로 책 쓰기라는 것이다. 몰라서 책을 못 쓰는 게 아니라 안 써서 모르는 것이다. 알아서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알게 된다. 실제로 책 한 권을 탈고하고 나면 알았던 것도 더 정확하게 알게 되고 몰랐던 것도 새롭게 깨닫게 된다.    

 


공감한 것만을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다른 것도 공감하게 된다     


글감은 주로 작가가 공감한 것을 쓰는 경우가 많다. 공감할 수 없는 것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내 신념을 담아낼 수 없다. “자신이 경험한 상처에만 과몰입하는 형태를 공감”(183쪽)이라고 하거나 동병상련은 동병에만 상련하는 아닙니다(184쪽)라는 《나를 견디는 시간》을 쓴 이윤주 작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공감에 대해 잘 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녀는 공감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어머 저건 딱 내 얘기야!’라는 인지하는 데는 어떤 품도 들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어떤 품도 들지 않는 일은 자신을 조금도 ‘낫게’ 하지 않습니다”(184쪽). 내가 공감하는 이야기만 쓰거나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책만 읽으면 우리는 이전보다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분야를 경험하거나 나와 다른 아픔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세계로 파고들어가기 위해 나는 그런 사람의 세계로 뛰어들거나 가까운 곳에서나마 관찰하며 상상하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반복해야 한다. 그것이 글쓰기를 통해 공감력을 기르는 소중한 과정이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어떤 세계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그 세계의 모습을 해체하여 자기 시각으로 재조립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이 행한 일정한 선택을 이해하려면, 그가 부닥쳤거나 거절당했던 다른 선택들의 결핍 상태를 상상 속에서 직시해보아야 한다. 잘 먹는 사람들은 못 먹는 사람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서툴게나마 남의 경험을 파악할 수 있으려면 그 세계를 분해해서 재조립해봐야만 하는 것이다”(97쪽). 《제7의 인간》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경험한 안목과 시야로 타자의 경험을 재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가 경험했을법한 결핍 상태를 상상 속에서 재현하려는 노력을 글로 쓰는 과정이 공감력을 높이는 또 다른 노력이다.     



쓰지 않으면 영원히 못 쓰고 쓰면 쓸 수 있다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글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쓰지 않는 이유는 저마다 그 이유가 제각각이다. 글을 왜 쓰는지 그 이유나 필요성을 알 수 없다는 사람도 있다. 글을 쓸 자격이 없어서 못쓰겠다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누가 자신의 글을 볼까 봐 창피해서 못 쓰겠다고 한다. 글을 처음 쓰는 사람이 느끼는 글쓰기의 두려움이나 글쓰기를 시작하지 못하게 막는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는 처음부터 잘 쓰려는 완벽주의가 아닐까. 엘렌코트라는 시인이 ‘초보자에게 주는 조언’이라는 시는 “시작하라. 다시 또다시 시작하라”로 시작해서 “완벽주의자가 되지 말고 경험주의자가 되어라”는 구절로 종반부로 달려간다. 마찬가지로 글도 일단 완벽하게 준비는 되어 있지 않지만 시작하면 된다. 생각나는 아무 주제를 잡아서 그 주제에 대한 나의 생각이나 연상되는 다른 생각을 곁들여 첫 문장을 시작하면 글쓰기는 어렵지만 쉽게 시작할 수는 있다. 글은 많이 써본 경험에서 글 쓰는 노하우가 나온다. 써보지 않고 글쓰기 책을 보거나 글쓰기 강좌를 듣기만 하면 글쓰기는 영원히 어려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우선 내 생각을 내 방식대로 겉으로 표현하면서 연습 삼아 반복해서 글을 쓰다 보면 쓰임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미성숙된 생각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은 아직은 미숙하다. 적확한 개념과 문장력이 없어서 생각만큼 잘 안 써진다. 힘들여서 글을 썼지만 누가 보면 정말 내 생각의 미천함을 들킬 거 같아서 두렵기도 하다. 처음에는 쓰고 나서 다시 생각하며 더 나은 표현으로 다듬어가면서 고친다. 어느 정도 쓰는 양이 늘기 시작하면 쓰고 나서 고치는 것보다 쓰면서 고치면 더 잘 써진다. 무조건 쓰면 쓰임이 달라지고 쓰지 않으면 쓰러진다. 저자는 한 마디로 일갈한다. “쓰면 남는다”(242쪽). 저자는 그래서 손자를 위해 육아일기도 쓴다. 나중에 손자에게 물려줄 가장 큰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부모다 아닌 할아버지가 육아일기를 쓴다고 한다.     



살아온 삶으로 글을 쓰지만 쓴 대로 삶을 살아가며 또 쓴다     


글감이 있어야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다. 글감은 내가 살아가는 삶이다. 삶에는 내가 만난 사람이 담겨 있고 내가 읽은 책이 들어 있으며 내가 경험한 사건과 사고가 스며들어 있다. 글감은 내가 겪은 경험, 만난 사람, 읽은 책이다. 이걸 내가 쓴 책 제목으로 표현하면 체인지(體仁智)다. 글감은 지금까지 내가 마주친 색다른 경험과 내가 만나서 자극이나 영감을 받는 사람, 그리고 내가 읽으면서 깨달음과 교훈을 얻은 책에서 나온다. 이런 글감이 풍부한 사람은 자기 생각을 추가해서 글을 남보다 쉽게 쓸 수 있다. 글쓰기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철저하게 발상이 아니라 연상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발상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거나 경험한 추억의 파편을 일정한 논리체계로 엮어내는 연상이다. 이렇게 삶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연상을 통해 글을 쓰면 글 쓴 대로 살아간다. 이제는 삶이 글을 만들지 않고 글 쓴 대로 삶을 살아간다. “글은 삶에 앞선다...글은 삶을 모방하여 서술하지 않는다. 거꾸로 글이 삶을 만든다. 계약에 의해 행위가 만들어지듯 글이 삶을 구성한다. 글은 삶에 앞서 이루어진 운명의 계약이다. 삶이 글로 모방되는 것이 아니라 글이 삶으로 상연된다”(263쪽). 강민혁의 《자기 배려의 인문학》에 나오는 말이다. 쓴 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글과 삶과 앎은 어긋나기 시작하고 결국 글은 자기 위장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글감을 갖고 글을 썼지만 이제 쓴 글대로 실천하면서 살다 보면 그 삶이 다시 글감으로 선순환된다. 작가는 살아가는 대로 글을 쓰고 쓴 대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글은 그 사람이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149쪽). 작가에 글과 삶은 하나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이 나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보면 여행자를 다섯 등급으로 나누는 글이 나온다.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여행하면서 오히려 관찰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눈먼 자들이다.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실제로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에서 그 무엇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그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자신 속에 가지고 살며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다; 끝으로 최고의 능력을 가진 몇몇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관찰한 모든 것을 체험하고 동화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 그것을 여러 가지 행위와 작업 속에서 기필코 다시 되살려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150쪽).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가장 낮은 등급의 글 쓰는 사람은 글을 쓰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관찰당하는 사람이다. 주인으로서 자기 삶을 쓰지 않고 방관자 입장에서 남의 이야기를 옮겨 적는다. 두 번째 등급의 글 쓰는 사람은 이제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관찰하는 사람이다.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이제 비로소 자기 삶을 스토리로 만들어보려는 사람이다. 세 번째 등급의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이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본인이 체험한 것을 자신의 이야기로 써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네 번째 등급의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자신의 언어로 쓰면서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체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등급의 글 쓰는 사람은 관찰한 것을 모두 체험하면서 자기 것으로 정리하고 그대로 내 삶을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마지막에 와서야 비로소 삶을 무대로 글을 쓰고 쓴 대로 자기 삶을 다시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된다. 비로소 글과 삶과 앎은 삼위일체로 맞물려 돌아가는 작가가 된다.   

   


저자는 오늘도 내일도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을 글을 쓴다”(214쪽). 글 쓰는 것에 한없이 순수한 기쁨을 느끼고 지금도 젊었을 때처럼 굶주린 마음으로 고집스럽게 매일 책을 읽고 책을 쓴다. 하루키처럼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매일 운동을 밥먹듯이 하는 것처럼 저자 역시 《몸이 먼저다》라는 책도 내면서 운동을 지속적으로 한다. 글쓰기나 책 쓰기는 모두 건강한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끝까지 버티면서 할 수 없는 육체노동이다. 몸이 받쳐주지 않으면  세상에서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읽기와 쓰기를 할 수 없다. 자기 생각을 녹여내는 육체노동이 따라주지 않으면 쓰고 싶은 생각도 관념의 파편으로 전락한다. 저자에 따르면 “글쓰기는 창조적 배설이다. 남에게 쏟아내면 기피인물이 되지만 글에다 털어놓으면 저자가 될 확률이 높다”(106쪽). 글에 자기 생각을 털어놓고 그것을 다시 엮어서 한 권의 책으로 독자들이 머무를 집을 짓는다. 책 쓰기는 일종의 집 짓기다. 내가 어떤 책으로 이루어진 집 속에서 살아가는지에 따라 내 인생이 전혀 다르게 바뀐다. 그래서 오늘도 책으로 집을 짓기 위해 “쓰면 생존할 수 있고, 쓰지 않으면 잊힐 것이다”(84쪽)는 좌우명을 믿고 새벽에 글을 쓴다. 글을 쓰는 순간 “난 글쓰기 전의 내가 아니다”(71쪽). 그래서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내 인생은 글쓰기 전과 글 쓴 후로 나눌 수 있다”(70-71쪽)고. 나도 저자를 본받아 이 책을 읽고 영감이 사라지기 전에 이 글을 쓴다. 쓰고 났더니 쓰기 전의 내가 아니다. 또 다른 나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글을 쓰기 시작하고 내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강한 유혹의 미늘에 걸려버린다. 이제 남은 것을 한 가지밖에 없다. 내 삶을 책으로 엮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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