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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발적 마주침의 흔적이
글감으로 축적된다

내 삶의 역사는 다른 생명체와 마주치면서 맞장구친 얼룩과 무늬다

 우발적 마주침의 흔적이 글감으로 축적된다

내 삶의 역사는 다른 생명체와 마주치면서 맞장구친 얼룩과 무늬다

인간 유영만을 만든 10대 구조 접속의 역사적 사건 

     

성장 체험 1: 야성은 야생에서 자라는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이다

야성 없는 지성은 지루하고 지성 없는 야성은 야만이다

생태학적 구조 접속으로 건강한 몸을 만들다     


성장 체험 2: 상상력은 체험적 상상력이다

체험하지 않는 상상은 공상이 환상, 몽상이나 망상이다

이질적 구조 접속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다     


성장 체험 3: 책을 잘 못 읽으면 위험한 사람으로 바뀐다

방황을 해봐야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우발적 구조 접속으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마련하다 

    

성장 체험 4: 한 순간의 선택이 한 평생을 좌우한다

포기하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가 열린다

정신적 구조 접속이 새로운 정신을 잉태한다.     


성장 체험 5: 뇌력은 체력에서 나온다

목적의식을 갖고 공부하는 흔적을 축적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언어적 구조 접속이 문화적 이해로 가는 가교가 되었다 

    

성장 체험 6: 체험 없는 개념은 관념이다

생각만 해본 사람은 당해본 사람을 못 당한다

실천적 구조 접속이 체험적 지혜를 낳는다     


성장 체험 7: 적막해지면 글쓰기의 서막이 열린다

쓰지 않으면 쓰러지고 쓰면 쓰임이 달라진다

학문적 구조 접속이 앎의 지평을 확대시켜준다     


성장 체험 8: 최고의 가르침은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면 생각의 경계도 뛰어넘는다

융합적 구조 접속이 새로운 지식창조의 원동력이다 

    

성장 체험 9: 정상(頂上)에 오른 사람은 정상(正常)이 아니다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의 핑계다

한계와의 극한적 구조 접속은 경계를 뛰어넘은 원동력이다     


성장 체험 10: 독창성이란 들키지 않은 표절이다

모든 글은 체험과 현집의 합작품이다.

개념적 구조 접속이 색다른 사유를 잉태하는 원동력이다   

  

움베르또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앎의 나무》에 따르면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자신(auto)을 제작(poiesis)하는 오토포이에시스, 즉 자기 생성(autopoiesis)의 역동적 실체다.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세포에 비추어 오토포이에시스를 생물학적으로 다시 정의를 내리면 끊임없는 생성 활동을 하면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만들어내는 세포 활동 자체’를 뜻한다. 자기 생성 개념에 따르면 유전자가 결정한 대로 환경변화에 관계없이 결정된 유전자 체계의 운명대로 살아가는 생명체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환경이나 다른 생명체와의 부단한 상호작용을 통해 어제와 다른 나로 자기 변신을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생성한다.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생성할지는 지금 여기서 결정할 수 없다. “자기 생성 체계의 가장 독특한 점이란 말하자면 자기 옷을 스스로 여민다는 사실, 곧 자신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자신을 주위 환경과 다른 것으로 구성한다는 사실이다”(58쪽). 자기 생성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 에너지원이 바로 구조 접속(structural coupling)이다. 구조 접속이란 생명체가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생명 조직을 잃지 않고 부단히 자신의 신경계 구조를 변화시키는 활동이다. 구조 접속이 끊어지면 생명체의 자기 생성을 위한 에너지원이 차단된다는 의미다. 개체와 환경의 구조 접속이 끊어짐으로써 에너지원의 유입이 끊기면 생명체로써의 고유한 특성을 더 이상 생성할 수 없어지고 결국은 생명성을 상실한다는 의미다. 생명체의 구조 변화는 일생일대의 큰 사건일 수도 있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역사일 수도 있다. 생명체의 구조 접속을 통한 자기 생성은 생명체가 살아있는 한 계속되는 영원한 미완성이다.      



생명체가 구조 접속을 통해 자기를 생성하는 과정은 생명체가 어떤 환경에서 상호작용을 주고받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산꼭대기에서 양동이로 물을 쏟아붓는다고 가정해보자. 쏟아진 물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어떤 자국을 내며 어떤 움직임을 보여줄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물이 흘러가다 만나는 장애물, 부는 바람과 물이 흐르는 땅의 굴곡 상태에 따라 예측불허의 방향으로 물은 흘러가면서 흔적을 남길 것이다. 이런 상상이 바로 움베르또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앎의 나무》를 통해 “진화는 자연 표류(natural drift)”라고 주장한 것이다. “자연 표류란 오직 그때그때 갈 수 있는 길만을 따라간다. 자연 표류 속에서 유기체들의 모습은 때때로 큰 변화 없이 이어지는가 하면 때때로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유기체와 환경이 그때그때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렸다, 유기체와 환경은 따로따로 변한다. 곧 유기체는 생식 단계마다 변화하고 환경은 또 다른 역동성에 따라 변화한다”(128-129쪽). 유기체가 지금 이 순간 환경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유기체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표류를 지속할지를 결정한다. 유기체가 결정하는 방향이나 의도대로 표류 통로를 결정할 수 없다. 유기체의 표류 방향은 유기체와 환경이 시시각각 맺고 있는 관계의 양상에 따라 결정된다. “진화란 자기 생성과 적응이 보존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자연 표류다. 중략. 진화란 오히려 방랑하는 예술가와 비슷하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실 한 가닥, 깡통 한 개, 나무 한 토막을 주어 그것들의 구조와 주위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그것들을 합친다. 그가 그렇게 합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저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서로 어울리게 연결해 놓은 부분들이나 형태들로부터 온갖 복잡한 형태들이 생겨난다. 여기에는 어떤 계획도 없으며 그저 자연스럽게 표류하는 가운데 생겨났을 뿐이다”(135쪽).      


나 역시 충청북도 음성에서 태어나 자연 표류를 하면서 한양대학교 교수 자리까지 흘러왔다. 나는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까지 수렵과 어로, 채취와 농경생활을 하면서 신체적 구조 변화를 경험하며 자랐다. 그 후에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전기 용접공으로 실력을 연마하며 졸업하고 평택화력발전소에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낯선 환경과 색다른 근무 형태에 내 몸은 또 한 번 신체적 구조 변화를 경험하면서 적응하다 뇌리를 자극하는 한 권의 책을 만나면서 운명적 장난이 시작되었다.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입학하고 다시 그 공부를 그만두고 공부에 재미를 부텨 유학까지 다녀오는 과정에서 나의 뇌구조는 책상공부에 적합한 방식으로 변신을 거듭해왔다. 유학 후에 삼성에서 겪은 5년간의 직장생활은 관념적 공부가 낳은 실력의 무력함을 깨닫고 내 몸은 체험적 지혜를 축적하는 신체구조로 진화를 거듭해오다 이제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책 읽고 책을 쓰는데 적합한 정신 근육을 발달시키고 있다. 산 정상에서 물이 흐르면서 수많은 장애물과의 우발적 접촉을 통해 표류를 거듭하며 바다로 흘러가듯 내 인생도 순간순간 만났던 우발적 마주침이 다음 행보를 결정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매 순간마다 부딪히며 겪은 마주침의 역사적 기억과 흔적에서 나는 오늘도 글감을 찾아 헤맨다. 지적 광맥이 흐르는 기억창고에서 내일을 상상한다. “기억은 과거의 것만이 아니고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구성요소다. 기억의 폭이 좁을수록 미래를 폭넓고 독창적으로 구상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중략. 기억이 빈약하면 이전에 가본 곳 말고는 앞으로 어디로 갈지를 상상할 수 없다”(174-175쪽).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에 나오는 말이다. 과거는 지나간 옛날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다가오는 미래다. 과거가 부실하면 미래도 부실해진다. 이문재 시인의 ‘소금창고’에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라는 시구절이 나온다. 과거의 추억이 없으면 지금 나에게 다가올 이야기도 없다. 글쓰기는 오래된 과거에서 지금을 생각해보고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다.      



글쓰기는 지나온 삶을 반추해서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추구하는 일이자 살아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다. “우리가 여행과 사랑에 끌리는 것은 거기에 ‘알 수 없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22쪽). 이영남의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에 나오는 말이다.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오늘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탐험을 계속할 것이다. 배우는 사람은 호기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익숙한 세상에서도 왜 그런지를 부단히 질문한다. 당연한 세계를 부정하고 원래 그런 세계도 애초부터 없었다고 생각한다. 배움의 멈춤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알아야만 하는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호기심인 것이다. 앎에 대한 열정이 지식의 획득만을 보장할 뿐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되도록 아는 자의 일탈을 확실히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23쪽). 푸코의 《성의 역사 2》에 나오는 말이다. 호기심은 익숙한 세계로부터 벗어나 일탈하려는 근원적 욕망의 물줄기다. 그것이 막히면 물음표가 사라지고 마침표가 찍히기 시작한다. 



푸코는 자신이 축적한 학문적 기반 자체도 뒤흔들어 마음속의 지진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언제나 안에서 밖을 향해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알기 위한 발버둥이 지금의 삶을 만들어온 원동력이다. 앎은 그래서 삶과 구분되지 않는다. 왜 알기 위해 노력하는가?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면 방법을 알면 이전과 다르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생물로서의 구조 접속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일) 바로 그 생물의 존재 영역에서 일어나는 인식활동이다. 경구로 나타내면, 삶이 곧 앎이다. 다시 말해 생명활동이란 생물로서 존재하는 데 효과적인 행위이다”(197쪽). 말미잘이 파도치는 물결 속에서도 먹이를 잡는 행동은 외부 사물을 인식한 다음 잡겠다고 생각해서 일어난 결과가 아니다. 아메바가 먹이를 보고 잡아먹겠다고 결심해서 행동에 옮기는 것은 아니다. 생명활동이란 생물이 존재하기 위해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생긴 효과적인 행동이다. 앎이란 곧 효과 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34쪽)안간힘을 쓰면서 살아온 삶이 앎이며 그 앎만큼 이전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글은 앎과 삶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이유다. 한 사람의 역사가 글에 담길 때 글은 앎과 삶을 매개하는 가교가 된다. 내 삶을 관통했던 구조 접속의 역사적 사건 10가지를 반추하면서 각성하며 성장했던 체험을 드러내 본다.

      

성장 체험 1: 야성은 야생에서 자라는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이다

야성 없는 지성은 지루하고 지성 없는 야성은 야만이다

생태학적 구조 접속으로 건강한 몸을 만들다     


내가 어린 시절 주로 보낸 공간은 자연이다. 책상이 있는 교실보다 일상에서 놀이하는 시간이 오늘의 내가 생태학적 상상력의 소중함을 알게 만들어준 역사적 계기가 된 셈이다. 자연이라는 공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간이 가져다준 체험적 흔적이 내 몸에 각인되어 자연환경에 익숙한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처음에는 운동화 살 돈이 없어서 맨발로 축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발은 축구공과 구조 접속을 통해 추구하기 좋은 발 모양으로 변화되다 어쩌다 운 좋게 운동화를 신고 축구하면서 다시 축구공과 내 발은 다시 한번 구조 접속을 통해 진화를 거듭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가기 전에는 약 1년 정도 어머니와 농사를 지으면서 내 신체구조는 자연환경과의 구조 접속을 통해서 봄부터 가을까지 밭농사와 논농사를 짓는데 적합하게 진화되어왔다. 우선 한여름 뙤약볕은 견디기 어려워 새벽에 일어나 밭농사를 짓기 위해 생체리듬은 새벽형으로 바뀌었다. 더위를 피해 가며 낮에 밭일을 하기 위해서는 장기간 앉아서 호미질할 수 있는 자세를 익혀야 했다. 이른 봄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장기가 허리를 굽혀 일하는 신체구조로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겨울에는 먼 산속으로 들어가 땔감을 마련해서 지게에 싣고 집까지 오는 일을 자주 했는데, 그때 무거운 지게 짐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세상의 짐을 견딜 수 있는 튼실한 어깨가 만들어졌다. 이 시기는 책상에서 공부하며 뇌를 단련하는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때는 야생에서 몸을 움직여 체험하는 공부를 하면서 지성보다 야성을 단련하는 생태학적 구조 접속이 일어났던 시기다.     



성장 체험 2: 상상력은 체험적 상상력이다

체험하지 않는 상상은 공상이 환상몽상이나 망상이다

이질적 구조 접속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다     


학교생활이 주로 이론과목을 짧게 배우고 실습을 통해 기능을 연마하는 학교였다. 기능사 합격을 위한 전기용접 기능사 2급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데 일과다. 하루 종일 보내는 공간이 용접 실습실이었다. 겨울에는 용접의 열기로 따뜻하지만 한 여름은 3천 도가 넘은 열기로 흐르는 땀과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뜨거운 열기에도 멈추지 않고 이질적 철판을 용접봉으로 녹여 붙이는 집중력과 인내심, 그리고 신체적 고통을 견뎌내는 내성을 이때 배웠다. 어느 수준이 되면 전기용접 기능사 2급 자격증 시험을 보는데 나는 첫 번째 도전에서 보기 좋게 낙방이라는 좌절 체험을 맛보았다. 첫 기능사 시험 때 용접봉을 잘 못 녹여서 철판에 구멍이 뚫어진 것이다. 어차피 시험 합격은 물 건너간 것이다. 순간 엉뚱한 오기가 발동했다. 시험에 떨어진 거 철판에 구멍이나 크게 뚫어보자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철판만 생각하면 보름달이 연상된다. 철판과 보름달은 연결될 공통점이 없다. 그럼에도 철판을 생각하면 보름달이 연상되는 이유는 내가 직접 철판에 보름달을 뚫어본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바꾸기가 어려운 이유는 생각은 그 사람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용접 실패를 통해서 얻은 통찰력은 체험적 상상력이라야 창조로 연결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체험적 상상력일 때 공상이나 허상, 망상이나 몽상 환상이나 허상으로 흐르지 않고 구체적인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돌파력이나 불굴의 의지와 만나 새로운 창조를 일으킨다. 용접봉의 도움으로 녹아버린 이질적 철판은 서로의 쉿 물을 뜨겁게 구조 접속하면서 제3의 새로운 구조를 완성하듯 우리가 터득하는 많은 깨달음도 전혀 다른 두 가지 현상이 만나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출산하는 가운데 생긴다.   

  


성장 체험 3: 책을 잘 못 읽으면 위험한 사람으로 바뀐다

방황을 해봐야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우발적 구조 접속으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마련하다     


졸업만 취업이 보장되는 특성화공고 덕분에 졸업 후 나는 평택화력 발전소로 발령을 받아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발전소는 1년 365일 전기를 생산하는 곳이다. 하루도 쉬지 않고 발전기는 돌아가야 한다. 처음으로 시작하는 4조 3교대 근무는 생체리듬을 완전히 잃게 만들었다. 사람은 밤에는 자고 낮에는 일을 하는 신체구조로 진화해왔지만 밤에 출근했다가 낮에 퇴근하거나 오후 늦게 출근했다 밤 늦게 퇴근하는 근무형태는 내 신체구조로 하여금 새로은 변회를 요구했다. 무조건 3일 일하고 하루 쉬었다가 이전과 다른 근무 시간대에 다시 3일을 출근했다 하루 쉬는 근무형태에 처음부터 적용하기 쉬울리 만무였다. 처음 마주치는 발전소 환경과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색다른 근무형태로 인해 초반에는 긴장도 되고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몇 개월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생체리듬 변화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일찍부터 마신 과음은 내 위장구조변화를 일으켰고 근무가 끝나고 휴일을 맞이하는 날에는 술과 함께 방황하는 인생을 보내기 일쑤였다. 앞으로 알 수 없는 하루가 내일도 반복되고 설렘이 사라진 미래가 늘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가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적인 책과의 만남이 방탕과 방랑, 그리고 방황을 거듭하던 내 삶에 터닝 포인트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이라는 고시 체험생 수기집에 공고생의 사범시험 합격한 수기를 발견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그 길로 좋아하던 술을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1년간 끊고 모든 인간관계도 단순화시켰다. 대학에 가서 고시공부를 하겠다는 불온한 꿈의 씨앗이 내 몸 속으로 날아든 사건이었다. 책과의 우연한 구조접속이 나의 뇌리구조를 바꿔버렸다. 오이가 피클로 바뀌듯, 책을 읽기 전의 오이에서 읽은 후 피클로 바뀌는 비가역적 변화가 일어나는 위험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책이 내몸을 통과하면서 없었던 꿈을 심어 놓은 덕분에 지금 생각하면 잘 못된 불온한 꿈이었지만 그 꿈을 향해 매진하는 불굴의 의지가 뇌리구조를 바꾼 것이다. 



성장 체험 4: 한 순간의 선택이 한 평생을 좌우한다

포기하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가 열린다

정신적 구조 접속이 새로운 정신을 잉태한다.     


우여곡절 끝에 법학과 대입학력고사 점수가 안 나와서 한양대 교육공학과에 우연히 원서를 제출했다. 또 다른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고시공부를 하러 대학에 왔지만 생각했던 만큼 내 심장을 뛰게 하지 못했던 고시공부를 드디어 군대 갔다 복학하고 나서 포기하는 역사적 사건을 감행했다. 달밤에 고시 공부하던 책을 쌓아놓고 기름을 부어서 다 불살라버리는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을 일으켰다. 고시 관련 책을 지루하게 공부에 단련된 뇌구조는 이제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지적 자극에 뇌세포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논어에는 두 가지 공부가 나온다. 하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이고 다른 하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위인지학은 내가 고시공부를 통해 인생역전을 꿈꾸는 것처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결과 중심의 공부다. 반면에 위기지학은 내가 하면 재미있는 공부를 선택해서 즐겁고 재미있게 하는 과정 중심의 공부다. 위인지학으로 공부할 때 따르는 정신적 괴로움은 위기지학으로 공부하면서 동반된 정신적 즐거움으로 공부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났다. 고시공부하던 책을 다 달밤에 불살라 버리고 이제 내 몸은 또 한 번의 거대한 신체구조 변화를 시도한다. 책 읽는 재미에 빠져서 5시에 잠을 자고 9시에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이런 일정으로 박사 공부할 때까지 했으니까 약 10년은 책 읽는 재미에 빠지는 정신적 구조 변화도 동시에 겪었다. 책이 주는 다양한 정신적 자극은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말 책 읽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다기 뇌세포의 신경계를 바꾸기 시작했다. 뇌세포의 신경계 구조 변화는 책이 담고 있는 저자의 생각 구조와 구조적으로 접속한 결과다. 호기심의 천국에 입문하는 것 같았다. 몰랐던 사실을 알아나가는 즐거움과 기쁨이 밤을 새워도 피곤하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어둠을 헤매던 정신세계에 새로운 광명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성장 체험 5: 뇌력은 체력에서 나온다

목적의식을 갖고 공부하는 흔적을 축적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언어적 구조 접속이 문화적 이해로 가는 가교가 되었다     


잘 들리지 않는 영어 수업은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거기에 영어로 매주 써내는 에세이나 논문은 난생처음 다른 나라 말로 소통하는 언어적 구조 접속의 혁명을 요구했다. 어느 정도의 영어공부를 해왔지만 그건 다 영어 관련 책이나 논문을 읽는 훈련으로 단련 독해 중심의 영어공부였다. 매시간 영어로 토론하고 발표하며 논문도 영어로 써내는 고통을 감내하는 뇌는 새로운 구조로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장의 영어 에세이를 쓰는데 몇 시간씩 걸리지만 진도는 생각만큼 나가지 않았다. 낯선 문화적 충격을 경험할 겨를도 없이 학교 공부는 우선 영어라는 언어의 구조에 한글로 단련된 언어구조를 바꿔야 한다. 한마디로 언어적 구조 접속이 필요했다. 언어적 구조 접속이 일어나는 동안에서 영어로 소통하는 수업은 계속되었다. 이때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학교 안 짐에 가서 규치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주로 주간 수업이 끝나고 저녁을 먹기 전에 운동을 매일 했다. 뇌력은 체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저녁을 먹고 일주일에 3-4일은 일식집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다. 역시 체력이 없으면 견뎌내 기 어려운 일정의 반복이었다.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은 집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학교 연구실에 가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에 들어와 다시 새벽 5시까지 박사학위 논문과 기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다양한 논문을 읽고 메모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니까 신간도서를 구입할 엄두는 낼 수 없었다. 정말 보고 싶은 책은 복사해서 보았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저널 중에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다양한 논문 역시 복사해서 분야별로 분류해놓고 주기적으로 메모하고 정리해놓았다. 복사하는 기술은 날로 빠르게 성장해서 300페이지 내외도는 책도 순식간에 복사할 정도로 복사의 달인이 되어갔다. 신체가 복사기를 만나면서 어떻게 하면 빠르게 할 수 있는지를 학습을 하면서 적응한 결과다. 복사기 구조와 내 신체가 구조적으로 접속한 결과다. 진지한 실천의 지루한 반복 끝에 3년 만에 고대하던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제 나는 나의 방식으로 내 생각을 펼쳐나가는 공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자격증을 딴 셈이다.     




성장 체험 6: 체험 없는 개념은 관념이다

생각만 해본 사람은 당해본 사람을 못 당한다

실천적 구조 접속이 체험적 지혜를 낳는다     


책상에서 거의 10년간 공부를 해서 학부와 석사, 그리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장과 단절된 상태에서 책을 머리로 이해하는 공부를 해온 것이다. “책상에서는 한 가지이지만 실제로 일해 보면 열 가지도 넘는다”(183쪽). “머리는 하나지만 손가락은 열 개나 되잖아요”(184쪽).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책상에서 배운 지식을 현장에 적용하면서 관념적 지식의 무력함을 몸으로 깨달았다. 실천이 실종된 관념의 야적이 낳은 허망한 결과다. 석사(碩士)가 머리(首)가 떨어져 나가고 돌(石)만 남은 석사(石士)고 박사(博士)가 돌을 갈다가 얇아지면 얇을 박(薄)자를 쓰는 박사(薄士)인 이유를 현장 체험을 통해서 알았다. 결론이 다양한 논의를 통해 나중에 등장하는 학술논문과는 다르게 가장 중요한 결론을 맨 앞에 제시하는 두괄식 사고는 뇌구조 변화를 요구하는 현장의 가르침이었다. 다양한 참고문헌을 활용하여 논리적으로 펼쳐지는 인용방식의 긴 글쓰기는 이제 급소와 핵심을 요약해서 간단명료하게 제시하는 보고서 형식으로 글쓰기를 바꾸는 또 다른 뇌구조 접속의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완벽한 계획과 철저한 검토를 거듭하는 보고서 쓰기는 실천 현장에서 겪었던 또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관념적 지식의 무력함을 깨달은 원동력도 실천이었다. 그 실천이 실종된 상태에서 완벽한 계획 수립과 반복된 검토 문화의 병폐와 역기능을 경험한 것도 실천 현장이었다. 완벽한 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의 타당성이나 현실 적용 가능성을 실천에 옮기지 않고 반복해서 검토하는 회의(會議)는 정말 심각한 회의(懷疑)가 들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현장에 근무하는 동안은 직접 기획해서 실행하고 평가해서 개선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론과 실천의 괴리도 몸소 경험하는 소중한 체험적 각성의 시간이었다. 현장에서 근무한 5년의 시간은 왜 생각만 해본 사람은 당해본 사람을 못 당하는지, 체험 없는 개념은 왜 관념으로 전락하는지를 몸으로 깨달은 실천적 각성 기였다. 현장의 구조는 나의 체험 구조를 바꾸어주었으며 결국 현장과 나 사이에는 새로운 깨달음의 가교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성장 체험 7: 적막해지면 글쓰기의 서막이 열린다

쓰지 않으면 쓰러지고 쓰면 쓰임이 달라진다

학문적 구조 접속이 앎의 지평을 확대시켜준다     


대학을 졸업한 직장인을 대상으로 교육과정을 기획하고 강의하고 운영하다 이제 대학교수가 되어 새로운 가르침을 시작했다. 공부가 재미있어서 시작한 대학원과 유학시절의 공부로 깨달은 앎을 삼성에서 다양한 모색과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져보았다. 나에게 현장은 실천적 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준 소중한 스승의 터전이었다. 이제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혜를 버무려 미래의 직장인이 될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맞이했다. 유학을 마치고 바로 학교로 오지 않고 현장에서 경험하는 기회를 가졌던 것은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만약 현장 체험이 없었다면 전문가와 전문성을 생각하는 방식에도 각성이 따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안동대학교에서의 2년 반 교직생활은 앞만 보고 달려오던 내 인생의 소중한 성찰기였다.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했던 공부와 현장 경험으로 새롭게 깨달은 체험적 지혜를 어떻게 버무려 나의 독창적인 이론적 관점과 학문적 체계로 정립 해나 가느냐를 고민하는 것이 대학교수로서 나에게 던져진 학문적 과제였다.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이전에 나는 학생들과의 만남으로 추구하는 변화를 사랑하는지를 묻고 싶었다. 안동에서의 2년 반 생활은 우선 주중 3-4일을 학교에서 보내고 나머지 3-4일은 서울에서 보내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안동에서 성남 집까지 왕복 장거리 운전을 하는 동안 많은 사색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안동이라는 지역이 나에게는 편안한 동쪽이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가르치는 시간을 제외하고 안동에서의 학교생활은 온전히 혼자 책 읽고 글 쓰고 운동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삼성에서 보낸 5년의 바쁜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온전히 혼자 책 읽고 글 쓰는 근육을 단련하는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밤 12시가 되면 대운동장에 가서 땀이 날 정도록 트랙을 달리고 다시 샤워하고 연구실에 앉아서 글쓰기에 몰입하며 심야의 적막을 뚫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시간이 날 때마다 교육공학을 매개로 다시 인문사회과학적 통찰력을 얻기 위해 다양한 책과 논문을 읽었다. 색다른 분야와의 학문적 구조 접속을 시도하면서 글쓰기도 병행했다. 쓰면 쓰임이 달라지고 쓰지 않으면 쓰러질 수 있음을 몸소 깨달은 시기였다. 어둠의 적막이 깔리기 시작하면 읽기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독수리 타법으로 배운 키보드로 글을 쓰는 손가락 근육은 어느 사이 자판을 안 보고도 원하는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키보드와 성공적으로 구조 접속을 하고 있었다.  

    


성장 체험 8: 최고의 가르침은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면 생각의 경계도 뛰어넘는다

융합적 구조 접속이 새로운 지식창조의 원동력이다     


84년도에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에 입학해서 학부와 석사, 유학 가서 박사를 마치고 삼성에 입사해서 근무하다 안동대학을 거쳐 모교로 돌아오기까지 17년 정도 걸렸다. 2001년 2학기부터 모교로 돌아와 후배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읽기와 쓰기, 그리고 운동으로 단련하며 행복하게 보냈던 안동대학 시절을 접고 바쁘고 복잡해지는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매일 밥먹듯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습관은 나만의 방식으로 글을 쓰고 구조화시켜 책을 완성하는 생각 근육을 단련시켜 주었다. 모교에 오자마자 교수 대상 교수법을 가르치고 학생 대상 학습법을 육성하는 교수학습개발센터장을 맡으면서 가르치는 교수를 가르치는 교수 역할도 해보았다. 일반인이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수 행위와는 전혀 다른 지적 안목과 통찰력이 없이는 난공불락의 대상이 대학교수다. 세상에서 가르치기 가장 어려운 대상 중의 한 그룹이 교수그룹이다. 자기 분야의 최고의 전문성을 갖고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지만 대부분의 교수는 현장체험 없이 자기 분야의 전공지식을 가르치는 업에 종사한다. 다 그런 거는 아니지만 전공분야에 ‘학(學)’이 붙을수록 해당 학문분야의 현장과는 오히려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전공지식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될 수록 전체나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성에 대한 통찰력을 망실하고 전문분야를 파고드는 깊이를 강조함으로써 나타나는 학문적 역기능이다. 전공분야의 깊이 있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나의 전문성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학문적 한계를 인식하고 현장성과 실천성을 높이기 위해 현실이 살아 숨 쉬는 현장을 매개로 다양한 학문과의 융복합적 접목을 부단히 시도해보았다. 지식창조나 지식경영 분야와 생태계를 지속가능성을 연구하는 생태학을 접목시켜 탄생시킨 지식생태학은 앞으로 유영만의 자기 정체성을 드높이는 나만의 학문적 칼라이자 스타일을 드러나는 학문이다. 공부를 계속할수록 내가 겪은 체험적 각성과 학문적 안목을 융합시켜 드러내는 언어적 사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풍부한 개념과 수사력은 단순히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드높이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적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갖추어야 할 학문적 자원이자 도구다. 다양한 개념과의 구조 접속을 통해 사고의 구조도 바꾸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한다. 언어의 한계가 나의 한계임을 느끼면서 학생들에게도 보다 쉬운 언어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강의를 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도 모색 중이다. 가급적 참견하지 않고 아이들을 열정적으로 참여시키면서 가르치지 않으면서도 잘 가르치는, 더 정확히 말하면 방법만 가르치지 않고 방향을 가리키는 교수법 개발에도 남다른 노력을 경주한다.     



성장 체험 9: 정상(頂上)에 오른 사람은 정상(正常)이 아니다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의 핑계다

한계와의 극한적 구조 접속은 경계를 뛰어넘은 원동력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런 말을 남겼다. “네가 자주 가는 곳,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읽는 책이 너를 말해준다.” 나를 바꾸려면 내가 자주 가는 곳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 가봐야 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다른 관계를 맺어야 하며, 늘 읽던 책 보다 전공 밖의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성인이라고 부르는 대학교수에게도 그래도 적용되는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연구실에 가서 연구하다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비슷한 경험을 반복할수록 나는 현재의 경험을 벗어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체험적 자극이 바뀌지 않으면 유기체의 구조는 어제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다. 지성이 야성의 자극을 받지 않으면 지루해지고 야성이 지성으로 연마되지 않으면 야만으로 흐른다. 2012년도 사하라 사막 월드 마라톤에 도전한 이유도 관념적 사유가 실전에서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다. 지성이 야성의 자극을 받지 않으면 지루한 설명을 반복한다. 한계에 도전하는 사하라 사막 마라톤 도전 체험 덕분에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들의 핑계라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120Km 지점에서 한계가 왔을 때 레이스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는 말을 “절대로 쓰지 마라”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윈스턴 처칠이 남긴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는 말이 실제 한계 상황에서는 잘 못된 말이 될 수 있음을 한계에 도전해본 체험 덕분에 깨달은 진리다. 



한계는 책상에서 알 수 없고 오로지 한계에 온몸을 던져 도전해봐야 몸으로 알 수 있는 깨달음임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좋아하는 일인데 잘할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절대 포기하지 않고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일인데 잘할 수 없는 일은 빨리 포기해야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2015년에는 아프리카의 지붕, 킬리만자로 등반에 도전해서 정상에 오른 적이 있었다. 5,000m가 넘는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인간의 신체가 고산에 구조 접속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여러 번의 고산 적응 끝에 마침내 정상 등반을 위한 마지막 베이스캠프인 4700m 고지에서 일찍 잠을 자고 밤 11시에 정상을 향해 출발한다. 정상 등반 여정은 말 그대로 사투를 벌이는 장면의 연속이다. 마침내 우리는 정상 등정에 성공하는 짜릿한 감동을 서로서로 나누며 아프리카의 지붕에서 잠시 감회를 나누었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목표를 향해 힘들어도 참고 올라가는 정상 등반여정과는 다르게 목표를 달성하고 내려오는 길은 허전하고 힘 빠지는 여정이었다. 사투를 벌이며 올라가는데 거의 다 소진한 힘은 이제 바닥이 날 정도였다. 밤 11시에 등반을 시작하기 위해 밤잠을 설쳐야 했다. 내려오는 길의 최대 아킬레스건은 졸음이었다. 바위틈 사이로 몸을 힘겹게 내려놓으면서 하산행을 얼마 동안 계속하다가 바위가 거의 없는 모래사막으로 이루어진 가파른 언덕길을 만났다. 그때부터는 거의 굴러내려온 기분이다. 잠시 앉아서 쉴 때는 잠이 쏟아져 잘 못하면 그대로 깊은 잠에 빠질 지경이었다. 간신히 가이드의 도움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출발했던 베이스 캠프에 도착했다. 올라갈 때의 신체적 구조와 하산할 때의 신체적 구조는 다시 한 번 산의 구조에 맞게 구조접속을 하지 않으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성장 체험 10: 독창성이란 들키지 않은 표절이다

모든 글은 체험과 현집의 합작품이다.

개념적 구조 접속이 색다른 사유를 잉태하는 원동력이다  

   

지금까지 88권의 저역서를 출간했다. 평범한 대학교수가 끊임없이 책을 펴내는 비결이 궁금해했던 SBS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에서 연락을 받았다. 책 쓰기 달인으로 출연하지 않겠냐고. 너무 뜻밖의 제안을 받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책 쓰기 달인은 다른 달인과 결정적으로 다른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책 쓰기 달인은 현장에서 시범으로 보여줄 수 없다는 점이다. 안타깝게 출연이 좌절되었다. 모든 창작은 지금까지 작가가 체험한 흔적을 책을 읽으면서 생긴 얼룩과 합작해서 창조해낸 산물이다. 체험이 없는 개념은 관념이고 개념이 없는 체험은 위험할 수 있다. 창작은 색다른 체험과 남다른 개념이 만날 때 일어나는 스파크다. 창작은 전대미문의 새로운 창조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혀 모든 예술적 창작은 이전 작품의 표절이다. “독창성은 들키지 않은 표절이다.” 윌리엄 랠프 윙의 명언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창조는 기존의 유와 유를 이전과 다르게 뒤섞어서 탄생한 산물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피카소는 “훌륭한 예술가는 가까운 곳에서 베끼고(copy), 위대한 예술가는 멀리서 훔친다(steal)”고 했다. 훌륭함과 위대함의 차이는 가까운 곳에서 베끼느냐, 멀리서 훔치느냐의 차이라는 기발한 발상을 한 것이다. 이런 말을 표절하면 “석사는 가까운 곳에서 베끼고(copy), 박사는 멀리서 훔친다(steal)”는 또 다른 패러디 명언을 창조해낼 수 있다. 모든 창작은 익숙한 개념의 낯선 융합의 산물이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 익숙한 지식과 산부인과의사를 개념적으로 융합하면 지식산부인과의사라는 낯선 개념을 출산한다. 이때부터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지식임신과 지식자연분만 유도법이나 지식낙태수술 방지법 같은 전대미문의 새로운 의료 서비스를 구상할 수 있다. 개념은 또 다른 개념과 우발적으로 접속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출산하는 개념임신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색다른 개념과의 우발적 접속으로 생각지도 못한 색다른 생각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대로 확산된다.     



머뭇거리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미래로 떠난다     


내 몸에 새겨진 구조 접속은 한 시대가 골머리를 앓으면서 사투 끝에 남겨 놓은 역사적 산물이다. 앞으로 또 어떤 환경 속에서 이전과 다른 구조 접속의 역사를 써 나갈지는 나 자신도 모른다. 지금까지 방랑하는 예술가의 길을 걸어오면서 앞으로 어디에 언제 도착할지를 전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유다. 내가 언제 어디에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나는 중간 여정에서 갑자기 열정이 사라질 수도 있다. 지금과 다른 길에서 우연히 만날 수많은 마주침의 미래가 설렐 뿐이다. “애를 쓰는 것, 시작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 시도해보는 것, 틀리는 것,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하는 것, 그리고도 여전히 발걸음을 머뭇거릴 방도를 생각해내는 것, 요컨대 의구심을 품고서 신중하게 작업하는 것이 포기와 다름없어 보이는 사람들로 말하자면, 우리가 그들과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22쪽). 푸코의 《성의 역사 2》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성취물에 취하지 않고 그것조차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용기가 공부를 계속하는 사람의 지치지 않는 끈기와 열정의 근원이다. 무엇보다도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방향 전환을 하면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이런 자기 탐구 여정은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말하는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내가 되려는 노력이다.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자기’, 단 한 번도 그렇게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를 구성해낸다”(p119). 이런 자기 자신은 그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예술가가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고유한 작품을 창조하듯이 우리는 어떤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내가 만나는 바깥의 세계는 언제나 나에게 배움의 원천이었고 지적으로 깨우침을 얻는 스승이었다. 밖은 언제나 안 보다 혼란스럽고 낯설었으며 위험하다. 안주 지대라는 보호 장막을 걷어내고 경계를 넘는 용기가 있어야 밖의 세계로 진출한다. “결국 위험은, 중략.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보장을 멀리 떠나 친숙한 광경들의 바깥 dehors으로, 우리가 아직 그 범주들을 구성하지 못한 땅으로, 예견하기 어려운 종말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69쪽).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에 나오는 말이다. 비록 내 앞에 종말이 다가오는 위험이 눈앞에 아른거려도 익숙한 여기에서 낯선 저기로 부단히 일탈하려는 발버둥을 평생 동안 해왔다. 언제나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사선을 넘나드는 결단과 결행을 감행했다. 푸코는 언제나 자신이 뭐하는 사람인지 모른다고 했다. 아니 그런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했다. 지금까기 구축한 좌표 안에서 자신을 규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에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23쪽). 푸코의 《성의 역사 2》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앎의 무늬를 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노력보다 지금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실험하는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려는 노력이 더 소중하다. 다름을 찾아가는 앎은 언제나 타인과의 부단한 마주침 속에서 얻는 깨우침이다. “우리가 가진 세계란 오직 타인과 함께 산출하는 세계뿐이다. 그리고 오직 사랑의 힘으로만 우리는 이 세계를 산출할 수 있다”(278-279쪽).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야 타자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가 생기고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측은지심이 발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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