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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감동시킬
만고불변의 10가지 글쓰기 법칙

독자를 독하게 변화시킬 만고불변(萬古不變)의 10가지 글쓰기 법칙     


①결론을 먼저 앞세우고 증거는 나중에 제시하라

②시인의 눈으로 관찰하고 생각의 뒤통수를 쳐라

③머리로 요리조리 쓰지 말고 몸으로 이리저리 보여줘라

④ 양식을 설명하지 말고 상식을 어루만져줘라

⑤먼저 주제 파악이 안 되면 소재를 엮어서 쓰기 시작하라

⑥낯선 분야와의 마주침으로 나만의 독창적인 언어를 창조하라

⑦화려하게 꾸미기 전에 사실의 텃밭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가꿔라

⑧ 틀에 박히지 말고 틀 밖에서 어제와 다름을 추구하라

⑨화룡점정으로 끝내지 말고 여운을 남기는 질문을 던져라

⑩밥먹듯이 매일 일정한 시간에 습관적으로 써라     



“문장을 쓰는 일은 한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다”(65쪽). 스탠리 피시의 《문장의 일》에 나오는 말이다. 한 문장에는 한 작가가 한평생 고뇌한 생각의 얼룩과 무늬가 고스란히 담긴다. 문장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이는 이유다. 모든 작가는 “네가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문장이 되고 싶다”는 문장을 쓰는 꿈을 꾼다. 이훤의 《너는 내가 버리지 못한 유일한 문장이다》 시집에 나오는 문장이다. 모든 문장은 저자의 체험적 깨달음이나 교훈을 적확한 단어로 건축한 산물이다. 독자를 변화시키는 감동적인 글은 모두 이런 문장으로 건축된다. 기존 개념이나 작가가 창조한 개념으로 작가 자신의 체험을 독창적인 표현방식으로 녹여내는 지난한 사투의 산물이 한 편의 글로 창작되고 그런 글이 묶여서 한 권이 책으로 탄생된다. 공부를 많이 한 학자의 학자연하는 글보다 비록 가방끈은 짧지만 격전의 현장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몸으로 체득한 어눌한 글이 더 감동적이다. 알량한 앎이나 관념적 사유로 각색한 설명 체계로 삶을 재단하거나 평가하는 글보다 뼈저린 고통 체험으로 건져 올린 깨달음의 글이 폐부를 찌르고 진한 감동을 전해준다. 이런 글에는 꾸밈이나 가식이 없고 관념의 언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몸으로 살아가며 벌인 사투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기술하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이야기를 창조하는 과정이 우리의 남은 삶을 위한 이야기의 요지를 담을 기억의 구조를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136쪽). 아서 프랭크의 《몸의 증언》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살아온 삶을 이야기로 창조하는 과정은 내 삶을 이야기로 직조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살아가며 만들어갈 이야기를 담아낼 기억의 구조를 창조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온 과거의 이야기가 지금 현재는 물론 미래의 상상력을 불태운다. 과거가 부실하면 과거에 그치지 않고 부실한 과거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도 지배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글을 써야 되는 이유다.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진실한 문장 뒤에 포장이나 장식이 따른다. 즉 문장에 담기는 삶이 먼저이고 그걸 표현하는 수사적 기교나 기법은 나중에 배워도 된다. 독자를 감동시키는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만고불변의 10가지 글쓰기 법칙을 정리해본다.     



결론을 먼저 앞세우고 증거는 나중에 제시하라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인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으로 글을 쓰면 독자들은 서론을 읽다가 도망간다. 첫 문장부터 범상치 않은 인상을 심아주고 앞으로 전개될 글이 대수롭지 않음을 예고해야 한다. 즉 호기심을 자극하고 읽고 싶은 욕망을 부추겨야 한다. 독자는 성질이 급하다. 빨리 결론을 보고 싶어 한다. 저자가 주장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지, 저자의 주장대로 따라 하면 나에게 어떤 혜택을 가져다주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즉 독자가 읽고 싶고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을 건드리지 않고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장황하게 시작하면 글을 장렬히 전사하는 지름길로 가는 셈이다. 대학원에서 쓰는 논문은 전형적인 서론-보론-결론의 논리적인 형식을 취한다. 논문을 쓰게 된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을 장황하게 설명한 다음 자신의 논문을 이론적으로 지원해주는 방대한 이론적 배경을 쓰고 연구를 진행한 다음 연구로부터 얻은 결과나 결론을 마지막에 제시한다. 자기주장을 주관적으로 호소하며 설득하는 논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논문은 자기주장을 감추고 가급적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의 주장에 기대서 논리를 펼친 다음 기존 연구결과와 배치되지 않는 선에서 미새한 차이를 드러내는 결과를 도출한 다음 논문을 쓰면서 얻은 결론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면 독자는 중간에 읽기를 포기할 것이다. 손님(客)의 관점(觀)으로 논리를 풀어가는 논문에는 주인(主)의 관점(觀)이 실종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듣고 싶은 결론은 한 참 읽은 다음 맨 뒤에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독자들의 인내심이 거기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모든 글은 기승전결(起承轉結)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도 틀에 갇힌 잘 못된 주장일 수도 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전통적인 기승전결 방법을 고수하면 기승을 부리기 전에 전멸한다. 오히려 결론을 먼저 제시한 다음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나 배경을 기술하고 반전을 거듭하다 독자들의 감정을 승화시켜 흥분시키는 결기전승(結起轉承)의 단계가 나을 수도 있다.   

  


시인의 눈으로 관찰하고 생각의 뒤통수를 쳐라     


“물건을 훔치면 범인이 되지만 마음을 훔치면 연인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훔치고 싶은 게 있다면 연인의 마음이 아니라 시인의 영감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영감으로 연인의 마음도 얼마든지 훔칠 수 있기 때문이다. ‘틀 밖’에서 호기심의 물음표(?)를 던져 ‘뜻밖’의 느낌표(!)를 찾고 싶은가? 마감 시간 전에 무릎을 치며 공감할 수 있는 시인의 영감이 곳곳에 숨어 있는 이 책을 보는 순간 우리 모두는 ‘시 읽는 CEO’를 넘어 ‘삶의 CEO’가 될 수 있다. 고두현의 《시 읽는 CEO, 처음 시작하는 이에게》에 쓴 추천사다. 이문재 시인의 ‘사막’이라는 시에는 “사막에/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모래와 모래 사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나는 2012년 사하라 사막 마라톤에 도전한 적이 있다. 매일 사막에서 달리기를 하면서 모래를 봤지만 시인은 사막에서 모래보다 더 많은 ‘사이’를 보고 왔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종은 더 아파야 한다.” 역시 이문재 시인의 ‘농담’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평범한 우리는 종을 더 세게 때리면 종소리가 더 멀리 간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종의 입장이 되어 종의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한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서 종이 더 아파야 한다는 측은지심이 시심으로 녹여져 나온 시구가 아닐 수 없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을 보면 시인은 상상력은 평범한 생각의 뒤통수를 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 빨간 대추를 보면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우리들에게 대추가 빨개진 이유를 시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포착해낸다. 생각의 물구나무를 서서 대추 입장이 되어본 시인의 눈은 역시 남다르다. 우리는 모두 삶의 CEO(詩理悟)다. CEO는 시(詩)를 통해 세상의 이치(理)를 깨닫는(悟) 사람이다. 시인은 ‘틀 밖’에서 물음을 던져 ‘뜻밖’의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다. 시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고(見) 들으며(聞) 남다른 조합(編)으로 놀라운 ‘깨달음(覺)’과 ‘깨우침’을 배우고 싶은 분, 그래서 작은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감동으로 세상을 움직이고(動) 싶은 모든 사람들이 ‘필독’해서 ‘중독’되어야 할 책은 바로 시집이다. 대작과 걸작도 시인의 마음으로 시작(詩作)해야 시작(始作)되는 경이로움을 경험하려면 우리 모두 시인의 마음으로 생각의 물구나무를 서서 세상을 관찰해야 한다. “자꾸만 귀를 기울이면 나지 않는 소리를 상상하는 능력이 생겨나고, 모든 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잘 들린다. 예술적 환청은 초월적 능력이 아니고 심리작용이다”(301쪽).   

 


머리로 요리조리 쓰지 말고 몸으로 이리저리 보여줘라    

 

너무 옛날이야기를 고지고식대로 풀어놓으면 금방 감각을 잃고 식상해진다. 자화자찬을 길게 놓으면 독자는 바로 읽기를 그만두고 나가버린다. 자기 과시나 자랑질이 길어질수록 너나 잘하라고 비난의 화살을 쏜다. 경험을 말하되 진솔하게 진정성을 갖고 솔직 담백하게 풀어놓는다. 생각지도 못한 사고에서 내가 사고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 속에서 담긴 사연은 어떤 사유를 촉발시켰는지를 구체적으로 쓸수록 독자는 저자의 글에 빨려 들기 시작한다. 저자가 감동한 사건과 사고를 써야 사유가 시작되고 사고가 바뀌기 시작한다, 저자가 경험한 사건과 사고가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느껴야 그걸 소재로 독자를 재미있고 의미심장한 감동을 준다. “경험을 통해 스스로 가짜와 진짜를 알아보는 눈을 갖는 일은 어떤 조언보다 값지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자신의 판단력을 갖게 된 사람은 남을 의심하거나 절망하느라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 길에 이르는 과정을 섣부른 충고나 설익은 지혜로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 경험하지 않고 얻은 해답은 펼쳐지지 않은 날개와 같다. 삶의 문제는 삶으로 풀어야 한다”(22쪽).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저자가 경험하지 내용은 자기 확신이 서지 않고 저자 특유의 신념이 담겨있지 않다. 신념이 없는 글은 관념의 파편일 뿐이다.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다른 모든 것은 잡담이고 ‘문학’이며 교양의 부족이다”(9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 중에 나오는 말이다. 극복해낸 체험 속에는 저다 특유의 얼룩과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곳곳에 뇌관이 숨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속에 어떤 감동의 폭풍이 숨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노명우 교수가 최근에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 쓴 추천사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온다. “이론과 지식으로 쓴 텍스트에는 논리적 엄밀성이 있지만, 머리가 아니라 살갗으로 파고드는 떨림이 없다. 삶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면한 후에 쓴 텍스트에는 논리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무게와 깊이를 담은 진심이 있다. 논리적 글은 두뇌로 쓸 수 있지만 진심이 담긴 글은 삶으로만 쓸 수 있다.” 머리로 쓰는 사람은 몸으로 겪은 체험이 없다. 그래서 자꾸 설명한다. 몸으로 겪은 체험이 많은 사람은 머리로 말하지 않고 몸으로 설득한다.   

   


④ 양식을 설명하지 말고 상식을 어루만져줘라     


거의 모든 글쓰기 작가가 강조하는 철칙은 가급적 짤막하게 끊어서 단문으로 써라다. 촌철살인의 지혜는 모두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단순함은 치열함의 산물이고 복잡함은 나태함의 산물이다. 생각이 복잡하면 글도 복잡해진다. 복잡한 생각을 중언부언하면서 설명하면 머리가 아파진다. 힘겹게 논리적으로 이해를 시켰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 않는다. 글은 감동을 줘야 한다. 감동이 없는 글은 독자에게 죄악이다. 어려운 전문용어를 동원해서 쓸수록 ‘지식의 저주’에 걸리기 쉽다. 지식의 저주는 전문가가 비전문가에게 전문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면 못 알아듣는 비전문가의 안타까운 마음을 전문가가 몰라줄 때 발생한다. 감동은 의미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고 오지 않는다. 의미를 머리에 꽂으면 골 때리지만 의미를 심장에 꽂으면 의미심장해진다. 감동은 의미심장함이 가슴 깊이 와 닿을 때 온다. 감동은 ‘양식’에 호소할 때보다 ‘상식’을 어루만져 줄 때 다가온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슬프다는 감정을 설명하지 말고 슬픈 표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어루만져야 독자는 비로소 슬픈 감정을 가슴으로 느낀다. 노명우 교수의 《세상 물정의 사회학》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특히 이 책에 나오는 상식과 양식의 의미심장한 차이에 주목해보자. 상식은 상냥하고 어루만져주는 어투를 사용하지만, 양식은 훈계적이고 공식적이고 엄격한 말투를 사용한다. 상식은 나를 이해해주는 연인 행세를 한다면 양식은 냉정한 심사위원과도 같다. 양식에 호소하며 설명하고 선전하는 고전이나 양서는 서가에 꽂혀 있고 상식을 어루만지며 설득하고 선동하는 베스트셀러는 가판대에 누워 있다. 책이 나오자마자 서가게 꽂히는지, 가판대에 누워있는지에 따라 그 책의 운명이 바뀐다. “창작이라는 것은 본래 왼쪽에서 뛰는 심장이 시켜서 하는 일입니다(193쪽).”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 나오는 말이다. 논리적 설명으로 일관하며 자기주장의 옳고 그름을 피력하는 책은 양식으로 품위를 갖추려고 노력한다. 주로 사람들의 좌뇌를 공략하며 의미를 머리에 꽂으려고 한다. 그럴수록 그 의미는 난해하고 옳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와 닿지 않는다. 반면에 상식을 어루만지는 책들은 주로 우뇌적 상상력을 자극하며 감성적으로 설득해서 의미를 심장에 꽂는다. 심장에 꽂힌 의미가 의미심장해진다. 좌파적 상상력은 발칙하고 도발적이며 선동가 스타일에 가깝다. 사람을 흥분시키고 감정을 휘저으며 행동하게 만든다. 글의 독자의 마음을 훔쳐 흥분하게 만들고 감동을 선사해서 행동하게 만드는데 목적을 둔다.      



먼저 주제 파악이 안 되면 소재를 엮어서 쓰기 시작하라     


주제는 글이나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이 책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무엇을 독자에게 심어주고 싶은지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주제다. 보통 글을 쓰는 사람은 쓰기 전에 무엇에 관해 쓰고 싶은지를 결정한다. 예를 들면 주제가 한계에 도전해봐야 한계를 알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으면 주제는 한계는 한계상황에 몸으로 도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난공불락의 적이라는 주제로 글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주제가 파악되면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주장할 소재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소재는 다 글감이 될 수 있지만 누구나 일상에서 흔히 만나지만 다르게 볼 수 있는 자극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틀에 박힌 소재를 평범한 방식으로 나열하면 독자는 바로 싫증을 느끼고 더 이상 읽기를 포기한다. 같은 사건과 사고를 경험했어도 그것에서 뒤통수를 치는 역발상을 유도하거나 평범한 일상이지만 비상하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를 활용하면 금상첨화다. 소재는 내가 직접 겪은 직접 경험도 되지만 다른 사람이 쓴 책이나 영화 또는 드라마 같은 곳에서 얻은 간접 경험도 된다. 문제는 동일한 소재지만 그 속에서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와 시사점을 던져줄 것인지는 전적으로 저자의 소재 요리에 달려있다. 똑같은 소재라고 할지라도 어떤 관점에서 그 소재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가치를 창조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글감으로 작용한다. 결국 사실로서의 소재가 사유를 촉진하는 생각의 매개체로 작용하려면 저자가 해당 소재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 싶은지, 의도에 따라 소재의 의미는 독자에게 다르게 다가간다. 하지만 주제 파악이 분명하지 않을 경우 글을 쓰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수많은 소재를 수집했지만 소재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떠오르지 않을 때 우선 소재를 구슬에 꿰듯이 연결시켜 글을 쓰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생각지도 못한 글의 지도가 그려지면서 주제가 부각된다. “때로는 잘못탄 기차가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준다”는 파울로 코엘료의 말처럼 가끔은 분명한 주제 의식 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글을 쓴다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 당황하지 않고 계속 쓰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지만 기대를 능가하는 놀라운 주제가 떠오르는 행운을 맞이한다. 주제 파악이 안 된다고 파악될 때까지 기다리다 소재 자체도 파악되지 않고 소실된다. 개별적 소재가 산재하면 다양한 소재를 하나의 주제로 꿰는 주제가 생각나지 않지만 일단 소재와 소재를 연결하면 점과 점이 연결되어 생각지도 못한 선이 탄생하듯 내 글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갈 주제가 주인처럼 나타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낯선 분야와의 마주침으로 나만의 독창적인 언어를 창조하라     


“개념은 여행을 한다...개념의 은밀한 이동 덕에, 어쨌거나 분과학문들은 질식 상태와 혼잡에서 벗어났다...브누아 망델브로는, 위대한 발견이란 개념이 어느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할 때 발생하는 실수의 산물이라고 했다”(182쪽). 에드가 모랭의 《복잡성 사고 입문》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식생태학자이자 지식산부인과의사라는 브랜드 이름을 좋아한다. 지식경영학과 생태학의 낯선 마주침으로 지식생태학을 창조했다. 지식과 산부인과 의사를 접목시켜 지식산부인과의사를 창안, 지식 임신과 지식 자연분만법을 독창적으로 연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자기만의 문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자기 분야를 남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독창적인 언어와 언어구사법을 창조한다. 똑같은 문제나 이슈를 글로 쓰지만 어떤 사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작가 특유의 방식을 표현하는 독특한 논리체계와 언어를 활용한다. 주강홍 시인의 ‘용접’이라는 시에서 용접을 매개로 인간적 접촉을 색다른 언어로 녹여낸다. “상처에 상처를 덧씌우는 일이다/감당하지 못하는 뜨거움을 견뎌야 하는 일이다/한쪽을 허물고 다른 한쪽을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애써 보지 말아야 할 일이다/처절한 비명 참아야 할 일이다/그리하여 끊어진 한쪽을 찾아야 할 일이다/이질이며/동질이다/불이(不二)다.” 이질이며 동질인데 불이(不二)다. 둘인데 하나이며 하나인데 둘이 되는 용접의 속성을 이용하여 이질적 접목을 통한 새로운 창조를 말한다. 나 역시 한 때 용접으로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한 적이 있다, 이질적 철판을 용접하다 지금은 이질적 지식을 용접하는 지식 용접공(Knowledge Welder)이라는 나만의 언어를 만들었다. 지식 용접은 남들이 흔히 말하는 지식 융합을 나의 체험적 언어로 재해석한 개념이다. 언어가 내 몸을 관통하면서 남긴 흔적을 축적해서 조어한 신생어다. “약자는 달리 약자가 아니다.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 자기 언어가 없으면 삶의 지분도 줄어든다.”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에 나오는 말이다. 글을 쓸 때마다 내 삶을 드러낼 나만의 적확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자문해본다. 언어가 삶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나친 언어적 수사로 삶이 왜곡되고 있지는 않은지. 언어가 삶을 가리고 정면에 드러나 뽐내고 있지는 않은지를 물어본다. “시에서 삶이 안 보이고 언어만 보인다. 시가 삶에 작용할지 자문하라.“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라는 시집을 5년 만에 낸 장석남 시인을 소개하는 신문 기사에서 만난 문장이다(참고: 조선일보, 2017. 12.6일 자 기사). 사실 여기서 말하는 시는 모든 글로 대체해도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글에서 삶이 안 보이고 언어만 보인다. 글이 삶에 작용할지 자문하라.“ 글과 따로 노는 삶, 삶을 녹여내지 못하는 글, 사는 대로 글을 쓰지 않고 삶과 유리된 관념적인 글이 될 때 글에서 삶이 보이지 않는다. 그 순간 관념어만 고개를 들고 허공을 대고 손짓을 한다.       



화려하게 꾸미기 전에 사실의 텃밭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가꿔라  

   

노자(老子) 45장에 보면 대직약굴大(直若屈)하고 대교약졸(大巧若拙)하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큰 바름은 굽은 듯하고, 큰 기교는 서툰 듯하다는 말이다. 훌륭한 기교(技巧)는 도리어 졸렬(拙劣)하게 보이는 이유는 기본이나 근본에 충실하지 않고 겉으로 꾸미기만 하다가 오히려 본질을 잃고 외형만 화려해졌기 때문이다. 아주 교묘(巧妙)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오히려 그 재주를 자랑하지 아니하므로 언뜻 보기엔 서투른 것 같다는 뜻도 지닌다. 글도 마찬가지다. 독자의 감동은 화려한 어휘력 구사와 수사학적 기교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는 작가의 진솔한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본인이 직접 겪으며 깨달은 체험적 교훈에 감동받는다. 진정성을 갖고 자기가 살아오며 겪은 체험적 스토리를 가감삭제 없이 진솔하게 사실 중심으로 털어놓을 때 오히려 더욱 울림이 큰 글이 나온다. 자기만의 이야기의 텃밭을 가꾸기 전에 장식을 하고 포장하는 꾸미기에 전력할 때 오히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숨겨지고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한다. 집으로 따지면 터전을 마련하고 정초를 튼실하게 잡은 다음 기둥과 골조를 구축하고 석가래를 얹어야 집의 본색이 드러난다. 그 집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그다음이다. 정초와 기둥이 없는 데 천장이나 지붕을 아름답게 꾸밀 수 없다.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어디서 빌려온 남의 문장이나 수사력을 동원하고 난삽한 개념을 사용할수록 독자는 작가의 글쓰기에서 믿음의 텃밭을 가꾸지 않는다. 꾸미면 꾸밀수록 독자의 감동에서 멀어지고 마침내 싫증을 느끼며 다시는 그 글을 보지 않는다. 비록 어눌한 글이지만 어디서 볼 수 없는 작가 특유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날 때 독자는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고 작가의 스토리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책에서 배운 수사학적 기교를 현란하게 구사하고 난해한 철학적 개념을 동원해서 자기 논리를 펼치는 글이 좋은 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글밭이 가꾸어지지 않을 때 독자는 더 이상 작가의 글밭으로 다가와 사유의 열매를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 진심이 담긴 삶의 얼룩과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어야 나중에 문학적 수사력을 동원해서 꾸미기가 가능하다. 가꾸기 전에 꾸미면 영혼이 없는 글자가 배치된 종이 책을 양산할 뿐이다.

     


⑧ 틀에 박히지 말고 틀 밖에서 어제와 다름을 추구하라  

   

글 쓰는 사람이 공부를 게을리하면 틀에 박힌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다. 남이 이미 사용한 언어를 그대로 복사해서 사용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눈에 익숙한 관습적 표현을 거리낌 없이 글에 사용한다. 김근배 교수의 《끌리는 컨셉 만들기》에 보면 컨셉은 무기이며 동시에 족쇄라고 한다. “개념에 붙잡힌 마케터의 생각은 고정관념이 되어 창의성을 제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개념에 사로잡혀선 안 될 때가 있습니다”(222쪽). 우리가 끊임없이 개념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개념을 습득하거나 기존 개념을 다시 정의하면서 세상을 다르게 보려는 노력을 부단히 전개해야 되는 이유다. 자기 분야는 물론 다른 분야를 끊임없이 공부하지 않는 작가는 타성에 젖어 살면서 어제와 비슷한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나태함에 빠지기 시작한다. 작가가 사용하는 개념과 표현이 식상해진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치열한 문제의식을 갖고 색다른 공부를 멈추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에 보면 “있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없앤다”(24쪽)는 원칙이 나온다. 모든 글에 ‘있다’, ‘것’, ‘수’라는 단어를 모조리 없애기만 해도 글의 활력이 생긴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문장에서 “수 있을 것”이라는 문장을 뻬고 “그렇게 말씀 드립니다”로 바꾸면 틀에 박힌 표현에서 벗어나 문장의 생명력을 얻고 활기를 띤다. 이런 단어를 무의식에 반복해서 사용하는 작가는 언어 선택의 불성실함과 나태함을 드러낸다. 비슷한 맥락에서 김정선의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에 보면 “적·의를 보이는 것들” 역시 모조리 처단할 때 살아있는 문장이 탄생된다고 말한다. 접미사 '―적(的)'과 조사 '―의', 의존명사 '것'과 접미사 '―들'이라는 말은 마치 경찰이 단속해야 할 상습범 같은 말이라는 주장이다. ‘사회적 현상'은 '사회 현상',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 해결', '내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는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로 군살을 빼라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모든'으로 수식되는 명사에는 '―들'을 붙이지 않는 게 자연스럽다. '모든 아이들이 손에 꽃들을 들고 자신들의 부모들을 향해 뛰어갔다'는 문장이 있다면  '모든 아이가 손에 꽃을 들고 자기 부모를 향해 뛰어갔다'로 고쳐 써야 문장에 생기가 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끝내지 말고 여운을 남기는 질문을 던져라     


관심을 유발하고 욕망을 자극하는 섬광(閃光)과 환상을 심어주고 기대감을 유발하는 발광(發狂)으로 시작한 작품은 애간장을 태우고 긴박감을 조성하며 열광(熱狂)을 일으키다 이제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진한 여운을 남기는 각광(脚光) 받는 결론 단계에 도달했다. 결론을 읽고 나면 작가가 남긴 최후의 일격 속에 숨겨둔 끝나지 않는 여운과 호기심의 물음표가 감동과 감탄을 자아내고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결론은 작가가 미리 준비한 주장을 제시하고 마치는 닫힌 문이 아니다. 오히려 결론은 새로운 의문이 시작되는 관문이다. 결론은 글이나 책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결론은 작가의 글이 끝나지만 새롭게 독자의 상상력이 시작되는 끄트머리다. 끝이지만 그 끝에 머리, 즉 출발과 시작을 알리는 지점이 끄트머리다. 결론까지 참고 읽어준 독자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은 작가가 내린 화룡점정의 결말이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관문의 제시다. 관문은 질문으로 시작된다. 작가가 만든 상상력 비행기로 비상하며 날아왔지만 이제 그 비행기는 또 다른 이륙을 위해 착륙했다. 작가의 비행기는 착륙했지만 그 지점에서 독자의 비행기는 이륙을 준비할 때다. 말문을 막으면 말이 답답해하듯 결론을 작가의 주장으로 막아버리면 독자의 상상력도 거기서 멈춘다. 작가가 결론을 내리지 말고 독자가 읽는 바를 저마다의 체험 구조로 해석하면서 다르게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막힌 관문도 열어주는 새로운 가능성이다. 완벽한 주장과 충분한 설명으로 끝을 맺는 순간 독자는 배가 부르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진다. 결핍이 채우려는 욕망을 부추기듯 모자란 듯이 끝나는 결말에서 독자는 새로운 궁금증과 호기심의 싹을 틔운다. 작가가 문제를 제시하고 해답을 주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보다 독자 스스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며 해결할 숙제를 남겨둬야 다양한 해석과 오독 가능성이 생긴다. 작품은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독자가 제2의 창작을 시도하면서 작가의 작품과 전혀 다른 수많은 다른 작품으로 탄생을 거듭한다. 작품의 뒷맛은 작가가 만든 요리에서 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가 저마다의 주관과 의견으로 조리한 요리에서 더 감칠맛이 난다.



⑩밥먹듯이 매일 일정한 시간에 습관적으로 써라     


밥먹듯이 주기적으로 써라. 김훈 소설가는 1일 5 매라는 글쓰기 원칙을 철칙처럼 따른다고 한다. 하루 원고지 5장은 무조건 쓴다. 나도 매일 쓴다. SNS에 올리는 글은 SNS 유형에 따라 조금 다르다. 주로 장문의 형식을 갖춘 글은 주로 브런치에 쓴다. 브런치에 쓴 글을 페북이나 블로그에 링크시켜 공개하되 카카오 스토리나 페이스북은 글 전체를 요약해서 덧붙인다. 블로그는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서 올리는 나의 지식창고다. 인스타는 주로 이미지 중심으로 짧은 글을 촌철살인 방식으로 쓴다. 글은 생각날 때마다, 글감이 영감으로 갑자기 다가올 때마다 무조건 써야 한다. 쓰지 않으면 쓰러지지만 쓰면 쓰임도 달라진다. 작가가 되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쓴다. 그 길만이 내 삶을 글로 녹여내는 작가가 되는 길이다. 뭐든지 밥먹듯이 하면 된다. 변함없이 글을 쓰면 글이 변한다. 습관적으로 글을 써야 글 쓰는 습관이 생긴다. 글 쓰는 습관이 생기면 쓰지 않으면 못 배긴다. 마치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 고프듯, 글을 쓰지 않으면 손가락이 허전하다. 글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한 주제를 내가 동원하는 단어를 문장으로 만드는 가운데 탄생된다. 머릿속 생각이 그대로 글로 표현되지 않는다. 생각과 글 사이에는 언제나 좁히기 어려운 간극이 존재한다. 생각은 많지만 그대로 글로 옮겨지지 않는 이유는 글쓰기 근육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대로 행동에 옮겨지지 않는 이유도 생각한 바대로 습관적으로 몸을 움직여 행동하면서 근육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대로 행동에 옮겨지려면 생각을 반복해서 실천에 옮겨봐야 한다. 그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밴 행동양식이 생긴다. 그 행동양식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할 때 생각은 행동과 일치하면서 비로소 생각대로 행동이 변화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글감을 갖고 생각이 풍부하다고 할지라도 그 생각을 글로 옮기는 글쓰기 습관이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생각을 글로 옮기는 글쓰기 근육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생각은 여전히 글과 거리를 두고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완벽한 문장을 쓰겠다고 생각할수록 완벽하게 쓰지 못한다. 생각나는 아이디어, 글감, 소재나 주제가 떠오를 때마다 무조건 붙잡아 메모하고 기록한다. 기록하면 기억을 능가하고 기록의 축적이 글쓰기의 기적을 낳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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