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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먹어버렸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읽고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먹어버렸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읽고


헤르타 뮐러(지음), 박경희(옮김)(2013). 《숨그네》. 서울: 문학동네.     



삶의 욕구는 낱말의 욕구다     


다양한 책을 읽어왔고 앞으로도 읽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책은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읽는다. 아니 책이 내 몸으로 침투해서 전율하는 아픔과 동시에 말 못 할 진한 감동의 여운을 남겨놓고 떠난다. 내가 책 속으로 파고들어 저자와 혼연일체가 된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먹어버리는 독서는 색다른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숨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네처럼 가쁘게 흔들리는 것을 상징한다는 '숨그네'라는 제목이 우선 주목을 끌었다. 《숨그네》는 루마니아 독재 치하에서 절치부심하며 기회를 엿보다 동료이자 남편인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1987년 독일로 망명한 헤르타 뮐러가, 수용소 경험을 했던 오스카 파스티오르와 만나 심층 인터뷰를 하고 직접 수용소까지 방문하며 보고 들으며 느낀 삶의 얼룩을 아름 다운 시적 언어를 사용하여 아름다운 무늬로 직조해낸 문학의 백미다. “상황은 처참했다. 문자는 아름다웠다. 나는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처참함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 문학의 명예였다.” 헤르타 뮐러의 고백이다. 처참한 상황과 아름다운 문자 사이를 오고 가며 치열하게 고뇌했던 작가는 자신이 늘 들고 다니는 낱말 상자에서 적확한 단어를 뽑아 문장을 건축했다. 처절할 정도로, 처참한 수용소의 삶을 시적 상상력으로 녹여내며 써 내려간 문장에는 숨을 멈추고 잠시 정신을 잃게 만드는 작가의 상황 묘사력이 살아 숨 쉰다. 이 책을 읽으려고 덤볐다가 어느 사이 책이 내 몸으로 들어와 요동을 치며 심장을 뒤흔들어버리는 통에 계속 읽어나갈 수 없었다.      


《숨그네》는 나치의 통치가 끝난 후에 루마니에 살던 독일인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러시아인들에 의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는 이야기다. 그중의 한 명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와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수용소에 겪었던 경험을 되살려 쓰면서 작품은 잉태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문장에 대해 책임을 지라고 말했던 작가 자신의 주장처럼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문장은 허투루 쓴 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삶에 묻힌 한 인간의 배고픔에 대한 욕구를 담아내는 낱말을 찾아 한 문장씩 건축한 작품이다. “나는 죽음의 공포에 삶의 욕구로 반응했습니다. 삶의 욕구는 낱말의 욕구였습니다. 오직 낱말의 소용돌이만이 내 상태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낱말의 소용돌이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글로 표현해냈습니다.” 헤르타 뮐러가 200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했던 연설문의 일부다. 삶의 욕구를 담아내는 낱말의 욕구를 찾아내기 위해 겪는 낱말의 소용돌이가 얼마나 처절하고 처연했던가. 낱말의 소용돌이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글을 쓰는 나 역시 심각한 반성과 성찰을 하게 되었다. 한 문장을 쓰기 위해 거기에 동원하는 단어는 과연 지금 내 심정을 표현하는 가장 적확한 단어인가? 낱말 상자에 들어 있는 다른 낱말은 왜 적절한 의도를 전달할 수 없는 것일까. 한 단어를 선정해서 문장에 집어넣어 다른 단어와 어울림도 점검해보고 뒷 단어에 미치는 영향력은 물론 앞 단어와는 모순이 안 되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이 바로 낱말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간이다.   

     

  

삶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낱말 상자     


한 작가가 신문이나 잡지에서 문장을 만드는 낱말을 수집해서 무작위로 뒤섞었다가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하면서 문장을 만들었다. 낱말을 모아 만든 문장들로 쓴 소설이 바로 《숨그네》다. 이 소설의 특징은 저자가 직접 만든 낯선 단어가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기존 단어로 표현이 안 되는 감정이나 도구는 스스로 단어를 창조한다. 우선 이 책 제목부터가 저자가 조어한 단어다. ‘숨그네(Atemschaukel)’는 힘겨운 중노동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들이 숨이 너무 차서 들숨과 날숨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들리면서 마치 그네 뛰듯 다급하고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생존 위기를 겪는 순간의 표정을 의미한다. 수용소에서 보내는 상상초월의 추위와 견딜 수 없는 배고픔, 참을 수 없는 향수병, 매일 내 몸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며 들끓는 빈대와 이 그리고 벼룩, 참으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인간이자 대접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으려는 자와 그냥 언젠가 사라지기를 원하며 억지로 살아가는 사람, 그 속에서도 삶의 버거운 짐을 던져버리고 갑자기 죽음을 택하거나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자들과 함께 보낸 수용소의 시간을 ‘뼈와가죽의시간’이라는 단어로 창조해냈다. 영하 273도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절대 영도’다. 소설에서는 ‘절대 영도'를 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한계상황을 지칭하는 말로 재탄생한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절대 영도’는 내가 어떤 손을 써도 바꿀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녀가 창조한 개념 중에 ‘심장삽’이라는 단어가 있다. “삽의 종류는 여러 가지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심장삽이다. 유일하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심장삽은 석탄, 그중에서도 무른 석탄을 하역할 때만 쓴다. (...) 보통 한 손으로 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자루 위쪽 손잡이를 잡는다. 하지만 나는 자루 위쪽을 잡는다가 아니라 자루 아래쪽을 잡는다고 말하고 싶다. 내게는 심장 모양의 머리가 중심이고 자루는 심장삽에 딸린 부품이니까. 그러니까 주변부이거나 아래니까. 다시 말해 심장 모양 삽 머리의 목을 쥐고 그 아래에 달린 손잡이를 쥔다. 심장삽은 중심이 잡히면 내 손에서 그네를 뛴다. 가슴속의 숨그네처럼”(92쪽). 심장 모양을 띤 삽 머리를 보고 심장삽이라고 만든 것이다. 심장삽과 혼연일체가 되어 숨넘어갈 정도로 고된 노동을 반복한다. 상황 자체는 처절하고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비극의 극단에서 낱말 상자에서 골라낸 적확한 시적 언어를 사용하여 아름다운 표현으로 재해석해낸다. 참담한 현실이 드러내는 참혹한 비극을 시적 상상력으로 번역해낸다. 참혹한 현실이 따뜻한 시적 언어로 번역된다고 해서 현실이 시의 세계로 함몰되지 않고 둘 다 살아남아서 각자의 세계에서 처연하게 빛난다. 심장삽과 더불어 작가가 창조한 단어가 배고픔과 싸우는 ‘배고픈 천사’다. 살인적인 배고픔에 맞서 항거하며 허기를 잊어버리려는 아름다운 노력을 ‘배고픈 천사’로 묘사한다. “배고픈 천사는 석탄 속에, 심장삽 속에 관절 속에 있다. 그는 안다. 온몸을 먹어치우는 삽보다 몸을 덥히는 것은 없음을”(94쪽). ‘배고픈 천사’는 허기를 잊기 위해 심장삽으로 몸을 데피는 중노동을 하지만 어느새 배고픔은 관절 속으로 파고든다.      



고달픈 배고픔은 대신 체험할 수 없다      


“배고픔은 항상 있다. 늘 거기에 있으므로 제가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온다. 이 인과 법칙은 배고픈 천사의 손에서 탄생한 졸작이다. 배고픈 천사는 일단 나타나면 본때를 보인다. 정확도는 높다. 삽질 1회=빵 1그램”(96쪽). 삽질 1회마다 빵 1그램이 생긴다는 절묘한 표현 속에 빵을 먹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한 인간의 처절한 배고픔이 뼈마디마다 숨어 있다. “사실 배고픈 설움을 표현할 적절한 말은 없다”(28-29쪽). 배고픔의 정도는 계량화시킬 수 없다. 오로지 배고픈 당사자가 몸으로 느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겪는 배고픔은 다양하게 표현될 욕망을 찾아 헤맨다. “배고픔을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입천장이 당긴다”(28쪽). 또는 “배고픈 천사는 입 안에, 내 천장에 오롯이 매달린다. 그건 배고픈 천사의 저울이다(97쪽). 배고픈 천사는 나의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배고픔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우아하게 다가간다. 게눈 감추듯 배고픔을 해소하는 음식을 먹어치운다. 하지만 먹어치울 정도의 음식은 언제나 일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배가 고플 때는 배가 고프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허기는 침대틀이 아니다. 침대틀은 셀 수 있다. 배고픔은 객체가 아니다“(102쪽). 배고픔은 내가 살아가면서 내 몸 안에 지니고 살아야 할 세상의 고통이다. 배고픔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관념적인 언어로 주장하지 않고 배고픈 천사의 모습을 구체적인 일상 언어로 써 내려간다.    

 

“배고픔의 단어는 모두 먹는 단어다. 눈앞에 음식이 그려지고 입천장에 맛이 느껴진다. 배고픔의 단어들 혹은 먹는 단어들은 환상을 먹여 키운다. 말이 말을 먹으며 맛있어한다. 배는 부르지 않지만 적어도 음식 곁에 머문다”(178쪽).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배고픔을 표현하는 단어를 먹으며 배고픔을 참을까. 아무리 먹어도 배는 부르지 않지만 배고픈 순간만큼은 잠시 잊게 해주는 배고픈 단어 앞에 배고픈 천사는 무참히 무너진다. “배고픔에서 타인이 차지하는 자리는 없다. 타인의 배고픔을 나눌 수는 없다”(178쪽). 쓰레기통을 뒤져서 음식 쓰레기를 먹어 치우는 자신을 의도적으로 모른 체한다. 지나가가 쌓인 눈도 퍼서 먹고, 파리가 붙은 빵 조각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먹어도 배고픈 천사는 입천장에 매달려 먹을 것을 요구한다. “배고픔은 여름내 자라는 풀보다, 겨우내 쌓이는 눈보다 빨리 자랐다. 평생 자랄 것이 하루 만에 자란다고나 할까. 내게는 배고픈 천사가 덩치만 불리는 게 아니라 수를 늘려 번식하는 것처럼 보였다”(178쪽). 배가 고픈 정도를 이렇게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배고픈 천사가 전하는 배고픔이 얼마나 빨리 내 몸을 파고드는지 배고픔이 배고픔을 번식한다. 어디를 가도 배고픔은 내 몸에 붙어 다닌다. “나와 나의 배고픔이 함께 길을 나섰다”(156쪽). 내가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배고픔이 나를 안내하고 유도한다. 배고픔이 가자는 대로 내 몸이 움직인다. “가마의 우르르 소리와 함께 배에서 꼬르를 소리가 쏟아졌다. 저녁 풍경은 배고픔의 파노라마였다”(35쪽). 매일 저녁 배고픔의 파노라마 속에서 파란만장한 하루는 끝을 모르게 이어진다.   


 


빵에는 뻥이 통하지 않는다     


“나는 수프를 반 숟가락만 떠서 천천히 들이마신다. 한 숟가락씩 마실 때마다 침을 삼키며 천천히 먹는 법을 터득했다. 배고픈 천사가 말했다. 침을 삼키면 수프를 더 오래 먹을 수 있어. 또 일찍 잠자리에 들면 배고픈 시간이 줄어”(125쪽). 너무 빨리 먹으면 금방 배고픈 천사가 달려온다. 침을 삼키면서 천천히 먹어야 오랫동안 수프를 먹을 수 있다고. 입으로 들어간 수프가 오랜 시간 머물며 부풀어지고 거기에 침을 섞어 먹으면 배고픔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다고. “아침에 국가가 울리고 나면 배고픔은 서둘러 나를 데리고 아침 식사를 하러 펜야에 갔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루의 첫 결심을 향해. 오늘 꿋꿋이 잘 버티면 먹을 빵 조각이 있다……그런 식으로 계속된다”(125쪽). 빵은 힘겨운 노동 끝에 다가오는 나의 희망이다. 빵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수용소 삶을 버티게 만들어주는 버팀목이다. 배가 너무 고프면 이성조차 마비된다. 생각해서 결정하고 몸을 움직이는 논리를 따르지 못한다. 배고픈 천사가 뇌까지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배고픈 천사가 나날이 내 뇌를 먹어치웠다”(125쪽). 배식하는 빵을 먹어도 배고픔은 해소되지 않는다. 남의 빵을 훔쳐먹는 빵 도둑이 등장하는 이유다. 빵에는 뻥이 통하지 않는다. 빵을 훔쳐 먹은 사람에게는 재판이 필요 없다. 그냥 처벌만 주면 된다. 빵을 훔쳐 먹은 행위는 누가 봐도 절대적인 범죄행위다.      


“빵의 법정에는 재판을 하는 게 아니라 처벌만 내릴 뿐이다. 절대영도(絶對零度)에는 세칙이 없다. 법이 필요 없다. 배고픈 천사가 뇌를 훔치는 도둑이라면 절대영도는 법 자체다. 빵의 정당성에는 현재만 있을 뿐, 전후 과정이 없다. 완벽하게 투명하거나 완벽하게 비밀에 휩싸여 있다. 빵의 정당성은 배고픔이 뒤따르지 않는 폭력과는 다른 폭력이다. 빵의 법정에는 일반적인 도덕이 들어설 수 없다”(127쪽). 빵을 훔쳐 먹은 사람에게 도덕은 도를 넘어서는 덕이다. 눈앞에 보이는 빵과의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갈급함이 뇌를 갉아먹는다. 매일 배급받는 빵이지만 언제나 내 빵이 작아 보인다. 그래서 빵 바꾸기 쟁탈전이 벌어진다. “빵을 바꾸지 직전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허둥대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나면 곧봐로 의구심이 고개를 쳐든다. 빵이 내 손을 떠나자마자 남의 손에 있는 빵이 더 커 보인다. 내가 받은 빵은 내 손에서 줄어든다. 상대는 나보다 눈썰미가 있다. 그가 이득을 보았다. 다시 바꿔야 한다. 하지만 상대도 마찬가지다. 그도 내가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빵을 다시 바꾸는 중이다. 빵은 내 손에서 다시 줄어든다. 나는 세 번째 상대를 찾아 바꾼다. 먹기 시작한 사람도 더러 있다. 배고픔을 좀 더 견딜 수 있으면, 네 번, 다섯 번까지 바꾼다. 그래 봤자 소용이 없으면 이전의 빵으로 되바꾼다. 그러면 나는 처음 받은 내 빵을 손에 넣게 된다”(134-135쪽). 조금이라도 더 큰 빵을 먹기 위해 끊임없이 빵을 바꾸지만 결국 내 손에 돌아온 빵은 내가 처음 받은 빵이다.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지만 결과는 처음 내가 받은 빵이 주인을 찾아온 것이다. 눈물겨운 사투를 벌였지만 결과가 허망하다. 그래도 빵 바꾸기는 매일 이어지는 격투전이나 다름없다.     


“빵 바꾸기는 필수다. 그 과정은 빠르지만 늘 아슬아슬하게 과녁을 비껴간다. 빵은 시멘트처럼 기만한다. 시멘트 병에 걸리듯 빵 바꾸기병에 걸릴 수 있다. 빵 바꾸기는 저녁의 소요이며 눈에서 불꽃이 튀고 손가락이 떨리는 사업이다. 아침에는 빵 저울의 접시를, 저녁에는 빵과 상대의 눈을 더듬는다. 빵을 바꾸려면 빵뿐만 아니라 얼굴도 제대로 골라야 한다. 상대의 입이 쭉 찢어졌는지 잘 살펴본다. 낫처럼 가늘고 긴 입이 제일이다. 움푹 꺼진 볼에 배고픔의 털이 자랐는지도 살펴본다. 하얀 털이 충분히 길고 촘춤한가. 사람은 굶어 죽기 전에 얼굴에 토끼가 자란다. 그걸 보면 상대에게 빵이 이미 낭비임을, 먹어도 그 값을 못 함을 알 수 있다”(135쪽). 빵 바꾸기 병에 걸릴 정도로 빵 바꾸기는 하루 중의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아니 빵 바꾸기는 불꽃이 튀며 전의에 불타는 치열한 각축전이다. 빵 바꾸기를 아예 하나의 사업으로 본다. 그러니 사업하는 사람끼리 만나서 우선 전초전을 벌인다. 상대방의 표정과 몸에서 나오는 동작과 신호 하나라도 유심히 살펴본다. 입 모양과 볼의 생김새에 숨겨진 빵에 대한 욕망의 뒤안길을 간파해야 빵 바꾸기 사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빵 바꾸기는 간단한 게임이 아니라 일생일대의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치열한 쟁탈전이다.     

  

    

참혹한 비극이 아름다워도 되는가?     


“책 전체가 시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문장들이 있다. 참혹한 비극을 다룬 문학이 아름다워도 되는가라는 문제는 오랫동안 이 동네의 난제였다. 이 소설은 그 한 대답이다”(124쪽).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말이다. 책 전체가 시라는 주장은 맞다. “유리잔에 담긴 차가운 우유 같은 달이 하늘에 떠 내 눈을 헹군다. 맥박이 다시 고르게 뛴다. 나는 수용소를 벗어날 때까지 찬 공기를 마신다. 그리고 창문을 닫고 다시 눕는다. 아무것도 알리 없는 이부자리는 포근하다”(38쪽).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다 만난 달을 보고 이부자리에 눕는 장면을 시적으로 표현한다. 문장을 시적일 뿐만 아니라 그림처럼 장면이나 상황을 묘사한다. 읽고 나면 음악이 들리고 그림이 보인다. “왼손으로 손잡이만 잡은 채 삽이 공중에 수평으로 뜨도록 이 동작은 같은 박자에 맞춰 뾰족한 삼각형을 만들어가는 탱고처럼 아름답다. 석탄을 멀리 던져야 할 때의 자세는 왈츠 동작을 연상시킨다. 커다란 삼각형을 그리며 몸의 무게중심이 이동할 때 상체는 45도까지 구부러진다. 석탄은 새 떼처럼 멀리 날아간다. 배고픈 천사도 함께 날아간다. 배고픈 천사는 석탄 속에, 심장삽 속에, 관절 속에 있다. 그는 안다 온몸을 먹어 치우는 삽보다 몸을 덥히는 것은 없음을. 그는 그러나, 배고픔이 그 기예마저 먹어치운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94쪽). 배고픈 고달픔을 참고 견디며 석탄을 퍼서 옮기는 처절한 인간의 동작을 왈츠라는 춤에 비유한다. 슬프고 힘든 장면이지만 읽고 나면 선명한 그림이 눈앞에 펼쳐지며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춤을 추며 눈앞을 지나간다.     



“점호 시간에는 부동자세로 서서 나를 잊는 연습을 했다.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크지 않아야 했다. 고개를 들지 않고 눈만 치켜떴다. 그리고 하늘을 보며 내 뼈를 걸어둘 만한 구름 자락을 찾았다. 나를 잊고 하늘의 옷걸이를 찾으면 그것이 나를 지탱해주었다……추위가 내장을 찌르는 날도 잦았다. 그런 날은 하늘이 내 흰자위를 뒤집었고 점호는 그걸 다시 뒤집었다. 걸릴 곳이 없는 뼈들은 오로지 나한테만 걸렸다”(30-31쪽). 구름에 고단한 뼈를 걸어놓고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하늘의 옷걸이에 나의 힘겨운 하루를 걸어놓고 고된 노동의 부담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하루 종일 힘에 겨워 지친 뼈들은 다시 돌아와 내 몸에 걸린다. 다시 온몸으로 끌어안고 어둔 터널이 끊임없이 이어질 내일을 애써 외면한다. “숨그네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착란 상태이다. 눈을 올려 뜨면 저위로 조용한 여름 솜, 구름의 뜨개질, 내 뇌는 바늘 끝에 꿰여 하늘에 고정된 채 꿈틀거린다. 뇌는 오로지 바늘 끝 그 한 점만을 지배한다. 그 점은 음식을 그린다. 어느새 허공에 흰 식탁보가 깔린 식탁이 보이고, 발밑에서 자갈돌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97-98쪽). 허기가 뇌까지 갉아먹지만 그럼에도 위태롭게 바늘 끝에 걸려 한 가닥 희망을 건져 올린다. 허공이지만 거기에 식탁보를 펼쳐놓고 음식상을 차린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귓전을 때리로 눈앞을 가린다. “수프는 귀로도 먹어야 한다. 나는 수저질을 몇 번 하는지 세지 않으려고 꾹 참는다. 세지 않으면 16이나 19보다 많다. 그 숫자를 잊어야 한다”(136쪽). 배고픔을 잊기 위해 잠시 한눈을 팔면서 옆사람이 떠먹는 숟가라질을 세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하지만 결국 세고 만다. 어느새 내 수프는 바닥을 보인다. 절망이다. 다시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가까운 거리에서 느끼는 거리감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다     


수용소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수용소와는 다른 절망감을 느낀다. “내가 돌아왔을 때 반가움보다 놀라움이 컸고, 집안에 달갑지 않은 안도감이 퍼졌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살아있음으로써 그들의 추모기간을 기만한 것이었다”(303쪽). 살아 돌아온 자가 느끼는 안도감이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달갑지 않은 안도감으로 전해진다. 더욱 참을 수 없는 당혹감은 가까운 거리에서 느끼는 거리감이다. “낯선 존재가 된다는 것은 분명 부담이지만, 믿을 수 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304쪽). 간신히 살아남아 고향에 돌아왔만 참혹했던 수용소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전해주려는 것일까. 결국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역시 소설 속의 주인공이 경험하는 또 다른 수용소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준다. "나는 풀려난 몸으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었고 자기를 기만하는 증인이 되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일어난 커다란 불행이었다“(316쪽).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처참한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며 마침내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누구도 반겨주지 않는 외톨이가 겪는 외로움과 소외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가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은, 손수건이 내 운명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운명을 포기하면 지는 것이었다. 나는 확신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하는 할머니의 작별인사가 손수건으로 모습을 바꿨음을. 나는 손수건이야말로 수용소에서 나를 보살펴준 단 한 사람이었다고 한 점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다. 지금도 그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89-90쪽). 진짜 손수건에 의미를 부여해서 의지를 담아 힘든 시간을 버텨내고 마침내 할머니의 작별 인사처럼 돌아왔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거리감을 느끼며 관계의 본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변하는 것들은 저 자신을 소모하지 않는다. 세상과 영원히 똑같은 관계를 지속할 뿐이다. 세상과 스텝의 관계는 매복이고, 세상과 달의 관계는 밝힘이며, 들개는 도주, 풀은 흔들림이다. 세상과 나의 관계는 먹는 것이다”(221쪽). 불변하는 세상과 나의 관계, 먹는 것은 인간에게 두 가지 다른 행복을 전해준다. “행복은 갑작스러운 데가 있다. 나는 입의 행복과 머리의 행복을 안다. 입의 행복은 먹을 때 오고 입보다 짧다. 입이라는 단어보다도 짧다. 소리 내어 말하면 머리로 갈 새도 없다. 입의 행복은 입 밖으로 말해지길 원하지 않는다. 입의 행복에 대해 말하려면 모든 문장은 앞에 갑자기라는 말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런 문장으로 끝맺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모두 배가 고프니까”(273쪽). 입으로 먹는 행복은 말하기도 전에 사라진다. 머리로 행복을 생각하기 이전에 입 밖으로 나오면서 사라진다. 먹는 행복은 먹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입의 행복은 혼자 있고 싶어 하고 말이 없으며 몸속에서 자란다. 그러나 머리의 행복은 어울리기 좋아하고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방황하는 행복이며 질질 끌리는 행복이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오래 지속된다. 머리의 행복은 잘게 쪼개져 분류하기가 어렵고 제멋대로 섞이고”(274쪽). 머리의 행복은 요리조리 생각하며 다른 사람에게 자랑도 하고 비교도 한다. 입의 행복이 감각이라면 머리의 행복은 관념이자 논리다. 머리로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하며 끊임없이 분류하고 구분하며 분석하고 평가한다. 그러다 행복은 관념 속에서 방황하다 길을 잃기도 한다.     



비극적 정서는 관념적 유희를 용납하지 않는다     


김훈의 《연필로 쓰기》에 보면 관념적인 개념어의 폐해와 역기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를 들면 전 세계를 강타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신종 코로나 종식에 나설 것”이라는 정치적 주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며 국민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는 개념어 문장이라는 것이다. 실체는 없고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언어가 개념어다.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아도 비난을 사지 않는 공허한 주장이다. 글은 개념어보다 구체적인 실상을 지적하는 현장 언어로 쓸 때 이미지로 형상화되면서 훨씬 감각적으로 와 닿는다. 헤르타 뮐러의 작품이 더욱 와 닿는 이유는 개념어로 설명하기보다 구체적인 현장성을 담고 있는 감각적 언어로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장으로 승화시키기 때문이다. 공허한 관념적 주장보다 구체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주장이라야  피부를 넘어 폐부를 파고든다. 생활(生活), 즉 삶이 활기를 띠려면 개념어보다 구체적인 실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수용소는 실용적인 세계다. 수치심과 두려움은 사치다. 흔들림 없이, 어설픈 만족감으로 시체를 처리한다”(168쪽). 눈치 보지 않고 복잡한 관념이 작용하지 않는다. 눈 앞의 시체는 이제  생명을 다한 물체다. 그걸 처리하는 업에 근무하는 사람은 흔들림 없이 평소 하던 대로 몸을 움직여 임무를 완수한다. 한 치의 관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형용사의 덤불도 존재하지 않는다. 맡겨진 일을 처리하는 몸동작만이 존재한다. “만기자가 출소하고 난 그날 저녁 취침 시간이 되면 그 빈자리가 눈에 띕니다. 함께 생활했던 감방 사람들은 자연히 바깥에 나간 그를 생각하면서 한 마디씩 합니다. 그 한마디가 또 놀랍습니다. 이 자식 오늘 한잔 걸치겠구나. 여자 끼고 자겠구나가 아니었습니다. 아 이 친구 ‘방 바뀌었네’. 그렇지 오늘은 ‘치마 걸린 방에서 자겠네.’였습니다. 절제된 언어이고 탁월한 상상력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치마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우리 감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체취가 짙게 배어 있는 정서입니다. 더구나 혹독한 비극적 정서가 바탕에 깔린 정서는 단 한 줌의 관념적 유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삶을 직시하고 삶과 언어가 일체화되어 있는 정서는 한마디로 정직한 것이었습니다. ‘진실’이란 말의 본뜻이 바로 그런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263쪽). 신영복의 《담론》에 나오는 말이다. 비극적 정서를 온전히 담아낼 언어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거기에는 관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냥 구체적인 일상 언어의 구체성과 맥락성에 담긴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는 상상력이 교감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었지만 아직도 수용소에서 들려오는 아비규환의 절박함이 저녁노을과 함께 참혹한 잔영으로 남는다. 여전히 심장삽으로 석탄을 퍼올려 허공에 던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고 배고픈 천사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온몸을 누비며 배고픈 단어를 먹어 살을 찌운다. 밑바닥 낱말 상자에서 건져 올린 처참한 비극적 현실이 시인의 비상하는 상상력으로 앓음답게 번역되어 눈앞을 수놓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기 시작한다. 뛰는 심장은 잠시 숨을 고르고 머리는 정색을 하며 숨그네의 세계로 다시 빠져든다. 논리와 관념을 거세하고 피부를 파고드는 감각적인 언어로 폐부를 찌르는 연습 뒤에 찾아오는 담담함으로 다시 담론의 세계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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