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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인간,  오묘한 숲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다

《숲에게 길을 묻다》를 읽고

오만한 인간, 오묘한 숲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다

숲에게 길을 묻다를 읽고     


김용규(2019). 《숲에게 길을 묻다(개정판)》. 서울: 비아북.     



모든 생명은 태어나서 성장하며 나를 찾아가다 결국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계로 돌아간다. 한 생명체가 일생을 통해 겪는 생로병사를 숲을 관찰하며 얻은 자연의 대서사시를 춘하추동을 보내며 겪는 생명체의 향연이 숲 속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생동감 있게 보여주는 이 책은 저자의 삶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성찰에서 시작합니다. 30대 중반 작은 벤처 기업의 CEO로 탄탄대로의 길을 열어가다 바쁘게 열심히 살아갈수록 삶이 점차 피폐해짐을 느낍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할 삶에서 나는 노예처럼 일하면서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 관계를 둘러보는 여유로운 사색과 성찰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앞만 보고 달리는 삶에서 염증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려 도시를 떠나 전기도 안 들어오는 숲으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살기 시작합니다. 익숙했던 자본주의적 삶과 도시 삶을 버리고 척박한 숲 속 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은 두려움과 결단의 위험도 감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스스로에게 물어본 질문이 있습니다. 정말 나답게 살아가는 길은 무엇일까?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면서도 튼실한 연대와 관계, 상생과 경쟁 속에서 자연의 대 하모니를 연출하는 숲이 주는 삶의 지혜를 매일 관찰하며 온몸으로 느끼는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이 책은 삶의 전환점에서 결단을 내리고 결연한 행보를 시작한 한 사람이 숲 속 삶으로 얻은 자연의 지혜를 깨달음의 언어로 변주하며 들려주는 생태학적 교향곡입니다.     



생명은 관계와 연대 속에서 흐름으로 존재합니다     


왜 나이 들수록 숲은 황홀하고 인간은 황망해지는가? 그 답을 숲에서 찾습니다. ‘숲에서 배우는 삶의 철학과 지혜’를 바탕으로 성공 패러다임에 젖어 앞만 보고 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자연파괴적인 삶의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폐해와 역기능을 고발합니다. 목표 중심으로 살아가며 효율을 추구하고 어제보다 더 빠른 속도로 더 많은 성과를 창출하는 현대인들에게 무한 반복되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고 진정 내가 누구인지, 나를 찾아 떠나는 참다운 여행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진정한 삶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의 목차를 보면 모든 생명체의 순환하는 삶의 주기가 보입니다.      

1막 태어나다: 선택할 수 없는 삶,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2막 성장하다: 내 모양을 만드는 삶,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3막 나로서 살다: 나를 실현하는 삶, 나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4막 돌아가다: 다시 태어나는 삶,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태어나서 성장하며 나를 찾아가며 살다 결국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자리로 돌아가는 삶의 선순환 과정에 따라 생명체가 어떻게 자연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지, 특히 나무의 탄생과 성장과 소멸의 과정에 비추어 숲의 생태계가 보여주는 변화무쌍함에서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알려줍니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태어남과 동시에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하며 운명을 개척해갑니다. “나는 ‘운명(運命)’을 ‘숙명(宿命)’과 다른 개념으로 정리합니다. 그것은 뜻 그대로 ‘명(命)’을 운영하는 것입니다. 거스를 수 없는(不可逆) 것이 아니라 거스를 수 있는(可逆) 대상입니다. 이는, 태어나는 자리와 그 관계는 거스를 수 없지만, 그 자리에서 자기 삶의 방향을 선택하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자율과 자기 통제의 뜻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49쪽). 태어나는 자리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하지만 태어난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내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운명입니다. 거목 아래 떨어져 햇볕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온 힘을 다해 기어코 하늘을 열어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이고 사력을 다해 살아가는 숲 속의 생명체에게 선택할 수 없는 삶을 선택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의 생존 축제이자 향연을 보여줍니다. “‘인-과’라는 직선성보다는 ‘인-연-과’라는 곡선성은 더디고 덜 선명하며 자못 복잡하여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5쪽). 직선적 패러다임은 원인이 있으면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선형적 인과관계를 상정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결과가 있으면 그것을 일으킨 원인을 직선적으로 예측하고 결정합니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게 단선적인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결과가 발생했지만 그 원인이 하나가 아니라 복잡합니다. 인과가 직선으로 연결되지 않고 곡선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습니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자연에는 홀로 존재하는 외로운 대상은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관계와 연대로 엮여  드러나는 복잡한 연쇄 고리의 산물입니다. “대상으로 취급되는 모든 존재는 쓸쓸합니다……한 존재가 대상화의 함정을 뛰어넘어 다른 ‘존재’와 깊게 마주할 수 있을 때 삶은 훨씬 풍성해집니다”(6쪽). 대상을 주체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은 그 자체가 폭력입니다. 그냥 거기에 존재하는 객체는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생명 공체는 관계와 연대가 생명입니다. “생명은 오직 연대와 관계 속에서만 생명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119쪽). 생태계는 어떤 생명체도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때로는 경쟁이 우세하게 작용하지만 결국은 모두 상생하는 생명체의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알 수 없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생명은 그렇게 아주 복잡한 관계의 망으로 얽히고설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복잡한 관계의 망 속에서 누군가를 돕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자라고 꽃 피우고 열매 맺으며 성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생태계는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생명의 그물망’인 것입니다”(120쪽). 생태계는 그 자체가 관계이며 연대입니다. 관계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존재는 관계가 그 의미와 가치를 만듭니다.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생명은 관계와 연대 속에서만 생명체로 거듭나며 성장하고 소멸하며 순환합니다. 관계와 연대 속에서 순환하는 생명체만이 생태계를 이루는 거대한 우주와 자연의 일부가 됩니다.  

   


인간은 학교에서 배우지만 자연은 나다움을 스스로 배웁니다     


자연의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법으로 스스로 터득합니다. “신은 생명들에게 학교를 세워주지 않았습니다”(30쪽). 학교에 가지 않고서도 앞서 살아간 선각자는 후세들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지혜를 매일매일 반복되는 삶을 통해 꾸준히 전수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어야 할 가장 큰 가치는 바로 ‘자식이 스스로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177쪽). 자연의 모든 생명체는 자식에게 홀로서기를 가르치지만 사람은 너무 극심한 보호막으로 가리고 온실 속의 화초 재배하듯 기릅니다. 이 책에서도 소개한 큰 오색딱따구리도 알을 깨고 나온 새끼들에게 극심한 보호를 하면 먹이를 자주 주다가 점차 먹이 주는 시간 간격을 늘리면서 둥지 밖으로 끌어냅니다. 그리고 점차 푸른 창공을 날아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홀로서기를 일찍부터 가르칩니다.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고유한 개성을 지닙니다. 홀로서기 방식도 다르게 가르치고 다르게 배웁니다. 한 생명체에게 통했던 방식은 또 다른 생명체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자연의 모든 생명체는 그래서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나는 생명의 가장 귀하고 소중한 특성을 바로 대체 불가능성에서 찾습니다. 그대가 낳은 아이를 다른 이의 아이와 바꿀 수 있습니까?”(32쪽). 대체 불가능성을 지닌 생명체로써 인간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남들처럼 살아가려고 노력하다 나다움을 잃어버리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다 죽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나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말처럼 “길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다시 말해 세상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찾아내지도,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자신이 맺고 있는 무한한 관계를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34쪽). 이렇게 저렇게 시도하면서 주어진 환경에서 어떤 방법이 최선의 대책인지, 어떻게 살아가는 길이 자기다움을 드러내는 길인지 모든 생명체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경험하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다움을 드러내는 삶의 길을 몸으로 익힙니다. 그래서 각자 다른 삶의 터전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 눈에 누추해 보이는 곳이나 그저 길섶에서 자라는 어느 풀 한 포기, 어느 나무 한 그루라도 이유 없이 자라는 생명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뿌리를 뻗고, 키를 키우고, 꽃을 피워대느라 고단하지 않은 초목이 없는 것입니다”(64쪽). 그냥 거기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경험적 노하우를 총동원해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방식임을 몸으로 익혀 지금 여기서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을 수용하지 않고 열 수 있는 하늘은 없고, 시작하지 않고 넘을 수 있는 벽은 없습니다. 거목 아래서 자라는 신갈나무가 하늘을 여는 방법이 그러하고, 커다란 벽 앞에 선 담쟁이덩굴이 벽을 넘는 방법 또한 그러합니다”(67쪽). 무조건 시작해야 길이 열립니다. 시작하지 않고서는 어떤 길이 최선의 길인지, 어디가 한계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서서 세상을 관망해서는 내가 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나다움은 치열하게 일해야 드러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떤 일이든 내가 그 일의 주인으로 일하면서 일하는 보람과 즐거움을 느껴야 합니다. 노동이 아니라 놀이로서 나를 어제와 다르게 발전시킬 수 있는 무한한 잠재성을 믿으며 하루하루 희망을 품는 일이 나를 나답게 살려내는 길로 인도합니다. “이 결심에 녹아 있듯이 일과 노동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내가 그 일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일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하고 자존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타인의 이익을 빼앗아 나를 살찌우려는 비열함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일에서 창조의 기쁨을 얻어낼 수 있을 때 더 흥겨울 것입니다. 나아가 세상의 아름다운 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면 내가 사람이라는 생명체로 이 별을 거쳐갈 수 있는 축복과 은혜를 받은 것에도 어느 정도 보답할 수 있겠지요”(190쪽). 자립을 넘어 자존감을 지키고 자발적으로 일해서 자율성을 확보하는 일, 그래서 자기를 어제와 다르게 늘 탄생시키는 일을 거듭할 때 점차는 나는 나답게 살아가는 길로 접어듭니다. “누군가에게는 그 일이 시시포스의 형벌과도 같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징검다리와도 같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나로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일이란 '그 자체로서 자신의 목적이 될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활동'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180쪽). 일 자체가 목적일 때 자신의 전부를 걸고 끊임없이 잘하는 방법을 찾아봅니다. 자신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바로 리처드 세넷이 《장인》에서 말하는 장인의 이상입니다.      


“나무들의 노동은 인간만큼 치열합니다. 그들은 매일매일 노동에 철저함으로써 자신의 세상을 창조해갑니다. 해가 뜨면 이곳에서 눈이 저절로 떠지듯, 잎의 세포들도 자동적으로 노동을 향한 기지개를 켭니다. 땅 속 뿌리로부터 시작한 물은 줄기와 가지를 타고 오르기 시작합니다. 앞의 구석구석으로 연결된 잎맥을 타고 물은 마침내 햇살을 맞이합니다. 그것으로 그들은 하루의 노동을 시작하고, 자신의 키를 키우고, 매일매일 자라서 자신의 하늘을 엽니다”(199쪽). 나무는 무엇을 달성할 목적으로 지금 여기서 뭔가를 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가을 단풍을 만들기 위해서 봄부터 여름까지 노력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꽃과 열매를 맺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찾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삶이 곧 함이고 그 함이 곧 앎입니다. 해가 뜨면 그 해를 이용해서 광합성을 해내지 못하면 자신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갑자기 비가 올 수도 있고 장기가 해가 뜨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어진 여건과 환경에서 치열하게 노동하는 일, 그 자체를 위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신의 삶을 확보하고 어제와 다른 성장을 이루면서 쉬지 않고 노동합니다. 낮에는 치열하게 노동하고 밤이 되면 나무도 하던 일을 멈추고 쉼의 모드로 전환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치열한 노동을 전개할 에너지를 얻지 못합니다. “세속에 휘둘리지 않고 나답게 성숙하고 싶다면 하루를 잘 눕히고 보듬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하루하루의 노동이 더욱 자기다워져야 하고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성숙한 삶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나무처럼 일하고 나무처럼 쉴 수 있어야 합니다”(196쪽). 하루의 노동에 감사하고 내일이 오늘과 다르게 펼쳐질 가능성에 스스로를 성찰합니다. 나무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과학의 현란함도 실은 태양의 관용 아래서만 가능한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74쪽). 태양이 주는 무한한 혜택을 벗 삼아 내일도 치열하게 있는 그 자리에서 자리를 지킬 뿐입니다.     



나무를 비롯해 모든 생명체는 버리고 경쟁하면서 끊임없이 소통합니다    


나무는 버리고 상처 받으면서 자랍니다. 버리지 않으면 생태계에서 버림받습니다. “나무의 경우 폐기는 스스로 잎이나 가지를 버리는 것이고, 상실은 희망하지 않는 사건으로 타의에 의해 잎이나 가지를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실은 바람, 눈, 벼락 따위의 아픈 운명에 의해 생길 수 있는 결과이고, 폐기는 삶을 성장시키거나 유지하기 위한 자발적인 구조조정의 결과인 셈입니다. 나무는 끊임없는 구조조정을 통해 성장합니다”(87쪽). 내 힘으로 버리고 어쩔 수 없이 잃어버리는 상실 덕분에 나무는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버리지 않고 상실의 상처가 주은 아픔이 없다면 성장도 없습니다. “숲의 나무가 그러하듯이 삶은 모색과 버림과 상실을 통해서 이어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쌓은 모색과 버림과 상실 중 아름다움이 깃들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90쪽). 학습에도 버리는 학습(unlearning)이 있습니다. 버리고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학습이 선행되지 않으면 다시 배우는 학습(relearning)도 없습니다. 먼저 버리고 상처 받지 않으면 그 위에 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생명체는 또 다른 생명체와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버리지 않고 경쟁에 뛰어들었다가 오히려 더 큰 상실의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내 몸집을 최소한으로 만드는 버림을 통해 나의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하는 나목처럼 철저하게 나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나를 들러싸고 있는 껍데기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체가 보여주는 치열한 경쟁은 인간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투쟁하듯이 전개하는 경쟁과는 다릅니다. “이렇듯 나무와 풀들이 보여주는 경쟁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타자를 누르고 이기는 것만을 선을 삼지 않습니다. 더러 칡덩굴처럼 타자를 휘감아 결국 타자를 해치는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식물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영역을 넘어 타자의 영역을 빼앗음으로써 자신을 성장시키는 무리한 경쟁에 골몰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자신을 꽃피우기 위한 공간을 열기 위해 오로지 자신과 다툽니다”(109쪽). 타자를 죽이고 나만 살겠다는 경쟁이 아니라 나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확보해야 되는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입니다. “오히려 숲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요, 새로운 영역의 창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핏빛 대지에서 영혼을 고갈시키며 앞을 다투는 경쟁이 아니라. 나만의 푸른빛이 가득한 공간에 서는 것, 감히 추한 욕망이 넘보지 못할 자기만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 타자를 파괴하여 내 하늘을 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낡은 나날을 부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 경쟁의 요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12쪽). 식물의 경쟁은 인간의 약육강식 경쟁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로지 자기만의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 최소한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사투입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숲 속의 생명체는 자연과 더불어 소통합니다. 에너지를 주고받기 위해 자신을 열고 주변의 변화를 끊임없이 관찰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소통을 계속합니다.     



“사람이건 사회건 성숙한다는 것은 소통의 그릇이 커지는 것이기도 합니다”(158쪽). 소통의 그릇에는 언어가 담겨 있습니다. 식물은 다른 곤충이나 새 또는 식물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다채로운 언어로 끊임없이 유혹의 언어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꽃은 오로지 암수 수술간 수정을 통해 제2의 종족을 보존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꽃은 놀라운 언어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꽃들은 바람에게 말을 걸고, 또 어떤 꽃들은 물과도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주 많은 꽃들은 벌, 나비, 나방, 파리 같은 동물과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드물지만 어떤 꽃들은 새를 불러 자신의 소원을 말하고 새가 그 소원을 들어주면 보답을 합니다”(146쪽). 놀라운 소통법으로 꽃은 유혹의 언어로 다른 생명체를 불러들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떻습니까. 꽃보다 더 정교한 언어가 있고 첨단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로 무장하고 있어도 진정한 소통은 온데간데없고 피상적인 소통만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소통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와 태도의 문제이며 갈급함과 처절함의 문제입니다. 꽃은 수정하지 않으면 자신으로 대가 끊기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더 간절하고 처절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소통의 언어를 개발해온 것입니다. 소통은 나무가 사랑하는 관계를 만드는 매개입니다. 가만히 서 있는 나무 같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상태를 알리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하지 않습니다.   

  

나무의 사랑은 애절하고 처절합니다    

 

나무가 맺는 사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줄기와 줄기가 합일하여 맺어지는 연리목(連理木)입니다. 둘째, 가지와 가지가 합일한 나무를 연리지(連理枝) 입니다. 셋째, 서로 같거나 다른 종류의 나무 둔 그루가 한 공간에 그 한쌍의 나무가 자라면서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모양을 만들어가는 혼인목입니다. 우선 연리목은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의 줄기가 이어져 한 나무로 자라는 현상입니다. “연리목이 되려면 각자의 나뭇 껍질을 벗고 세포와 세포를 합치는 아픔을 감내해야 합니다. 벗은 자리에 생기는 서로의 상처를 기꺼이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에 세포까지도 하나로 결합해야 되는 때가 있습니다. 나의 살을 내어주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경지입니다. 우리가 연리목처럼 옆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고자 한다면 나의 몸과 마음을 열고 세포의 칸막이까지도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165-166쪽). 상처를 내지 않고서는 서로가 합일의 꿈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각자의 몸에 난 상처를 보듬어 주면서 상처와 상처와 맞닥드릴 때 비로소 하나로 합일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 열립니다. 참참으로 고통스러운 사투 끝에 피는 상처의 아름다움이 상생하며 자라는 새로운 운명의 문을 열어갑니다.     



둘째, 나무가 열어가는 아름다운 사랑은 연리지를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연리목을 이루는 것도 쉬운 잊은 아니지만 연리지가 되는 것은 연리목에 비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바람의 훼방 때문입니다. 가지와 가지가 맞닿아 하나로 합쳐지려 할 때 거센 바람이 불면, 줄기에 비해 가늘고 가벼운 가지는 속절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수한 흔들림 속에서 서로가 합쳐지는 것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야속한 바람을 넘어서서 끝내 합일을 이루어낸 것이 바로 연리지의 사랑입니다. 깊은 사랑입니다”(164쪽). 온갖 사랑 방해꾼을 물리치고 힘겹게 맞닥드린 사랑의 불씨는 마침내 타오르는 불꽃의 힘으로 두 가지 나뭇가지를 하나로 합칩니다. “이들의 사랑은 서로 자신의 살을 내어주지 않고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두 그릇의 나무가 한 그루로 합일한다는 것은 이렇게 살을 에는 아픔을 딛고 이룩하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수백 년을 거쳐 이루게 되는 완성입니다”(165쪽).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부단한 접속을 시도하다 마침내 손잡고 이루어낸 세기의 사랑은 가지에 맺힌 상처와 상처가 만나 새살을 만듭니다. 그렇게 너의 손길은 내가 되고 너의 손길은 내가 되면서 서로 다른 가지는 한 가지로 접속됩니다. 여러 가지 중에서 두 가지가 만나 끈길 긴 노력 끝에 한 가지로 자랍니다. 한 가지로 교환되는 에너지는 두 나무를 더욱 뜨겁게 연결시키는 사랑의 통로입니다.    

 


셋째, 나무가 사랑해서 탄생한 관계는 혼인목(婚姻木)입니다. “이들은 좁은 공간에서 어울려 살기 위해 서로에게로 뻗는 가지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필요할 때는 빈 공간을 찾아 뻗어나가기도 하면서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조화를 이룹니다. 연리목이 제 살을 내어주며 하나로 합일하는 사랑이라면 혼인목은 서로의 가지를 떨어뜨려 서로의 공간을 열어주는 사랑입니다. 혼인목의 사랑은 옆의 나무로 향하는 날 선 가지를 떨어뜨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360도로 돌아가며 뻗는 나뭇가지 중 그에게로 향한 모든 가지를 하나, 둘 떨어뜨리는 것으로 그에게 그늘을 만들지 않으려는 사랑입니다. 그가 허용한 공간으로만 나의 가지를 뻗으며 마치 둘이 하나인 것처럼 나무의 모양을 완성하는 사랑입니다”(166쪽). 놀라운 배려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지극한 배려와 존중의 결과입니다. “혼인목의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를 위해 각자의 욕망을 덜어내어 완성되는 사랑입니다. 나도 있고 그도 있는 사랑입니다. 서로 다른 둘의 내가 만나 하나를 이루는 사랑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인연을 수용하는 사랑입니다. 그와 나의 만남을 우주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나도 그도 제각각 욕망의 덩어리임을 인정한 채 불편한 공간을 극복해가는 사랑입니다. 나를 위해 뻗은 소중한 가지의 일부를 떨어뜨리는 사랑입니다. 그녀 또는 그에게 그늘이 될 수 있는 나의 가지를 부단히 거두어들이는 사랑입니다. 상대를 누르려는 내 가지의 영양분을 차단하고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는 성찰과 노력이 함께함으로써 이루는 사랑입니다”(166-7쪽).      



상생하는 지혜가 공존(共存)의 기본이자 공영(共榮)의 날개입니다     


나무가 보여주는 세 가지 사랑의 공통점은 “이 모든 것이 오랜 시간 서로를 바라보는 과정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순간순간 불편함을 겪으며 긴 시간을 함께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경지입니다”(168쪽). 하루아침의 욕망에 이끌리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아픔을 이해한 상대가 타자를 지극한 마음으로 대하는 자세와 태도입니다. 사랑에는 생태계의 운영 원리인 상생(相生)이 작용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배려하는 차원을 넘어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오랜 시간의 성장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상생(相生)을 한자로 써보면 '서로를 살린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나무 한 그루 속에도 고스란히 존재합니다. 상생이라는 단어에서 서로를 뜻하는 '상(相)‘자는 '나무(木)'와 '눈(目)'이 합쳐져 그 뜻을 이루는 글자입니다. 뜻글자와 뜻글자가 합쳐져 새로운 뜻을 만드는, 이른바 회의 문자(會意文字)입니다. 자원(字源)을 풀어 한자의 뜻을 설명하는 책을 보니. ’상‘자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木’과 ‘目‘의 합침. 나무에 올라 멀리 '바라볼' 때 저쪽에서도 마주 바라본다 하여 '서로'의 뜻이 된 자(字)”(209쪽). 나무(木)가 눈(目)을 갖고 서로를 바라봅니다.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눈여겨봅니다.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지만 나무도 곁과 옆에 있는 나무를 살펴봅니다. 평상시에 살펴봐야 상대의 아픔으로 어루만져주며 보살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상생(相生)의 자원을 달리 해석합니다. “나무(木)는 눈(目)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한겨울을 보낸 나무는 저마다의 때를 골라 그 눈에서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웁니다. 잎을 띄우는 눈은 잎눈, 꽃을 틔우는 눈은 꽃눈이라 부릅니다. 잎을 띄울 눈이 없으면 밥을 만들지 못해 죽을 것이고, 꽃을 틔울 눈이 없으면 열매를 만들지 못해 새로운 삶을 잇지 못할 것입니다. 앞 잎과 꽃 두 가지를 하나의 눈에서 틔우는 나무도 있습니다. 이를 혼합눈이라 부릅니다. 그런 나무에게 혼합눈의 부재는 더 위험합니다. 잎도, 꽃도 아무 것도 틔울 수가 없으니 그 나무는 그대로 죽음입니다”(209-210쪽). 그런데 나무의 눈(芽)은 사람의 눈(目)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눈처럼 놀랍게 계절의 변화에 따른 온도 변화를 감지하고 때가 되면 눈에서 새순을 틔웁니다. 보지 않고 보고 있는 나무의 눈(芽)은 사람의 눈(目)보다 신기한 눈입니다. “눈은 나무의 도움 없이는 그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눈이 그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발아(發芽) 시기를 감지하고 눈이 싹을 틔우도록 도와주는 생장 호르몬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나무의 뿌리로부터 만들어져 눈으로 전달됩니다. 나무가 호르몬을 공급하지 않으면 싹은 휴면 상태에 있게 되고, 따라서 제 소임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뿌리의 도움이 없다면 눈은 잎도, 꽃도 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의 모습을 합쳐보면 눈이 없으면 나무도 없고, 나무가 없으면 눈도 없는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나무와 눈, 둘은 뗄 수 없는 '서로'인 것입니다. 나는 나무와 눈이 함께하여 서로를 의미하는 '상' 자가 된 본질적인 연유가 나무의 이런 모습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210쪽). 눈과 나무, 나무와 눈은 서로 힘을 합쳐 새순을 만들고 잎을 만들어 광합성을 하며 다시 성장합니다. 자연에서 터득한 상생의 의미가 오묘하게 다가옵니다.     



낙엽은 식물 각자가 출자하여 만드는 공동 은행과도 같습니다     


“가을은 기울 것들이 기울어가는 계절입니다”(224쪽). 성하의 녹음을 자랑하던 나무들도 가을이 오면 온도 변화를 감지하고 서서히 단풍잎을 만들어 마지막 에너지를 불태웁니다. 그리고 잎으로 가는 모든 에너지를 차단하고 혹독한 겨울을 나목으로 준비합니다. 결연한 나무의 자세에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들이 서로를 위해 부를 쌓는 방식은 낙엽으로 잎을 떨어내는 것입니다. 나무들이 낙엽을 만드는 것은 더 깊은 안식에 드는 의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축재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낙엽은 숲의 모든 식물들이 생장에 쓰고 남은 잉여가치입니다. 질소와 인산과 칼륨처럼 소중한 영양소는 몸속으로 다시 회수하여 저장하고 탄소를 중심으로 하는 부차적인 양분들은 잉여가치로 잎에 남겨둡니다”(225쪽). 자신을 성장시켰던 잎을 낙엽으로 만들어 떨어뜨림으로써 다시 자신을 성장 시키키는 거름으로 만들어가는 재생의 지혜를 숲에서 배웁니다. “식물들은 잎을 숲 바닥에 떨어뜨림으로써 다시 생장의 계절에 쓸 거름을 만듭니다. 수많은 미생물과 지렁이와 곤충과 이끼 등 다른 생명들이 낙엽을 덮고 매만지며 살아갈 것이고, 결국에는 이를 흙으로 되돌려놓습니다. 궁극적으로 나무는 흙 속으로 돌아간 양분을 흡수하며 해를 잇는 자신의 욕망을 펼칩니다. 낙엽은 식물 각자가 출자하여 만드는 공동 은행과도 같습니다. 벌거벗은 나무들의 키는 봄과 다르고, 그 나른 만큼이 그들의 성장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로 남을 뿐입니다. 오로지 그것만이 자신의 부로 남고, 폐기하는 낙엽들은 서로를 위한 부조가 됩니다. 따라서 가을의 숲은 온동 축재의 축제입니다. 두 발 자전거로 계속 질주해야 유지되는 것이 인간의 방식이라면, 숲의 방식은 낙엽들을 통해 벌이는 '축재의 축제'라는 바퀴를 하나 더 둔 세발자전거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숲은 느리지만, 훨씬 더 안정되게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지속하고 있는 셈입니다”(225쪽).   

  

축재의 축제에 불청객이 끼어듭니다. 사람이 만든 무덤입니다. “숲에는 사람의 것을 제외한 다른 동물의 무덤이 보이지 않습니다”(242쪽). 오로지 인간만 죽어서도 자신을 대자연의 순환체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땅속에서 지내겠다는 불온한 욕망을 꿈꿉니다. 자연 생태계의 흐름에 비추어보면 인간의 무덤은 생태계를 파괴시키고 교란시키는 주범입니다. 자연은 완벽한 재활용이 반복되는 피드백 시스템입니다. “자세히 보면 그들이 평형을 찾는 또 하나의 방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재활용의 지혜입니다. 이를테면 뱀이 벗어놓은 허물은 새집의 구조체나 인테리어 소품으로 변신하여 재활용되고, 그 소용이 마무리되면 최종적으로 분해자들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또 나무의 부러진 가지나 죽은 가지는 까치나 멧비둘기 등에게 넘어가 훌륭한 건축재료로 재활용되었다가 다시 분해자들에게 넘어가기도 합니다”(244-245쪽). 자신의 죽음이 다른 생명체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무한 선순환이 반복됩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이런 선순환의 흐름에 역행하는 행동을 하면서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으로 활동합니다. 무덤을 없애고 사람의 죽음도 자연으로 돌려줘야 합니다.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온 은혜를 되돌려줄 마지막 기회가 죽음입니다. 죽음으로써 다른 생명체의 생명활동에 도움이 되는 에너지원이 됩니다.     



잘 돌아가지 않으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습니다     


나무는 죽어서도 모든 생명체의 생명활동에 마지막까지 봉사하고 헌신합니다. 우선 자신의 몸을 송두리째 내어줌으로써 무수한 생명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도록 아낌없이 다 주고 조용히 자연의 품에 안깁니다. “그곳은 무수한 생명들의 집이고 식탁이고 사냥터이고 놀이터입니다. 나무들은 항상성을 잃고 주어진 삶을 정리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푸석푸석 썩어가는 그들의 몸은 누군가의 은신처요 사냥터요 놀이터였다가 비와 바람을 만나면서 아주 천천히 흙으로 되돌아갑니다. 흙으로 되돌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은 모든 것을 내어주어 다른 생명을 부양합니다……그렇게 오랜 시간 크고 작은 생명들을 부양하고 숲을 지키는 나무들은 자신의 일생과 주검 모두를 흙에게 바칩니다. 모든 나무의 죽음이 풍성하고 숭고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255쪽). 자신의 안위와 과시를 위해 무덤을 만드는 인간과는 대조적인 나무의 죽음에서 인간은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나무가 태어난 자리, 자신의 성장을 도와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나무에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각자의 자리, 제자리로 돌아가서 하는 일이 잘 돌아가게 하는 일이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나무는 사람처럼 무덤을 만들어 죽어서도 생명체계의 거대한 흐름에 역행하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그 흐름에 독야청청 빛나겠다고 자기를 과시하는 자리로 돌아갑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몸부림 때문입니다.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일도 돌아가지 않으며 머리도 돌아가지 않을 때 우리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자리로 돌아갑니다. 자연과 생명이 어울려 잘 돌아가는 자리에 인간이라는 불청객이 끼어들어 생태계의 흐름을 돌아가지 않게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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