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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개념적 충격이
나의 인식의 깊이를 좌우합니다

나의 뇌리에 충격을 준 14명의 철학자(사회학자, 인류학자, 경제학자)

내가 받은 개념적 충격이 나의 인식의 깊이를 좌우합니다

나의 뇌리에 충격을 준 14명의 철학자(사회학자인류학자경제학자)    

 

다시 한 학기가 저물어갑니다. 이번 학기 대학원 수업은 가열차게 14명의 학자들을 불러와 평온했던 뇌리(腦裏)에 새로운 문리(文理)로 흔적과 얼룩을 만드는 고달픈 수업을 이끌어서 미안한 마음 가득합니다. 하지만 색다른 개념과 논리(論理)로 무장한 낯선 학자의 사유체계로 사우나탕에서 평온함과 안락함을 즐기는 내 생각에 타격과 충격을 주지 않는 이상 우리의 사상적 깊이와 넓이는 변하지 않습니다.     


늘 보던 책과 논문만 보면 자신도 모르게 거기에 익숙해지며 그 순간부터 내 생각은 더 이상 숙성되지 않고 발효과정도 필요 없게 됩니다. 숙성과 발효 없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할 방법은 없습니다. 주마간산으로 스쳐 지나간 사유의 흔적을 더듬어 가며 다시 나의 사유체계로 통합해내기 위해서는 생각하고 느낀 점을 글로 옮겨 적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쓰기는 오로지 쓰기를 통해서 향상됩니다. 글쓰기 책과 글쓰기 강연을 아무리 보고 들어도 글을 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저 관념의 파편으로 야적될 뿐입니다. 한 학기 동안 저와 함께 색다른 HRD 사유 실험과 여행을 해주셔서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방목 학습을 제대로 즐기는 방학을 맞이해서 모래알처럼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사유의 파편들을 나의 관심과 애정과 열정으로 녹여 붙이는 멋진 시간 기대합니다. 우리가 만난 스승의 면면을 떠올려봅니다.     



첫 번째 우리들에게 개념적 충격과 타격을 준 철학자는 롤랑 바르트입니다. 사상가이자 문학자이며 사진 철학자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밝은 방》에 나오는 스투디움은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었거나 문화적 전통으로 공유하는 신념체계에 따라 주어진 사진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이에 반해 푼크툼은 사진 속의 특정 이미지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다가와 새로운 감성적 충격을 줍니다. 



두 번째 만난 학자는 진정한 전문가는 과학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축적해서 탄생되지 않고 자신이 일하는 업무 현장에서 실천하면서 성찰하는 성찰적 실천가(Reflective Practioner), 마스터리(Mastery, 경지)에 이르는 길은 밝힐 수 없는 미스터리(Mystery, 신비)인가를 고민하게 만든 도날드 쉰(Schon, Donald A.)입니다. 그가 쓴 《전문가의 조건》은 ‘기술적 숙련가에서 성찰적 실천가로’라는 부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전문성은 기술적 지식을 축적한 다음 실천하는 가운데 생기지 않고 전문성이 실천되는 현장에서 성찰하는, 즉 앎과 삶이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얽혀 돌아가는 가운데 생긴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는 프로네시스(phronesis), 즉 실천적 지혜에 따르면 전문가가 체득해야 될 이상적인 경지라고 합니다. 딜레마 상황에서 윤리적으로 옳은 판단과 행동으로 공동체의 선을 위해 올바른 방법으로 행동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지혜라는 개념은 너무 아름다운 생각이 아닐까요. 



네 번째 만난 학자는 《장인》이라는 책을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입니다. 그 책의 부제목이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기술발전과 함께 인간의 장인성 수준이 현격하게 떨어지는 역기능 현상을 방지하고 손으로 체득하는 체험적 지혜와 장인정신을 되새겨봅니다.      



다섯 번째 만난 스승은 브리꼴레르(bricoleur)라는 개념을 창시한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입니다. 그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사유를 자극하면서 진정한 전문가의 이상적인 모습을 맥가이버와 같은 인재상에서 찾아보는 재미있는 체험적 기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여섯 번째 만난 철학자는 《개인적 지식》이라는 책을 쓴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입니다. 그가 창안한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과 인격적 지식(Personal Knowledge), 지식은 객관적일 수 있는가, 아니면 인간의 신념이 반영된 인격적 지식일 수밖에 없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면서 화두를 제공한 책입니다. 



일곱 번째 만난 스승은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입니다. 《의미의 논리》, 《차이와 반복》, 그리고 《천 개의 고원》을 통해 그가 창안한 리좀(Rhizome)과 아장스망(agencement), 그리고 다양체(multiplicity)에 비추어 창조는 계획된 의도의 산물인가, 우발적 마주침의 산물인가를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여덟 번째 우리에게 개념적 충격을 전해준 스승은 《앎의 나무》를 쓴 칠레의 인지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움베르토 마투라나 (Humberto R. Maturana)와 그의 제자 프란시스코 바렐라 (Francisco J. Varela)입니다. 그들이 만든 자기생산(self-production)과 구조접속(Structural Coupling)은 생명은 유전자 복제에 불과하지 않고 우발적 자연 표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기적 유전자의 주인공,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를 정면에서 반박합니다. 



아홉 번째 만난 스승은 《주체의 해석학》을 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입니다. 저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나는 지금 자기를 탕진하는 자기 계발에 몰두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를 발견하고 해체하며 기존의 나를 포기하는 자기 배려에 몰입하고 있는가? 푸코가 말하는 자기 배려는 “단 한 번도 자기가 되어 본 적 없는 자기가 되는 실천”을 의미합니다.     

 


열 번째 만난 스승은 《경험과 교육》을 쓴 미국의 교육철학자, 존 듀이(John Dewy)입니다. 듀이가 말하는 경험이란 곧 삶의 과정, 즉 생명체가 환경 조건과 상호작용하면서 갱신을 통해 자기를 보존해 가는 일련의 과정이요, 행함(doing)과 겪음(undergoing)을 상호 관련짓는 지적 작용을 통해 의미(meaning)를 파악하고 세계를 향한 실험적․ 창조적 변화를 시도하는 모든 노력이다. 



취향은 개인적 선호도가 아니라 사회적 계급구조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외의 아비투스(habitus)가 우리에게 지적 충격을 준 열한 번째 스승입니다. 그는 《구별 짓기》라는 책에 따르면 아비투스란 특정한 인간 행위는 자발적인 욕구나 사회적 심층구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집단의 성향 체계가 결정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비투스는 구조가 실천을 지배하고 실천이 다시 구조를 바꿔가며 매개합니다. 



열두 번째 만난 우리의 스승은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가 말하는 《무지한 스승》입니다. 무지한 스승이 강조하는 교육적 효과는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로 요약된다. 모든 학생들은 지적으로 평등하고 전제하는 무지한 스승은 학생에게 ‘지식’을 가르치지 않고 ‘의지’를 심어줌으로써 곤란한 상황에서도 학습할 수밖에 없도록 의도적으로 코너에 몰아넣습니다.      



열세 번째 만난 우리의 스승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H. 탈러(Richard H. Thaler)와 그의 동료 캐스 R. 선스타인(Cass R. Sunstein)의 《넛지》에 나오는 행동경제학과 질병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킨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 나오는 사회역학입니다. 인간은 비합리적이라고 가정하는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변화는 변화를 일으키는 조건의 변화가 변화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가정합니다. 사회역학 역시 인간의 질병은 개인의 건강관리 실패보다 그 사람이 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구조적 환경이나 사회적 제도에서 기인한다고 가정합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스승은 프랑스 철학자 에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시간과 타자》, 《전체성과 무한》에 나오는 타자라는 개념입니다. 타자는 사르트르가 말하는 것처럼 나를 감시하는 지옥인가, 아니면 나의 미래를 열어가는 가능성인가? 레비나스는  타자를 미래라고 해석합니다. 미래는 내 마음대로 손에 거머쥘 수 없는 사이에 나를 향해 엄습해옵니다. 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타자가 나에게 엄습해올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타자는 언제나 나에게 신비한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불확실한 가능성입니다.      




이렇게 열네 명의 스승을 만나면서 그들이 치열하게 고민했던 삶의 흔적을 자기만의 독창적인 개념으로 녹여 특유의 사유체계를 완성하는 학문적 탐험 여정을 해보았습니다. 저마다의 문제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의 치열한 열정이 아직도 온몸을 타고 요동칩니다. 갑자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이전과 다르게 깊고 넓어진 느낌입니다. 이제 이런 수많은 개념적 통찰력을 나의 사유체계로 녹여내기 위해서 가열찬 실천과 성찰이 뒤따라야 합니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뛰고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것만 지적 충만감이 다시 한 번 온몸을 휘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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